'라무네'라는 음료가 있습니다. 라무네는 일본의 탄산음료로, 입구가 구슬로 막혀 있는 독특한 형태의 병이 라무네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합니다. 집 앞 편의점을 가 보았다가 음료 코너에 라무네가 몇 개 놓여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호기심에 하나 구입해서 마셔 보았습니다.

 

라무네

 

 우선 라무네가 어떤 녀석인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지요. 라무네라는 이름은 19세기 중반 일본의 개항기에 영국에서 유입된 레모네이드에서 유래하는데, 일본인 특유의 외래어 줄여부르기 신공(?) 때문에 그 이름이 와전되어 '라무네'가 된 것입니다. 이후 이 레모네이드에 탄산을 주입한, 흔히 알려진 형태의 라무네가 개발되었고 1872년 공식적으로 제조 허가를 얻게 됩니다.

 

 이 시기 채택되어 라무네의 상징이 된 독특한 모습의 유리병은 코드넥 보틀(Codd-neck Bottle)이라고 하는데, 영국인 기술자 하이럼 코드(1838-1887)가 1872년 고안하여 미국에서 특허를 받은 음료수병입니다. 코드넥 보틀은 병 입구 안쪽에 작은 유리구슬이 하나 있어서 음료수 탄산의 압력으로 병 입구를 막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구슬을 힘으로 밀어넣으면 구슬을 밀어올리던 탄산이 빠져나가면서 입구가 열리고 음료수를 마실 수 있게 됩니다. 이 때 구슬을 밀어넣는 용도로 보통 못 형태로 된 플라스틱 조각이 하나 동봉됩니다.

 

코드넥 보틀의 유리구슬

 

 입구보다 조금 더 큰 이 구슬이 코드넥 보틀의 핵심인데, 구슬이 아예 밑으로 빠지거나 음료수를 마실 때 굴러내려와 입구를 다시 막아버리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병의 상부에는 독특한 구조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병의 한 부분이 잘록하게 좁아지는데 구슬이 거기 걸쳐져 더 밑으로 빠지지 않고, 그 위쪽에 있는 굴곡은 음료수를 마시기 위해 병을 기울일 때 구슬을 붙잡아 다시 입구를 막지 않도록 방지합니다.

 

 이전에는 탄산음료의 병 입구를 코르크(!!)로 막는 게 보통이었고, 당연하게도 음료수에 녹아 있던 탄산은 금새 날아가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ㅡㅡ; 그래서 이러한 형태의 병은 한동안 인기를 끌었지만 이후 왕관 모양의 병뚜껑이 개발되는 등 밀봉 기술이 발전하면서, 만들기도 복잡하고 마시기도 상대적으로 불편한 코드넥 보틀은 자연스럽게 도태됩니다. 다만 라무네의 경우 병 자체가 하나의 아이덴티티로 남아 지금까지 계속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라무네는 백수십 년의 역사를 거치며 일본을 상징하는 음료의 하나로 각광받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해군 장병들은 함정 내에 화재진압용으로 설치된 이산화탄소 발생 장치를 이용, 레모네이드에 탄산을 주입하여 라무네처럼 만들어 먹었다고 합니다. 전쟁 이후 코카콜라 등 다양한 음료수들이 인기를 끌게 되지만 라무네는 다분히 서민적인 음료의 이미지로 남아 나름의 입지를 확보하였고, 1977년에는 일본의 중소기업 관련 법률의 대상이 되어 중소기업에서만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여러 중소기업에서 라무네를 생산해 판매하고 있습니다.

 

 라무네는 '일본식 음료'의 대표처럼 인식되고 있기도 하지만, 사실 서민적인 이미지와 나이 든 사람들이 즐겨 마신다는 이미지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즐겨 마시는 정도는 아니라고도 합니다. 라무네 특유의 병 여는 방법도 잘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네요. 그래도 요즘에는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나라로 수출까지 하고 있는데, 덕분에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블로거 역시 일본산 라무네를 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구입한 라무네를 마셔 보겠습니다. 병의 위쪽이 포장되어 있는데, 여기에 구슬을 밀어넣기 위한 플라스틱 못이 있습니다.

 

 뜯는 선을 따라 포장을 잘 뜯으면

 

플라스틱 못과 병의 입구가 드러납니다. 보시다시피 병 입구는 플라스틱으로 덮여 있고, 구슬이 거기를 막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저 부분도 그냥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는데, 요즘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놓아 나중에 구슬을 빼거나 병을 재활용할 때 편리하다는군요.

 

 플라스틱 못을 가지고 구슬을 밀어넣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힘이 좀 필요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 정도로 단단히 막혀 있지 않으면 밀봉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겠지요?

 

 그러니 이렇게 손가락 한두 개로 눌러서는 절대 입구를 열 수가 없을 겁니다. ㅡㅡ; 아예 병에 붙어 있는 안내문에도 손바닥으로 못을 강하게 누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힘을 강하게 주면 구슬이 빠지면서 병이 열립니다.

 

 이제 구슬이 다시 입구를 막지 않도록 적당히 주의하면서 음료수를 마시면 됩니다. 라무네의 맛은 사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사이다의 맛과 별 차이가 없고, 그냥 라무네 자체가 일종의 사이다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일본에는 오리지날인 소다맛 뿐 아니라 와사비맛, 카레맛 등 온갖 해괴한 맛의 라무네가 있다는군요. ㅡㅡ;

 

 저 구슬은 마실 때마다 항상 신경쓰입니다. 생각 없이 그냥 마시면 구슬이 입구를 다시 막아 음료수가 나오지 않게 되기 때문에, 병을 너무 기울이지 않고 한쪽에 있는 홈에 구슬이 걸리게 만드는 등 나름의 스킬을 발휘해야 합니다. 코드넥 보틀이 왜 도태되었는지 납득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렇게 라무네 한 병이 뚝딱 비워졌습니다.

 

 라무네를 맛으로 먹기에는 바로 곁에서 저렴하게 판매되는 사이다와 별 차이가 없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음료도 종류가 수두룩하니 딱히 매력이 있는 음료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디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형태의 병과, 일본의 상징 음료라는 역사적(?) 특이성을 생각하면 한 번쯤 구입해 마셔 봐도 괜찮을 것 같기는 합니다. 블로거가 마신 라무네 병에는 "일본에서 시작되어 세계인이 사랑하는 라무네"라고 적혀 있는데, 일본인의 생활사(史)를 접해본다 생각하고 한 병 마셔보는 건 어떨까요?

 


 - 제주도는 마치 '여행자를 위한 신비의 장소'와도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블로거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주도편을 읽고 나서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언젠가 제주도는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죠(정작 여행을 갈 때 저 책을 들고 가지도 않았던 건 함정). 어떻게 기회가 닿아 제주도를 다녀올 수 있었고, 예상한 대로(?) 블로거는 제주도의 팬이 되었고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정도의 생각까지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 그런데 과연 제주도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끌어당기는가 하는 것이 분명치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여행자의 자유로움에서 나오는 막연한 동경심에 불과할 따름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제주도만이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일까요? 어쩌면 블로거에게는, 육지와는 다른 제주도의 역사, 그리고 이를 통하여 만들어진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매력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 제주도는 우선 독자적인 창조신화와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육지와는 그 뿌리가 다르다는 의미죠. 당장 한반도의 건국신화 중 난생(卵生)설화가 아닌 것은 (단군신화 정도를 제외하면) 탐라 건국신화밖엔 없습니다. 사실 제주도가 한반도의 일부가 된지 1천 년 가까이 지났다면 탐라 건국신화 역시 한반도의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가르칠 법도 한데, 2015년 현재까지 한국의 교과서는 탐라의 신화와 역사를 철저히 외면합니다. 어찌 보면, 이것이야말로 탐라 소멸 이후 제주도의 역사를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삼성혈 신화는 화산지형과 함께 해 온 탐라인들만의 문화코드)


 - 이후 한반도의 일원으로서 제주도가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폭력과 수난의 연속입니다. 제주도의 소유권은 고려, 몽골, 조선, 일본제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이어집니다만 제주도를 지배한 육지의 권력은 하나같이 제주도를 착취와 탄압의 대상으로 다루게 됩니다. 몽골과 고려 정부에 대항했던 삼별초, 제주도를 전쟁터로 만들었던 삼별초를 이후의 제주도 문화에서 비교적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이후 제주도는 몽골의 식민지가 되어 말 생산지로 변모하였으며, 이후 고려-조선 교체기에 발생한 '목호의 난'은 제주인이 아닌 몽골인 목호(牧胡)들이 벌인 반란입니다.


 - 조선시대 제주도는 본격적인 착취의 대상이 됩니다. 조선의 지배자들은 제주도의 말 목장을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거기에 덧붙여 제주도에서만 생산되는 감귤을 매우 먹고 싶어했죠. 제주인들은 목장의 말을 자신들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다루어야 했고, 운송 과정에서 썩을 경우에 대비하여 계획보다 훨씬 많은 감귤을 생산하여 진상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착취에 주민 이탈이 우려되자, 육지의 권력은 제주도민들에게 번듯한 선박을 생산하지 못하게 합니다. 아예 바다로 나서지도 못하게 한 것이죠.


 - 하지만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이 배를 타지 않을 수 있나요? 그래서 고기잡이 뗏목 '테우'가 등장합니다. 남자들이 뗏목 하나에 몸을 의지하여 어업을 하다 보니 남성들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고, 제주도는 상대적으로 '여자가 많은 지역'이 되어버립니다. 제주도의 3다에 '여자'가 들어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제주도는 결코 평화롭게 한반도의 일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거상 김만덕이 육지로 건너가 금강산 한 번 구경해보는 것을 소원이라 말했던, 그러한 한(恨)을 제주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 일제강점기 말기, 제주도는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수세에 몰린 일본제국은 '옥쇄' 따위를 부르짖으며 본토와 남은 점령지들을 요새화하기 시작하는데, 제주도 역시 일본에 의해 철저히 요새로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제주도 곳곳의 해안 절벽에는 바닷물의 침식으로 생겼다 보기 어려운 동굴들이 많은데, 이는 대부분 일본군의 비밀 요새로 쓰기 위해 뚫어놓은 것입니다. 이 동굴들을 누구의 노동으로 뚫었을까요? 당연히 제주인들이었겠죠.


 - 그나마 다행히도 제주도는 오키나와처럼 실제 전장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방이 되고 한 숨 채 돌리기도 전에 제주도 역사상 최대의 참사, 4.3 대학살 사건이 발생합니다.


 - 일제강점기 제주인들 중에는 일본으로 일하러 건너갔다 돌아온 사람들이 많았고, 이 당시 일본 내에서 활발했던 노동운동의 영향을 받고 좌파 성향을 띠게 된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들의 주도로 만들어진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전반적으로 미군정에 협조적이었는데,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벌어진 인명사고를 계기로 경찰과 제주인들 사이의 대립이 본격화됩니다. 육지의 지배도 매끄럽지 못하던 미군정 쪽에서는 제주도의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고, 상당수의 경찰이 교체되는데 교체된 인원들이 하필이면 서북청년단......


 - 국군이 진주하면서부터 사태는 악화일로를 걷게 됩니다. 한라산과 중산간마을은 출입이 금지되고 기존의 주민들은 모두 해안으로 소개당했으며,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상당수의 주민들은 오히려 한라산으로 숨어들어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되었지만 제주도의 남로당 세력은 단선 반대를 명분으로 봉기를 일으키고,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등 제주도는 그야말로 생지옥으로 바뀌게 됩니다.


 - 이 와중에 국군의 지휘관은 유재흥(劉載興)으로 교체되고, 유재흥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전략을 펼쳐 한라산에 숨어들었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돌아오고 어느 정도 사태는 수습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분위기는 다시 악화되어 대규모의 학살이 계속되었고, 이는 1954년 한라산의 입산 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 4.3은 제주도에 헤어날 수 없는 상처를 안겼습니다. 4.3으로 인해 찍힌 낙인을 벗고자 제주인들은 한국전쟁 기간에 (전사 비율이 매우 높았던) 해병대에 앞다투어 지원하였고, 제주인들에게 찍힌 낙인을 피하고자 이들은 제주인의 언어를 버리고 한국 표준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 노력은 가히 눈물겨울 정도여서 현재는 유네스코가 '제주어'를 '사멸 위기 4단계'로 지정할 지경에 이릅니다. 주변에 제주 출신인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제주어로 대화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블로거는 제주도를 여행하면서도 제주어를 그닥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 섬 특유의 폐쇄성에 더하여 이러한 역사적 상처가 있다 보니, 제주도는 육지 출신자들에게 알게모르게 배타적인 곳이 되었습니다. 이는 수백만의 관광객이 드나들며 육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온 지금까지도 면면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제주도의 여당은 '괸당(친척)'이라는 말이 이래서 나온 것이며, 이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한 결과 제주도의 지방정치는 가히 최악의 상황에 빠지고 말았긴 하지만, 제주인들에게는 이것을 포기할 수 없는 충분하고도 남을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 제주도는 이런 곳입니다. 역사를 좋아하고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제주도의 역사를 알고 거기에 공감하고 싶어질 겁니다. 아마 블로거만의 감성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주도는 남해바다 한가운데 굳게 서 있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어떤 비바람도, 그 어떤 차별과 착취와 탄압에도 제주도에는 제주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어찌 이런 곳에 애정을 갖지 않겠습니까.


 - 결국 블로거는 제주도에 다시 한 번 가게 될 겁니다. 아직 블로거는 중산간지역에도 가 보지 못했고, 한라산에 오르지도 못했으며, 제주도의 사람들과도 충분히 만나보았다고 말하긴 어렵겠습니다. 제주도는 보면 볼수록 더 넓어지는 곳이라는 생각입니다. 조만간, 두 번째 여행기를 올릴 수 있겠지요?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기 힘겨워서, 이번 여행기는 이 쯤에서 갈무리하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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