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 전쟁의 장기화


 - 1937년 말 일본군의 대규모 상륙전으로 상하이가 함락되고 난징이 위기에 처하자, 장제스의 중국 국민정부는 긴급 회의를 열고 행정부는 충칭으로, 군사위원회와 군사령부는 우한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도 나름 '수도'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난징에는 탕셩즈가 남아 방어작전을 총괄하였지만 그는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막판에 우한으로 도망쳐오고 말았습니다(더 자세한 이야기는 앞의 글 참조)


 - 우한(우창, 한양, 한커우 시가 1927년 통합)은 양쯔강 중하류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이자 군수산업의 중심지로,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중국 정부는 수도를 충칭으로 옮기면서도 군사 부문은 우한에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일본은 중국이 결코 만만하지 않으며 3개월이면 충분하다던 호언장담이 잘못임을 뼈저리게 깨달았고, 최대 요충지인 우한을 점령하면 중국에게 결정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한커우 지역을 향하여 진격하는 일본군 전차부대]


 - 결국 1938년 4월 1일부로 일본은 본국과 식민지에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대규모 병력을 추가 편성하여 전선으로 보냈습니다. 일본군은 40만 가까운 대병력을 우한 공략에 투입했고, 히로히토 덴노는 독가스의 사용을 허가하였습니다. 이런데도 히로히토가 전범이 아니라고? 결국 버티지 못한 중국군은 10월 17일 군사위원회를 충칭으로 철수했고, 10월 27일 우한의 세 지역은 모두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습니다(특이하게도 여기서는 일본군 특유의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고).


 - 하지만 이 과정에서 중국군 주력을 섬멸하는 데 실패하면서 일본군의 계획은 또다시 어긋났습니다. 1938년 11월 장제스는 전쟁의 첫 단계가 끝났음을 선언하고, 징병령을 발동하고 각지 군벌들의 충성을 확인하는 등 장기항전 태세를 확고히 다졌습니다. 중국은 일본의 예상보다 훨씬 굳건하게 버티었고, 이 시점에서 일본은 완전히 수렁에 빠진 신세가 되었습니다.



2. 일본군의 무차별 폭격


 - 이미 전쟁을 중지하기에도 너무 멀리 가버린 일본은, 중국군과 중국 민중에게 최대한 많은 피해를 먹여 전반적인 사기를 꺾고자 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중국 임시수도인 충칭에 화력을 집중하였는데, 우한이 점령되기도 한참 전인 1938년 2월부터 이미 일본군 폭격기는 충칭을 공격하고 있었지만 1939년 초까지 약 1년간은 별로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 충칭은 1년 내내 안개가 심하고, 특히 겨울에는 구름이 끼는 날이 많아 폭격기의 공격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1939년 봄 들어 구름과 안개가 걷히면서 충칭 시가지는 폭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습니다. 1939년 5월 3~4일에 걸쳐 일본군이 충칭에 대규모 폭격을 가했는데, 하필 이 날 월식이 있었고 많은 시민들이 더위를 식힐 겸 월식을 구경하러 밖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일본군의 폭탄을 몸으로 받아냈고, 사망자만 수천 명에 달하는 대참사가 발생하였습니다.


 - 충칭은 그 당시 이미 대도시이긴 했지만, 다른 대도시에 비해서는 비교적 낙후된 곳이었기 때문에 방어태세 역시 부실했습니다. 사람들은 폭격을 피하여 열악한 환경의 방공호로 대피했고 일부 시민은 난징에서처럼 외국 공사관으로 몰려들었는데, 영국 대사관은 무차별 폭격에 함께 휘말렸고 독일 대사관은 피난민에게 문조차 열어주지 않아 수백 명이 몰려드는 인파에 깔려 압사하거나 폭격에 휘말려 타죽었습니다.


[일본군의 소이탄 폭격으로 불바다가 된 충칭 시가지]


 - 일본군의 폭격은 대부분 민간시설과 민간인 거주구역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는 민간인들의 공포를 극대화하고, 전쟁 수행 의지를 감소시켜 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일본군 폭격에 포함된 소이탄(인화성 물질을 잔뜩 포함하여, 화재를 일으켜 피해를 주는 형태의 폭탄)은 충칭 시가지 곳곳에 화재를 일으켜 막심한 피해를 주었습니다. 더구나 이 때까지 동아시아 지역의 건물들은 대부분 목재로 지어져 있었으므로......


 - 충칭으로 진격하던 일본군은 창사 일대에서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고, 일본군이 독가스를 살포하는 등 발악에 가까운 몸부림을 쳤음에도(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가스를 대규모로 사용한 건 일본군이 사실상 유일) 결국 창사를 점령하지 못하고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육지에서의 진격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이와 함께 충칭을 향한 일본군 폭격기의 공습은 한층 더 격렬해졌습니다.


 - 1941년 6월 5일에는 충칭 대공습에서 중요하게 기억되는 또 하나의 대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이 날 5시간에 걸쳐 일본군 폭격기 24대가 공격을 벌였는데, 이를 피해 18제대터널(방공호)로 피신한 다수의 민간인은 터널 입구가 폐쇄된 이후 통풍이 되지 않으면서 대부분 산소부족으로 질식사하고 말았습니다(6·5 대터널 참변). 당시 희생자는 1200명, 최대 4000여 명에 달합니다.




3. 그래도 저항은 계속된다


 - 많은 사람들이 폭탄에 맞아죽거나 무너지는 건물에 압사하고, 소이탄 화재에 타죽거나 질식사하였습니다. 이는 권력이나 돈이 있는 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250여 명의 부자들이 충칭 중국은행 지하실에 피신했다가 건물의 붕괴로 모두 압사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의 옷과 소지품은 역시 폭격으로 모든 것을 잃은 생존자들이 가져다가 써야 했을 정도로 사람들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충칭 대공습을 상징하는 사진. 죽은 사람들의 옷은 생존자들이 벗겨 가져갔다.]


 -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활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폭격이 끝난 이후에는 식당들이 '공후반(공습 후 식사)'이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을 재개했으며, 은행도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많은 상점들에서는 폭탄을 투하하는 폭격기가 그려진 계란을 팔았는데, 여기에는 '도쿄 직송 계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 폭격이 시작되면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도시 내의 모든 차량이 징발되었는데, 이 중에는 최고 권력자 장제스의 개인 리무진도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폭격과 누적되는 피해에도 중국 정부와 군은 점차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해갔고, 대공 방어체계와 방공호 확충이 이루어지며 희생자는 점차 감소하였습니다. 이에 힘입어 충칭 시의 인구는 다시 증가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폭격을 피해 방공호에 모여든 충칭 시민]


 - 충칭에 대한 폭격은 1943년 8월 23일까지 약 5년여간 이어졌으며, 이는 단일 지역에 대한 최장기간 공습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기간동안 공식적으로 집계된 사망자 수는 11889명, 시가지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1만여 채의 가옥이 무너지거나 불타 사라졌습니다. 5년간 일본군의 공습은 218차례 이어졌고 연 9513대의 폭격기가 21593발 가량의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4. 폭격 이후


 - 충칭 대공습은 소이탄이 대규모로 사용된 사실상 첫 사례로, 이미 소이탄 자체는 제1차 세계대전기에 개발되어 있었지만 이것이 도시 공격에 특출난 위력을 보인다는 사실이 이 때 증명됩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교훈은 일본의 적국(敵國)도 똑같이 얻었고, 미국은 이 교훈을 바탕으로 1945년 일본의 도쿄를 폭격하여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 난징 대학살 때만 해도 (심지어 자신들의 군함이 공격당했음에도) 일본에 대한 개입을 자제해온 미국은, 1939년 5월의 대폭격 이후 방침을 바꾸어 비행기 부품 수출금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제재에 들어갔습니다. 양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로를 가상적국으로 간주해 왔고, 일본은 미국의 경제제재가 점차 강력해지자 이를 핑계로 1941년 12월 하와이를 급습하며 태평양전쟁의 문을 활짝 열었고, 그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일본의 사죄와 피해배상을 요구하는 피해자 유족의 시위. 충칭 고급인민법원 앞]


 - 당시의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2004년부터 소송단을 꾸려 일본정부에 사죄와 피해배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006년 일본정부를 상대로 첫 소송을 제기하였고, 이후 다른 지역의 폭격 피해자들도 합세하였습니다. 2015년 2월 도쿄지방법원은 "이 사건에서는 국가에 대한 개인의 청구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당연하게도 원고의 소송을 기각하였습니다. 기사보기



1. 배경 : 일본군의 허난성 침입


 - 중일전쟁의 시작점인 베이핑(베이징)-톈진 방어선은 1937년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9월부터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남하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허난성 최북단 안양을 점령하며 허난성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화북 방면 총사령관은 군벌 출신 펑위샹(1882-1948)이었는데, 그가 지휘하는 병력은 40만 명에 달했지만 이들은 사실상 군벌들의 집합체인 오합지졸에 가까웠기 때문에 37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 주력의 공격을 저지할 수 없었습니다.


[허난성의 위치]


 - 한푸쥐(1890-1938), 쑹저위안(1885-1940) 등 휘하 군벌들이 잇따라 도망치는 등 졸전 끝에 산둥성 대부분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장제스는 펑위샹을 해임하고 한푸쥐 등 적전도주와 부정부패를 일삼은 군벌들을 싸그리 체포하여 처형하는 강수를 두어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하였습니다. 한편 황하 북쪽을 대부분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군의 보급선을 단절하기 위해, 간선철도의 교차지점인 정저우(허난성)와 쉬저우(장쑤성)를 다음 목표로 잡았습니다.


 - 일본군은 먼저 쉬저우로 진격하였지만, 쉬저우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타이얼좡(산둥성 최남단)에서 1938년 3~4월에 걸쳐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을 맞고 후퇴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타이얼좡 전투). 흐름을 꺾인 일본군은 이 쪽을 담당한 북지나방면군 사령관을 왕족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1887-1990)로 교체하였고, 그의 지휘하에 일본군은 중국군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 상하이 전투에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장제스는 쉬저우 일대의 병력에 체계적인 철수 명령을 내렸고, 후퇴하는 중국군을 포위섬멸하고자 한 일본군의 작전은 지휘관들이 공적을 놓고 갈등하느라 협조체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일본군은 중국군이 철수한 쉬저우를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1938년 5월 19일).


 - 한편 정저우 방면으로 진격한 일본군 제14사단은 정저우의 길목이자 과거 북송의 수도이기도 한 카이펑을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중국군에 포위당했고, 인근 제16사단의 지원을 받고서야 간신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제14, 제16사단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카이펑을 다시 공격, 6월 6일 카이펑을 함락시켰습니다. 카이펑을 넘어 정저우로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막아내기 위해, 장제스는 인근의 황하 제방을 무너뜨려 수공(水攻)을 벌이기로 결정합니다.



2. 대재앙으로 번진 수공


 - 국민혁명군 제53군 1단은 정저우 인근 화위안커우(花園口)의 황하 제방을 파괴하는 작업을 벌여, 6월 9일 제방 일부를 터뜨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황하는 천정천(주변 땅보다 강바닥이 더 높은 곳에 있는 하천)이기 때문에, 뚫린 제방을 넘어선 강물은 걷잡을 수 없이 주변 평야지대로 쏟아집니다. 황하의 물살은 정저우에서 카이펑에 이르는 지역을 침수시켰고, 이 곳에 있던 일본군 제14, 제16사단은 차오르는 홍수에 그대로 휩쓸렸습니다.


[홍수에 휩쓸린 일본군 전차부대]


 - 장제스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은 대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6월 10일 황하 상류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사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불어난 물 때문에 제방 붕괴가 확대되면서, 계산을 훨씬 뛰어넘는 양의 강물이 평야지대로 넘쳐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홍수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허난성 동부는 물론이고 동남쪽의 안후이성, 장쑤성으로 계속 퍼져 나갔습니다. 수천 km에 달하는 평야지대에서 넘치는 물을 막을 장애물은 없었습니다.


 - 중국은 애초에 작전지역인 화위안커우 인근 지역에만 홍수경보를 내리고, 나머지 지역에는 아무 경보도 내리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결국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수많은 주민들이 난데없이 들이닥친 물벼락에 그대로 휩쓸려 죽어갔습니다. 이 홍수로 사망자만 최소 9만, 최대 89만 명이 발생하였으며 이재민은 1250만 명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황하의 흐름은 남쪽으로 바뀌어, 회하와 양쯔강 하구 쪽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1947년 제방 복구와 함께 원상복귀).


 - 하지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허난성은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피해복구는 꿈도 꾸지 못했고, 이는 4년 후 벌어지는 훨씬 더 큰 재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3. 대기근, 지옥도가 열리다


 - 전쟁과 홍수 피해가 누적되어 허난성 일대의 경지면적은 이전의 1/3 가까이로 줄어든 상태였지만, 전쟁과 부정부패, 행정력 미비라는 복합적인 문제가 피해복구를 계속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1942년 봄부터 비가 거의 내리지 않을 정도의 가뭄이 시작되고, 가뜩이나 피폐할대로 피폐한 이 지역에 극심한 기근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 농민들은 봄과 여름 내내 하늘만 쳐다보았지만 비는 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빗방울 대신 가을 하늘을 채운 것은 다름아닌 메뚜기떼. 그나마 남아있던 것들을 메뚜기떼가 죄다 쓸어가면서 허난성은 생지옥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량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산나물과 풀을 뜯어먹기 시작했고, 산나물이 사라지자 나무껍질을 벗겨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마저도 곧 바닥을 드러냅니다.


[나무껍질을 벗기고 있는 가족]


 - 사람들은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닥치는대로 찾기 시작했고, 기러기 똥이 절찬리에 식용으로 쓰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소화가 덜 된 곡식 종자가 있어 그나마 영양을 보충할 수 있었다고). 혹은 땅을 파서 관음토(일종의 백색토)를 파먹기도 했는데, 당장의 허기는 채울 수 있지만 당연히 열량도 없고 소화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흙을 계속 먹는 사람들은 소화기에 장애를 일으키고 나중에는 점점 죽어갔습니다.


 - 이런 참상 속에서 도대체 중국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나름 20세기 중반인데, 중국 정부가 이 지역을 구휼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 만연한 관료주의와 부정부패가 허난성 주민에 대한 지원을 가로막았습니다. 허난성 정부의 관료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책임을 회피하거나 전가하기 바빴고, 상부의 추궁을 피하고자 피해상황을 무시하거나 축소 보고하였습니다.


 - 쉬창(허창) 지역의 경우 5만여 명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하였다고 성 정부에 보고하였는데, 이조차 축소 의혹이 있었음에도 성에서는 "왜 이렇게 많이 보고하였는가"를 이유로 보고서를 반려해 버릴 정도였습니다. 이런 마당에 제대로 된 구휼체계가 돌아갔을 턱이 없습니다. 당시 허난성 일대를 취재한 후 장제스를 만난 저널리스트 테오도르 화이트(1915-1986)가 허난성의 참상을 전했을 때, 장제스는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 그나마 지원되는 부족한 식량마저도, 태반은 부패한 관료들이나 군벌의 손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결국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인육(人肉)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길거리에 널린 시체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살아있는 사람들까지 죽여서 그 고기를 뜯어먹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극도의 굶주림에 피폐해진 위장은 갑자기 들어오는 고기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렇게 인육을 뜯어먹은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급성 소화질환으로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 가뭄은 1943년 초까지 계속되었고, 그 사이 굶어죽은 사람의 수는 최대 300만 명에 달했습니다.



4. 결말 :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트라우마


 - 장제스와 중국 정부는 기근의 실태를 파악하고서도, 중일전쟁의 분위기에 악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철저한 보도통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실제로 정부의 선전 기사 사이에 허난성 재해의 실태를 짧게 보도한 충칭의 지역 신문 <대공보>가 정부의 탄압으로 무기정간을 당한 사례가 있습니다(그리고 화이트는 이 기사를 목격한 후 허난성 취재를 시작했다고).


 - 자신들의 죽음을 외면한 정부와 군부에 대한 허난성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급기야 1944년 중탸오산 전투에서는 허난성의 농민들이 후퇴하는 중국군 5만 명을 습격하여 무장해제시키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당시 군사령관 탕언보(1900-1954)는 이들을 일제 앞잡이 혹은 반역자로 규정했지만, 그렇게까지 된 사연을 돌이켜보면......


 - 이러한 일련의 실정(失政)으로 장제스에 대한 민중의 신뢰는 최악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반사이익을 얻은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중국 공산당이었습니다. 비록 중일전쟁 발발 이후 힘을 합쳤다지만(제2차 국공합작) 실질적인 연계는 거의 되지 않았고, 공산당은 일본과의 전투를 치르면서도 동시에 농민들의 민심을 얻는 대민전략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수탈에 절망한 농민들은 앞다투어 공산당 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이는 훗날 국공내전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 민심을 완전히 잃은 국민당은 신식 무기를 들고도 공산당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제스는 민중을 외면한 대가를 '중국 대륙의 상실'로 뼈저리게 치렀던 것입니다. 부정부패가 결정적인 패인이었다고 판단한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도망친 이후 강력한 부정부패 처벌과 경제개발그리고 극악의 1인독재을 통하여 자신의 과오를 시정하고자 하였지만, 그런다고 잃어버린 대륙이 돌아오지는 않았으니 엎질러진 물.


 - 예전 수천년간 중국의 중심이었던 허난성 일대는, 중일전쟁 당시의 피해를 지금까지도 완전히 복구하지 못한 채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중일전쟁기 덧씌워진 반역자의 이미지, 그리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타 지역으로 이주하여 일하는 허난 출신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편견이 겹쳐 중국 내에서는 허난 출신자들에 대한 심한 지역차별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는 현대 중국의 큰 사회문제 중 하나라고 합니다.



1. 배경 1 : 상하이 전투


 - 1937년 7월 일본군의 한 병사가 똥 싸느라 늦은 것이 발단이 되어 시작된 중일전쟁은, 8월 초까지만 해도 베이핑(베이징)-톈진 등 북동부 지역에 한정하여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호구이며 우리는 3개월 내에 중국 전체를 털어먹을 수 있다'는 이상한 자신감에 빠져있던 일본군 지도부는, 중국의 수도를 직격할 심산으로 난징(당시 중국의 수도) 코 앞 상하이에 대규모로 상륙하였습니다(상하이 전투, 혹은 제2차 상하이 사변).


 - 하지만 중화민국 지도자 장제스는 상하이를 사수하고자 독일식 훈련을 받은 정예부대를 대규모로 상하이에 때려박았습니다. 또한 일본군 2개 사단이 상륙을 시도한 우쑹 해변에는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1878-1966)과 한스 폰 젝트(1866-1936) 등의 조언에 따라 건설한 강력한 방어시설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중국군의 결사항전에 고전을 거듭했고, 중국 대륙을 정복하겠다던 3개월이 되도록 상하이 하나 점령 못하는 촌극을 연출합니다.


[상하이 전투에서 활약한 중국군 방어진지]


 - 결국 일본군은 교착상태를 끝장내고자 파견 병력을 3배(10만)으로 늘렸고, 이에 대항하여 장제스는 화중-화남 지방의 거의 전병력(80만)을 상하이에 집결시키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쓸데없이 많은 병력을 좁은 공간에 쏟아부은 게 오히려 패착이 되어, 중국군은 10만을 훨씬 넘는 사상자를 냈고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장제스는 10월 26일 전 병력을 철수시켰습니다.


 - 중국군은 3개월간 일본군을 저지하고 큰 피해를 강요하는 성과를 올렸지만, 결국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했으며 방어라인은 무너졌고 독일식 정예병력도 절반 이상 날려먹는 등 방어력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상하이와 인접한 난징을 방어하는 것이 어려울 뿐더러 별 의미도 없다고 판단한 중국 정부는 내륙의 충칭으로 피난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 이 때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끝까지 남아 난징을 지키겠다"고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으니, 군사참의원장 탕셩즈(1889-1970)였습니다.



2. 배경 2 : 난징 전투와 적전도주


[탕셩즈]


 - 중국 정부는 11월 15일 충칭으로 피난하였고, 결사항전을 주장한 탕셩즈는 난징지구 사령관이 되어 남았습니다. 당시 난징은 정부와 함께 피난하려는 난징 시민들과,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피해 난징으로 도망쳐온 외부 주민들이 뒤엉켜 온통 아수라장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상하이에서의 고전으로 광기분기탱천한 일본군은 11월 들어 상하이와 난징 주변의 지역들을 공격하여 말 그대로 '싹쓸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나마 방어병력이 있는 난징으로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 11월 19일 쑤저우에서 학살이 발생하여 35만 인구가 5백 명으로 줄어드는 등, 이미 대학살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탕셩즈와 방어군은 일본군의 학살을 피해 몰려든 피난민들까지 지켜야 했지만, 정부가 피난하고 남은 것은 패잔병 수준의 15만 병력과 형편없이 저질인 지휘관들 뿐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탕셩즈는 방어병력을 난징 성(城)에 집중시키고 도시 밖으로 이어진 교량과 선박도 파괴하는 등, 고립을 자초하는 뻘짓을 벌였습니다.


 - 지나친 확전을 경계한 대본영의 명령까지 씹어먹은 일본군은 외곽의 방어라인을 쓸어버린 후 난징을 포위하고 방어군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날렸는데, 탕셩즈는 이에 "ㅗ"로 화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탕셩즈는 덜컥 겁을 먹었는지 장제스에게 전갈을 보내 후퇴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번에는 장제스가 탕셩즈에게 "ㅗ"를 날려버렸습니다. ㅡㅡ;


 - 일본군의 최후통첩 기한인 12월 10일 오전이 지나자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성곽을 방패삼아 싸우는 중국군은 10만 일본군의 공세를 이틀간 잘 막아냈지만, 12일 오후 일본군이 성문 한 곳을 폭파하는 데 성공하고 독가스까지 사용하면서 중국군을 무력화시켜 최후 방어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난입하는 일본군과 방어하는 중국군의 시가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참모들과 함께 양쯔강을 건너 도망쳐 버렸습니다.


 - 사령관이 사라진 중국군은 와르르 무너져내렸고 15만 명 중 2만 명만 난징을 탈출,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일본군에 잡혀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13일 오전 4시 정부청사 함락을 끝으로 난징은 완전히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 그리고 난징 시내에 남겨진 50만 명 이상의 패잔병, 시민과 피난민들에게는, 지금부터가 본격 인세지옥(人世地獄)의 시작이었습니다.



3. 대학살과 '국제안전지대'


[난징에 입성하는 일본군]


 - 그동안 광기와 살기를 풀파워로 충전한 일본군은 약 6주에 걸쳐 난징에서 피의 폭풍을 일으켰습니다(자세한 학살 내용은 다른 곳에도 많고 너무 잔인하니 이곳에는 가급적 올리지 않기로). 강간이나 총살은 기본이고, 사무라이 전통을 이어온 일본군답게(?) 그들은 전도(戰刀)로 민간인과 포로를 마구 베어제꼈는데 심지어 이를 스포츠 혹은 총검술 훈련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학살에 참여한 한 군인의 일기에는 "심심하던 차에 중국인을 죽여 무료함을 달랜다"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 당시 난징의 일본군, 아니 일본 전체가 얼마나 미친 상태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100인 참수 경쟁이었는데, 두 명의 일본군 초급장교가 '누가 더 빨리 중국인의 목을 베는가'를 주제로 시합을 벌였고 언론은 이를 중계하여 신문으로 보도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람 죽이기로 시합을 벌인 놈들도 미친 놈들이거니와, 이를 자랑스럽게 자국 언론에 중계했다는 것으로 당시 일본 사회 전체가 얼마나 미쳐돌아갔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신문기사. "100인 참수 초기록" 무카이 106-105 노다 / 양 소위 거기에 연장전]


 - 물론 당시 난징에는 외국인도 다수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구역에 최대한 많은 중국인을 받아들여 학살의 희생자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 노력의 중심에는 독일 나치 당원이자 지멘스 중국지부에서 근무하던 욘 라베(1882-1950)가 있었는데, 라베는 자신의 나치 당적(나치 독일은 당시 일본의 동맹이었으므로)을 내세워 자기 집과 그 일대 구역에서 중국인들을 보호하였습니다. 비록 효과적인 보호는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수백 명의 중국인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 그를 따라 많은 외국인 선교사와 기업인, 외교관들이 대사관, 학교 등지를 확보하고 많은 중국인들을 수용하였는데 이 구역을 '국제안전지대'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비무장인 외국인들이 일본군의 발광(發狂)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일본군은 수시로 안전지대를 침범하여 강간과 살육을 자행하곤 했습니다. 그래도 난징의 중국인에게는 불완전하나마 국제안전지대만이 살 길이었고, 약 20~30만 명의 중국인이 국제안전지대로 몰려들어 학살을 피했습니다.


 - 그리고 결국 구원받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중국인은, 중국 정부 추산 30만여 명에 달합니다.



4. 뒷이야기


 - 당시 일본군은 중국인 학살에 정신이 팔려 있었는지, 자국민을 싣고 양쯔강을 통해 철수하던 미국과 영국 소속 초계함들을 공격하여 한 척을 침몰시켜 버렸습니다(파나이 호 사건). 충칭으로 도망친 장제스는 이 사건으로 미국과 영국이 발끈하여 일본의 발목을 잡아주기를 기대했지만, 아직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던 두 나라는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들여 발을 빼버리고 말았습니다. ㅡㅡ;


 - 전쟁이 끝난 이후 1946~47년에 걸쳐 '난징 전범재판'이 열렸고, 학살의 중심에 있었던 제6사단의 사단장 타니 히사오(1882-1947), 100인 참수 경쟁의 두 주인공 무카이 도시아키(1912-1948)와 노다 츠요시(1912-1948) 등 다수의 전쟁범죄자들이 처형되었습니다. 무카이와 노다는 "그런 일 없었다"고 발뺌하였지만, 위의 신문기사가 증거로 제출되자 "이건 왜곡이다"라고 발악하면서 죽어갔다고.


 - 도망자 탕셩즈는 우한까지 달아나는 데는 성공했지만 분노한 장제스에 의해 모든 직책과 권력을 빼앗겼고, 종전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습니다. 이후 그는 국공내전 때 공산당으로 전향하여 후난 성 부주석을 역임하는 등 잘나갔으나, 문화대혁명 때 숙청되어 홍위병에게 갖은 고초를 겪었으며 81세로 병사(病死)하였습니다.


 - 욘 라베는 학살 직후 히틀러에게 "학살을 멈출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동맹국을 건드리기 싫었던 히틀러와 나치 정부에게 무시당하고 오히려 비밀경찰에게 감금당하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다만 학살의 증거자료를 보전하는 것은 허가받았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때까지 지멘스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종전 후 나치 당적 때문에 체포당하였습니다. 비록 재판에서 무죄함을 입증받아 석방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재산을 날리고 건강까지 해친 라베에게 중국인들은 성금을 모아 지원을 해 주었다고 하는군요.


 - 종전 후 이 사건에 대한 중국(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모두) 정부에서는 난징 대학살에 대한 피해배상 요구를 실질적으로 포기해 버립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다나카 가쿠에이(1918-1993) 총리에게 마오쩌둥 주석이 "우리가 승전국이니 피해배상 따위는 요구하지 않겠다"는 만행소리를 하는 바람에, 희생자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은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ㅡㅡ; 실제로 당시 난징에서는 격렬한 반대시위가 벌어졌고, 중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는 것으로 답했습니다.


 - 중국 정부가 난징 대학살을 제대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마오쩌둥 사후의 일입니다. 난징 대학살 기념관이 1985년에야 건립되었을 정도. 최근 들어 일본의 우경화와 중국-일본 관계악화 등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난징 대학살을 전면에 내세우는 경향이 있는데, 2014년 1월에는 대학살 사건 관련 기밀문서를 공개하였고 이후 사건 관련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하여 2015년 10월 마침내 등재되기에 이릅니다. 일본은 당연히 길길이 날뛰었지만......


[난징 대학살 기념관]




- <ハイサイおじさん(하이사이 오지상)>은 오키나와 출신 싱어송라이터 키나 쇼키치(喜納昌吉)의 데뷔작으로, 1977년 발표 이후 일본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며 '우치나(오키나와) 팝'의 선두주자로 인정받게 된 노래입니다. 오키나와 전통음악 특유의 '류큐 5음계(도-미-파-솔-시)'를 사용하고 있으며, 표제의 의미는 '안녕하세요('하이사이'는 오키나와 어 인사말) 아저씨' 정도의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 전체적으로 흥겨운 곡조를 띤 이 노래는 어느 소년과 아저씨가 실없는 농을 주고받는 내용의 가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작자는 이 노래에 얽힌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 오키나와 출신인 작자의 집 옆에는 오키나와 전투 때 충격을 받고 정신 이상이 된 아주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정신 착란을 일으켜 자신의 어린 딸을 목졸라 죽이고 그 시신을 냄비에 넣어 요리를 하고 있었더랍니다. 이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발견되면서 마을 전체가 뒤집어졌고, 그 아주머니는 어딘가로 끌려갔으며(아마도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것으로 추정) 아주머니의 남편이 이 광경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아 정신 이상이 되어버렸다고 하지요.

 - 이후 그 남편은 옆집에 계속 살면서 작자의 집에 술을 얻어먹으러 오곤 했는데, 딱한 사연을 알고 있던 작자의 집안에서 그 남편을 잘 챙겨주었다고 합니다. 가사는 이 때 소년이었던 작자 자신과 술을 얻어먹으러 온 그 옆집 아저씨와의 대화였던 것입니다. 그저 흥겹고 신나기만 한 이 노래에는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트라우마, 그리고 이를 잊지 못하지만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던 지금까지의 역사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
1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昨夜(ゆうび)ぬ三合ビン小(ぐゎ) 残(ぬく)とんな
残(ぬく)とら我(わ)んに 分(わ)きらんな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三合ビンぬあたいし 我(わ)んにんかい
残(ぬく)とんで言ゆんな いぇー童(わらばー)
あんせおじさん 三合ビンし不足(ふずく)やみせぇーら
一升(いっす)ビン我(わ)んに 呉(くぃ)みせーみ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夕べの三合ビンは残っとるかぁ~?
残っとったらワレに分けてくれんかぁ~。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三合ビンの量をワシに
残っとるか聞いとんのかい。えィ小僧

小僧:
あのなぁ、おじさん。三合ビンで不足ちゅうなら
一升ビンをワレくれるとでも言うんなぁ~ 

2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年頃(とぅしぐる)なたくと 妻(とぅむ)小(ぐゎ)ふさぬ
うんじゅが汝(いやー)ん子(ぐわ)や  呉(くぃ)みそうらに
ありー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汝(いやー)や童(わらばー)ぬ くさぶっくいて
妻(とぅむ)小(ぐゎ)とめゆんな  いぇー童(わらばー)
あんせおじさん 二十や余て三十過ぎて
白髪(しらぎ)かみてから 妻(とぅむ)とめゆみ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年頃だで女房が欲しいんだけど
おじさんの娘をくれないかい?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小僧の癖しやがって
女房を娶ろうってか、えィ小僧

小僧:
それならおじさん。二十三十過ぎて
白髪になって女房を娶れってか。

3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カンパチ まぎさよい
みーみじカンパチ 台湾はぎ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頭(ちぶる)んはぎとし 出来やーど
我(わ)ったー元祖(ぐゎんすん)ん むる出来やー
あんせおじさん 我(わ)んにん整形しみやーい
あまくまカンパチ 植(い)いゆがや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ハゲはデッカイねぇ
ミミズハゲだど 台湾ハゲ~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禿とるもんは出来がええのよ。
うちの先祖もものすごう出来が良い。

小僧:
そんならおじさん。ワレも整形してみるわ
あっちこっち、ハゲをこさえてやろうかよ

4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ヒジ小(ぐゎ)ぬ をかさよい
天井(てぃんじょ)ぬいぇんちゅぬ ヒジどやる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汝(いやー)やヒジヒジ笑ゆしが
ヒジ小(ぐゎ)ぬあしがる むてゆんど
あんせんおじさん 我(わ)んにん負きらん明日(あちゃー)から
いぇんちゅぬヒジ小(ぐゎ) 立てゆがや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の髭っておかしいわ。
天井ネズミの髭みたいやなぁ~。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お前は髭を笑うけど、
髭があるからモテるんよ。

小僧:
あのなおじさん。ワレも負けとれん明日からは
ネズミ髭でも生やしょうわい。

5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昨日ぬ女郎(じゅり)小(ぐゎ)ぬ 香(か)ばさよい
うんじゅん一度 めんそーれー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辻、中島、渡地とぅ
おじさんやあまぬ 株主ど
あんせんおじさん毎日(めーなち)あまにくまとして
(※)
我(わ)んねー貧乏(ひんすー)や たきちきゆみ 

※我んねちゅらーさよーがりゆさ(わたしゃはきれいに痩せるわね)
 汝やちゅらーくよーがりゆさ  (おまえさんきれーに痩せられるさ)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ゆんべのお女郎はかぐわしかぁ~。
あんたも一度はやっかいになったら?。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おじさんは辻、中島、渡地(遊郭地)の大旦那よ。

小僧:
そんならおじさん。毎日遊郭にいりびたり
ワレも貧乏なってみようかい?
============================================
##의미가 궁금하신 분께서는 이곳의 댓글을 참고하세요.##

 - 이 노래는 오키나와 인들에게는 자신들을 상징하는 노래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시엔 야구 대회에서 오키나와 지역 학교의 응원단이 줄곧 이 노래를 응원가로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오키나와 지역은 1972년 다시 일본 영토로 바뀌어 현재에 이릅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현재, 오키나와는 순조롭게 일본의 일부로 녹아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글쎄, 2010년대에 와서도 오키나와 현이 일본의 많은 도도부현 중에서 가장 가난하고, 실업률도 가장 높은 지역으로 남아 있으며, 주일미군 문제에 있어서 오키나와 섬이 계속 독박을 쓰고 있는 상황임을 생각하면 딱히 나아진 것이 있는가 싶기도 합니다.


 - 오키나와 인의 자기 정체성은 상당히 미묘합니다. 현재 시점에서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일본인임을 인정하지만(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오키나와인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한 상당수), 오키나와 출신의 가수들은 방송에서 기미가요(일본의 국가(國歌))를 부르지 않으며 간혹 부르는 사람은 오키나와 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오키나와를 방문한 황태자(現 히로히토 천황)에 대한 테러사건이 일어난 적도 있습니다. 이곳에는 (비록 당세는 크지 않지만) '류큐 독립당'이 활동하고 있으며 상당수의 주민이 오키나와 독립을 지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 일본 반환 이후 오키나와 지역의 핵심 과제는 미군기지의 이전 문제입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현 전체 면적의 19%를 차지하는 미군기지를 현 밖으로 이전할 것을 꾸준히 요구해 왔고, 일본 정부는 이를 묵살하다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야 간신히 이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정권은 다시 자민당에게 넘어갔고, 모든 것은 다시 원위치로......


 - 결국 자민당 소속인 현지사(한국으로 치면 도지사)가 일본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기지를 현 내부로 이전할 것을 추진하자, 오키나와 주민들은 2014년의 지사 선거에서 반대파인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 후보를 상당히 큰 표차로 선출하기에 이릅니다. 다만 이 문제는 현지사에게 그리 큰 권한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도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상태로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중.


 - 미군 기지가 현내로 이전할 경우 후보지는 오키나와 섬 중부의 헤노코 해변인데, 이 곳에서는 기지 이전 반대시위가 2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위측에서는 아예 반대시위를 관광상품(!!!)으로 만들어서, '헤노코 시위현장 방문 코스'라든지 '반대구호 부착을 조건으로 한 무료 카누 체험'이라든지 하는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고...... 헤노코의 투쟁은 현재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진행되고 있는 해군기지 반대 투쟁에도 참고가 되고 있다는 뒷이야기 또한 있습니다.


 - 흥미롭게도 정치적 여론이나 지형에 있어서 오키나와 현 내에서도 오키나와 본섬과 주변 섬 지역간의 차이는 상당히 큽니다. 앞에서 말한 '인두세' 등의 역사적 문제, 그리고 오키나와 전투에서 본섬 외에는 대량학살이 발생한 곳이 없었다는 사정이 더해져 두 지역간의 정치적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본섬을 제외한 곳에서는 현재도 자민당이 강세이며, 오키나와 전투에 대하여도 일본 본토에 상당히 우호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경향을 보입니다. 심지어 <새역모>의 극우 성향 교과서를 채택한 곳이 있을 정도.


 - 이것만 해도 오키나와의 사정은 상당히 복잡한데, 최근에는 조어도(센카쿠 열도) 문제와 관련하여 난데없이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서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중국의 주장은 오키나와 주민들조차도 철저히 무시할 정도로 언어도단이긴 하지만, 중국이 내세우는 이유라는 게 류큐 왕국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번속국(藩屬國)이었다는 것이니 오키나와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오히려 살펴볼 필요가 있는 주장이기는 합니다. 이 논리가 발전하면 과거 중국과 조공무역을 하던 주변의 모든 국가에 대한 정치적 압력 행사로 이어질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 오키나와의 역사는 그곳에 사람이 사는 이상 계속 이어질 겁니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역사에 주민들이 그토록 원하는 '평화'라는 두 글자가 새겨질 날은 과연 언제쯤에나 찾아올까요. 그들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 현재의 착취자가 사라지면 그래도 무언가 나아질 거라며 실낱같은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 하지만 그것이 단지 누가 그들을 착취하느냐의 차이였을 뿐임은 머지 않아 드러납니다. 일단 본섬 외의 주민들에게 징수하던 인두세는 류큐 처분 이후에도 1900년대까지 그대로 존속됩니다. 새로운 착취자인 일본 정부는, 수백 년간 유지된 주요 수입원을 하루아침에 포기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 한편 본섬과 주변 지역을 막론하고 실시된 것이 바로 가혹할 정도의 동화정책, 아니 '문화 말살' 정책입니다. 전통적인 류큐 언어의 사용은 금지되었고, 그 자리에 표준 일본어의 사용을 강제합니다. 학교에서는 철저한 '황국신민'화 교육이 이루어졌고, 왕성인 슈리성(首里城)을 비롯한 류큐 왕국의 흔적은 방치되고 파괴되어 유명무실해집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식 성씨로의 '창씨개명'을 강요당합니다.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지요? 이로부터 수십 년 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키나와 지배는 일본에게는 식민 지배의 연습장이었던 셈입니다.


 - 명목상 일본 내 행정구역, 실질적 식민지, 오키나와의 여러 섬과 그곳의 주민들에게도 제2차 세계대전의 폭풍은 어김없이 불어닥칩니다.


 - 미국에게 강력한 선빵(진주만 공습)을 한 방 날린 일본군은 잠시간 잘 나가는 듯 보였지만, 본격적인 전쟁모드로 돌입한 미군에게 압도적으로 밀리기 시작하며 태평양 절반을 차지한 판도를 급속도로 잃어갔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다시피하던 일본 군부는 전황이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나서야 자신들이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고, 이 이후로 일본의 지상과제는 '어떠한 피해도 감수하고 천황(과 지배계급)의 자리를 보전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군은 자신들의 피해는 상관없이 연합군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하고, 연합군의 전쟁 수행 의지를 최대한 꺾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됩니다.


 - 이를 위하여 일본군은 본토와 주변의 주요 점령지를 온통 난공불락의 요새로 바꾸어갔고, 몇 년간 일본군을 '사냥'해오던 연합군은 오가사와라 제도의 최남단에 있는 이오지마 섬에서 처음으로 엄청난 피해를 강요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연합군의 피해가 커질지언정 승패에는 변동이 없었고, 연합군의 다음 목표가 된 곳이 바로 오키나와 본섬이었습니다. 물론 이곳은 이미 일본군과 주민의 강제동원으로 섬 전체(특히 인구가 밀집한 남부지역)가 요새화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 일본군과 주민들은 섬 곳곳에 파놓은 동굴 속에 틀어박혀 있었고 해안 방어는 사실상 포기 상태였던지라, 매우 순조롭게 상륙할 수 있었던 연합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이 섬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전에는 점령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항복하느니 자결할 것을 '사실상' 강요하고, 이들을 일회용 자살병기로 써먹기까지 하였습니다. 임산부에게 폭탄을 짊어지고 연합군에게 자살돌격하도록 한다거나......


 - 일본의 철저한 세뇌교육은 일본군과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연합군에 항복했다간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살해당한다'는 인식을 심어놓았고, 이들에게 정서적으로 항복할래야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섬 곳곳에서 학살 뿐만 아니라 집단 자살도 예사로 벌어집니다. 주민들은 연합군이 들이닥치는 상황에서 더 버틸 수 없게 되면 '명예롭게 죽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 자신 또한 죽어갔습니다.


 - 연합군은 곳곳에 산재한 참호와 동굴을 점령하기 위해 화염방사기와 독한 연막탄까지 동원해야 했고, 결국 일본군의 모든 은신처를 파괴하고 섬을 완전히 점령하는 데는 거의 3개월이 걸렸습니다. 그 기간 동안 연합군의 사망자는 약 1만2천명, 일본군 사망자는 6만5천명(미국측 추산), 오키나와 주민 사망자는 12만명(일본측 추산)에 달했습니다. 당시 오키나와 인구는 약 3~40만명 정도였습니다.


 - 다수의 일본군과 자신들의 식민지를 희생하는 대가로 일본은 그들의 목표를 상당 부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예상을 초월하는 피해규모에 질려 다음 계획이었던 본토 침공 작전을 사실상 포기했고, 이는 두 개의 원자폭탄으로 대체됩니다. 20만명의 사망자와 이를 능가하는 방사능 피폭자를 더한 끝에 일본은 항복했고, 히로히토 천황(과 상당수의 지배계급)은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였으며, 인구의 1/3이 사망한 오키나와는 그대로 미국의 식민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 미국은 전략적 요충지인 오키나와 섬 전체를 미군 기지로 만들어갔습니다. 일본군에게 자결을 강요당하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이제 미군에게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고, 미군 전투기의 비행 소음을 매일같이 듣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을 거치며 미군기지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한반도와 베트남을 폭격하는 비행기들은 대부분 오키나와에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인들은 자신들을 죽이는 악마의 비행기가 날아오는 오키나와를 '악마의 섬'이라 부르며 치를 떨었고, 이 말을 듣는 오키나와 주민들은 '우리는 악마가 되기 싫다'며 마찬가지로 치를 떨었습니다.


 -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과 미국의 합의에 따라 다시 일본에게 '반환'되었습니다. 우측통행이 좌측통행으로 바뀐다거나 하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한 가지, 섬의 미군기지만큼은 떠나는 일 없이 그대로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소위 '오키나와 반환'이란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는 그저 지배자가 바뀐 것, 아니 어쩌면 지배자가 둘이 된 것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계속)



 면적

 2,276.49 ㎢

 인구

 1,416,587 명 (2013. 10. 1.) 

 현청소재지

 나하 시 


 - 오키나와(沖縄) 현은 일본 남부의 류큐(流球) 제도의 섬들로 이루어진 일본의 지역입니다. 전체적으로 일본 본토보다는 오히려 타이완 섬 쪽에 더 가까이 붙어 있으며,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하여 북쪽으로 올라오는 태풍의 주요 통과지점이기도 합니다(아마 여름철 태풍예보에서 "지금 태풍의 위치는 오키나와 남동쪽~"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일본 본토와는 조금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본 내외에서 관광지로 각광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 '독자적인 문화'라는 데서 짐작이 가능하지만, 오키나와는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에는 일본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가가 공식적으로는 1879년, 비공식적으로는 1609년까지 존속했습니다. 류큐 왕국은 그 이전 시대에 3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류큐 섬이 쇼(尙) 씨가 지배하는 추잔(中山) 지역을 중심으로 통일되면서 성립되었고, 초기 불안정한 시대를 지나 16세기경에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고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동아시아 각국과 활발한 교역을 하는 등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 하지만 그 전성기는 별로 길지 못해서, 16세기 후반 명,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나라들이 동아시아 무역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이 작은 나라는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은 1609년 일본 본토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사쓰마 번(지금의 가고시마 현)의 군대가 침략하는 것을 막지 못하여 일본(정확히는 사쓰마 번)의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 다만 사쓰마 번은 류큐 왕국을 '멸망'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직후 중국으로의 조공이 막혀 곤란에 처해 있던 일본은, 역시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던 류큐를 이용하여 중국과 간접적으로 조공 무역을 할 요량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중국산 사치품은 일본 지배계급을 회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고, 일본은 류큐가 조공을 통해 사치품을 확보하면 이를 가로채는 방법으로 수요를 해결했습니다.


 - 류큐의 이점은 또 있었는데,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 중에서 사탕수수 농업이 가능한 사실상 유일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을 확보하면 설탕의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동아시아 지역에서 (당시로서는 사치품인) 설탕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이를 통해 류큐를 직접 통제하는 사쓰마 번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이것이 유신시대 사쓰마가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보기도 합니다).


 - 류큐는 일본의 사탕수수+사치품 셔틀로 전락하게 되었고, 일본 본토의 착취와 무역 금지로 인해 경제적으로 파탄지경에 빠진 류큐 왕조는 결국 '세금'을 통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데, 류큐 왕조는 류큐 본섬 이외 주변의 다른 섬들(북부의 아마미 제도는 아예 사쓰마 번에 편입당했으니 빼고)를 더 가혹하게 착취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게 되죠. 다단계 착취......쯤 되려나?


 - 이들 섬들(야에야마라든지, 구메지마라든지 하는 지역)에 류큐 왕조는 '인두세'를 매깁니다. 즉 사람 수대로 세금을 매긴 것인데, 이 세금이 가혹했던데다가 경제적 능력이 없는 어린이나 노인에게까지 인두세가 매겨지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이들 지역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래서 이들 지역에서는 세금이 매겨지는 사람의 머릿수를 줄여가며 발버둥을 치게 됩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불필요한 사람을 죽이는(!!!) 방식으로 세금을 줄인 거죠.


 - 이런 '독립국이지만 독립국이 아닌' 상태가 이백 년 이상 지속되다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 드라이브를 밟고 있던 일본이 이 틀을 깨뜨리게 되었습니다. 서양 열강과 대등한 수준을 목표로 하던 일본은 내부의 문제가 해결되자 본격적으로 주변 지역의 식민 지배를 꿈꾸게 되었고, 그 테스트 무대로 이미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류큐를 선택한 것입니다. 어쨌든 명목상 류큐는 중국과 일본에 이중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기 때문에,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일본은 두 단계에 걸쳐 류큐를 멸망시킵니다. 이를 '류큐 처분'이라 합니다.


 - 1차 류큐 처분은 1872년, 류큐를 일본의 일개 번(藩, 영주가 통치하는 행정구역)으로 격하시키고, 류큐 왕을 '류큐번왕'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얼마 후 타이완 섬에서 류큐 주민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지자 일본에서는 이를 핑계로 군대를 출병시켰는데, 중국에서 타이완 침공에 대응하는 것 이외에 류큐에는 별 관심이 없음을 확인한 일본 정부는 1879년, 류큐 번을 폐지하고 (잠시 가고시마 현에 편입했다가)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여 완전히 일본의 일부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2차 류큐 처분입니다.


 - 당시 류큐 처분에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은 엉뚱하게도 미국이었는데, 이전에 함포외교를 통해 류큐를 강제개항시킨 바 있는 미국에서는 율리시스 그랜트 전(前) 대통령을 중국으로 파견하여 이를 막아보려 노력하지만 정작 중국의 실권자 이홍장은 여기에 별 관심이 없었고, 류큐의 일본 편입은 어영부영 확고한 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 흥미롭게도, 류큐 처분에 대하여 류큐 본섬 이외의 지역은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상술했다시피 류큐 왕조에서 강요하는 '인두세'가 이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했고, 이들의 노력이란 세금 명세서나 다름없는 사람 수를 줄이기 위해 임산부를 죽인다거나 할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기 때문에 지배자가 바뀌는 것을 환영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은 합니다. 적어도 인두세를 낼 필요는 없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 과연 이들의 작은 소망은 실현될 수 있었을까요? 오키나와의 끔찍한 역사가 이제 시작에 불과했음은, 시간이 지나며 명백해지게 됩니다......(계속)


최근 일본에서는 한 정치가의 기자회견이 화제입니다. 노노무라 류타로(野々村竜太郎) 효고현 의원의 기자회견인데, 그는 최근 약 300만 엔 정도의 공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이 300만 엔은 공무활동비 명목으로, 주로 교통비 등으로 사용했다고 보고했지만 모 온천에 다녀온 게 100회를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영수증이나 다른 상세한 활동보고도 없어서 논란이 되고 있지요. 이와 관련하여 그는 기자들을 불러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기자회견에서 노노무라 의원은 괴성을 지르며 통곡하는 모습을 보이며 전 일본인의 어이를 뒤집어놓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현 의원이 되었다" "여러분이 날 뽑아줘서 내가 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등의 발언을 쏟아냈지만, 정작 공금유용 의혹에 대하여는 제대로 된 해명을 하지 않았고(...) 결국 천하에 웃음거리만 되고 말았죠.


기자회견 영상의 임팩트가 워낙 강렬한지라 그는 단숨에 일본의 합성 필수요소로 등극하게 되는데...


감동적인 버전


노노무라의 숲


F1 버전


기타 연주(...)


피아노 연주(...)


기타, 바이올린, 피아노 합주 버전(......)


이게 한국에도 알려지고, 한국에서는 그러잖아도 최근에 정치인 필수요소가 등장했던지라...



(...)


실제로 한국에서는 '일본판 고승덕'으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애비메탈(...) 패러디 곡을 올린 뮤지션이 노노무라 의원 영상을 가지고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올리기도 했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