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술 피리>는 모차르트가 죽은 1791년 완성한 징슈필(독일어 오페라)입니다. 이 작품은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 지부에서 함께 활동하던 극작가 에마누엘 시카네더(1751-1812)의 제안을 받아 만들었고, 실제로 프리메이슨 사상이 담겨 있다고도 합니다. 당시의 징슈필은 이탈리아어 오페라에 비하여 낮은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이 작품은 비엔나 변두리의 서민 대상 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당시의 상연은 100회 이상 반복되는 대 흥행을 기록했고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다만 모차르트 자신은 오페라 두 개와 레퀴엠을 동시에 작업하는 무리를 하여 건강을 해쳤고, 결국 완성 두 달 후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후기] 맨 처음의 2연음에 대하여, 일반적으로는 한음 한음 떼어서 연주하는 게 보통인데 특별한 이유는 아니고 대가들이 그런 식으로 연주를 했기 때문에 이를 관례적으로 따르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말년의 모차르트는 바흐의 음악을 연구하여 대위법 마스터가 되어 있었는데, 그걸 잘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 삼중 협주곡은 세 악기의 합동 협주라는 특이한 형태의 작품으로, 이런 형태의 음악은 주로 바로크 시대 '합주 협주곡(Concerto Grosso)'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만들어진 바 있습니다. 고전 시대 이후로는 찾아보기 어려워진 이러한 형태를 베토벤이 왜 꺼내들었는지는 분명치 않은데, 베토벤의 전기 작가(하지만 신뢰성은 심히 의심받는)인 안톤 쉰들러(1795-1864)에 따르면 피아노는 베토벤의 후원자 중 하나인 루돌프 대공, 바이올린은 루돌프의 전속 음악가인 칼 자이들러, 첼로는 에스테르하지 가문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로 주자인 안톤 크라프트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합니다. 완성은 1804년에 되었지만, 루돌프 대공이 악보를 먹튀개인소장하는 바람에 출판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는군요.
[후기] 블로거는 이 작품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베토벤 특유의 혁신성이 그닥 느껴지지 않거든요. 그래도 역시 (바로크 음악이 아닌) 세 악기의 동시 협주라는 게 독특한 매력이기는 하지요. 첼로를 듣보잡 취급했다는 모차르트와는 달리 베토벤은 나름 첼로를 좋아해서 첼로 소나타를 썼다든지 삼중 협주곡에 첼로를 포함했다든지 정도의 노력은 했으니 경건히 들을 따름입니다.
- 닐센은 덴마크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전반적으로는 신고전주의(구체적으로는 反바그너)에서 출발하여 현대음악과 고전주의 사이의 접점을 찾고자 노력한 음악가입니다. 2번 교향곡의 주제는 고대 철학자들이 이야기한 인간의 네 가지 기질에서 따 왔는데, 닐센이 어느 선술집에서 이를 표현한 그림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작곡에 착수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각 악장이 하나의 기질을 상징하고 있는데, 각각 'Chloeric(담즙질, 충동적)' 'Phlegmatic(점액질, 나태함)' 'Melancholic(우울질)' 'Sanguine(다혈질'을 뜻합니다.
[후기] 북유럽의 작곡가 중 닐센은 그리그, 시벨리우스에 비해 묻히는 경향이 크지만 그 업적은 크게 뒤처지지 않지요. 블로거가 닐센의 작품을 제대로 접해본 건 이 연주가 처음이었고, 지금 교향곡 2번은 블로거가 즐겨 듣는 레퍼토리의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 모차르트의 자녀는 총 4남 2녀였는데, 생후 1년 내에 죽은 네 명을 제외하고 살아서 장성한 자식은 아들 두 명입니다. 그 중 2남인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1784-1858)는 음악 교육을 중도에 포기하고 공무원으로 평생을 살았으며, 막내아들인 프란츠 크사퍼만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 프란츠 크사퍼는 아버지 모차르트가 사망한 1791년 태어났고, 아버지가 사망할 당시 4개월 남짓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프란츠 크사퍼'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유명한 제자 중 하나인 프란츠 크사퍼 쥐스마이어(1766-1803)의 이름과 같은데, 이 때문에 프란츠 크사퍼가 알고보면 쥐스마이어의 자식일 것이라는 음모론이 있기도 했습니다(사실무근).
- 어머니 콘스탄체 베버(1763-1842)는 모차르트 사후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1761-1826)과 재혼하였는데, 정식 재혼은 1809년으로 한참 뒤였지만 이미 1790년대 후반부터 두 사람은 연인 관계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니센은 덴마크의 외교관으로 모차르트의 팬이기도 했는데, 콘스탄체가 모차르트의 악보집을 출판할 때 협력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니센은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 아무튼 콘스탄체와 니센의 관계가 진전되면서 모차르트의 두 아들도 두 사람의 밑에서 자라게 됩니다. 때마침 둘 모두 생부를 닮아 음악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 콘스탄체와 니센은 이들에게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시켰습니다. 프란츠 크사퍼의 경우 요제프 하이든, 안토니오 살리에리, 요한 네포무크 훔멜(1778-1837) 등 당대 굴지의 음악가들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 음악적 재능은 동생이 더 많았는지, 중도에 음악을 포기한 형에 비해 프란츠 크사퍼는 아버지 못지않은 재능을 과시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그의 재능을 옥죄었는지 이후 프란츠 크사퍼의 음악은 아버지 시대의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 그는 청장년기에는 주로 렘베르크(現 폴란드 리비우)를 중심으로 피아니스트와 작곡가, 음악교육자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물론 렘베르크뿐 아니라 전 유럽에 걸쳐 연주와 지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는데, 전성기라 볼 수 있는 1820년대에는 400명의 아마추어 가수로 조직된 '성 체칠리아 합창단'을 결성하여 지휘를 맡았고, 유명 작곡가 50인이 공동으로 참여한 변주곡 프로젝트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1838년 비엔나로 돌아왔고,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설립식에서 합창 지휘를 맡았습니다. 모차르트의 아들이었으니 모차르테움의 음악감독을 맡아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는데, 프란츠 크사퍼가 아버지의 후광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1841년부터는 카를스바트(現 체코 카를로비바리)에 거주하면서 교육에 전념하던 중, 1844년 위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 상술했듯이 프란츠 크사버가 음악인의 길을 걷는 데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능과 아버지의 후광이 크게 작용한 바 있습니다. 반면 아버지의 이름값이 그에게 지나치게 많은 영향을 주는 바람에, 그의 작품세계가 아버지의 그것을 벤치마킹한 수준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사후에는 아버지의 명성에 완전히 묻히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값에 눌려 살다 보니 인간적으로도 그리 행복하게 살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와 비교당하는 것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했으며, 성격 또한 전반적으로 내성적이고 겸손한 성향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담감과 성격 문제 때문인지 평생 솔로 독신으로 살았고 자녀도 없는데, 하필 그의 형도 평생 독신으로 사는 바람에 모차르트의 대는 이들을 끝으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ㅡㅡ;
- 피아노사중주 1번은 공식 작품 번호가 붙은 첫 작품으로, 11세 때 완성하였습니다. 이 작품을 들으면서, 과연 그가 '모차르트'가 아닌 '프란츠 크사퍼'로서 평생을 살았다면 과연 어떤 음악세계를 보여주었을까 하는 생각을 짧게 해 봅니다.
- 드보르자크의 미국 생활은 그리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기간도 3년 남짓으로 길지 않았지만, 음악적 지평을 넓히는 데는 큰 도움이 된 시기였습니다. 뉴욕 내셔널 음악원장으로 근무하면서 드보르자크는 '인종 불문 입학 가능'이라는, 당시로서는 과감한 조치를 단행하였고 그렇게 입학한 학생들을 통하여 아프리카계와 아메리카 원주민의 음악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첼로 협주곡은 1895년 완성, 1896년 영국에서 초연되어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드보르자크의 후원자였던 브람스는 "이런 작품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내가 진작 첼로 협주곡을 썼을 텐데"라며 탄식했다고 하지요.
[후기] 연주회 뒷풀이에서 협연자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추어와 맞추다 보니 루바토를 주기 어려워서 철저히 정석에 맞게 연습을 했는데, 들어보니 대가들은 다 정석에 맞게 하더라" 뭐 이런 이야기도 했고, "음악을 업으로 하다가 음악을 순수하게 즐기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게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다" 이런 이야기도 했던가요.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다 보면 이 자리가 전문가와 취미가의 연결지점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양쪽 모두에게 정말 중요한 경험이 되겠지요.
- 모차르트의 오보에 협주곡은 그가 협주곡을 썼다는 정보만 있고, 작품의 실체는 오랫동안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의 사보된 악보가 발견된 것은 1920년이었는데, 놀랍게도 모차르트의 플루트 협주곡 D장조 K.314와 조만 다른 사실상 똑같은 곡이어서 논란을 낳았습니다. 핵심적인 것은 과연 둘 중 어느 쪽이 원곡이냐 하는 것인데, 일단은 모차르트 연구의 권위자인 알프레드 아인슈타인(1880-1952)의 의견을 따라 대체로 오보에 협주곡 쪽을 원곡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기존의 작품 분류에서는 플룻/오보에 협주곡에 같은 번호가 붙어 있습니다(개정 번호에서는 물론 다름).
[후기] 사실 이 곡을 연주했는지 아니 했는지도 기억이 불분명했다가, 곡을 다시 들으면서 간신히 기억해 냈습니다. 남아있는 기억이 이 수준이다보니, 후기랄 만한 건 딱히 없습니다. ㅡㅡ;
- 베토벤이 교향곡이라는 형태의 음악에 끼친 영향이라면, 무엇보다 음악회의 보조 음악이었던 교향곡을 음악회의 중심부로 끌어올렸다는 것에 있습니다. 베토벤이 1번 교향곡을 완성한 것은 1800년, 나이 30세 때로 그의 선배들인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에 비해 상당히 늦은 시작입니다. 실제로 그 이전에도 베토벤은 상당히 많은 교향곡 초안을 만들었지만 작품으로 완성시키지는 않았으니, 처음부터 교향곡 자체에 큰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번 교향곡은 지금에 와서는 선배들의 영향이 상당히 남아있는 작품으로 평가되지만, 그래도 나름 새로운 시도가 많이 보이기 때문에 발표 당시에는 상당히 진보적인 음악으로 이런저런 논란을 낳기도 했다고 합니다.
[후기] 베토벤 교향곡 입문용으로 괜찮은 작품. 좋게 평가하면 하이든-모차르트의 고전적 스타일과 베토벤 고유의 스타일을 모두 맛볼 수 있고, 나쁘게 평가하면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작품이라 할만하죠.
- 세르게이 쿠세비츠키는 지휘자 겸 더블베이스 연주자로, 젊은 시절에는 주로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30대 중반쯤부터 지휘자로 활동, 본래 러시아를 중심으로 음악 활동을 하였으나 러시아 혁명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습니다. 1924년부터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아 25년간 맹활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작곡가로서의 활동은 별로 없지만, 평소 더블베이스를 위한 곡이 부족함을 아쉬워하던 중 직접 작품을 쓰기에 이르렀으니 유명한 더블베이스 협주곡입니다.
[후기] 더블베이스를 위한 협주곡 자체가 희귀하니, 진기한 경험을 한 셈이지요. 당시 협연은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더블베이스 연주자 성민제씨가 연주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