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 기관총이 개발되기까지


 - '기관총(Machine gun)'이란, 다수의 탄을 총 안에 담아두고 총알을 장전, 발사, 탄피 배출, 재장전까지 완전 자동으로 할 수 있는 '기관'이 달려 있는 총을 의미합니다. 다만 이는 요즘 총이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는 기능이기 때문에(흔히 말하는 자동소총이라든지), 이런 총이 일반화된 현대에는 '수백 발 이상의 총알을 지속적으로 발사하고도 총이 무사할 수 있는' 특정한 부류의 총을 일컫는 용어가 되어 있습니다.


 - 총알을 빠른 속도로 연달아 발사하는 무기는 총기류의 발명 이후 지속적으로 연구되어 왔습니다. 초기의 화승총은 총알과 화약을 장전하고 발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아직 총알을 자동으로 장전하고 발사하는 기술적 바탕이 없었기 때문에(이를테면 '탄피'가 발명되기 이전) 사람들은 산탄포를 쏘거나 여러 개의 총열을 묶어놓는 식으로 문제를 보완하려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중국과 조선에서 쓰인 삼안총(三眼銃)이라든지.


[삼안총]


 - 19세기 초중반 발명된 탄피는 기관총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커다란 기술적 문제를 해결시켜 주었습니다. 총알과 화약이 일체화되면서 총알을 장전하는 속도가 매우 빨라졌고, 총알을 기계적인 방법으로 발사하기도 한결 쉬워졌으니까요. 이러한 바탕 위에서 19세기 후반에는 기관총의 할아버지 쯤으로 불리는 두 총기가 등장합니다. 미트라예즈(Mitrailleuse)와 개틀링(Gatling)입니다.


[미트라예즈에 총알 장전 중]


 - 미트라예즈는 1851년 벨기에에서 개발되었고, 개틀링은 1862년 미국의 리처드 개틀링(1818-1906)이 발명하였습니다. 이들은 여러 개의 총열을 사용한다는 기존의 개념을 답습하고 있지만, 기계적인 구조를 채용하여 본격적인 연사(連射)가 가능하도록 한 최초의 무기입니다. 손으로 핸들을 돌리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기관총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개틀링의 경우 분당 1200발(개량형 기준)까지 발사가 가능할 정도였다니 기관총의 위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1874년식 개틀링의 구조]


 - 마침내 1883년 미국 출신 영국인 하이럼 맥심(1840-1916)이 진정한 의미의 '기관총'을 최초로 발명해냈습니다. 맥심은 '총을 발사할 때의 반동'을 가지고 총알을 재장전해보자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방아쇠를 당기고 있으면 알아서 장전과 발사와 재장전이 반복되는 현대 총의 구조를 최초로 구현했습니다. 이후 그가 만든 개념은 기관총 뿐만 아니라, 소총을 비롯한 개인화기 전체에 적용됩니다.


 - 그런데 기관총에는 해결해야 할 난제가 하나 있었으니, 총알을 연속으로 발사하다보면 자연스레 총열이 너무 뜨거워지고(그야 화약이 계속 '폭발'하는 것이므로), 이는 쿡 오프(사용자의 뜻과 관계없이 총알이 발사되어버리는 것) 문제라든지 총열의 변형이라든지 하는 여러 문제를 낳게 됩니다. 그렇다고 개틀링처럼 총열 자체를 여러 개 달아놓으면 총이 너무 무거워지므로, 뜨거워진 총열을 냉각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고안됩니다(맥심 기관총의 경우 수냉식 냉각 시스템을 가지고 있음).



2. 제국주의 침략의 치트키(?)가 되다


 - 기관총은 등장하자마자 세계 역사를 뒤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총기류는 빠른 사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칼과 창, 활만으로 총에 대항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사람 좀 많이 죽을 각오를 하고 압도적인 수로 달려들면, 제아무리 훈련된 총병이라도 버틸 수 없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나 아시아 지역을 침략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고, 식민지 경영도 대부분 해안의 항구도시를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 그런데 기관총은 (총알을 쏜다는 점만 같고) 전혀 다른 개념의 무기. 좁은 공간에 총을 난사하는 것이니, 그 공간에 사람이 밀집할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이제 유럽인들은 칼이나 창을 들고 밀집대형으로 쳐들어오는 원주민들을 기관총으로 손쉽게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밀림과 사바나를 탐험하던 몇 명 혹은 몇십 명의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잡기 위해 몰려오는 수백이나 수천 명의 원주민들을 기관총 한두 정으로 박살내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습니다.


 - 남의 이야기 같지요? 1894년 제2차 동학전쟁에서 딱 이런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2만 명을 넘는 동학군은 충청도 공주를 목표로 진격했고, 도중 우금치 고개에서 기관총을 설치하고 기다리던 5천여 명의 관군+일본군 콤보에 말 그대로 학살을 당합니다. 당시 동학군의 전법이란 밀집대형을 갖추고 적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었으니, 기관총에는 말 그대로 밥이 될 수밖에요.



[ 우금치 전투 기록화. 안타깝지만 이래서는 차라리 전투보다 학살이라고 봐야겠죠]


 - 이제 유럽 열강의 식민지 침략은 해안을 넘어 내륙으로 깊숙히 들어가게 되었습니다(물론 이에는 밀림의 전염병을 이겨내게 해 준 의학기술의 발전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기존의 무역 거점을 넘어 대륙 전체가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것은 빨라야 19세기 후반, 완성된 것은 20세기 들어서야 가능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누가 더 많이 갈라먹을까'를 두고 영국과 프랑스가 한판 붙었던 '파쇼다 사건'이 1898년에야 발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입니다.


 - 이렇게 기관총(과 의사와 선교사)을 앞세워 유럽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기관총이 원주민이 아닌 유럽인 자신들을 향해 사용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당시의 유럽인들은 이 생각을 충분히 해본 적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3. 제1차 세계대전 : 그리고 스스로를 학살하다


 -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발전한 무기체계가 전쟁의 양상을 바꿀 것이라는 조짐은 있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1861-1865)은 수동식 기관총 등의 연사화기가 최초로 사용된 전쟁이었고, 남북 모두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기존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피해를 낳았습니다. 무기의 살상력이 높아지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해지고, 이 병력이 더 강력한 무기에 몰살당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각국은 전쟁 한 번 이기려고 모든 국력을 쏟아부어야 하게 되었습니다(이를 '총력전'이라 합니다).



[전쟁 양상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피켓의 돌격'. 게티즈버그 전투 당시 조지 피켓(1825-1875) 지휘하의 남부군은 방어라인이 갖추어진 북부군 진영으로 착검 돌격하였고, 한 시간 남짓만에 약 7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 이러한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이유는, 유럽의 전술 또한 기본적으로 전근대적 밀집대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상술했듯이 기관총은 적이 밀집해 있을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데, 적의 (부정확한) 포화에 '쫄지 않고' 밀집대형으로 적진 앞까지 전진하여 백병전을 치르는 19세기 유럽 군대의 전술은 기관총 앞에서는 말 그대로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남북전쟁을 비롯한 몇 차례의 전쟁에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 유럽인들은, 1914년부터 전개된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처참한 대가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몇 달 사이에 끝날 것이라 장담하던 전쟁은 서부전선을 중심으로 교착상태에 빠지고, 동맹측과 협상측 양쪽에서 이 전선을 지키기 위해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방어라인을 구축하면서 역사상 유례 없는 '참호전'이 시작됩니다.


 - 길고 복잡하게 뻗은 참호의 최전방 요소에는 어김없이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었고, 이들은 참호 점령을 위해 돌격하는 적군을 몰살시키는 역할을 지나치게 잘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이때까지도 유럽 군대의 기본전술은 밀집대형으로 착검 돌격이 다였으니,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보다도 멍청한 상황. 결국 협상측과 동맹측은 적군의 기관총에 수없이 많은 생명을 갖다바치는 짓거리를 3년 이상이나 계속하게 됩니다.


[방독면을 쓴 기관총 사수들]


 - 결국 유럽 열강은 천만 명의 사망자를 내고 나서야,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전술을 시도하게 됩니다. 총알을 막고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 처음 등장한 전차(탱크), 그리고 병사의 전투력을 소리없이 무력화할 수 있는 독가스의 등장으로 비로소 전쟁의 모습은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기관총의 효용성은 그 이후에도 죽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그 이후의 전쟁에서도 기관총은 다양한 형태로 개량되며 오히려 더 많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4. 결론 : 진정한 제국주의 무기, 최초의 대량살상무기


 - 기관총은 유럽 제국주의가 본궤도에 오를 수 있게 만든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요소 중 하나입니다. 유럽인들은 기관총을 들고 어디로든 쳐들어갔고, 그 각각의 지역에서 수많은 원주민을 기관총으로 학살한 이후 그 지역을 점령하고 수탈하였습니다. 실제로 당시 유럽인이 원주민에 대해 가진 우월의식은 상당 부분 이 기관총에서 비롯하였고, 이를 풍자한 노래가 있었을 정도입니다.


"전진하라 명받은 병정들아 이방인의 땅으로 가자 / 기도서는 네 주머니에 넣고 손에는 총을 쥐어라 / 그곳에서 거래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좋은 소식과 / 널리 평화의 복음을 전하라 / 맥심 기관총을 가지고서 // 가련한 원주민들에게 말하라 / 그들이 얼마나 죄지은 모임지 / 그들의 이방 사원을 / 영혼의 장터로 돌려놓자 / 만약 그들이 네 가르침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 이방 원주민들에게 맥심 기관총으로 설교하라 // 이방인들이 십계명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 그들의 추장을 꾀어 그 땅을 손에 넣어라 / 혹여 그들이 미혹되어 그대에게 설명을 원한다면 / 다시 산 위에서 맥심 총으로 설교하라" <Onward Chartered Soldiers>. 찬송가 <Onward Christian Soldiers>를 개사


 - 하지만 재미있게도, 혹은 안타깝게도 이방인을 학살하는 데 쓰인 기관총은 나중에는 유럽인 자신을 학살하는 데 더 효율적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인에게 '총으로 흥한 자는 총으로 망한다'는 준엄한 교훈을 주었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유럽은 20년 후 한 차례의 세계전쟁을 더 치르고 나서야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사자. 영국, 프랑스, 독일의 사망자는 대부분 참호전의 전사자 (출처)]


 - 이후에도 기관총은 세계 각지에서 애용되고 있으며, 기술 발전에 따라 활용도는 오히려 증가하여 이제 소형 기관총은 분대급 지원화기로까지 쓰일 정도입니다(대한민국 국군 기준). 유럽에서는 더 이상 기관총이 사람을 죽이고 있지 않지만, 아직 세계 각지의 전장에서 기관총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으며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무기'라는 기관총의 악명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가시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Johann Fridrich Franz Burgmuller (1806-1874)

<25 Études faciles et progressives> Op.100


 - 프리드리히 부르크뮐러는 독일 출신의 피아노 연주자 겸 작곡가입니다. 집안 전체가 음악가 출신으로, 아버지는 오르간 연주자와 지휘자로 활동했고 동생 또한 음악가였습니다. 레겐스부르크에서 출생한 이후 카셀로 이주하여 루트비히 슈포어(1784-1859)와 모리츠 하우프트만(1792-1868)에게 음악을 배웠고, 1830년 첫 번째 연주회를 열고 피아노 연주자로 본격 데뷔하였습니다.


 - 이후 1832년 파리로 이주, 남은 평생을 거주하게 됩니다. 파리에서 부르크뮐러는 (다른 많은 음악가와 마찬가지로) '살롱'이라 부르는 상류층의 사교 모임을 중심으로 음악 활동을 하였고, 그의 많은 작품이 살롱을 위해 만들어진 소규모의 실내악입니다. 이들 외에 오페라, 발레 음악도 작곡했지만 그를 대표할만한 작품이라면 25번(Op.100), 18번(Op.109)을 위시한 일련의 피아노 연습곡입니다.


 - 부르크뮐러 25번은 대체로 체르니 100번을 배울 시기에 병행하여 가르치는데, 피아노를 배우는 어린 학생들에게는 아무래도 다른 연습곡보다 인상적으로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부르크뮐러는 낭만파 시대 음악가이고 당시의 추세를 따라 각각의 연습곡에도 이러저러한 표제를 붙여놓는 등 음악성을 겸비해 놓았기 때문에, 순전히 기계적 훈련이 강조되는 체르니나 하농에 비해 조금 더 신선하게 받아들일 수 있거든요.


 - 각 곡의 표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부르크뮐러는 독일 출신이지만 모든 표제는 프랑스어로 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그가 대부분의 음악 활동을 파리에서 한 것과 연관이 깊을 것입니다. (출처 : 위키백과 "프리드리히 부르크뮐러")


1. "순진한 마음" - La Candeur
2. "아라베스크" - L' Arabesque
3. "목가" - La pastoral
4. "작은 모임" - La petite Reunion
5. "천진난만" - Innocence
6. "앞으로 앞으로" - Progres
7. "맑은 시냇물" - Le Courant limpide
8. "아름다움" - La Gracieuse
9. "사냥" - La hasse
10 ."귀여운 꽃" - Tendre Fleur
11. "할미새" - La Bergeronnette
12. "이별" - L' adieu
13. "위로" - Consolation
14. "스티리아의 춤" - La Styrienne
15. "발라드" - Ballade
16. "작은 슬픔" - Douce Plainte
17. "수다쟁이" - La Babilarde
18. "걱정" - Inquietude
19. "아베마리아" - Ave Maria
20. "타란텔라" - La tarentelle
21. "천사의 음악" - L' lfarmonie des Anges
22. "뱃노래" - Barcarolle
23. "돌아오는 길" - Le Retour
24. "제비" - L' Hirondelle
25. "승마" - La Chevaleresque





Carl Czerny (1791-1857)

<100 Progressive Studies> Op.139


 - 체르니는 베토벤의 제자 중 하나로, 수많은 작품(1000곡 이상)을 쓴 다작 작곡가이나 후대에 주로 기억되는 것은 피아노를 위한 일련의 교본들입니다. 실제로 체르니는 연주자, 작곡가만큼이나 피아노 교육자로도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제자 중에는 그 유명한 프란츠 리스트도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이후 대대로 이어져 19~20세기 내내 수많은 명 피아니스트를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 체르니의 피아노 교본은 각각 표제가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교본에 포함된 곡의 개수로 명명되는데, 쉬운 것부터 순서대로 100번(Op.139) → 30번(Op.849) →40번(Op.299) →50번(Op.740)으로 이어집니다. 이 연습곡들은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피아노 교본으로 널리 쓰이고 있지만,19세기 중반 이후 발전된 피아노 테크닉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어 최근에는 50번과 같은 어려운 연습곡을 생략하고 바로 낭만파 연습곡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 체르니 100번은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간추린' 체르니 100번>과 같은 형태로 출간됩니다. 100개는 너무 많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순서상으로는 바이엘을 마스터한 이후 하농과 함께 배우게 됩니다.





1~20번



충격과 공포의 60번


Charles-Louis Hanon (1819-1900)

<The Virtuoso Pianist in 60 Exercises>


 - 샤를-루이 아농은 프랑스 출신의 작곡가이자 교육자로, 후대에는 거의 음악 교육자로서의 업적이 남아 있습니다. 19세기에는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음악 훈련에서도 과학적 접근이 시도되었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다섯 손가락 훈련(Five-fingers exercise)'입니다. 아농이 쓴 <명피아니스트가 되는 60 연습곡>은 이 개념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대표적인 교본입니다.


 - 한국에서 흔히 <하농 60번>으로 알려진 이 교본은 1873년 출간되었으며, 출간과 함께 수많은 찬사와 논란을 동시에 낳았고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집니다. 이 교본은 피아노 연주의 기술적인 측면(손가락의 터치력, 타건(打鍵)의 정확성, 손목과 손가락의 유연성, 민첩성 등)을 기르는 데 더없이 좋은 교본이었기 때문에 많은 음악가와 교육자는 교본의 등장을 반겼으며, 1878년 파리 세계박람회에 출품하여 은상을 차지하기도 하였습니다.


 - 하지만 이 교본에 대한 비판도 19세기 이래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이 교본이 음악성을 무시한, 지나치게 기계적인 연습을 강제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연습이 잘못되었을 경우 오히려 잘못된 습관을 고착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계적 연습만을 지나치게 반복하면 손목 부상 등 신체에 무리가 갈 위험이 크고, 연주자의 흥미를 떨어뜨리게 된다는 것은 생각할 만한 문제제기입니다.


 - 이렇다보니 전문 연주자 사이에서도 교본에 대한 평가는 극을 달립니다. 매일같이 교본의 1번~60번까지를 반복해서 연습하는 피아니스트가 있는가 하면, 교본 자체를 쓰레기 취급하고 쳐다보지도 않는 경우가 있는 것. 어쨌든 세계의 피아노 연주자들에게 애증의 존재인 것은 맞는 듯합니다. 쇼스타코비치는 피아노 협주곡 2번에 교본 1번의 음형을 살짝 집어넣었는데, 이 곡의 초연을 자신의 아들(막심 쇼스타코비치, 1938-)이 맡았기 때문에 아들 놀려먹으려고 넣은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 한국에서는 <하농>이나 <하논>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며(실제로 아농은 프랑스인이기 때문에 이름 첫 글자 h가 묵음), 일반적으로 피아노학원에서는 바이엘 교본을 뗀 학생에게 체르니 100번과 함께 주어지는 교본이기도 합니다. Welcome to the hellgate





Ferdinand Beyer (1803-1863)
<Vorschule im Klavierspiel> Op.101

 - 한국의 대부분 피아노학원에서 처음 펴드는 책은 대부분(아마 거의 98%) 다양한 '바이엘 교본'일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이엘 교본은 독일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페르디난트 바이어가 작곡한 <Vorschule im Klavierspiel(번역기에 의하면 '피아노 연주 유치원')>을 기초로 합니다. 바이어는 다른 여러 작품을 발표하였고 생전에는 순수하게 예술적 활동으로도 유명한 음악가였지만, 후세에는 대부분 피아노 교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비록 150년 이상 되어 그동안의 연주 스킬 발전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있지만  여전히 세계 각지에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웃기게도 바이어의 고향 독일에서는 이 교본이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군요. ㅡㅡ; 한국에 전해진 것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거쳐서 처음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 순수하게 한국에서 출판된 가장 오래된 책은 1954년 국민음악연구회가 출간한 <바이엘 피아노 교본>입니다. 이후 한국에서 출간된 다양한 바이엘 교본은 대부분 바이어의 원본을 기초로 일부 편집을 가한 버전입니다.





John Field (1782-1837)
Nocturne No.2 in c H25


 - '녹턴(Nocturne)'이라는 단어는 '밤의 기도'를 의미하는 라틴어 'Noturnus'에서 유래하였는데, 중세부터 쓰여 왔으며 당시에는 예배 용어로 쓰였습니다. 이후 18세기에 'Notturno'라는 명칭으로, 주로 저녁이나 밤에 연주되는 연회 음악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녹턴은 이후 19세기 들어서는 밤의 고즈넉하고 때로는 고독한 이미지를 형상화한, 주로 피아노로 연주하는 악곡의 장르가 되었는데, 대중에게는 쇼팽의 녹턴이 유명하지만 실제로 '녹턴'이라는 장르를 창시한 인물은 존 필드입니다.


 - 필드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음악가 집안에서 출생하였고, 얼마 뒤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집안 환경 때문인지 일찍부터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어릴 적에 이미 재능을 보여 무치오 클레멘티(1752-1832)에게 음악을 배우게 됩니다. 그의 재능은 대단해서 12세 때 이미 웨일스 공(영국의 왕세자) 주최의 음악회에서 정식으로 데뷔하였으며, 20세 때는 피아노의 거장이었던 클레멘티와 함께 전 유럽에 순회 공연을 떠날 정도가 되었습니다.


 - 전 유럽에 걸쳐 진행된 순회 공연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끝났는데, 여기서 필드는 스승과 헤어져 그대로 러시아에 정착하게 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필드는 본격적인 작품 활동과 함께 교육 활동을 병행하였는데,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 중 한 명과 결혼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최초의 녹턴이 만들어졌고, 필드는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 러시아 내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기반으로 모스크바를 오가는 생활을 하다가, 1821년 이후 모스크바로 완전히 이주하였습니다. 이 무렵 필드는 상당히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는데, 그 결과 보드카 알코올 중독이 찾아왔고 자연히 건강도 악화되면서 그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1820년대 후반에는 직장암까지 발병하여 어려움을 겪었고, 치료 차원에서 오랜만에 서유럽으로 떠났습니다.


 - 필드는 요양차 서유럽에 와서 겸사겸사 음악 활동도 재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멘델스존 등의 음악가들과도 만나 교류하였습니다. 파리에서 콘서트를 열었을 때는 당시 이미 쇼팽이 활발히 활동하면서 자신의 첫 녹턴을 발표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필드와 쇼팽을 비교하기도 했고, 쇼팽이 필드의 제자 아니었냐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습니다(음악을 들으면 알겠지만 둘의 스타일은 꽤 다름). 쇼팽은 필드의 음악에 관심은 있었지만, 썩 좋아하는 정도는 아니었다고 하는군요.


 - 서유럽에서 활동하면서 수술을 받는 등 이런저런 치료를 받았지만 필드의 건강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나폴리의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러시아에 있는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1835년 모스크바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에서 필드는 마지막 몇몇 작품들을 작곡하고 마지막 음악회를 수행한 후, 1837년 1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 피아니스트답게 작품 중 많은 수는 피아노곡이며, 그 중에서도 자신이 창시했다고 말할 수 있는 녹턴이 후대에까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필드의 음악은 쇼팽이나 리스트와는 달리 간결한 테크닉과 서정성을 특징으로 하며, '노래'하는 것 같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그의 녹턴은 18곡 정도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녹턴으로 보기 애매한 작품이나 번호가 붙지 않은 작품도 있어 작품 수는 사람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릅니다. 리스트는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1859년 출판된 악보에 직접 서문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Kaikhosru Shapurji Sorabji (1892-1988)

<Opus Clavicembalisticum>





 카이코스루 소랍지는 영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음악평론가로도 활동하였습니다. 런던 근교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인도계로 뭄바이 파르시(조로아스터교도 공동체)의 후예이고, 어머니는 스페인계 시칠리아인으로 오페라 가수 출신입니다. 그의 본명은 '레온 더들리 소랍지'였지만 후에 개명하였는데, 자신이 파르시의 후예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소랍지가 음악을 배우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였으며, 소랍지의 어머니가 음악을 그만둔 것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소랍지는 어머니에 의해 피아노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청소년기까지 주로 독학과 개인교습으로 음악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첫 번째 인물은 작곡가 겸 음악평론가 피터 월록(1894-1930)으로, 그와의 친교를 통해 소랍지는 작곡과 음악평론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페루치오 부조니(1866-1924)의 도움으로 음악계에 데뷔하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소랍지의 음악세계에 영향을 준 것은 쇤베르크, 스크랴빈, 말러, 드뷔시 등 시대 전환기에 등장한 작곡가들의 독특한 음악, 그리고 자신의 출신에서 비롯한 인도 음악이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점차 '난해하고 길며 어려운' 성향을 띠게 되었는데, 이를 상징하는 작품이 바로 1930년에 완성한 <오푸스 클라비쳄발리스티쿰>입니다. 이 작품은 총 12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곡 연주에 4시간 이상이 걸리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합니다. 물론 이후의 작품 중에는 연주 시간이 훨씬 더 걸리는 것들도 있습니다. ㅡㅡ;


 곡이 연주하기 너무 어려운데다 소랍지 자신이 지나치게 높은 완성도를 요구하면서 이런저런 갈등이 생겼고, 결국 소랍지는 타인이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것을 수십 년간이나 금지하고 악보 출판도 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1951년에는 런던을 떠나 이주하였고 사실상 은둔 생활을 하였습니다. 소랍지는 자신의 작품을 녹음하는 것도 매우 싫어했는데, 그나마 주변 사람들의 제안으로 간간이 녹음이나 보존 작업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금령(禁令)은 1970년대 중반 마이클 하버만(1950-)과 욘티 솔로몬(1937-2008)에게 자기 작품의 연주를 허용하면서비로소 풀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1982년에는 존 오그돈(1937-1989)이 <오푸스 클라비쳄발리스티쿰>을 런던에서 공개 연주한 사례가 있습니다. 90세를 넘어서까지 건강을 잃지 않았고, 1988년 사망하였습니다.


 소랍지의 작품은 대부분 피아노곡이며, 연주 난이도가 높고 연주 기법도 상당히 독특(혹은 이상)한 것이 많은데다 대체로 연주 시간도 장난 아니게 길어서 연주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그의 사후에는 봉인 해제 많은 피아니스트가 도전하지만, 일단 정상급 기교에 체력을 겸비하지 않으면 곡을 제대로 소화하는 것 자체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라 자주 연주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앞서 언급한 존 오그돈 등의 몇몇 연주자들이 음반을 녹음하는 등의 노력을 해 오고 있습니다.

 

[2018. 5. 23. 수정]




charles valentin alkan (1813-1888)

Etude <Le Festin D'Esope> Op.39 No.12


 - 샤를 발렌틴 알캉은 프랑스 파리 출신의 유대인으로, 전성기에는 쇼팽, 리스트와 함께 당대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본명은 '샤를 발렌틴 모랑주'이며, '알캉'은 역시 음악가였던 자신의 아버지가 사용한 이름입니다. 아버지는 파리 음악원 입시를 위한 일종의 음악학원을 운영하였고, 이런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알캉은 유년기부터 음악적 재능을 발산하여 불과 6세 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 피에르 지메르만(1785-1853)을 사사하였습니다.


 - 이후로도 천재성은 가라앉지 않아 파리 음악원을 최우등(프리미에 프리)으로 졸업하였고, 20대에는 비슷한 나이대의 쇼팽, 리스트와 함께 젊은 비르투오소로 거대한 명성을 쌓게 됩니다. 폴란드 출생이지만 역시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한 쇼팽과는 라이벌이면서 동시에 친구 사이였는데, 쇼팽이 자신의 연주회에 알캉을 초청할 정도로 친분이 깊었다고 합니다.


 - 순조로운 젊은 시절을 보낸 알캉은, 절친 쇼팽이 병으로 요절하고 스승 지메르만이 은퇴한 후 앙투안 마르몽텔(1816-1898)과의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정신적으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알캉은 이후 오랫동안 모든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성서와 탈무드에 천착하는 은둔 생활을 거의 30여 년 가까이 이어가게 됩니다.


 - 은둔 중에도 작곡과 출판은 꾸준히 이루어졌고, 1877년에 비로소 알캉은 봉인 해제 은둔에서 벗어나 연주회를 비롯한 대외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하였습니다. 1888년 자신의 침실에서 사망하였는데, 책장에서 탈무드를 꺼내다가 책장이 넘어지면서 깔려죽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ㅡㅡ; 다만 이는 약간 후대에 나온 이야기로,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답게, 알캉의 작품은 대부분 피아노곡이며 이외에 교향곡 하나와 몇몇 실내악곡이 있습니다. 동시대의 쇼팽과 리스트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그의 작품세계는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근래 와서야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앞의 두 작곡가와 비슷하게, 알캉 역시 고난이도의 연습곡을 다수 작곡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Op.39의 12곡이 가장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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