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송유근은 왜 이렇게 되었나 : 육성전략의 대실패


 우선 송유근씨가 어릴 적 우리에게 보여준 것들에 대하여 고민해 봅시다. 송씨가 처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6세 때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면서부터입니다.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은 정보기술 분야의 가장 기초적인 자격증 중 하나로, 2017년경 시험 난이도가 상승하여 요즘엔 조금 다르지만 그 이전에는 합격하기 정말 쉬운 시험이었다고 합니다. 관련 전공자는 공부가 거의 필요 없을 수준에, 비전공자라도 짧으면 며칠 준비해서 붙을 수도 있는 시험이라고 하는군요.


 특히 문항이 문제은행식으로 출제되고, 2016년 이전에는 실기시험도 객관식(!)으로 출제될 정도였다고 하니 그 난이도를 짐작할 만 합니다. 이러다 보니 군인들이 포상휴가를 노리고 상당히 많이 준비하는 자격증이기도 하고(준비에 드는 노력이 적기 때문에), 나이 어린 사람들이 도전하여 합격하는 사례도 종종 있는 모양입니다. 당장 송씨가 합격한 그 해에 7세 아동이 이 시험에 합격한 다른 사례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사]


[정보처리기사 자격증 필기시험 문제 예시]


 난이도보다 주목할 지점은 그 공부 방식인데, 블로거가 찾아본 바 이 시험은 기출문제를 열심히 풀어보는 데서 상당 부분 성패가 갈립니다. 즉 기출문제를 최대한 많이 암기하는 능력이 중요한 시험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송씨가 가진 '재능'의 실체를 파악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됩니다. 송유근씨는 뛰어난 '암기력'을 어릴 적부터 소유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훗날 사람들에 의하여 분석된 그의 어릴 적 모습을 보면 실제로 그렇습니다. 송씨가 방송에 나와서 어려운 미적분이나 물리학 법칙을 술술 풀어내는 모습은 얼핏 보면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이는 그 수식이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암기'해서 칠판에 베껴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발군의 암기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과학적 사고에 필요한 이해력이나 창의력 등에 있어서는 다른 어린이들보다 딱히 나을 것도 없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물론 또래 평균보다는 높았을 가능성이 높지만요).


 여기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사실 뛰어난 암기능력은 오히려 한국의 제도권 교육에서 더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아마 송씨가 초등학교에 제대로 입학하여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모두 밟았다면 시험점수가 매우 우수한 '우등생'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트 영재들이 밟는 과정까지는 몰라도 상당히 순탄한 코스를 밟아 소위 명문대 진학은 무난하게 했을 겁니다. 물론 그래서야 지금처럼 유명인사가 될 일 따위는 없었겠지만, 사태가 이 지경이 되고서야 차라리 이런 평범한 삶이 낫지 않았을까요?


[앞에서 언급했듯이 저 '발명품'은 한 기업의 제품을 그냥 가져온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송씨는 저 기계의 작동 원리를 이해는 하고 있었을지]


 송씨에게 닥친 비극은 바로 주변 사람들(특히 그의 부모)이 송씨의 '재능'을 잘못 분석했다는 데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수식을 잘 외우고 주어진 문제를 잘 푸는 능력이 위대한 과학자의 덕목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송씨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상적인 경로를 거부하고, 자꾸만 송씨에게 부재한 '창의적 사고'를 요구하는 길로 그를 몰아갔던 것입니다. 그 길에 그런 능력이 요구된다는 것을 몰랐던 건 물론이고 말입니다.


 그 결과 송씨는 정상적 교육과정을 통하여 일반적 능력을 기를 기회를 싸그리 날려먹었고, 그렇다고 진정한 창의적 사고력을 기를 기회조차 제대로 가지지 못했습니다. 결국 2018년 '성인'이 된 송씨는 사회인이 가져야 할 사고능력과 덕목을 하나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채, 그저 온갖 지식의 파편들만 녹음기마냥 읊어대는 깡통으로 자라났던 것입니다.




5. 송유근을 둘러싼 여론과 언론의 뒤틀린 시선


 여기서 단순히 '영재가 될 수도 있었던 한 어린이를 잘못 육성'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그냥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송유근이라는 개인의 문제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를 대하는 사회의 자세가 심하게 뒤틀려 있(었)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블로거가 글을 쓰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이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먼저 짚고 싶은 문제는 그를 일종의 '연예인'으로 만든 언론의 작태입니다. 송씨가 처음 정보 관련 자격증을 획득하고 그 부모가 자식을 초등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설치던 때는 2004년 무렵이지만 이 시기에는 그냥 '그런 아이가 있다' 정도로만 가볍게 언급되곤 했습니다. 그러던 송씨가 갑자기 전국민의 관심을 받고 천재소년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은 2005년 <인간극장> 출연이었습니다. 당시 방송 제작진은 실제로는 별 것 없던 송씨를 무지막지하게 '포장'하여 '천재소년'이라는 하나의 '상품'으로 둔갑시켰습니다.


[방송에서 송씨를 어떻게 포장했는지 잘 보여 주는 사진 하나. 사진에서 등장하는 수식은 이차방정식 x^2-12x+36=0 인데, 생판 틀린 풀이법으로 문제를 풀고 있습니다]


 이후 송씨는 이곳저곳 방송에 불려다니며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방송국과 언론사는 그에게 쏠린 대중의 시선을 통하여 쏠쏠하게 돈을 벌었겠지요? 사실 언론의 입장에서는 송씨가 진짜 천재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치 연예인들의 이미지와 실제 삶이 어떻게 다른지 상관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즉 송씨는 철저하게 '천재 이미지를 가진 연예인'으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부모는 이를 인지하고 이용하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정말 자기 아들이 천재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마 둘 모두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그럼 이를 접하는 대중은 왜 그에게 열광하고 맹목적인 지지를 보냈을까요? 사실 송씨가 방송에 나온 것과 같은 '천재'가 아니라는 것은 학계나 교육계에서는 꽤 많이 언급되어왔고, 그가 통상적 교육과정을 계속 건너뛰는 것에 대하여도 많은 우려가 제기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우려가 대중에게 전달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를 접해봐야 대중은 "제도권 교육이 천재를 죽이려 든다"라며 기존 교육계에 비난을 퍼붓기 일쑤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한국의 교육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뿌리깊은 불신 때문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의 교육과정을 성인이 되기까지 밟아왔지만 정작 그 교육과정과 체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분석하려면 글이 하나 더 필요하겠지만 -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한국의 교육체제가 마치 절대악인 것마냥 취급하는 사고가 알게 모르게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송씨에 대한 기존 교육계의 우려가 '꼰대들의 꼰대질' 이상으로 인식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는 이러한 인식을 지금껏 해소하지 못한 교육계에도 책임이 있겠지만, 그와 별개로 교육계의 지적이 합리적인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송씨 문제에 있어서는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고 말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는 송씨가 군입대를 하게 된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송씨를 천재소년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요.


[황우석씨는 과학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와 비뚤어진 애국심을 교묘히 활용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대중의 무지와 비뚤어진 애국심입니다. 대중은 송씨에 대한 언론의 '허술한' 포장조차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였습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이니 상대성 이론이니 하는, '뭔 소리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어려워 보이는' 소리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아무 말이나 떠드니 똑똑한 사람일 것이라고 지레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상술했듯이 사람들이 그의 허상을 파악할 수 있는 식자(識者)들을 무턱대고 배척한 것에는, 어려운 이야기에 대한 막연한 공포 또한 어느 정도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송씨를 민족의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비뚤어진 애국심(?)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열광에는 그가 세상을 호령하는 천재가 되어 사회와 그 구성원들을 잘 먹고 잘 살게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위인전 감성'이 숨어 있습니다. 차라리 종교에 가까운 이 심리 때문에, 여론은 송씨를 비판하거나 걱정하는 목소리를 마치 반사회적 망동인 것처럼 취급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뜨던' 시기 한국 사회를 들끓게 한 황우석 사태와도 통하는 바가 많습니다. 글쎄, 10년 넘게 지난 지금은 뭔가 좀 다를까요?




6. 정리 : 다시는 이런 사람이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송유근 사태'의 최대 피해자는 누가 뭐래도 송유근씨 본인입니다. 사회에 도움이 될 유능한 인재가 될 수도 있었을 가능성이 주변 사람들과 대중의 비뚤어진 의도와 욕심 때문에 자라나지 못했고,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인 양 인식하며 성장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제는 자신에게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게 되어 버렸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이미지 메이킹은 그가 어렸을 때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지적 능력이 필요한 대학원 단계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고, 결국 뭐든지 빨랐던 그는 남들보다도 더 시간을 소모하고도 박사학위 하나 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우리 사회 전체에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위에 언급하였듯이 이 사태에는 자극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려는 언론의 돈벌이 전략과 거기에 무비판적으로 낚이는 대중들, 사회 전반에 만연한 과학에 대한 무지, 지성에 대한 반감, 그리고 비뚤어진 애국심까지 온갖 다양한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래서 송유근씨의 문제는 그 개인의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전세계적인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유럽에서는 극단주의 정당이 세를 불리고 있으며, 도날드 트럼프는 미국 대중의 반지성주의를 잘 이용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어떤지는 차치하고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송유근씨와 같은 '만들어진 천재'들은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되며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 전체의 반성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이처럼 천재를 '만들고' '소비하는' 행태는 사회 전반에 반(反)지성주의를 뿌리깊게 만들고, 이는 한 사회의 과학적 역량을 고갈시킬 뿐 아니라 인문학적 사고 또한 부진하게 만듭니다. 이미 문제는 현실화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공계 대학원이 텅텅 비어가고 인문학적 사유 또한 하지 않는 사회, 어쩌면 지금 우리 자신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한때 '천재소년'으로 세간에 잘 알려졌던 송유근(20)씨가 결국 군입대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사] 송유근씨는 2018년 6월 소속 학교인 UST에서 박사학위 최종심사를 받았으나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등의 사유로 불합격하고, 졸업연한을 초과하여 결국 학위를 따지 못한 채 학교를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워낙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고, 3년 전 논문 표절 사건으로 크게 시끄럽기도 했던 터라 언론 기사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사실 송유근씨는 논문 표절 사건으로 사실상 학자로서의 커리어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고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이 사람을 과연 '천재'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매우 의심스럽기에 크게 신경쓸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여전히 이 사람을 천재로 떠받드는 사회 일반의 여론이 적지 않은 것 같아 이런저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송유근씨는 어떻게 천재가 '되었고' 어떻게 망가졌을까요? 한때 천재라 불리던 소년의 인생을 말아먹은 모든 사태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송유근]




1. 이것부터 고민해 보자 : 도대체 천재란 게 뭔데?


 다른 나라는 모르겠고,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천재라는 말은 상당히 남용되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어릴 적 천재 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한 분 계신가요? ㅡㅡ; 물론 그 용례 중 대부분은 그리 진지하지 않은 의미로 하는 말이겠지만, 자기 자식을 천재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과도한 기대로 자녀를 짓누르는 부모들이 한둘이 아닌 것을 생각하면 이 단어가 어느 정도 잘못 인식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럼 과연 어떤 사람이 '천재'일까요? 임마누엘 칸트는 "예술에 규칙을 부여하는 능력"이 곧 천재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순수예술에 관한 말이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말은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일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블로거가 철학에 조예가 없으므로 더 이상은 깊이 들어가지 않겠지만 ㅡㅡ; 분명한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내고, 이를 정리하여 규칙으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바로 '천재'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칸트. 따지고 보면 이 사람도 천재]


 칸트의 설명을 따른다면, 천재로 불리기 위해 요구되는 가장 핵심적인 능력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될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머릿속으로 생각해 내고, 이를 완성된 형태로 표현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대하여도 다른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주 어려운 미적분 문제를 풀어내고, 남들이 1문제를 풀 시간에 서너 문제를 쉽게 풀어내는 사람을 과연 천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중에서도 칸트의 정의에 부합하는 천재는 당연히 있겠지만, 단순히 '언젠가 할 것을 조금 일찍 하는' 것을 칸트가 정의하는 '천재'라고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역사적인 천재들을 생각해 봅시다. 아리스토텔레스, 뉴턴, 가우스, 모차르트, 피카소, 아인슈타인 등등 자기 분야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천재로 평가되는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사조나 법칙을 창조하고 이를 후대에까지 관철시킨 인물들입니다. 물론 이들 중 많은 수가 남들보다 빨리 성장했고 우리의 고정관념 속 '천재'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천재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개발한 컴퓨터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계산을 했다는 폰노이만 쯤 되면야 인정해 드리지요. 물론 그 역시 매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으니 칸트의 정의에 따른 천재인 것 맞습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사람들에게 천재 소리를 듣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는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묻혀버리곤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언젠가 도달할 경지에 아주 이른 나이에 도달했지만, 결국 그 경지를 뛰어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남들도 다 그만큼(혹은 그보다 더 높은)의 경지에 도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들은 기껏해야 남들만큼 잘하는 평범한 재능의 소유자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천재에 대한 정의를 나름대로 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과연 어릴 적부터 천재로 불리던 송유근씨는 어떨까요? 과연 그는 천재가 맞았는지,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어쩌다 급전직하하고 말았는지 짧게나마 살펴봅시다.




2. 송유근 인생 초기 : 그는 과연 '천재'였는가?


 이젠 이것도 과거형으로 불러야 하겠지요. 어린 시절의 송유근씨는 과연 우리가 말했던 그 말대로 '천재'였을까요? 그가 천재 소리를 듣게 된 것은 대여섯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정보처리기사 시험에 최연소로 합격한다거나, 고등학생~대학생이나 손댈 법한 어려운 수학 문제들을 척척 풀어내는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이야기가 TV 등 언론을 타면서(블로거가 검색하기로는 <인생극장>이라고 합니다. 분명 블로거가 봤던 것 같은데 오래되어 기억이 잘) 그는 전국민적 관심을 받는 '천재소년'이 되었습니다.


[저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는 하고 쓴 걸까요?]


 실제로 그는 초등학교를 초고속으로 졸업하고(6세 때 행정소송까지 하며 6학년으로 입학, 졸업) 중졸, 고졸 검정고시를 몇 달만에 광속 패스, 2005년에는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인하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특별전형으로 합격합니다. 1학년 1학기 때 평점 3.8/4.5를 받는 등 블로거가 딱 한 번 받아본 점수를 대학교에서도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얼마 뒤 "획일적이고 주입식인 대학교육에 흥미를 잃었다"며 학교를 자퇴하고 독자연구를 하겠다는 발표를 하게 됩니다.


 이후 2008년 3월 서울시립대학교 양자컴퓨팅 분야 연구조교로 선임되고, 12월에는 UST(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석박사 통합 과정에 입학 허가를 받았습니다. 잠깐, 그러면 학사 학위는? 2009년 초에 학점은행제로 땄다고 하네요. 아무튼 11세 때 학사 학위를 따고 대학원까지 들어갔으니 정말 '천재적'인 소년으로 보일 법 합니다. 그러면 그는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천재였던 걸까요?


[형들은_이런_거_있어?.jpgee 그래 있다. 그것도 두 개나]


 우선 한 가지 생각해 볼 지점은 송유근씨가 과학영재들이 일반적으로 거치는 교육과정을 거의 하나도 밟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송씨는 영재올림피아드를 비롯하여 이 땅의 영재들이 경쟁하는 다양한 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고, 일반적인 교육기관은 커녕 과학고 등 과학영재를 위한 전문적 교육기관조차 거치지 않았습니다. 대학교 역시 조금 다니다가 자퇴하였으며 앞에 언급한 학점조차 다른 학생들과 별개로 평가를 한 결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송유근씨와 그의 부모가 계속 주장한 대로 한국의 제도권 교육은 과학적 창의력을 길러주는 데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한국의 교육과정을 충실히 거치고 다양한 학문적 업적들을 남긴 수많은 영재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 출신의 인물 중 과학분야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던 벤자민 휘소 리(이휘소, 1935-1977)는 당시 제도권 교육의 정점인 경기중학교(현재의 중고등학교 통합)와 서울대 공대(물리학과 전과가 불가능하여 중퇴)를 나왔습니다. 심지어 제도권에 영재교육 개념 자체가 없던 1950년대에!


[이휘소]


 또한 송씨가 주목받던 어린 시절에도 그의 천재성(?)에 의문을 제기할 기회들은 있었으니, 그가 대학교에 입학할 때 자신의 발명품이라고 소개한 물건이 사실 부모가 빌려 온 한 중소기업의 장비였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기사] 모든 일이 마무리된 지금 보자면 "그렇다면 지금껏 보여 온 천재의 이미지도 부모가 만들어 온 허상이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신기하게도 이 사건은 별 반향 없이 묻혔고 송씨는 계속 천재 이미지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과학계에서는 송씨에 대해 우려의 시선들이 있었지만 '국민 천재소년'으로 추앙받고 있던 그에 대하여 대놓고 문제제기를 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언론과 부모가 계속 '천재성을 죽이는 제도권 교육' 프레임을 쌓아가는 마당에 제도권 학계에서 그에 대한 비판은 곧 제도권의 천재 죽이기로 비추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학계 사람들은 대체로 그냥 입을 닫고 "논문 나올 때 두고보자"라는 입장을 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3. 천재의 몰락 : 알고보니 껍데기였을 뿐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2015년 송씨가 Astrophysical Journal(ApJ)에 투고한 논문이 표절 판정을 받고 게재 취소 처분된 것입니다. 이 과정을 다 쓰려면 글이 너무 길어지기도 하고 블로거가 상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부분도 많이 있으니 [링크]를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흥미로운 점이라면 과거 황우석 연구조작 사건과 진행과정이 조금 비슷한데 디시인사이드 과학 관련 갤러리에서 논란이 불거진 점(물론 이 사건은 일베저장소에서 처음 말이 나왔다고는 합니다만), 문제를 제기하는 쪽이 여론의 뭇매를 맞다가 한 방에 사태가 반전되었다는 점 등등.


 아무튼 이 사건으로 송씨는 천재소년으로 불리던 그간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었고, 이 논문을 바탕으로 취득하려던 박사 학위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황우석 때와 달리 이 사건은 논란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신속하게 사태가 종료되어 황우석 사건처럼 사회가 분열되어 개싸움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렇다 보니 역으로 이 사건의 경과나 그 의미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아직도 그를 천재소년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기는 합니다. ㅡㅡ;


[응 학위 못 준다]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2016년 arXiv(코넬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출판 전 논문 등을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사이트)에 송씨가 올린 논문이 또다시 표절 논란에 휩싸인 것입니다. [기사] [최초 문제제기] 뿐만 아니라 송씨와 관련된 연구보고서에 뜬금없이 그의 부모가 연구원으로 등재되어 있다거나, 보고서들이 온통 Ctrl+CV로 점철되어 있다거나[참조] 하는 등 이후로도 그에 대한 논란은 계속됐습니다. 아마 송씨는 물갤을 철천지원수로 여길 듯하다


 기껏 게재한 논문이 잇따라 표절로 드러나고 그 여파로 모든 지도교수가 날아가는 등등, 연구자로서 그는 그야말로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나마 SCI급이나 그에 준하는 학술지에 어찌어찌 논문을 내긴 했던 모양이지만, UST에서 받은 논문 심사에서 심사관의 질문에 대답조차 못 하는 등 기본조차 안 된 모습을 보이며 결국 박사학위를 받을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누구보다 빠르게 대학교와 대학원에 들어간 사람이 결국 기한초과로 학위 취득에 실패하다니, 어딘가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졸업한다고는_하지_않았다.fact]


 박사 학위는 기본적으로 자기 분야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학설을 만들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부여됩니다. 그러니 (다른 논문도 물론 마찬가지지만) 박사학위 논문을 베낀다는 건 그야말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 겁니다. 물론 한국의 대학원에서는 그 상상도 못할 일이 꽤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사실이긴 합니다만 문도리코라든지 문도리코라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국민의 주목을 받아온 학생이 철저한 검증의 대상이 될 논문을 그렇게 복붙 수준으로 베껴서 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석하면 되겠습니까. 


 이쯤 되고 나서는 그가 어린 시절에 TV에서 보여준 문제풀이나 공식 유도같은 자료들도 죄다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체로 '저건 식 자체를 외워서 외운 그대로 쓴 것이지 문제를 이해하고 푼 것이 전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송씨는 어린 시절에도 뭔가를 기억하는 암기력만 뛰어났지, 그게 뭔 소리인지 이해하는 능력은 전혀 없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모르는 블로거가 보기에도 저건 그냥 여러 변수들을 무의미하게 이리저리 돌려가며 장난친 것으로 보입니다. 블로거가 예전에 저러다가 문제 많이 틀렸는데]


 결국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가 TV같은 데 나와서 어려운 수학 문제 몇 개쯤 베껴쓰는 푸는 것, 그리고 지도교수 논문을 그대로 오려붙여서 논문이랍시고 내는 것 외에는 무언가 결과를 남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까지 와서 보면 송씨가 과연 자신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완료할 역량과 의지가 있기는 한가 싶기까지 합니다. 학자 인생에 평생 따라다닐 학위논문조차 지도교수의 것을 복붙하는 지경이래서야, 어디 그가 자기 머리로 논문은 커녕 번듯한 레포트 한 장이라도 제대로 쓸 능력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도 천재 소리 듣던 사람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걸까요?


(계속)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끝났습니다. 결과야 모두 예상한 대로 나왔고 말입니다(하긴 그것보다도 민주당이 더 싹쓸이를 하긴 했네요). 뭐 전체적인 결과에 대해서야 너무 뻔한 이야기가 나올테니 관두고, 그냥 블로거 개인적으로 흥미있었던 몇몇 동네만 짧게 살펴보겠습니다.




1. 이번 선거 최대 격전지



 이번 선거에서 가장 간발의 차로 당선자가 결정된 곳은 강원도 평창군수입니다. 득표율 50:50에 표차가 단 24표가 나왔습니다. 2위 후보는 아마 두 달은 잠을 못 이룰 듯. ㅡㅡ; 사실 강원도는 도지사는 몰라도 시장-군수는 대부분 보수계열 정당 후보들이 석권하는 곳이었는데, 이곳은 아무래도 평창올림픽 성공 개최가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2. 왕년의 최대 격전지



 강원도 고성군수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현직 군수를 떨어뜨리고 당선되었습니다. 이 곳은 사실 많은 이들에게 유명한데 과거 어떤 일이 있었냐면



 바로 이 사건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ㅡㅡ; 두 후보는 이후 지방선거에서 리벤지(?) 매치를 치렀는데 황종국 후보가 한 번 더 승리하였고, 황종국씨가 시장 재직 중 별세한 이후에는 윤승근 후보가 당선되어 현직 군수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산을 하나 넘어서 군수직을 계속 하나 했더니, 또다른 산이 나타나 버렸네요. ㅡㅡ;




3. 이부망천의 최후




 얼마 전 자유한국당 대변인 정태옥씨의 "이부망천(이혼하면 부천, 망하면 인천)" 발언으로 폭탄을 맞은 두 지역입니다. 뭐 서울에서 망해서 인근 위성도시로 이사간다는 식의 이야기는 블로거가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서도 들은 적이 있는 유서 깊은 이야기이긴 한데, 그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선거에 나서는 정당의 중요 인물이 이런 식으로 대놓고 지역비하를 하는 건 그냥 그 지역에서 선거 포기하겠다는 거나 다름없지요. 당연하겠지만 선거 결과를 보면 수도권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격차가 났습니다.




4. 박정희 본진 털리다



 사실 이번 선거의 숨은 주인공은 바로 이곳일지도 모릅니다. 박정희의 고향이자 이전 시장이 "박정희=반인반신" 드립이나 치던, 박정희 숭배의 끝판왕 구미시장 자리가 더불어민주당에 넘어왔습니다. 민주당 계열에서 후보조차 잘 못 내던 경북 지역에 처음으로 민주당 기초단체장이 배출된 것도 그렇고, 그 자리가 하필이면 박정희의 고향 구미라는 게 더 의미심장하네요. 보수 계열 후보가 난립했던 것, 구미시가 전자산업 중심의 도시라 청장년층의 비중이 생각보다 높은 것 등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5. 어쨌거나 당선!



 이번에는 옆동네 상주시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크게 이슈가 없는 동네에 왜 왔을까요? 바로 1위 득표율 때문입니다. 보시는 대로 1위와 4위의 득표차가 10%도 나지 않습니다. ㅡㅡ; 여기도 무소속 후보가 난립하는 바람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아무튼 TK에서도 자유한국당 후보들의 득표율이 예전보다 많이 낮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겠습니다.




6. 서울 유일의 자유한국당 구청장



 서울은 더불어민주당이 싹쓸이를 해서 제4회 지방선거의 리버스 버전이 되나 싶었지만 유일하게 서초구만 자유한국당이 지켜냈습니다. 딱히 이 지역이 보수라서라기보다 현직 구청장이 인근 강남구에 비해 크게 안 좋은 쪽으로 이슈가 되지도 않았고, 선거 공보물 등 선거운동도 잘 한 측면이 있다고 하네요. 아무튼 덕분에 자유한국당 역시 간신히 고개를 들 껀수가 하나 생기긴 했습니다. 현실은 TK자민련




7. 녹색당에도 털린 자유한국당



 제주지사 선거는 예상대로 원희룡씨가 당선되었지만, 자유한국당 후보가 녹색당 후보에게도 밀리는 대참사(?)가 벌어졌습니다. ㅡㅡ; 이번 제주도 녹색당은 비례대표 선거에서도 꽤 높은 득표율을 얻었는데 아무래도 제주도라는 지역의 특성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8. 이준석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울 노원병 재보궐선거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나 버렸습니다. 이준석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9. 자유한국당 vs. 안티자유한국당



 경북 김천 재보궐선거에서는 자유한국당 후보가 간발의 차이로 당선되었습니다. 사실 이것도 자유한국당이 기뻐할 일만은 아닌 것이 무소속 최대원 후보는 반(反) 자유한국당 연합후보로 민주당 쪽의 지지까지 등에 업고 출마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마터면 민주당 혹은 민주당이 지지하는 후보들에게 재보선 모든 지역구를 다 털릴 뻔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10. 정리


 라고 할 게 있을까요? 이번 선거에서는 아무튼 민주당이 압승할 것이라고 대부분이 예상했고, 결국 그 정도가 문제일 뿐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으니 말입니다. 이재명씨나 김경수씨가 개인적, 정치적 온갖 논란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무난하게 당선된 것을 보면 여론 일반이 자유한국당이나 바른미래당에 어떤 입장인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바른미래당은 반짝 떴다가 사라진 수많은 제3정당들의 뒤를 따를 가능성이 아주 높아졌고, 민주평화당은 역시 호남 자유선진당 노릇이나 좀 하다가 말겠지요. 정의당은 정당득표율은 좀 나온 것 같지만 고질적인 인재부족을 어떻게든 해결 못하면 여전히 답이 없을 겁니다. 그냥 앞으로 4년간 이 사람들이 뭔 짓을 하는지나 잘 감시해 봅시다.



 - 1.


 '선언'이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무엇일까요? 사실 선언이라는 건 그 자체만으로는 어떠한 역사적 의미도 갖지 않습니다. 그냥 말만 한 거니까요. 그것이 무슨 계약이나 판결, 조약처럼 강제력 또는 법적 효력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언의 의미를 논하려면 결국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가지고 따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미독립선언서는 한반도가 결국 해방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고, 군사독재 시대 발표된 많은 선언문들은 결국 민주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사에 그 빛을 남기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번 판문점 선언 또한 마찬가지라 할 것입니다. 좀 더 멀리 간다면 7·4 남북공동성명부터 시작해서 6·15, 10·4에 이르기까지 통일 문제와 관련한 모든 선언문들은, 결과적으로 남북이 통일되어야 역사적으로 그 의의를 평가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이번 선언에 마음 한 구석 불안함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겠지요. 지금까지는 그러한 선언들이 제대로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지금 이 순간까지 이 모양이었던 거니까요.




 - 2.


 그러니 앞으로 이 선언의 내용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겠는가를 따져 보아야 할텐데, 아직 확정적인 이야기를 할 수야 없지만 이전 선언에 비해 훨씬 여건이 좋고 실현 가능성이 크기는 한 것 같습니다(물론 블로거의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이번 회담은 '북미정상회담'과 한 트랙으로 가는 이벤트이고, 또한 한 쪽 당사자인 대한민국 대통령은 임기를 4년 이상 남겨 두고 있습니다. 북미관계라는 변수, 반북세력으로의 정권교체라는 변수를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는 북한 쪽에서 이전과 다르게 매우 즉각적인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핵실험장을 확실히 폐쇄할테니 그걸 직접 와서 확인하라는 이야기나, 몇 년 전에 바꾸어 놓은 북한식 표준시를 다시 원래 기준으로 돌려놓겠다는 이야기나 이전의 북한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물론 이것이 '정치'인 만큼 이것이 진심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별 의미가 없고, 적어도 북한 쪽에서 "우리 지금 진지하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이것 또한 이번 선언의 신뢰도를 높여 주는 건 물론이고 말이지요.




 - 3.


 이번 선언문에 비핵화 문제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지만, 계속 언급이 되었듯이 비핵화 문제에 있어 남북정상회담은 북미정상회담의 전초전 성격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북핵이 '외교적'으로 겨냥하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 되었건 비핵화 안건은 북미정상회담에서 다루어야 하고 거기서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날 겁니다(이 점에 있어서는 플레잉 카...... 아니 트럼프가 장사꾼 답게 협상 하나는 통 크게 한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러므로 판문점 선언에서 언급된 비핵화 이야기는 북미정상회담에서 어떤 기준으로 이야기를 할지 '가이드라인'을 잡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정도 주제와 무게를 가진 회담에 한국 정부가 미국과 협의를 하지 않았을 턱이 없으니, 이번 선언의 내용에 미국의 의중이 들어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북미정상회담에서도 기본적으로 핵을 완전히 없앤다는 전제 하에 북한과 미국의 딜이 이루어진다고 보면 될 겁니다. 기대해도 좋을 것 같군요.




 - 4.


 이번 선언 단독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내용은 역시 '종전선언' 추진 부분입니다. 다만 이것은 아마 남북한만의 합의로 해결되기는 어렵겠지요. 1953년 휴전협정의 당사자가 이들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휴전협정문에 서명한 당사자는 북한, 중국, UN군(사실상 미국) 측으로, 심지어 대한민국은 여기에 서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ㅡㅡ; 다들 아시다시피 이는 당시의 대통령인 저승...... 아니 이승만이 여기에 서명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전 이야기는 남북미중 4자회담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높지요(뭐 이래 놓고 미국과 중국이 그냥 남북에 일임해버리면 또 모르지만). 무엇보다 종전선언이란 곧 기존 정전협정의 폐기를 의미하고, 이는 평화협정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되면 또 외교적으로 만만치 않습니다. 생각보다 따져봐야 할 것들이 많거든요. 한국전쟁의 최종 정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주변국들 - 특히 전쟁과 휴전협정의 직접 당사자였던 미국과 중국의 입장은 어떻게 할지, 군축 문제는 어찌 할지, 서로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등등등등.


 그래도 전쟁이 완전히 끝난 상황이라는 게 상상할수록 흥미로워지기는 합니다. 우선 (옛 동서독이 그랬던 것처럼) 양측간에 제한적이나마 왕래가 가능해질 것이고, 그리 되면 이산가족 상봉 문제는 사실상 완전 해결됩니다. 수시로 창구를 열어 놓고, 고향을 방문하도록 하는 것도 가능하니까요. 그리고 그간 말로만 나왔던 북한 철로를 통한 대륙간 물류수송, 러시아에서 한반도로 오는 석유와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등도 실현될 겁니다. 러시아 싱글벙글 무엇보다도 더 이상 휴전선에 육군 병력을 몰빵할 이유가 사라지고, 휴전선(일단 이름이 바뀌겠군요)의 경비는 일반 국경 수준으로 완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면 양측 군대에도 상당한 변화가 생기겠지요.




 - 5.


 정치는 결국 '쇼'입니다. 특히 대중매체가 극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의 정치라면 더욱 그렇지요. 홍XX씨가 이번 회담을 '위장 평화쇼'라고 주장하는 건 충분히 제시 가능한 의견입니다만 그건 애초에 정치라는 게 그렇다는 걸 무시한, 유아적인 논리에 입각한 주장에 불과합니다. 그분의 말대로라면 이번 회담은 그 목적을 백배 달성한 겁니다. 이 분 정치 오래 하신 분 맞나요? 그대로 종신대표를 하시기를 기원합니...... 에......




 - 6.


 김정은씨는 갑자기 왜 태도를 돌변했을까요? 이건 블로거가 전문가도 아니고 정확히 알 수야 없는 노릇입니다. 일단 이 사람 생각에 북한이 언제까지나 은둔 상태로 있을 수도 없고 핵을 더 이상 크게 키울 수도 없는데(이 이상 핵개발을 더 하려면 이제 메가톤 단위의 핵무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걸 실험하려면 만탑산이 아니라 개마고원이 날아갑니다), 미국의 현 황상대통령을 봤을 때 장사꾼 출신이고 통 크게 쇼부(?)를 칠 수 있는 사람이니 적당히 판을 만들어 최종적으로 핵을 외교카드로 제대로 쓰고 버리자......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개인적으로 의문인 건 김정은씨가 과연 저렇게까지 나와도 괜찮은가 하는 것입니다. 북한이 이 정도까지 전향적으로 나온다면 분명 북한 내부의 체제 유지 프로세스에도 변화가 불가피합니다. 전쟁과 반미라는 두 가지 명분이 한꺼번에 날아가니까요. 그런데 북한에도 분명 냉전체제로 기득권을 유지하는 자들이 있고(남한에도 있듯이), 이들이 북한 지배계층을 점유하고 있는 만큼 예상되는 반발을 과연 제어할 수 있겠는가 의문이 조금 듭니다. 어쩌면 김정은씨는 그동안 이런 식으로 나올 준비를 하기 위해 위협요소들을 대숙청으로 착실히 제거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 김정은씨를 과대평가한 게 아닌가 싶어 일단 판단을 보류하겠습니다.



 - 티스토리가 블로그 백업 서비스 종료를 선언하였습니다. [공지] 물론 함께 종료를 선언한 서비스가 몇 가지 더 있습니다만, 블로거가 거의 쓰는 일이 없었던 트랙백과 API 서비스와는 달리 백업 서비스의 경우 티스토리 전체의 명운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 일단 티스토리 운영측의 입장은 명확합니다. '이미 데이터 복원 기능이 없어진 지 오래인데, 굳이 복원도 불가능한 백업 기능을 남겨둘 이유가 없다.' 일견 합당한 생각입니다. 굳이 긍정적으로 보자면, 현재의 백업 기능은 블로그 복원에는 무용지물이 된 데다 블로거들이 타 플랫폼으로 이주하는 데 악용(티스토리의 입장에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니, 백업 기능을 차단하여 티스토리 블로거의 감소를 최대한 어렵게 만들어 보겠다는 의도로 해석되기는 합니다.


 -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긍정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이유가 제법 많다는 점입니다. 우선 카카오는 다음과 합병한 이후 지속적으로 옛 다음 시절의 서비스를 종료하거나, 카카오의 이름으로 간판을 바꾸어 왔습니다. 카카오톡과 겹치는 마이피플이 사라진 것을 비롯하여, 다음 지도는 카카오맵으로 흡수, TV팟은 카카오TV에 흡수통합되어 사라질 예정으로 있는 등등.


 - 다음이 티스토리 인수 이전부터 운영하던 다음블로그는, 서비스는 지속중이지만 사실상 관리를 포기한 상태로 수 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티스토리의 중요 서비스가 폐지되는 것이 티스토리 자체의 단계적 폐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당연합니다.


 - 특히 백업 기능의 폐지는 티스토리가 타 서비스형 블로그(특히, 네이버 블로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중요한 이점 하나를 없애는 것을 의미하기에, 티스토리 블로거들의 우려와 반발은 충분히 납득할만한 일입니다. 일단 블로거가 생각하는 티스토리의 차별점이라면


1. 디자인이나 운영의 높은 자유도

2. 강력한 백업 기능

3. 업로드 시각을 과거시점으로 설정 가능


등이 있겠습니다만, 3번은 이미 올해 봄에 사라졌지요(심지어 제대로 예고도 하지 않고 갑자기 기능을 없애서, 많은 유저들의 반발을 산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사실상 저 세 가지가 사람들을 네이버에서 티스토리로 끌고 오는 원동력이었는데, 이미 하나가 없어지고 남은 둘 중 하나도 곧 폐지한다니 블로거의 입장에서는 어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 거기에 카카오의 서비스 중에서 이미 블로그를 대신할 수 있는 '브런치'가 존재한다는 것도 걱정을 키웁니다. 물론 브런치를 기존의 블로그 서비스와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기존 블로그의 역할을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카카오는 역할이 겹칠 경우 과거 다음의 서비스들을 미련없이 내쳐버리는 모습을 많이 보여 왔습니다.


 - 물론 '블로그'라는 콘텐츠의 특성상, 카카오가 무턱대고 티스토리를 닫는 것은 자폭행위에 가깝습니다. 한국 2위의 블로그 서비스, 수많은 양질의 블로거들이 십여 년간 쌓아올린 데이터의 축적량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서비스를 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활용가치가 충분하지요. 다음이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을 뿐


 - 브런치가 얼마나 흥하고 있는지는 (사용을 하고 있지 않으니) 잘 모르겠지만, 축적된 데이터의 양에서 티스토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티스토리를 날린다? 자폭도 이런 자폭이 없지요. 카카오 경영진이 제정신이라면, 이걸 제대로 활용하지 않을망정 그대로 날려먹는 바보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 하지만 최근 카카오의 사업확장이 지지부진한 것을 생각하면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 그나마 출구전략이 될 만한 것이라면 티스토리의 명칭이 카카오XX로 바뀌거나 카카오스토리(+다음블로그)와 합병하고, 전체적인 틀은 셋 중 가장 잘 검증된 티스토리의 체제 중심으로 가는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블로거가 카카오의 내부사정을 모르니,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는 모르겠군요.


 - 결론적으로 블로거는 티스토리가 그렇게 쉽게 사라질 만큼 허약한 플랫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백업 기능이 사라지는 이상, 만약에 대비하여 플랜 B를 세워둘 필요는 있어보입니다. 아마도 많은 티스토리 블로거들이 설치형 블로그(워드프레스라든지)로 이전하는 것을 고려하실테고, 블로거도 일단은 티스토리 폐쇄 대비용으로 설치형 블로그를 함께 돌려볼 생각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만약'에 대비하는 것으로 끝나면 좋겠습니다마는.



 - 경주에서 강진이 발생하여 전국이 시끄럽습니다. 이번에도 많은 곳(그것도 그 중 상당수는 언론)에서 지진의 세기를 말할 때 '규모'와 '진도'를 혼동하여 쓰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규모'와 '진도'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기 때문에 이를 언급할 때는 조금 더 엄격히 분리해서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두 가지 개념이 정확히 무엇이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규모 : 객관적인 지진의 Power


 - '규모'는 지진 발생 시에 방출된 힘 자체를 간단한 숫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힘의 크기 하나만을 보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수치로 정리하기도 쉽죠. 지진의 규모를 표시하는 척도에는 크게 '릭터 규모('리히터 규모'라고도 하는데 '릭터'가 정확한 표현)'와 '모멘트 규모'가 있습니다.


 - 릭터 규모는 미국의 지질학자 찰스 릭터(1900-1985)가 만든 체계입니다. 릭터는 지진이 발생했을 때 100km 떨어진 지진계에 기록된 최대 진동폭을 기준으로, 진폭이 10배 커질 때마다 수치가 1씩 증가하는 척도를 개발하였습니다. 이 경우 힘의 크기는 진폭의 크기의 2/3제곱만큼 커지기 때문에, 릭터 규모 수치가 1 증가할 때마다 힘의 크기는 대략 31.6배씩, 2 증가할 때마다 대략 1000배씩 증가하게 됩니다.


 - 1930년대 개발된 릭터 규모는 파의 종류(S파냐 P파냐), 지진계와 진원 사이 거리에 따른 변수 등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큰 지진에 대하여 정확한 측정이 어렵다는 약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에 걸쳐 릭터 규모 척도에 대한 보완이 이루어졌고, 1979년 가나모리 히로오(1936-) 등 캘리포니아 공대(칼텍) 연구진에 의해 '모멘트 규모'가 새롭게 고안되었습니다.


 - 실제로 릭터 규모와 모멘트 규모는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혼용되고 있습니다. 대체로 작은 규모 지진에서는 릭터 규모가, 큰 규모의 지진에서는 모멘트 규모가 더 신뢰성이 높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미국 지질조사국의 경우 규모 3.5를 기준으로 그 이상에서는 모멘트 규모를, 그 이하에서는 릭터 규모 등 다른 척도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 릭터 규모 기준으로 힘의 크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0 - TNT 480g

2.0 - TNT 15kg

3.0 - TNT 480kg

4.0 - TNT 15t

5.0 - TNT 480t

6.0 - TNT 15kt

7.1 - TNT 480kt

8.0 - TNT 15Mt

9.0 - TNT 480Mt

10.0 - TNT 15Gt


 - 이번 경주 지진은 최대 규모 5.8이었으니, 대략 TNT 10kt 정도 크기가 되겠습니다.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 때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TNT 20kt 위력이었으니, 대략 원자폭탄 반 개 정도의 위력이었다고 보면 되겠군요.


 - 규모는 단순히 힘의 크기만을 나타내기 때문에, 소수점 이하로 표시하는 게 가능합니다. 뉴스 등에서 지진의 세기를 소수점 찍어가며 표현했을 경우(예를 들어 이번 경주 지진에서의 5.1이나 5.8같이)에는 '규모'를 쓴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규모의 경우 단순히 지진으로 방출된 힘이 얼마냐 크냐는 것만 따지므로, 이 힘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해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2. 진도 : 사람이 느끼는 주관적인 피해


 - '진도'라는 다른 개념이 등장합니다. 진도는 사람이 느끼는 지진의 위력을 말하는데, 이를테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진을 느끼는지, 시설이나 실내 물건에는 어떤 영향이 있는지같이 사람이 직접 느낄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한 척도입니다. 이는 사람의 체험과 감각에 기초하므로, 당연히 주관적인 척도가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가에 대하여는 오히려 더 자세한 정보가 될 수 있습니다.


 - 진도 척도는 기본적으로 '수정 메르칼리 계급'(MM계급, 12등급)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세계 굴지의 지진대국(?) 일본에서는 이 체계를 쓰지 않고, 자체적인 척도를 따로 만들어 씁니다. 일본 기상청의 진도 계급은 예전에는 8등급(진도 0~7)이었다가, 1996년 진도 5와 6을 각각 5약-5강-6약-6강으로 세분화하여 현재는 10등급으로 되어 있습니다. 역시 잘라파고스...... 한국은 일본 기상청 계급을 사용하다가 2000년부터 MM 계급으로 바꾸어 쓰고 있습니다.


 - 지진이 지표에 전달되는 과정에는 여러 변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진원은 지표면에서 얼마나 깊은 곳에 있는지(당연하게도 진원이 깊을수록 지표면은 안전해집니다), 진동은 어떤 형태로 되어 있는지, 땅은 단단한지 연약지반인지 등등. 그러니까 규모가 큰 지진이라도 사람에게 별다른 영향이 없을 수 있고, 약한 지진이라도 지표면에서는 큰 피해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래서 진도의 경우 규모와는 별개로 발표하며, 어떤 지역의 진도가 얼마라는 것을 따로따로 나누어 발표합니다(이번 지진의 경우 경주와 대구에서 6, 부산과 울산 등지에서 5였다는군요). 진도는 정확히 1 단위로 표현되기 때문에 소수점 이하 단위가 있을 수 없고, 일반적으로는 로마 숫자로 표기하는 게 원칙입니다. 그러니까 6, 5가 아니라 VI, V로 표기하는 게 맞지요.


 - MM 계급은 다음과 같이 해석됩니다.


I. 미세한 진동. 특수한 조건에서 극히 소수 느낌.

II. 실내에서 극히 소수 느낌.

III. 실내에서 소수 느낌. 매달린 물체가 약하게 움직임.

IV. 실내에서 다수 느낌. 실외에서는 감지하지 못함.

V. 건물 전체가 흔들림. 물체의 파손, 뒤집힘, 추락. 가벼운 물체의 위치 이동.

VI. 똑바로 걷기 어려움. 약한 건물의 회벽이 떨어지거나 금이 감. 무거운 물체의 이동 또는 뒤집힘.

VII. 서 있기 곤란함. 운전 중에도 지진을 느낌. 회벽이 무너지고 느슨한 적재물과 담장이 무너짐.

VIII. 차량운전 곤란. 일부 건물 붕괴. 사면이나 지표의 균열. 탑·굴뚝 등의 구조물 붕괴.

IX. 견고한 건물의 피해가 심하거나 붕괴. 지표의 균열이 발생하고 지하 파이프관 등의 지하 시설물 파손.

X. 대다수 견고한 건물과 구조물 파괴. 지표균열, 대규모 사태, 아스팔트 균열.

XI. 철로가 심하게 휨. 구조물 거의 파괴. 지하 파이프관 작동 불가능.

XII. 지면이 파도 형태로 움직임. 물체가 공중으로 튀어오름.


 - 경주와 대구가 진도 VI(6)이라면, TV가 넘어지고 담벼락이 쓰러지는 수준의 피해소식이 대강 이해가 되시겠지요?



 - 김성근 한화 이글스 감독(이하 김성근)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안 좋은 쪽으로. 한화가 김성근을 선임할 때만 해도 2015년 한화의 변화할 모습에 대한 기대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의외라고 할만하죠. 야알못이라 깊은 분석은 어렵고, 그동안 보고 들은 것들을 생각하며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 김성근은 자타공인 한국 최고의 야구지도자 중 하나입니다. 김응룡 전 감독 정도만이 비교대상이죠. 그런 그가 2010년대 압도적 최하위팀 한화를 맡을 때, 블로거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올해 한화가 어떻게든 분명 발전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단지 첫 해에 5강에 드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따져보는 수준이었죠. 시즌이 끝나가는 지금, 분명 전체적으로 보면 한화는 이전보다 나아지긴 했습니다(이는 그동안의 한화가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태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김성근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최악으로 치달아 버렸습니다. 블로거가 보기에도 현재의 김성근은 분명 한화를 망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걸까요?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 글은 그러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합니다.

1. 김성근, 전형적인 '한국형' 리더


 - 일단 김성근이라는 캐릭터가 왜 사람들에게 지도자의 표상으로 대접받는지를 생각해봅시다. 김성근의 스타일은 리더가 목표와 실행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면 '아랫사람'들은 거기에 절대적으로 따르면 되는, 전형적인 독재자형 리더십이죠('독재자'라는 단어가 입맛이 쓰지만,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쓴 것이지 부정적 의미로 쓴 건 아닙니다). 20세기 후반 한국 사회의 발전신화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영명한 지도자(독재자)가 방향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강제적인 통제와 더불어)지시하면 사람들이 거기에 충실히 따르는.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현재도 잘 먹힌다는 건 현재의 대통령이 당선된 과정을 보면 명백하고, 그런 사회에서 김성근의 리더십은 가장 이상적인 것임에 분명합니다.

 - 그런데 여기엔 분명한 후과가 따르죠. 독재자형 리더십은 필연적으로 리더를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한 탄압, 그리고 리더가 옳은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을 때의 후유증을 낳습니다. 김성근이 대단히 인간적이고 아랫사람을 잘 챙기는 지도자인 것은 유명하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 스타일의 아랫사람에게는 끝없이 매몰차고 가혹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 대표적 인물인 한대화 전 감독의 경우, OB에서 뛰던 시절 질병(A형간염)의 여파로 강훈련을 소화할 몸상태가 아니었음에도 '훈련에 태만하다'는 이유로 김성근의 눈 밖에 나고, 쫓겨나다시피 해태로 트레이드되었으며 나중에 쌍방울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한대화는 김성근의 반대로 은퇴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쓸쓸히 은퇴한 바 있습니다.

 - 김성근 스타일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양으로 질을 커버한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른 2010년대쯤 되어서는 김성근식 훈련의 강도와 분량이 그야말로 독보적이라 할 만하지만, 그런 게 일반적이었던 20세기에도 김성근은 선수를 대단히 많이 '굴리는' 감독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선수들에게 다양한 방식의(나쁘게 말하면 별별 희한한 방식의) 훈련을 시키죠. 빠른 성적향상을 위해 엄청난 훈련량을 소화시키고, 선수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훈련법은 감독이 직접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이러한 방식 또한 한국의 경제발전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는 건 다들 짐작하실 겁니다.

 - 그에게 '한국적'이라는 말을 붙인다면,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이유로 들 수 있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링크를 참고.


2. 김성근은 리빌딩형 감독이 아니다


  - 2015년의 한화는 철저한 리빌딩이 필요한 팀입니다. 주전급 선수의 뎁스가 처참할 정도로 얇기 때문에(차라리 선수들 다 팔아치우던 시절의 히어로즈가 더 나아 보입니다. 블로거는 넥센 팬), 일단 선수층의 두께를 키우는 일부터가 필요하고 이건 1~2년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넥센이 아직도 이 문제로 허덕이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신다면). 이런 팀에는 선수 육성에 일가견이 있는 지도자를 앉혀놓고 한 3~5년쯤은 성적에 연연할 필요가 없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리빌딩이 가능하죠.


 - 김성근은 어떨까요? 분명 김성근은 그동안 이러한 팀들을 맡아 성공적인 육성 능력을 보여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팀들을 맡아 첫 해부터 좋은 성적을 거두었죠. 여기서 '첫 해부터'라는 게 중요. 즉 김성근은 선수를 장기적으로 키우기보다, 단기간에 가능한 한 빨리 선수를 키워낸 다음 그 선수들을 200% 활용하여 최대한의 성적을 거두는 스타일의 감독인 셈입니다. 단기간에 선수를 키워내려면, 결국 훈련의 강도를 최대로 높이는 것밖에 답이 없죠. 김성근 특유의 미친 듯한 훈련량은 상당 부분 여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이는 선수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오버페이스'가 됩니다. 6개월 이상 계속되는 페넌트레이스 일정에 강훈련, (투수의 경우) 혹사까지 겹치게 되면 선수들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체력 및 근력소모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과연 선수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주게 될까요? 김성근을 변명할 여지가 있다면 적어도 그는 선수의 상태에 대한 세심한 관리를 한다는 점인데, 김성근식 관리는 선수를 최대한 혹사한 후 나가떨어질 때쯤 일정한 휴식을 부여하는 방식이고 이러한 방식으로 신체가 점점 소모되는 것을 온전히 막지는 못합니다(재료과학에서는 '피로파괴'라고 합니다).


 - 위에서 분석해봤듯이 김성근은 '빨리 만들어서 빨리 써먹는' 타입의 감독입니다. 적어도 먼 미래를 우선시하는 감독은 아니죠. 그가 몸담았던 팀이 그가 나간 이후로 하나같이 성적이 추락하는 결말을 맞았다는 것은, (팀이 아예 망해버린 쌍방울을 빼고)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그랬다는 것은 단순히 프론트나 후임 감독의 삽질이라고만 해석하기엔 곤란할 것입니다. 비록 그가 5년 이상 장기간 재임한 적이 없기 때문에 '김성근이 끝까지 책임을 진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에 대한 답은 내릴 수 없겠지만, 적어도 후임자를 대단히 난감하게 만드는 감독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3. 선수의 특성을 무시하는 방향제시


 - 김성근식 리더십의 다른 문제는 '선수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단 그의 밑에 있는 선수는 일률적으로 '적당히 날씬한' 몸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김성근의 강훈련을 거쳐가게 되면 누구라도 살이 빠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ㅡㅡ; 최근 프로야구 선수들이 체중을 불리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가 되면서, 살을 지나치게 찌워 문제가 되는 선수들도 제법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선수들을 제외한, 현재 상태로도 별 문제가 없는 선수들까지 강제 다이어트(?)를 하게 된다는 것.


 - 이번 시즌 양훈의 변화는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경찰청에서 제대하여 올시즌 한화로 복귀한 양훈은 김성근의 지시로 살을 뺐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우수한 피지컬이 무기인 양훈은 살을 뺀 이후 젓가락이 되어 ㅡㅡ; 구위를 완전히 잃어버렸고, 시즌 초 버려지다시피 넥센으로 트레이드됐죠. 그런 양훈을 받은 넥센은 김성근과 정확히 '반대로' 가게 됩니다. 짧은 기간 동안 무서울 정도의 벌크업을 통하여, 거의 다른 사람 수준으로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 이후 양훈은 넥센의 새로운 필승조로 맹활약하고 있습니다. 많은 걸 시사하죠.


 - 혹자는 선수들 개개인에 맞는 다양한 훈련법을 적용하는 감독이지 않냐고 반론을 제기하실텐데, 그건 그것대로 맞습니다. 블로거가 말하고 싶은 건 큰 틀에서, '최대한 많은 훈련과 이를 통하여 강인하고 가벼운 몸 만들기'라는 기본 전제를 일률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인드를 가진 감독에게, 위에서 말한 한대화 같은 선수가 인정받을 것으로 생각되진 않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당뇨병 환자였던 심성보 정도일텐데, 김성근이 직접 훈련 스케줄을 따로 짜 줄 정도로 신경을 썼다지만 (본인의 태만 때문이건 어쨌건) 좋은 결과는 내지 못했으니 야만없이라 하겠습니다.


4. 투수혹사 문제에 대한 단상


  - 투수의 수명에 대한 김성근의 생각은 전형적인 일본식 마인드인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야구에서는 '투수의 팔은 던지면 던질수록 단련된다'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투수가 최대한 많은 공을 던지도록 유도합니다. 그러니까 매년 고시엔 대회에서 연일 완투를 거듭하는 고교선수가 나와도 문제를 삼지 않는 것이고, 선발 투수가 많은 공을 던져 완투하는 것을 당연한 미덕으로 여기는 거죠. 반면 미국은 정 반대로 생각하는데, '투수가 평생 던질 수 있는 공의 개수는 정해져 있다'고 보고 학교야구에서 투수들의 투구수를 철저히 제한합니다. 놀란 라이언이 예찬하는 '롱토스 훈련법'의 경우도 찬반 양론이 거세고, 이를 즐겨 하는 선수들 중 다수가 나중에 구속 저하 증세를 보인다는 점 때문에 부정적인 쪽으로 여론이 가고 있죠.

 - 이것에 대해 블로거는 뭐라 할 수 있을 만큼의 식견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일본인 투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몇 년 활약하다가 하나같이 드러눕는 게 과연 우연일까 싶기는 합니다.

 - 한국야구로 돌아와 보죠. 20세기의 야구 감독들이 으레 그러했듯이, 김성근 또한 팀의 마운드를 우수한 몇몇 투수들에게 최대한 집중시키는 투수 운용을 합니다. 가깝게는 SK 감독 시절 정우람, 전병두, 박희수 등 몇몇 불펜투수가 수많은 혹사 관련 기록들을 만들어냈던 바 있죠. 여기에 대하여는 항상 '김성근은 철저한 관리 하의 혹사를 한다'라는 변명이 따라붙는데, 글쎄요 저 SK 불펜 3인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5년째 재활, 재활과 복귀를 반복, 마침내 퍼져버린 것으로 의심됨)를 생각하면 그 관리라는 게 도대체 얼마나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올해 한화의 '살려조'에 대한 우려가 많은 건 결코 과한 게 아닙니다.


5. 결론 - 김성근은, 20세기는 끝났다


  - 지금 시점에서 어떤 욕을 먹더라도, 김성근이 20세기 최고의 감독 중 하나라는 데 이견은 없습니다. 라이벌 김응룡이 커리어 막판에 웃음후보(?)가 되었음에도 10회 우승 감독이라는 금자탑을 아무도 폄하하지 않는 것과 같죠. 하지만 그들의 방식이 앞으로도 통할 것인가에 대한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 블로거는 김성근에 대하여 '분명 저런 방식이 언젠가는 한계에 다다를텐데 그것이 언제가 될진 모르겠다' 정도의 생각을 항상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2015년 이후 한화 감독으로서의 행보가 여기에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죠. 일단 (안타깝게도) 김성근은 커리어 막판에 김응룡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오히려 시즌 중반 이후 그의 모습은, 그동안 그의 뻣뻣한 이미지를 보완하던 '최소한의 유연성'마저 집어던진 것 같습니다. 이제는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성근의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김성근으로 대표되는 한국식 성공신화, 발전의 패러다임이 종언을 고하는 순간을 목도하고 있기도 합니다. 몇몇 투수들의 팔을 제물로 삼아서.



 - 지난 17일 방콕 도심의 에라완 사원 근방에서 폭탄테러로 인해 (18일 현재) 최소 21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태국 총리는 이번 테러가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지지세력 쪽에서 태국의 관광산업에 타격을 주기 위해 벌인 테러행위라고 주장하였고, 정부에서는 최근 중국으로 추방된 위구르 독립운동세력의 일원일 수도 있다는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합니다. 이번 테러는 방콕에서 발생한 사상 최악의 테러사건입니다. 관련기사


- 탁신 전 총리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닌데, 최근의 태국 정치는 군부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과 탁신의 지지세력으로 양분되어 시위와 쿠데타가 빈발하는 등 그야말로 난장판입니다. 군부의 쿠데타는 태국 현대정치사에서 특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며, 이것이 푸미폰 아둔야뎃(1927-, 라마 9세) 현 국왕의 권위와 뒤엉켜 현대 태국의 역사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1. Round 1 : 군부 vs 국왕

  - 태국은 1932년까지 절대군주제 국가였습니다. 이후 입헌군주정으로 전환하는데, 엉뚱하게도 이런 전환이 벌어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군부 쿠데타입니다. 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쿠데타(?)였던 당시의 쿠데타를 라마 7세 국왕이 받아들이고 입헌군주제 전환을 인정한 이후 태국의 정치체제는 '사실상 군부가 권력을 독점하는' 입헌군주제로 이어져 왔습니다.


- 얼마 후 라마 8세가 즉위하였지만 1946년 의문의 총기사고로 급사하자, 그의 동생인 푸미폰 아둔야뎃이 왕위를 이어받아 라마 9세가 되었습니다. 비록 왕이 되었다지만 권력은 군부가 틀어쥐고 있었으며, 푸미폰 국왕은 국가의 상징이자 구심점으로서의 권위를 쌓아나가며 권토중래를 노립니다. 푸미폰이 실질적인 권력자로 부상하게 되는 것은 1992년 수찐다 크라쁘라윤이 주도한 쿠데타 때입니다.


 - 수찐다의 쿠데타가 발생하자 잠롱 스리무앙(1935-)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반대시위가 발생하였고, 군부가 진압 과정에서 총기를 발포해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푸미폰은 자신을 알현하러 온 수찐다를 면전에서 강하게 비난하였고, 이 한 방으로 수찐다 내각은 붕괴하였으며 수찐다 본인은 외국으로 망명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총선거를 통해 사실상 최초의 본격적인 민주정부가 들어섰고, 푸미폰 국왕은 그야말로 태국 국민들의 숭배의 대상으로 떠오릅니다.


- 이후 십수년간 태국은 그럭저럭 민주적인 입헌군주국가로 잘 나가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2001년 2월 탁신 친나왓(1949-)이 총리로 취임하며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2. Round 2 : 탁신 vs (군부+국왕)

  - 탁신은 타이 굴지의 대기업을 창업한 화교 출신의 기업가입니다. 그러한 인물이 총리가 되었는데 특이하게도 그의 정책은 태국 역사상 가장 친서민적인 것이었고, 주로 하층민을 중심으로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이 생겨납니다. 태국은 발전 과정에서 상당히 심한 빈부격차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하층민들이 탁신에 지지를 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 당연하게도 이러한 정책은 보수파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보수파의 양대산맥인 왕실과 군부가 힘을 합쳐 탁신을 권좌에서 축출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스라윳 쭐라논 육군참모총장의 주도로 쿠데타가 발생하고, 푸미폰 국왕이 이를 승인한 것입니다. 이후 군부의 관리 하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흥미롭게도 친 탁신 세력이 승리를 거둡니다.


 - 다만 이 무렵부터 타이의 정치구도는 완전히 둘로 쪼개지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하층민이 중심이 된 탁신 지지세력과 왕실-군부를 중심으로 한 보수(기득권)세력입니다. 2010년에는 친 기득권 성향인 아파싯 웨차치와(1964-) 총리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는데, 이에 보수세력도 맞불을 놓으며 거의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 2011년에는 탁신의 동생인 잉락 친나왓(1967-)이 총리직에 올랐는데(이것 자체가 탁신 세력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보여주죠), 그는 탁신에 대한 사면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2013년 다시 대규모 시위를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탁신이 하층민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상당한 부패혐의를 받는 등 그리 깨끗하다고는 볼 수 없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 탁신 반대세력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또다시 찬성-반대측 사이에 사망자까지 발생하는 대규모 충돌이 벌어졌고, 이는 푸미폰 국왕의 생일인 12월 5일 휴전을 선언하며 진정되나 싶었지만 2014년 5월 잉락 총리가 '권력남용'을 이유로 헌법재판소로부터 총리직 상실 판결을 받으며 다시 폭발합니다.


 - 혼란이 커지는 와중에 5월 20일 난데없이 군부에 의해 계엄령이 선포되고, 22일 쁘라윳 짠오차(1954-) 육군참모총장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음을 인정합니다. 이 쿠데타는 푸미폰 국왕에게 승인받으며 태국 역사상 12번째 '성공한 쿠데타'로 기록되었습니다. 쁘라윳은 선거 없이 총리직에 올랐으며, 이후 2015년 현재까지 태국에서는 새로운 총선이 실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3. 태국 정치에 봄날은 오는가

  - 태국의 정치는 과연 다시금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타이에서는 1932년 이후 12번의 '성공한 쿠데타'와 7번의 '실패한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이를 합쳐 평균하면 대략 4년에 한 번 꼴로 쿠데타가 발생한 셈입니다. 애초에 태국 군부는 정치에 깊숙히 개입해왔고, 정치가 혼란에 빠졌을 때 마치 끝판왕(?)처럼 등장하여 모든 상황을 종결시키곤 하였습니다.


 - 이는 마치 터키의 정치와도 비슷해 보이는데, 다만 터키의 쿠데타는 군부가 세속주의를 대표하며 쿠데타 이후 정치권력을 잡지 않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데 비해(이는 현대 터키의 건국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의 유산) 태국은 쿠데타 세력이 직접 정치권력을 잡는다는 차이는 있습니다.


 - 왕실이 있지만 군부가 권력을 독점하는 태국의 정치 지형에서 군부와 왕실은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1992년의 쿠데타에서 잘 드러납니다. 국왕이 민주화세력과 힘을 합쳐 군부를 억누르는 구도가 되었죠. 이 결과 국왕은 태국의 수호자라는 절대적 권위를, 민주화세력은 민주정부를 얻게 됩니다.


 - 그런데 민주정치 하에서 탁신으로 등장하는 포퓰리스트(블로거는 이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로 쓰고 있지 않습니다)의 시대가 열리자, 이를 원치 않는 왕실은 이번에는 군부와 손을 잡게 됩니다. 2006년과 2014년의 쿠데타는 다 푸미폰 국왕의 승인을 통하여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국왕의 승인이 없으면 아무리 강력한 쿠데타라도 한 방에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아시겠지요?


 - 다만 최근의 난장판을 단순히 왕실과 군부의 잘못으로만 돌리기에는 부족한 부분도 있습니다. 탁신은 현재 태국의 하층민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처럼 되어 있지만, 그 자신이 기업가 출신이고 이런저런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있는 등 지도자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탁신에 대한 사면 시도가 대대적인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도 분명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 태국 정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2006년 이후 태국의 보수세력을 지탱하는 것은 푸미폰 국왕 개인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 지지입니다. 국왕에 대한 모독이 과도할 만큼 금지되어 있다거나, 이러한 지지가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은 있지만 어쨌든 국민들이 그를 거의 신급으로 존경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푸미폰은 다시금 절대권력에 가까운 권력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 하지만 이러한 지지가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 푸미폰 국왕은 이미 나이 90을 바라보면서 각종 건강 문제에 시달리고 있으며, 와찌랄롱꼰 왕세자(1952-)는 성격과 사생활 문제, 역시 건강이상 의혹까지 겹쳐 있어 국민들에게 매우 평판이 나쁩니다. 따라서 푸미폰 사후 그의 자녀들이 뒤엉켜 권력투쟁을 벌일 것이라는 전망도 있죠. 이래저래 태국 정치의 민주적 정상화는 아직도 요원해 보입니다.


참고 :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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