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 : 비엔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98. 지휘 :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


Franz Lehar (1870-1948)

Waltz <Gold und Silber> Op. 79


 - 프란츠 레하르는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헝가리계 작곡가로, 헝가리식 이름은 '레하르 페렌츠(Lehár Ferenc)'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코마롬에서 출생하였고, 헝가리계인 아버지는 군악대에서 지휘자로 근무했습니다. 프라하 음악원에서 안토닌 베네비츠(1833-1926)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이 때 안토닌 드보르자크를 만나 작곡에 도전해 볼 것을 권유받았지만 당시 음악원 규정상 연주와 작곡을 함께 전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규정에 따르면서 작곡을 독학해야 했습니다.


 - 1888년 음악원 졸업 후 레하르는 아버지의 악단에 부지휘자로 합류하여 음악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2년 후에는 최연소로 정식 밴드마스터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육군 쪽에서 활동하던 그는 중간에 잠시 해군으로 옮겼고, 이 때 첫 번째 오페라를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다시 육군으로 옮겨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 1905년 초연한 오페레타 <메리 위도우(유쾌한 미망인)>가 큰 호평을 받으며 레하르는 인기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후 그는 비엔나로 거처를 옮겼고, 오페레타 작곡 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레하르는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비엔나의 오페레타 작곡가로 입지를 굳혔고, 큰 명성과 그에 걸맞는 부를 함께 거머쥐게 됩니다. 이 시기 그는 오페레타 뿐 아니라 왈츠, 교향곡 등의 기악곡 또한 다수 작곡하였습니다.


 - 승승장구하던 레하르도 1930~40년대를 풍미한 나치의 격동기를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출신이 헝가리계였고 심지어 부인은 개종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의 핍박을 받을 처지였지만, 히틀러가 그의 작품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ㅡㅡ; 그는 일단 나치의 탄압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나치에 협력하는 모습은 보여야 했기 때문에 그는 히틀러 50세 생일 기념 음악회를 주도한다거나 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 그 와중에 그는 자기 주변에 있던 유대계 인사들을 인종청소로부터 보호하고자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나치의 인종청소가 강화되자 그는 자기 아내와 함께 스위스로 망명, 취리히에 머물게 됩니다. 그는 금방 비엔나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했지만 망명지에서 자기 아내가 사망하고 유대계 친구들이 학살당한 사실을 알게 되자, 비엔나 복귀를 포기하고 종전 후 잘츠부르크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습니다.


 - <금과 은>은 1902년 작곡되었으며, 메테르니히 공주가 주최한 '금과 은' 무도회의 음악으로 위촉받아 만들었습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일족의 전통을 따르라는 주문에 레하르는 자기 고유의 색깔을 더해 작품을 썼고, 많은 인기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여담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말년의 레하르는 "새로 왈츠를 쓰게 된다면 '금과 은' 정도는 어림도 없으니 <우라늄과 원자폭탄> 이라고 이름을 붙여 볼까?"라는 개드립 농담을 한 적이 있다는군요.



Ivo Josipović (1957-)

<Samba da Camera>



 - 요시포비치는 크로아티아의 작곡가, 법학자 겸 정치인ㅡㅡ;입니다. 작곡가나 법학자로서의 업적도 볼만하지만, 특히 2010년부터 2015년까지 크로아티아의 대통령을 역임한 거물급 정치인으로 더 유명합니다.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의 중요 인물이었고, 현재는 '전진 크로아티아'당을 이끌고 있습니다.


 - 요시포비치는 1957년 유고슬라비아의 자그레브(現 크로아티아 수도)에서 출생하였습니다. 학창시절에는 축구선수로 활동한 적도 있다고 하며,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자그레브의 2차 음악학교에서 음악 수업을 함께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자그레브 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하였는데, 그와 함께 자그레브 음악학원에도 등록하여 음악 수업을 계속 받았습니다. 진정한 복수전공


 - 그는 1985년 형법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1994년에는 범죄과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84년부터는 모교에서 강사로 활동을 시작, 이후 법학부 교수로 선임되기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ㅡㅡ; 1983년 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작곡한 <삼바 다 카메라>가 1985년 유럽방송연합 상을 수상하면서 작곡가로서도 인정받게 됩니다. 1987년부터 2004년까지는 자그레브 음악학교의 강사 또한 역임하였습니다. 도대체 못하는 게 뭐냐 당신은


 - 정치 활동은 1980년 크로아티아 공산당(당시 크로아티아는 유고슬라비아 내의 '자치공화국'이었음을 감안합시다)에 입당하면서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1990년 전후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시기에 요시포비치는 공산당을 '사회민주당'으로 재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사회민주당의 첫 번째 법령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1994년 그는 너무 바빠서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작곡가와 법학자로서의 활동에 집중하였습니다.


 - 이후 2003년 그는 당시 총리였던 이비차 라찬(1944-2007)의 권유로 정계에 복귀하였고, 국회의원과 사회민주당 부대표로 활동하였습니다. 이후 2010년에는 사회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제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대통령 요시포비치는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 내전 때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사이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해 사과하였고, 집권 초기에는 지지율 88%를 찍는 등 대단한 인기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 하지만 집권 내내 계속된 경제난 등 악재가 겹쳐 집권 말기에는 인기를 상당히 잃었고, 2014년 대선에서는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크로아티아 민주동맹 소속 콜린다 그라바르키타로비치(1968-)에게 근소하게 패배, 대통령 임기를 마쳤습니다. 퇴임 이후에는 '전진 크로아티아'라는 중도좌파 성향의 당을 창당하고, 자유인민당과 연합하여 총선에 후보도 내 봤지만 역시 크로아티아 민주동맹에 패배하였습니다.이후로는 전진 크로아티아 당 대표로 정치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여담으로 그는 대통령 재직 말기인 2014년 태권도 명예9단을 수여받은 적도 있습니다. ㅡㅡ; 이는 요시포비치 자신이 태권도를 잘 해서라기보다, 크로아티아가 동유럽에서 태권도 인기가 가장 높은 편이고 세계랭킹 상위권 선수들도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롤러코스터 타이쿤 : 루피 랜드스케이프 - (3) Arid Heights


 "아무런 재정적인 한계가 없는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손님들을 행복하게 유지할 수 있는 공원을 사막에 건설하는 것 입니다."

 목표 : 관람객 2000명 (무기한) / 놀이공원 등급 700 유지

 제한 : 재정 관련 기능 사용 불가능



 - 이번에는 거의 평지에 가까운 사막지대가 주어졌습니다. 겉보기엔 별 것 없어 보이지만



 - 이번 시나리오는 말 그대로 무한맵, 돈 개념 자체가 없는 맵이 되겠습니다. 무제한으로 공원을 꾸며서(즉 지형 조절도 무제한으로 된다는 이야기) 관람객을 모으면 되는데, 대신 모아야 하는 관람객 수가 많고 재정 관련 기능(즉 마케팅)을 쓸 수 없다는 핸디캡이 있습니다. 공원 등급이야 사고가 연달아 나지 않는 다음에야 700 이하로는 떨어질 일이 거의 없으니, 좀 시간만 오래 걸려서 관람객만 모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 언제나처럼 입구 근처에 간단한 놀이기구와 휴게소를 짓는데, 나중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입구 쪽에 뭘 많이 지어 놓으면 이쪽이 너무 붐벼서 공원 등급이 곤두박질하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합시다(그래서 입구-출구 위치를 잘 설정해야 합니다).



 - 모처럼 제대로 된 미로를 건설.



 - 재정 관련 기능은 아무 것도 쓸 수 없기 때문에 연구/개발도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습니다.



 - 어차피 돈이 무제한인 김에 측면 마찰 코스터나 지어 보겠습니다. 사실 이건 사고 위험이 높아 이런 시나리오에서는 특히 조심해야 하는데, 다행히도 그럭저럭 성공!



 - 돈 걱정도 없고 공원이 전반적으로 평지인 김에, 평소에 지을 일 거의 없는 리버 라이드를 지어 봅니다. 로그 플럼과 비교하여 60도 급경사가 있고 차량이 커서 승객 순환이 빠른 대신 커브가 한 칸 크기 때문에 전체 크기가 강제로 커지게 됩니다.



 - 루피랜드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놀이기구 옵션이 개발 완료된 상태로 나옵니다. 이번에는 콕스크류 코스터의 차량 중 하나인 '하이퍼코스터 기차'를 지어 보겠습니다.



 - 하이퍼코스터는 매우 빠른 속도를 요구하기 때문에, 짓다 보면 트랙이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 좌석의 안전바가 승객의 허리께만 잡아준다는 개념이라(좌석이 바이킹처럼 생겼다는 의미) 열차가 거꾸로 뒤집히는 트랙을 건설하면 안 됩니다(열차가 선택되지 않음). 그래서 트랙은 크고 아름다운데 뭔가 좀 단순해 보이는 트랙이 되기 쉽습니다.



 - 중간마다 소소한 놀이기구들도 만듭니다. 눈치 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이번 시나리오에서는 모든 놀이기구의 입출구를 캔버스 스타일(천막 모양)으로 짓고 있습니다.



 - 돈을 벌 필요가 없으니 상점도 꼭 필요한 종류들 외에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관상용이죠.



 - 그런 주제에 연구개발은 자꾸 상점만 파고 있습니다. ㅡㅡ;



 - 공원이 넓으니 면적을 좀 여유 있게 써도 될 것 같습니다.



 - 이번엔 스탠드업 코스터에 도전해 보았습니다. 흥미도와 격렬도는 그냥 포기하기로. ㅡㅡ;



 - 관람객이 한 쪽에 너무 몰리면 공원 등급이 떨어지니, 놀이기구들을 넓은 공원에 적당히 흩어 놓도록 합니다. 타워가 있는 걸 보니 여긴 아마 공원의 중앙쯤이겠지요?



 - 한 가지 재미있는 게, 돈 개념이 없는 공원이라 관람객들이 돈을 다 써서 집에 간다는 개념도 없습니다! 덕분에 적당히 즐길 거리만 있으면 3년이고 4년이고 무한정 눌러앉는 관람객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저 '놀이동산에서 보낸 시간'이 보이시나요?



 - 스릴 놀이기구를 좀 짓고 싶은데 도통 개발을 하지 않는군요.



 - 이번 시나리오는 전반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걸 빼면 쉽지만, 의외로 흥미도 관리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놀이기구 사고야 그렇다 치고, 특정 구역(아마 주로 입구 쪽)이 너무 복잡하면 관람객이 불평을 해서 등급을 추락시킵니다.



 - 아까 지은 하이퍼코스터의 흥미도가 좀 애매하다 싶어서 트랙 아래 연못을 추가해 주었습니다. 롤러코스터는 물 지형과 잘 조합하면 흥미도가 상당히 크게 오릅니다.



 - 새로 지은 스틸 코스터는 다른 공원이라면 ATM용이라고 했겠지만 이번에는 그냥 손님 순환용으로 지은 것입니다.



 - 넓은 공원에 빠질 수 없는 교통수단, 모노레일도 짓습니다.



 - 여긴 입구 반대편. 어느 새 여기까지 확장이 됐습니다.



 -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 3년째 공원에서 Enjoy 중인 관람객들을 특별관리하기로 하였습니다.



 - 드디어 ㅡㅡ; 거의 3년 끄트머리까지 가서야 스릴 놀이기구를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 이쪽에는 다양한 취향의 관람객을 배려한 푸드센터를 건설. 롤러코스터 타이쿤 2에서는 저기를 건물 모양으로 덮어서 꾸민다거나 하는 게 가능한데, 1에서는 딱 저게 한계죠.



 - 스릴 놀이기구랍시고 지은 게 뭔가 했더니 제트스키였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공원은 사막에 있습니다. ㅡㅡ;



 - 물론 사막에 있다는 건 수중 놀이기구가 아주 인기 만점이란 의미이기도 합니다. 워터 슬라이드를 지어 보았습니다.



 - 우든 코스터에 버티컬 루프도 있습니다. 여담으로 실제 우든 코스터는 아주 초창기부터 지어져 왔지만, 우든 코스터에 쓰는 버티컬 루프가 개발된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라고 합니다.



 - 특수 트랙 좀 섞고 야자나무 떡칠을 하 주었더니 흥미도가 매우높음을 찍었습니다.



 - 아 저놈의 공돌이들은 이번 시나리오에서는 정말 도움이 안 되는군요.



 - 하릴없이 점잖은 놀이기구들이나 계속 짓고 있습니다.



 - 테마는 또 이런 것만 있습니다. ㅡㅡ;



 - 돈이 들지 않아 좋은 것 또 한 가지는, 스탭을 많이 고용해도 걱정이 없다는 겁니다. 되는 대로 많이 고용해 둡시다. 물론 무제한은 아니고 128명인가? 정도 제한이 있다고 하는군요.



 - 트위스터 코스터에서는 '바닥 없는 열차'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흥미도와 격렬도가 더 높아진다고 합니다.



 - 관람객 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이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자 마지막으로 롤코1의 금지어인 하트라인 코스터를 지어 볼까요?



 - 클리어 직전에 가까스로 완성을 보았습니다. 흥미 등급은 신경쓰지 맙시다. 원래 이래요(개발자 크리스 소여가 실수로 흥미도가 안 올라가게 만들었다는 설도 있던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 클리어 직전. 뭔가 엄청 개발한 것 같은데 마지막까지 빈 공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4년이 끝나기 전에 클리어하네요.




김순남 (1917-1983?)

<산유화>



 - 이번에는 한국인 작곡가를 다루어 보겠습니다(생각해 보면 우리는 오히려 한국인 작곡가들을 더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김순남은 다수의 가곡과 한국 최초의 교향곡, 협주곡, 오페라를 쓴 대작곡가이지만 해방과 분단의 격동기에 북한을 선택하고, 북한에서도 정치적 숙청과 복권을 거듭하며 그 존재 자체가 묻혀 버린 비운의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 김순남은 서울 낙원동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낙원상가?? 어릴 적에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보이며, 1932년 경성사범학교(現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피아노 연주나 취주악단 지휘 등 음악적 활동에 열중하였다고 합니다. 졸업 후 몇 년간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37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다음 해 도쿄 고등음악학원 작곡부에 입학하였습니다.


 - 도쿄에서 김순남의 가장 중요한 스승으로 하라 타로(1904-1988)가 있는데, 그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음악가로 김순남에게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재학 중 그는 일본 현대작곡가연맹의 창작 발표회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출품하였는데, 당시 출품작인 피아노 소나타 1번은 상당히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작법을 사용하여 보수적인 일본 음악계에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 1942년 귀국 후 김순남은 '조선음악협회'에 음악가의 일원으로 가입하였는데, 이는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관제 단체였습니다. 다만 한편으로는 좌익 성향의 비밀 조직인 '성연회'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하였다니, 그가 딱히 친일부역자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해방 전까지 그는 버르토크, 스트라빈스키 등 당대 첨단을 달리는 작곡가들의 기법을 적극 활용하여 꽤 전위적인 곡을 썼습니다.


 - 해방 후에는 본격적으로 정치적 활동을 시작했고 그의 작품도 사회 참여적인 색채를 본격적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해방 직후 <해방의 노래> <농민가> 등 소위 '해방가요'를 다수 작곡하여 인기를 끌었고, '조선음악건설본부'에 가입하였지만 이 단체가 좌익-우익 및 친일-민족 대립으로 쪼개진 후에는 좌익계와 민족계가 합세한 '조선음악가동맹'으로 옮겨 활동하였습니다.


 - 이 시기 교향곡 1번과 피아노 협주곡 1번, 합창 교향곡 <태양 없는 땅> 등 본격적인 관현악곡 또한 작곡하였는데, 각각 한국 최초의 작품들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악보는 전하지 않습니다. 김순남은 좌익 인사였음에도 그의 재능은 미군정 쪽에서 주목할 정도였고, 문화 담당 장교인 엘리 하이모비츠는 그에게 미국 유학을 주선하려고도 했지만 본인과 미군정 양쪽의 거부로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좌익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압박이 시작되자, 김순남은 아내와 외동딸을 놔둔 채 다른 인사들과 함께 월북하였습니다. 북한에서는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과 평양음악대학 교수를 역임하였고, 작곡 활동도 계속 이어갔는데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오페라 <인민유격대>는 한반도에서 작곡된 최초의 오페라입니다.


 - 한국전쟁 도중인 1952년 김순남은 소련으로 유학하여,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에서 아람 하차투리안을 사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종전 직후인 1953년 그는 돌연 본국으로 소환 명령을 받게 되었고, 주변인들은 여러 유학생 중 그 혼자만 소환되는 것을 의심하였지만 본인은 별 생각 없이 귀국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평생을 옥죄는 고난의 시기가 시작됩니다.


 - 그가 소환된 것은 실제로 그가 남로당 쪽과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박헌영과 친분이 두터웠음), 남로당을 숙청하면서 그를 엮어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강한 사상 비판을 당하고, 1958년에는 창작에 관한 권한을 모두 박탈당하고 함경남도 신포조선소의 주물공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후 1964년이 되어서야 다시 음악가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창작 권리를 회복한 김순남은 다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지만, 얼마 뒤 폐결핵이 발병하면서 활동을 중단하고 투병생활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투병이 길어지면서 그는 북한 사회에서 조금씩 잊혀졌고, 결국 명예회복을 하지 못한 채 1983년 경 신포에서 사망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그는 남한에서는 소위 빨갱이였고, 북한에서는 숙청당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커녕 존재 자체가 오랫동안 묻혀 있었습니다. 그나마 남한에서는 1980년대 말 좌익 음악가들의 작품이 해금된 이후 조금씩 연구가 이루어져 왔고, 남한에 남은 외동딸 김세원(1945-, 성우로 활동)씨가 자료를 수집하여 <나의 아버지 김순남>이라는 책으로 내기도 했습니다. 김희조(1920-2001), 백남준 등의 거장들도 김순남에게서 음악을 배우거나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 하지만 교향곡과 협주곡 등 그의 많은 작품들이 소실되었고, 북한에서는 아직도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는 면이 있어서 김순남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나마 현재 알려진 것들은 주로 가곡과 해방가요들이며, 그 중에서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산유화>의 경우 조수미 등의 유명 성악가들이 녹음한 바 있어 일반 대중에게도 어느 정도 유명합니다.




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

<Stabat Mater>



 -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바이올린 및 오르간 연주자입니다. 바로크-고전파 전환기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명곡들을 남겼지만, 아주 젊은 나이(26세!)에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본명은 '조반니 바티스타 드라기'인데, 조상의 출신지인 페르골라에서 따와서 '페르골레시'로 불린 게 굳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 페르골레시는 중부 이탈리아의 제시(안코나 근교)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가난했고 한쪽 다리를 저는 등 건강도 좋지 않았다는데, 그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지역 영주의 경제적 지원을 얻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725년 그는 나폴리로 유학하여 가에타노 그레코(1657-1728), 프란치스코 페오(1691-1761)를 사사하였습니다.


 - 1731년 음악원을 졸업한 페르골레시는 작곡가로 활동하여 일찍부터 많은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는 처음에는 나폴리 귀족 악단에 들어가 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폴리의 오페라 극장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의 명성을 드높인 작품은 1733년 발표한 단막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였는데, 본래 다른 오페라의 일부였던 이 작품은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현재는 '오페라 부파(희극 오페라)'의 기틀을 잡은 명작으로 평가됩니다.


 - 오페라의 성공을 바탕으로 1734년에는 나폴리 예배당에 악장 대리로 취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폐결핵을 지병으로 앓고 있었고, 이듬해부터 병이 크게 악화되어 의사의 권유에 따라 1736년 2월 타지로 요양을 떠났지만 차도가 없이 한 달 후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사망한 해에 만들어진 마지막 작품이 <스타바트 마테르>(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를 바라보는 성모 마리아의 애가(哀歌))라는 게 의미심장합니다.


 - 페르골레시의 음악은 웅장함보다는 섬세함, 그리고 풍부한 멜로디와 화성이 장점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그는 죽은 지도 20여 년이나 지난 후 난데없는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으니, 대표작 <마님이 된 하녀>가 프랑스에서 초연되었을 때 장 자크 루소(1712-1778)와 장 필리프 라모(1683-1764)를 중심으로 프랑스 오페라 - 이탈리아 오페라를 놓고 벌어진 소위 '부퐁 논쟁'이 그것입니다.



롤러코스터 타이쿤 : 루피 랜드스케이프 - (2) Volcania


 "이 코스터 건설 도전에서는 휴화산이 배경이 됩니다."

 목표 : 미완성 롤러코스터 완성 (5종, 흥미도 6.7)



 - 루피랜드에서 추가된 특이한 미션의 시나리오. 롤러코스터 건설이 임무이기는 한데



 - 이미 어느 정도 만들어져 있는 트랙을 완성해야 합니다. 시작부터 주어진 저 미완성 트랙들은 철거할 수 없습니다.



 - 그런데 이거 짓기 꽤 까다롭습니다. 일단 멋모르고 서스펜드 루핑 코스터를 짓다 보니



 - 벌써 돈이 부족해졌습니다. ㅡㅡ; 아무리 롤러코스터 건설 시나리오라도 기본적인 놀이기구는 건설해 주고 시작해야 돈 때문에 고생할 일이 없습니다. 일단 연구개발을 중단합니다.



 - 그리고 불필요해 보이는 시설들도 철거하여 돈을 확보하고



 - 그럭저럭 돈이 될 만한 스릴 놀이기구를 짓습니다.



 - 언덕 내부로 통하는 길이 있는데, 당장 필요하지 않으니 일단 막아둡니다. 어차피 안쪽으로 롤러코스터 출입구가 있기 때문에(출입구도 이동 불가능) 나중에는 어차피 열어줘야 합니다.



 - 어느 정도 개발이 진행되어 수입이 들어오니 연구개발을 다시 시작합니다.



 - 사람을 더 끌어들이기 위해 서스펜드 루핑 코스터 주변에 다른 놀이기구도 짓습니다.



 - 스릴 놀이기구 중에는 탑승객 순환이 빨라 돈 벌기에 좋은 놀이기구가 많이 있습니다.



 - 어느새 롤러코스터 반대편 공간에 많은 놀이기구가 들어와 있습니다.



 - 좋은 의미의 상을 받으면 관람객을 끌어들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 공원 입장료를 받을 수 없다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이야...... ㅡㅡ;



 - 스틸 코스터는 버티컬 루프의 높이가 의외로 높아서 트랙을 짓기 매우 까다롭습니다.



 - 결국 체인 언덕을 두 개를 깔아야 했습니다. 어쨌든 짓고 보니 흥미도는 높게 나와서 좋군요.



 - 전망대는 산 정상에 짓는 게 좋을 것 같지만, 산 정상의 높이가 꽤 높아서 놀이기구를 짓는 게 좀 까다로울 수 있으니 그냥 밑에 짓습니다.



 - 마우스 코스터 미완성 트랙도 연결해서 완성해 줍니다.



 - 이제 우든 트위스터 코스터와 서스펜디드 코스터가 남았는데, 서스펜디드 코스터는 정거장이 산 정상에 있습니다. 그러니



 - 등산로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 옥의 티 ㅡㅡ;



 - 등산로를 완공하였습니다.



 - 뭔가 둥근 섬이 주어지면 해안을 순환하는 모노레일을 만들고 싶어집니다.



 - 충돌사고 ㅡㅡ; 다만 사고가 나더라도 흥미도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는 게 다행.



 - 누군가 분노한 관람객이 가로등을 박살냈습니다. 천하장사 누군지 찾으려다가 실패했습니다.



 - 모노레일 순환선을 완공하였습니다.



 - 이 쪽은 놀이기구 트랙이 많아서 이리저리 피해서 레일을 건설해 주어야 했습니다.



 - 마우스 코스터가 위험하다고 사람들이 타지 않으려 합니다(물론 탈 사람들은 다 탑니다).



 - 서스펜디드 코스터도 완성. 이제 우든 코스터 하나 남았습니다.



 - 언덕 위쪽으로도 놀이기구를 좀 설치해 줍니다. 그런데 저 박살난 의자는 ㅡㅡ;



 - 루피랜드에서 추가된 상점이 제법 많습니다. 이제 목마름을 음료수 가게 하나로 때우던 시절은 지나갔죠.



 - 이제 마지막으로 우든 트위스터 코스터를 지어 봅니다. 이미 지어진 여러 트랙 사이를 이리저리 지나도록 만들다 보면



 - 어느 새 완성. 등급 수치가 뜨고 잠시 지나면 시나리오가 끝납니다.



롤러코스터 타이쿤 : 루피 랜드스케이프 - (1) Iceberg Islands


 "빙하들은 이 야심적인 놀이공원에서 차가운 배경을 만듭니다."

 목표 : 관람객 1250명 (3년) / 놀이공원 등급 600



 - 이제부터 롤러코스터 타이쿤 1의 두 번째 확장팩, 루피 랜드스케이프 시나리오에 돌입합니다. 첫 번째 시나리오로는 빙하로 이루어진 다섯 개의 작은 섬이 주어져 있습니다.



 - 루피 랜드스케이프 시나리오는 공통적으로 공원 입장료를 받을 수 없도록 설정되어 있어 난이도를 상당히 높입니다.



 - 첫 시나리오 주제에 이 공원은 상당히 골때리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일단 별 필요도 없는 지하보도가 입구에서부터 잔뜩 깔려 있어 관리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ㅡㅡ;



 - 한 섬(편의상 1호 섬으로 호칭)에는 꽤 괜찮은 봅슬레이 코스터가 하나 있습니다. 일단 이것으로 돈벌이를 해야 합니다.



 - 지하보도는 놔두면 정말 관리가 안 되니 배너로 입구를 막고 철거해 버립니다. 물론 무턱대고 철거했다간 관람객이 사망도 아니고 공허의 세계로 빠져버리니 주의합시다. ㅡㅡ;



 - 필수 상점들은 다 개발되어 있긴 하지만, 상점 개발 때 첫 번째로 나오는 커피숍이 상당히 괜찮으니 먼저 개발하도록 합니다. 이번 공원처럼 기본 날씨가 차가운 기후로 설정되어 있는 시나리오에서는 커피숍 같이 따뜻한 음료가 잘 팔립니다.



 - 어느 정도 기본 정리가 마무리되면 1호 섬부터 차근차근 개발해 나갑니다. 그런데 1호 섬은 이미 도로와 봅슬레이 코스터 트랙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의외로 개발하기가 짜증납니다.



 - 그래도 어떻게든 섬 중앙으로 도로를 잇고 놀이기구를 지어 봅니다.



 - 루피랜드 시나리오를 해 보면 공원 입장료가 그동안 얼마나 혜자였던가를 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ㅡㅡ;



 - 1호 섬 개발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이미 있는 게 너무 복잡해서 개발에 한계가 있음) 입구 맞은 편에 있는



 - 2호 섬(체어리프트 있는 곳)으로 옮겨갑니다. 돈이 없어 짧은 카트 트랙을 만들었는데 영 어색해 보이긴 합니다.



 - 고생 끝에 스틸 코스터를 완성하였습니다. 수치가 크게 높지는 않지만, 스틸 코스터니까 그러려니 하고 쓸 만은 합니다.



 - 적절히 꾸며주고 광고를 때려 2호 섬으로 사람들을 유도합니다. 놀이기구의 출입구를 저렇게 빙하 컨셉으로 바꾸면 상당히 잘 어울리죠.



 - 노력의 결과 상을 받습니다.



 - 빙하 조경 아이템 중에서는 블로거의 마음에 드는 것들이 많습니다. 저기 눈 덮인 나무 울타리도 그 중 하나죠.




 - 이제 옆의 3호 섬으로 확장합니다.



 - 롤러코스터가 많이 개발되었는데, 뭘 건설할지는 좀 애매합니다. 서스펜드 루핑 코스터는 인버트 코스터와 비슷한데, 전반적으로 좀 다운그레이드 된 느낌의 롤러코스터입니다.



 - 이제 가운데 4섬으로 확장하면 어느 정도 순환도로가 만들어집니다.



 - 그리고 3섬의 남은 공간에는 마우스 코스터를 짓습니다. 바다에 트랙을 짓는 건 좋은데, 이 공원은 바다의 깊이가 꽤 깊어서 그 쪽으로 트랙을 건설하는 게 의외로 까다롭습니다.



 - 4섬 개발에 박차를 가합니다. 콕스크류 코스터처럼 짧은 발진 트랙을 만들 수 있는 코스터가 빛을 발합니다.



 - 그리고 어디서나 쓸만한 버티컬 코스터도 그렇지요.



 - 2호 섬의 정수리(?)가 좀 허전해서 점잖은 놀이기구를 채워 보았습니다. 그런 대로 잘 어울립니다.



 - 4호 섬의 정수리 역시 마찬가지.



 -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안쪽의 5호 섬에 도로를 깔아줍니다.



 - 이곳에 트위스터 코스터를 지어 주면 완벽하겠습니다. 런치드 리프트 힐로 언덕을 만들면 체인 리프트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건 아시죠?



 - 돈과 건설 환경이 좀 빡빡해서 그렇지 관람객 모으는 건 무난합니다.



 - 5호 섬의 (그럭저럭) 완성된 모습



 - 얼음 테마가 개발되면 눈사람 모양 엔터테이너를 쓸 수 있습니다. 경치와 잘 어울리니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합니다.



 - 한창 개발하다 보면 이런 상도 받고......



 - 1호 섬 전경



 - 2호 섬 전경



 - 3호 섬 전경



 - 4호 섬 전경



 - 5호 섬 전경



 - 완공 직전. 겨울도 지났는데 이제 좀 따뜻한 곳으로 가 보겠습니다.



 - 우리에게는 흔히 <내가 고자라니>의 주인공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존인물 심영(1910-1971?)은 일제강점기 유명 배우우이자 친일 연극인이었고 해방 후에는 좌익 계열로 전향하여 꽤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재미있게도 당시 한반도의 연예인들 중에서는 심영처럼 친일/좌익 콤보를 밟았던 사례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번에는 고자라니 말고 '진짜' 심영의 일생을 간략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존인물은 적어도 고자는 아니었다는군요]



1. 조선의 슈퍼스타 심영


 - 심영의 본명은 심재설(沈載卨)입니다. 일단 심영의 출생지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의견이 나뉘어 있는데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여 어릴 적 서울로 이주하였다는 주장이 있고, 아예 처음부터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심영이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자랐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것은 분명한데, 의정부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2고등보통학교(現 경복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고 합니다(인터넷에서 찾은 정보에는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참고).


 - 이 무렵 심영은 무용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는데, 단순히 무용만 하러 다닌 게 아니라 이런저런 사회 운동에도 참여하였던지 심영은 사회활동 참여를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심영은 한국 최초의 극단(劇團) 중 하나인 '토월회'와 연을 맺게 되는데, 토월회 연구생 신분으로 몇몇 연극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면서 연기 인생을 시작하였습니다. 


 - 심영은 1929년 <간난이의 설움>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연극계에 데뷔하였고, 여기서 호평을 받은 그는 다음해 <남경의 거리>의 1막 주인공으로 깜짝 캐스팅된 것을 계기로 스타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심영의 연기력은 바다 건너까지 알려져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을 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며, 가히 1930년대 초 심영은 조선 최고의 인기스타 중 한 명이었습니다.


[1930년대 심영. 흑백사진으로만 봐도 잘 생겨 보이긴 합니다. 1937년 12월 2일 동아일보]


 - 다만 1930년대 후반 들어 새로운 대스타 황철(1912-1961)이 등장하며 심영은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두 배우는 <춘향전> <단종애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등에서 함께 출연하여 인기 경쟁을 벌였는데, 1936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심영과 황철이 각각 홍도 남편(이쪽이 악역), 홍도 오빠('홍도야 울지 마라' 노래에 등장하는 그 오빠) 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둘의 인기는 역전되어 버렸습니다.



2. 친일에서 좌익으로


 - 인기를 빼앗겨 삐뚤어진 것인지, 심영은 이 무렵부터 친일의 길로 빠져들게 됩니다. 1939년 심영은 극단 고협 대표로 취임하였는데 이 극단은 적극적인 친일 성향 단체로, 주로 한다는 일이 농어촌을 순회하며 일본 프로파간다 공연을 한다든지 만주에서 중일전쟁 참전 중인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한다든지 하는 짓이었습니다.


 - 심영은 극작가 박영호, 연출가 나웅 등과 함께 고협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이들은 현재의 서울 불광동 일대에 '고협촌'이라는 연극인 마을을 만들고 집단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협은 1940년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조선연극문화협회'에 참여하였습니다. 심영은 여러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는 와중에 일본 프로파간다를 위한 연기 활동에도 다수 참여하였습니다.


 - 1943년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심영은 일어극(日語劇) 부문 개인연기상을 수상하였고, <너와 나> 등 친일 영화에도 다수 출연하여 연기하였습니다. 물론 그가 주도하는 고협에서도 <빙하>니 <해당화 피는 섬>이니 하는 일본 프로파간다 연극을 다수 공연하였고, 거기에 심영이 출연하였음은 물론입니다. 그렇게 적극적 친일파로 맹활약하던 도중 갑자기 해방이 찾아왔습니다.


 - 기대고 있던 기둥을 잃어버린 심영의 선택은, 정말 역설적이게도 '좌익'이었습니다(이전 글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제국주의 일본은 (당연히) 극렬한 반공주의 집단이었습니다). 심영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연예인들이 좌익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였는데, 구체적인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일제강점기까지도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광대'였던 연예인들이 (친일을 했든 않았든)만인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에 경도되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3. 고자......는 되지 않았지만


 - 어쨌든 심영은 해방 후 좌익 계열 연극단체인 '연극동맹'에서 활동하면서, 이번에는 친일 대신 좌익 성향의 연극을 다수 공연하고 다녔습니다.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시대에 심영은 당연히 우익 쪽의 주요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1946년 박영호 작 <님>(<야인시대>에도 등장하지만 실존 작품이기도 합니다)을 공연하고 이동하던 도중 김두한 일파에게 습격을 받고 영 좋지 않은 곳이 아니라 하복부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심영 피습사건 기사. 1946년 3월 16일 동아일보]


 - 그 때 김두한은 실제로 심영이 입원한 병원에 쳐들어갔고, 그에게 해코지를 하려다가 그의 어머니를 보고 마음이 누그러져 협박만 하고 나왔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김두한 본인의 증언으로 100% 믿기는 어려운 이야기입니다(이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게 <야인시대>의 해당 부분). 심영은 총상에서 회복한 이후에도 계속 활동을 이어갔고, 1947년에는 파업 선동 혐의로 미군정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 아마 이쯤 되자 남쪽에서는 더 이상 좌익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였는지, 심영은 1947년 말 월북을 하였습니다. 이 무렵이 되면 좌익 활동을 용인하던 미군정이 점차 좌익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고 있었으며, 이를 버티지 못하고 남로당 등 많은 좌익 계열 인사들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갔던 것입니다. (여담으로) 심영의 라이벌이었던 황철 역시 좌익 계열 활동을 하다가 1948년 8월, 즉 분단 막판에 월북하였습니다.


 - 월북 이후에도 황철과 함께 배우로 이름을 날렸고,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습니다(황철은 전쟁 중 오른팔을 잃었고, 의수를 끼고도 열연을 거듭하여 최초의 '인민배우'가 되었습니다). 이후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점령지에 남아 있던 연극인 등 여러 연예인들을 강제 납북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당시 끌려갔다가 탈출한 최은희(1926-)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군복 차림으로 와서 여러 연예인들을 납치해갔다고).


 - 그렇게 요란하게 북한으로 건너간 심영이지만, 최후는 분명치 않습니다. 남로당 숙청 때는 같이 숙청되었다가 어찌어찌 복권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1971년 다시 숙청되어 탄광 노동자로 일하다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설, 연극영화학교 교원으로 활동하다가 자연사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5. 정리 : 연예인의 친일


 - 우리에게 이상한 쪽으로 잘 알려진 심영을 선택하였는데,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은 문화예술인(특히 연예인)들이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노선을, 해방 직후에는 좌익 노선을 택하였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데, 블로거는 그들의 선택을 '광대'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 일제강점기 이후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인기 연예인들은 사회적 관심을 받는 스타가 될 수 있었지만, 사람들은 연예인에 열광하면서도 그들을 조선시대까지 천시당하던 '광대' 취급하곤 했습니다. 이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으레 복잡한 행보를 거듭하기 마련, 많은 수의 연예인들은 권력에 영합하여 입지를 넓히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들을 무시하는 세상에 한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 그런 그들에게 만인 평등을 외치는 사회주의는 하나의 복음처럼 들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친일을 했든 하지 않았든, 해방 이후 좌익에 경도된 것은 이상할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심영 뿐 아니라 황철, 문예봉, 신불출 등 당대 인기 연예인 중 많은 수가 좌익 계열에서 활동하였고 이후 월북하여 북한으로 가게 됩니다. 물론 북한 역시 그들이 생각하는 평등 사회는 아니었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숙청 등으로 쓸쓸하게 퇴장하였습니다.


 - 그들의 생각과는 별개로, 인기 연예인의 친일 행위는 지배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유용한 통치 수단이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들은 사회 전체의 주목을 받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능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본 체제에 영합한 연예인들은 각종 공연과 위문행사 등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당대 일본의 프로파간다를 심는 데 앞장서 활약하였던 것입니다.


 - 연예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행위는 어찌 보면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근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연예인의 정치적 행보에 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들이 정치적으로 가진 영향력과 이를 부당한 권력 유지를 위해 악용해 온 과거 때문일 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연예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힘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그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www.kmdb.or.kr/vod/mm_basic.asp?person_id=00020233#url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0388568 (황철 일대기 1부. 중간에 심영과의 라이벌리가 언급되어 있음)

http://www.ohfun.net/?ac=article_view&entry_id=1099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467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른 곳과 설명이 좀 다른데 참고용으로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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