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Leonore> "Overture" No.3 Op.72a

연주 : 건국대학교 KUPhil (2015 가을 연주회)


 -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는 파란만장한 개작(改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판본은 1805년 완성되어 그해 말 초연되었는데, 하필 나폴레옹이 비엔나로 침공한 혼란통에 몇 차례 상연되지 못하고 무대에서 내려오고 말았습니다(당시의 서곡은 <레오노레> 2번). 이듬해 초 베토벤은 작품을 다듬어 3막에서 2막으로 축소하고, 새로운 서곡(<레오노레> 3번)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으니 이것이 두 번째 판본입니다. 다만 이는 1차보다도 흥행에 실패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듬해(1807년) 프라하에서 상연 기회가 생기자 베토벤은 서곡을 다시 써서(<레오노레> 1번) 준비를 하였으나 이번에는 상연 자체가 취소. 이후 시간이 지나 1814년이 되어서야 작품은 다시 상연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베토벤은 음악을 대규모로 개작하였고 비로소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서곡을 다시 썼는데(<피델리오> 서곡), 초연 당시까지 완성하지 못하여 얼마 후에야 새로 쓴 서곡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최종본에 이르기까지 3명의 다른 작가가 대본 작업에 참여했고, 제목도 <피델리오> → <레오노레> → <피델리오>로 바뀌었습니다. '레오노레'는 주인공의 본명, '피델리오'는 남장한 주인공의 가명입니다.


[후기] 은근히 어려워서 허를 찔린 기억이 있습니다. 곡 자체의 재미도 재미지만, 완성되기까지의 긴 사연이 더 인상적이었던 작품.





Arturo Marquez (1950-)
Danzon No.2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5 봄 연주회)


 - 아르투로 마르케스는 멕시코 출신의 작곡가입니다. 멕시코 북부의 알라모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가족들과 함께 미국 로스엔젤레스 교외의 라 푸엔테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멕시코 음악원을 거쳐 프랑스 파리에 장학생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1990년에는 캘리포니아 예술학교에서 MFA(Master of Fine Arts) 학위를 받았으며 풀브라이트 장학금의 수혜를 받기도 했습니다. 주로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의 음악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는 작품 활동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단존 2번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단존(Danzon)'은 멕시코와 쿠바 등에서 유행한 2/4 박자의 춤곡입니다.


[후기] 흥겨움 하면 라틴아메리카 음악을 따라올 게 별로 없죠. 독특한 리듬을 가지고 있는 곡은 제대로 연주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운데, 블로거는 이런 곡이야말로 색다른 재미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좋아합니다.





Michael Haydn (1737-1806)

Symphony No.25 in G MH 330

(Mozart Symphony No.37 in G K.444)


 - 먼저 작품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이 교향곡은 오랫동안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알려졌으며 교향곡 37번을 부여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알려진 악보에 모차르트의 서명이 있었으며, 그의 지휘로 비엔나에서 초연된 바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대에 이 곡의 작곡자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고, 이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80-1952) 등 학자들의 검증을 통하여 현재는 1악장의 서주만 모차르트의 것이고 나머지는 미하엘 하이든의 작품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


 - 미하엘 하이든은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입니다. 형과 마찬가지로 음악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형이 비엔나 슈테판 성당 합창단에 입단한 이후 합창단 감독인 칼 게오르그 로이터(1708-1772)의 도움으로 미하엘을 비롯한 동생들 역시 합창단에서 활동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 하이든 형제는 변성기가 오면서 차례로 합창단을 떠났으며, 미하엘의 경우 퇴단 직후 그로스바르다인(現 루마니아 오라데아) 성당의 음악감독을 맡으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1762년부터는 잘츠부르크에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미하엘은 이후 남은 평생을 잘츠부르크에 머물며 360곡 이상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 1768년 미하엘은 성악가로 활동한 마리아 막달레나 리프(1745-1827)와 결혼하였는데, 잘츠부르크에서 친분 관계를 맺게 된 모차르트 가문에서는 마리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군요. 둘 사이에 자식은 딸(알로이지아 요제파)하나가 유일한데, 그나마 생후 1년 남짓만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를 종합하면, 미하엘은 몇몇 부분에 대하여는 형인 요제프보다도 더 뛰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종교음악의 경우 요제프 스스로가 자신보다 미하엘이 뛰어나다고 인정했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미하엘은 주로 교회음악가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대표작들 또한 교회음악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그문트 대주교를 위한 레퀴엠 c단조>는 미하엘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물론 고전시대 작곡가답게, 43개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다수의 세속음악도 만든 바 있습니다.


 - 다만 아무래도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대라, 그의 작품인지 불분명한 작품들이 있으며 요제프의 작품에 섞여들어간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똑같은 '하이든'이다보니 풀 네임을 쓰지 않으면 헷갈리기 딱 좋았다고).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위의 교향곡 25번이죠. 여담으로 미하엘은 술을 상당히 좋아했던 모양인데,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경우 미하엘이 술을 너무 마신다고 비판하기도 했다는군요.





Josef Strauss (1827-1870)

Polka <Ohne Sorgen> Op.271


 -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차남으로, 형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비슷하게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가의 길을 걸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군인으로 키우려고 하였지만 군사훈련을 버티기에는 그리 강건하지 못하여, 전공을 수학과 공학 쪽으로 바꾸었고 수학 참고서를 낼 정도로 나름의 입지를 확보하였습니다.


 - 음악가 데뷔는 상당히 얼떨결에 이루어졌는데, 1853년 요한 2세가 건강 문제로 잠시 활동을 중단하자 요제프에게 땜빵(?) 지휘를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형과 마찬가지로 몰래 음악 교육을 계속해왔던 그는 이를 수락하였는데, 데뷔 무대가 의외의 호평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 슈트라우스 일가의 일원답게 요제프 역시 왈츠 등의 경음악 분야에서 맹활약하였는데, 요한 2세가 "형제 중 최고의 재능은 요제프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공계 쪽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보니 공과대학이나 산업체 등의 행사에서 많은 음악을 의뢰받았고, 특히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상대적으로 서정적인 음악 스타일 때문이었다는군요.


 - 워낙 인기가 많았다보니 슈트라우스 일가는 모두 과로에 시달려야 했는데, 요제프 역시 과로로 건강을 많이 해쳤고 1870년 폴란드 공연 중 무대에서 갑자기 쓰러져 그 길로 사망했습니다.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세간에서는 그의 사인에 대해 온갖 소문이 돌았는데(심지어 러시아 군인의 폭행으로 사망했다는 설까지 있었다고), 장례와 매장에 관여한 사람들의 증언으로 일단은 과로사라는 결론이 났습니다.


 - 283곡의 자작곡 뿐 아니라 편곡한 작품 또한 굉장히 많았는데, 막내동생인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1835-1916)이 형들의 사후 악단을 해체하면서 요제프의 악보 상당수를 폐기해 버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에두아르트 역시 음악가였지만 형들의 명성에 묻히는 경향이 있었고(심지어 자신이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여기에 큰 불만을 가졌던 것이 하나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Johann Strauss II (1825-1899)

Waltz <Fruhlingsstimmen> Op.410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5 봄 연주회)


 - '왈츠'라는 춤곡 형식은 19세기 유럽을 완전히 평정하다시피 했는데, 당시 유럽의 대도시는 부유층의 무도회로부터 서민의 길거리 음악에 이르기까지 온통 왈츠로 차 있었습니다. 비엔나의 왈츠를 평정한 게 바로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父子)인데,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가가 되었으며, 말년의 아버지와 흥행 경쟁까지 벌여가며(요즘도 그렇지만 이런 대결구도는 대중의 관심을 받기 딱 좋았지요) 비엔나 왈츠의 최강자로 군림했습니다. <봄의 소리>는 1883년 슈트라우스가 헝가리로 연주 여행을 갔다가 초대받아 간 저녁 파티에서 거의 즉흥적으로 만들어 다듬은 작품입니다. 본래는 소프라노 독창을 위한 곡이었으며, 이후 관현악용으로 편곡한 버전이 널리 연주되고 있습니다.


[후기] 슈트라우스 일가의 왈츠는 빼놓을 수 없는 앙코르 곡목이죠. BGM으로도 많이 쓰이다보니 귀에 익은 작품들이 많지만, 조금만 찾아보면 처음 듣는 왈츠가 쏟아져나올 정도로 많은 작품을 쓴 작곡가들이기도 합니다.





Alessandro Marcello (1673-1747)

Oboe Concerto in d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5 봄 연주회)


 - 마르첼로는 베네치아 원로원 의원 집안에서 태어나, 음악 뿐 아니라 미술, 문학 등에서도 재능을 나타내었고 취미로 예술 활동을 한 전형적인 귀족 음악가입니다. 동생 베네디토 마르첼로(1686-1739) 역시 음악가로, 오보에 협주곡은 기존에는 베네디토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716년 출판된 악보가 뒤늦게 발굴되면서 알레산드로의 작품으로 밝혀졌습니다. 한동안은 잊혀져 있었으나 동시대 활동한 바흐가 건반악기용으로 편곡(BWV 975)하면서 세상에 알려진 바 있습니다.


[후기] 바로크 음악이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가 분명히 있겠지요. 블로거는 바로크 음악의 친숙하고 편안한 느낌을 좋아합니다.





Gioacchino Rossini (1792-1868)

<Guillaume Tell> "Overture"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5 봄 연주회)


 - 로시니의 마지막 오페라. 흥미롭게도 로시니는 37세 때 <빌헬름 텔>을 완성한 이후 39년을 더 살았지만, 남은 기간 동안 오페라를 단 한 개도 쓰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서양음악의 성향이 낭만파로 옮겨가고 성악가들의 창법도 변화하면서, 기본적으로 이전 시대의 작곡가였던 로시니가 이에 발맞추지 않은(혹은 못한) 것이라는 게 유력한 추측입니다. <빌헬름 텔>은 스위스 독립과 관련된 '빌헬름 텔'의 전설을 바탕으로 프리드리히 실러(1759-1805)가 쓴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그랜드 오페라(프랑스를 중심으로 유행한 거대규모 오페라)'입니다.


[후기] 역시 첼로파트에게는 곡의 처음에 등장하는, 첼로만의 합주가 기억에 남지요.





Giovanni Sgambati (1841-1914)

Symphony No.1 in D Op.16


 - 스감바티는 이탈리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지휘자 겸 작곡가입니다. 로마에서 태어나,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이탈리아 움브리아 주의 트레비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가수이자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약간의 교회 음악을 작곡하기도 하였습니다.


 - 1860년부터 로마로 돌아와 정착하였고, 때마침 1861년 로마로 이주한 프란츠 리스트의 지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휘자 활동은 독일계 작곡가의 음악을 이탈리아에 소개한 것이 돋보이는데, 베토벤 교향곡 3번과 7번의 이탈리아 초연을 맡았고 리스트의 <단테 교향곡> 등 여러 작품을 이탈리아에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 1860년대 후반 뮌헨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여기서 바그너의 음악을 접하게 됩니다. 작곡가로서는 주로 피아노곡을 많이 썼으며, 1901년 완성한 레퀴엠 같은 대작도 있습니다. 교향곡은 총 두 곡이 있고, 1번 교향곡은 1881년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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