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법학자 겸 소설가 유진오(1906-1987)는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활동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철저한 반공국가로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초한 그가 한때 사회주의자였고, 이 경험이 그의 학문 및 사상체계의 기반이며 그가 만든 헌법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요. 학문과 문학에서 많은 성취를 이루고, 한 나라의 헌법을 쌓아올렸으면서도 그의 인생은 항상 억압과 고뇌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를 돌아본다면 일제강점기 많은 지식인들의 모순적 삶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유진오

 

1. 명문가의 자식은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

 유진오는 1906년 한성부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유치형(1877-1933)은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법학을 전공한 엘리트였으며,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하다가 멸망 후 퇴직하여 한성은행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유치형은 근대 학문을 공부하였지만 일상에서는 구시대적 관습을 고수하였고, 유진오는 이러한 분위기의 집안에서 억압적인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결혼 또한 부모에 의하여 14세 때 해야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일본에서 온 근대문학은 하나의 해방구였으며, 근대적 개인주의를 접하는 창구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現 대학로에 위치했던 경성제국대학


 이 시기의 여러 지식인들처럼 유진오 역시 대단한 수재였는데 1924년 경성제국대학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예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이어 법학을 전공하였는데 한때 철학과로 전과할 것을 고민하기도 하였고, 마르크스주의 학자인 미야케 시카노스케(1899-1982) 교수 등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에 크게 경도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한창이었는데 이 영향을 받아 경성제국대학에서도 자유주의, 사회주의적 경향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미야케 시카노스케

 재학 중 유진오는 마르크스주의 연구모임인 '경제연구회'에 참여하고, 정치적 성향 때문에 일본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졸업은 수석으로 무사히 했습니다. 이 때 마르크스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은 구시대적인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의 사유체계를 새롭게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많은 사회주의자들과 비슷하게, 그 역시 개인과 현실의 모순을 해결할 이상적인 대안으로 마르크스의 사상체계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당시 유진오와 교류하던 인물 중에는 경성제대 1년 후배이자 오랜 동료로 해방 후 북한 헌법의 제정을 주도하는 최용달(1904-1953?)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1929년 졸업한 뒤 경성제대 연구소 조수로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낙산구락부(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조직하여 학문을 통한 사회운동을 시도하였습니다. 당시 이 단체에서 활동한 인물 중에는 훗날 남로당의 주요 인사 중 하나가 되는 리강국(1906-1956)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체는 일본 당국에게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기도 전에 1933년 탄압을 받아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유진오는 이를 마지막으로 실천적 사회운동에서 사실상 발을 빼고, 학문연구의 길에 집중하게 됩니다.

 

2. 사상과 행동의 괴리, 그리고 그로부터의 해방

 유진오는 졸업 후 사회운동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경성제대 교수를 목표로 학문에도 매진하고, 재학 중이던 1927년 소설가로 등단한 후에는 틈틈이 작품활동도 병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사회운동은 처참히 실패하고, 목표하던 경성제대 교수직 역시 한국인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었기 때문에 그는 또다시 좌절을 맛봐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김성수에게 스카웃(?)되어 동료 최용달 등과 함께 보성전문학교 법과 교수로 직을 옮겼습니다.

 학자로서 유진오가 천착한 분야는 서양 법사상, 법률이념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식민지배 이데올로기의 중추인 제국대학을 나왔지만, 동시에 마르크스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그는 개인주의와 단체(전체)주의의 대립을 중심으로 각 시대를 해석하고, 기존의 학설을 비판하며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그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사상체계의 기초였지만 동시에 실천적 동기로 작용하지는 못하였고, 이는 마르크스 사상의 실천성과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모순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으며 이에 대한 고민은 그의 소설작품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앙드레 지드

 그런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내려왔으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작가이자 사상가인 앙드레 지드(1869-1951)가 소련에 다녀온 후 1936년 <소련 기행>을 써 소련 체제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처음에 소련을 지지했던 지드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간성의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소련이 정작 획일성과 비판정신 결여로 물든 전체주의 사회였다고 강하게 비난하였고, 이는 전 세계 사회주의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아마도 유진오는 지드의 비판을 접하고 마음 속에 남아있던 고뇌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버리지 못하던 사회주의의 현장이 결국 파시즘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은, 그에게 마르크스를 붙잡을 이유가 사라졌다는 의미로 다가왔겠지요. 그는 지드의 전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활동을 벌여 좌익 문학계와 사회주의 세력의 거센 비난을 받았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39년을 기점으로 결국 친일 노선으로 완전히 전향하고 말았습니다. 이 해 그는 법학 교수를 그만두고 작품활동에 집중하였으며, 동시에 친일 성향 논설을 언론에 발표하거나 친일 문학단체에 참여하는 등 전형적인 친일 부역자 행보를 걷게 됩니다.

 

3. 해방 이후 : 대한민국 헌법의 아버지

 그는 1944년 퇴계원으로 낙향하였다가 해방 후 보성전문학교로 복귀하였습니다. 당시 유진오는 이미 독보적인 헌법학자로 그 위상을 얻고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새로 수립할 국가의 헌법 초안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지게 됩니다. 1948년 출범한 제헌국회는 그가 만든 초안을 바탕으로 헌법 제정을 논의하고 마침내 대한민국 헌법(제헌헌법)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헌법을 매개로 정치와도 깊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초대 법제처장에 취임하여 신생 대한민국의 법령을 구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유진오가 직접 쓴 헌법 초안

 마르크스주의를 버렸다고는 하지만 이는 여전히 그의 사상을 이루는 중요한 한 줄기로 남았습니다. 우익과 좌익의 전체주의를 모두 배격한 그가 헌법의 모델로 선택한 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절충한 독일 바이마르 헌법이었습니다. 이 위에서 유진오는 자신이 그동안 배우고 연구해온 모든 법적 지식과 사상을 쏟아부었고, 이후 여러 차례 개헌과 많은 우여곡절이 있기는 하였지만 지금도 대한민국 헌법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결코 손색 없는 헌법으로 대한민국의 최고 규범으로 기능하고 있지요.

 헌법 제정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유진오는 헌법에 '인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 하였지만, 이것이 좌익 용어가 아니냐는 윤치영(1898-1996)의 반발 때문에 모든 단어를 '국민'으로 바꿔야 했고 그는 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합니다. 당시 그는 좌익 전력 때문에 이런저런 의심의 눈초리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관철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행정부 전횡을 방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양원제와 의원내각제를 지지하고 헌법에 반영하려 하였으나, 자신에게 권력이 집중되기를 원한 이승만의 반대로 결국 대통령 중심제가 채택되었지요.

 

4. 만년과 죽음

 아무튼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다시 강단으로 돌아가 1949년 고려대학교 법정대학 학장, 1952년 고려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여 1965년까지 장기간 재임하였습니다. 총장 재직 당시 고려대학교 운영에 수완을 발휘하여 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1960년 4.19 혁명 때는 4월 18일 국회 앞까지 행진한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설득하고, 경찰의 안전 귀가 약속까지 받아 시위대를 돌아가도록 하였는데 귀가 도중 시위대가 깡패의 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하며 혁명의 확산에 본의 아니게 중요한 역할을 한 바도 있습니다.

국회에서 야당 의원의 반대농성을 밤새 지휘하는 유진오(오른쪽 아래). 1969년

 총장 퇴임 이후 유진오는 한동안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는데, 1967년 대통령 선거 때는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가 윤보선과 단일화하며 사퇴한 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68년에는 신민당 총재로 취임하여 3선개헌 반대 운동을 이끌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1969년 뇌졸중이 발병하여 이듬해 총재직을 사임하고, 1971년에는 국회의원에 불출마하면서 오래 활동하지는 못하고 정계은퇴를 하게 됩니다. 이후로는 병석에서도 유신 반대 운동에 이름을 올리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80년 돌연 신군부가 만든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민주화 세력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유진오는 6월항쟁 이후 개헌 논의가 진행되던 1987년 8월 사망하였고, 고려대학교는 오랜 기간 재직하며 학교 발전에 크게 공헌한 그의 빈소를 설치하고 추모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절이었다보니 일부 학생과 교수진은 친일 부역을 한데다 전두환 정권에도 원로로 참여한 인물을 추모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반발하고, 학내에서 이와 관련한 충돌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5. 정리 : 우리 속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모순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처럼 유진오 역시 빛과 어둠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를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역사적인 법학자로, 혹은 근대문학에 큰 흔적을 남긴 소설가로 기억할 수도 있고, 적극적 친일부역자 내지 변절자, 전두환 군부 협력자로 기억할 수도 있지요. 사실 그 모든 것이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얼핏 보면 서로 모순되지만 사실 그 모든 것들이 어딘가에서는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지요. 때문에 어떤 인물을 평가할 때는 그런 여러 가지 요소들을 최대한 버리거나 무시하지 않을 필요가 있습니다.

 유진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 할 것입니다. 유진오가 기초한 대한민국 헌법을 보면 그가 불과 수 년 전에 일본 제국주의의 스피커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고, 이를 볼 때는 또 몇 해 전까지 그가 사회주의를 신봉한 법사상가였다는 것을 믿기 어렵지요. 어쩌면 그 모순이야말로 유진오의 일생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였을지 모릅니다. 구시대와 근대의 모순 속에서 성장하여,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모순 가운데 학업을 잇고, 실천적 사상과 실천하지 않는 현실의 모순 속에 갈등하며 삶을 지낸 것이 그의 일생이었지요. 어쩌면 그의 친일행각은 그 모순을 억지로 지워버린 데서 나온 치명적인 오류였을지도 모릅니다.

유진오 빈소 관련 시위를 다룬 뉴스. 경향신문 1987년 9월 2일

 네. 그를 바라보는 블로거의 시선 자체가 모순에 가득 차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친일 부역자를 비판하던 사람이 여기서는 왜 이렇게 애매한 말만 지껄이고 있을까요? 물론 블로거는 그의 친일행각을 옹호하거나 변명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는 친일인명사전 등의 목록에 오르기에 넘치도록 충분한 업적(?)들을 남긴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헌법 초안이나 친일행각 전후의 모습들을 보면 전혀 모순되는 그 모습들 또한 유진오 자신의 것임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순이야말로 그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본질은 아닐까요?

 여담으로, 그의 동문이며 오랜 기간 함께 일한 최용달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는 시골 자작농의 아들로 성장하여 마르크스주의를 더 실천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유진오가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친일로 돌아서던 시기 그는 항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길은 완전히 갈리게 되지요. 해방 후 그는 박헌영의 측근이 되었고 일찌감치 북한으로 건너가 북한의 법체계를 만드는 데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박헌영과 남로당계가 몰락할 때 그 역시 사라졌고, 아마도 함께 숙청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참고 :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남과 북을 만든 라이벌』, 역사비평사, 2008.
한국교육신문, "⑭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1899~1982) : 植民기획 부정한 지식인… 미친놈 취급받으며 불행 감내" (www.hangyo.com/news/article.html?no=8983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치형"
한국어 위키백과 "유진오", "앙드레 지드"
나무위키 "유진오", "최용달"

 

 윤리적 기업가이자 항일운동가였던 설립자 유일한(1895-1971) 덕분에 유한양행은 지금도 비교적 깨끗한 이미지를 가진 기업으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곳도 흑역사랄 것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유일한의 동생 유명한(1908-1950)이 기업을 운영하던 일제강점기 말기였습니다. 하필이면 형 유일한이 항일운동에 매진하던 때 이 사람은 기업 차원에서 친일행위를 일삼은 것이지요. 말할 필요도 없는 형 유일한, 역시 양심적 기업인으로 이름을 남긴 동생 유특한(1918-1999)과 비교됩니다. 이번에는 형만 못한 아우, 아우만 못한 형이었던 유명한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유명한

 

1. 사전 지식 : 유일한과 유한양행

 

 우선 유한양행이라는 기업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출발하겠습니다.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에서 '라초이'라는 식품회사를 경영하여 큰 성공을 거둔 유일한은 192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설립하였습니다. 그가 귀국할 때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서재필(필립 제이슨)이 버드나무 모양의 CI를 만들어 주었고, 이것이 지금까지도 유한양행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유한양행 CI

 

 유일한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당시 한국인들을 위한 사업을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유한양행이 주력으로 삼은 분야는 의약품 제조 및 유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산 의약품을 수입 판매하는 일에 주력하다가 자체적인 생산체제도 갖추었는데, 유한양행이 자체 생산한 의약품 1호는 바르는 소염진통제 '안티푸라민'이었다고 하지요. 거의 약장수 수준의 홍보가 판치던 당시 제약업계에서, 유한양행은 제품의 구체적 효능과 이를 뒷받침하는 전문가 의견 등을 광고에 실어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만주, 베트남 등 해외로도 진출하였습니다.

 

 유일한은 철저한 윤리경영을 추구하여 당시에는 판매가 합법이었던 메스암페타민(히로뽕) 등 마약성 제품의 판매를 철저히 막고, 1930년대 후반에 이미 종업원 주주제를 실시하는 등 상당히 선진적인 경영을 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비밀리에 한반도와 미국을 오가며 항일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1942년에는 재미 한인으로 구성된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하고, 미육군전략처(OSS)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공작원으로 비밀리에 입대하여 50이나 된 나이에 고도의 훈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이는 그의 사후 20년이나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집니다).

 

말년의 유일한

 

 미국에서 유일한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일본 당국에도 알려졌는데,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당국은 이런저런 이유로 유일한의 귀국을 불허하였습니다. 사장이 미국에 발이 묶이자 회사는 당연히 난리가 났고, 12월 15일 긴급 이사회에서 사장으로 선임된 사람이 당시 부사장으로 일하던 동생 유명한이었습니다. 유명한은 1936년 유한양행 대주주로 처음 경영에 참여하였고 1938년에는 이사, 1940년에는 부사장으로 승진하여 형이 부재중일 때 회사 운영을 맡고 있었습니다.

 

 

 

2. 유명한의 '덜 유명한' 친일행적

 

 그런데 형이 하던 일을 생각하면 유명한의 행적은 사장을 맡기 전부터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미 1941년 8월 그는 종로경찰서를 방문하여 일본 육군에 1만 원의 자금을 헌금하는 등, 형의 신념과 정 반대의 행보를 걷고 있었습니다. 일단 당시는 그가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미국에서 활동하던 형의 대리인으로 기업을 운영하던 시절이었으며, 유일한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명한은 정식으로 사장직에 오르고 나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친일 행보를 펼쳐나갔습니다. 그가 사장에 선임되고 며칠 뒤, 유한양행은 본사+사장(유명한)+계열사+직원 명의로 총독부에 소위 '애국기'를 헌납하여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당시 유한양행이 헌납한 금액은 총 5만 3천 원으로, 조선 최대 재벌이었던 박흥식이 헌납한 3만 원보다도 훨씬 많은 액수였습니다.

 

유한양행의 애국기 헌납을 다룬 기사. 매일신보 1941년 12월 28일

 

 유명한의 친일 행적은 이것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1943년 1월 1일에는 유한양행과 계열사들이 <매일신보>에 신년기념 합동 광고를 실었는데, 그 내용이라는 것도 소위 '황군'의 무운장구를 빈다든지 신년 맞이 전승(戰勝)을 기원한다든지 하는, 전형적인 일본 제국주의 찬양 광고였습니다. 그는 또 개인적으로는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 博유원박)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형이 미국에서 무엇을 하는지 유명한이 모르지는 않았을텐데,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 다녔을까요? 블로거가 추정해 보자면 유일한의 당시 행보 때문에 회사가 일본 당국에 탄압을 받았고,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이것이 큰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굳이 변호하자면 '회사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유한양행은 일제강점기나 군사정권기에 권력과의 유착을 단호히 거부하였으며 이 때문에 권력으로부터 이런저런 탄압과 견제를 받은 바 있습니다.

 

유한양행 명의 친일광고. 매일신보 1943년 1월 1일

 

 

 

3. 말년 : 형제에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다

 

 물론,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와 회사의 친일행적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설립자 유일한과 막내동생 유특한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해방 후 1946년 귀국한 유일한은 다시 사장으로 복귀하였고, 유명한 역시 유한제약 이사장과 한국제약협회 2대 회장을 지내는 등 기업가로 계속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반민특위에 끌려가지도 않는 등 잘 살았지요. 이 시기에 그는 일본 적산을 불하받아 '고려출판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였는데 이 기업은 해방 직후 출판업계에 큰 영향을 준 회사였다고 합니다.

 

 이와 별개로 형과 동생은 민족반역자가 되어 자신들의 신념과 회사 경영이념을 정면으로 거스른 그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독립운동을 했던 형 유일한의 배신감은 상상을 초월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나는 유명한이라는 동생은 알아도 '야나기하라 히로시'라는 일본인은 모른다"라며 사실상 큰동생과 연을 끊어버렸다고 합니다. 막내동생 유특한이 일본 유학을 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고, 이것조차 나중에 형에게 깊이 사죄했을 정도라고 하니 유명한의 친일 행적이 나머지 형제에게 어떻게 보였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특한은 나중에 일부 계열사를 가지고 독립하여 '유유그룹'을 창업하고, 역시 양심적 기업인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기업인으로 잘 나갔을지는 몰라도 그는 형제들에게 인간적으로 버림받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형제들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하지만 당연히 모두 무시당합니다. 그래도 당시 생존해 있던 삼형제의 어머니는 그가 모시고 피난하였는데,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부산 다대포에 정착한 유명한은 배를 타고 부산 중심가에 출퇴근하던 중 침몰사고가 발생하여 허무하게 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형 유일한은 말년에 막내동생 유특한에게 "친일파만 되지 않는다면 괜찮겠지"라는 내용의 말을 건넨 적이 있다고 알려졌는데, 동생 유명한의 친일 행적이 평생 한으로 남았던 듯합니다. 동생 자신뿐 아니라 유한양행이라는 회사 전체의 역사에도 큰 흠집을 남겼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아무리 그래도 나름 피를 나눈 형제여서 그랬던지, 형 유일한이 동생의 부고에 깊이 안타까워했다는 뒷이야기도 남아 있습니다.

 

 

 

4. 정리 : 흑역사도 역사다

 

 형 유일한이 워낙 잘 알려진 인물이라 그런지, 동생들은 나름 사회적인 활동이 많았음에도 알려진 게 그리 많지 않습니다. 블로거의 능력과 노력 부족을 탓하시오 그래서 유명한의 행적은 이름과 달리 그리 유명하지 않고, 일제강점기 언론에 남아 있는 기록들을 토대로 그의 친일 행적을 재구성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일생은 형 유일한과 비교하여 그 그늘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비록 그의 행적이 회사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역사가 거기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단언코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저런 이유로(회사를 지키기 위하여, 주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친일분자로 돌아선 많은 이들을 만났고, 이들이 위의 이유로 핑계를 대는 것 또한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습니다. 자신과 회사에 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항일운동에 참여하였고, 적지 않은 나이에 공작원 훈련까지 받아가며 한 몸을 아끼지 않았던 유일한이야말로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유한양행 연혁. (유한양행 홈페이지)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현재 유한양행에서 유명한과 그 시대의 행적을 철저히 감추고 언급조차 꺼려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유한양행은 일제강점기부터 세무조사 등 정치적 탄압을 버티며 성장한 것이 사실이나 그와 동시에 유명한의 주도로 애국기를 헌납하는 등 친일 행보를 보인 것 또한 지울 수 없는 사실이지요. 블로거는 유한양행이 양심적 경영과 사회공헌을 전통으로 하는 깨끗한 기업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비록 일부나마 명백한 흑역사를 감추는 데는 약간의 아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 어두운 과거까지도 솔직하게 드러내고 반성하는 것이야말로 양심적 기업이라는 전통에 더 어울리고, 설립자 유일한의 정신에도 부합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참고 : 

유일한박사 온라인기념관 (www.yuhan.co.kr/Founder/founder_main.html)

뉴스워커, "[광복절 기획] ‘민족기업’ 유한양행이 친일 행위를?…90년 역사 ‘옥에 티’" (www.newswork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73)

오마이뉴스, "[한국 기업인 열전 7]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24800)

일요신문, "[8·15 특집 기업과 친일] 유한양행 ‘유명한 악몽’" (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196461)

CNB뉴스, "[임정 100년 - 겨레 기업 (2)] 유일한 박사 독립정신 잇는 유한양행·유한킴벌리" (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27516)

정운현, "민족기업 유한양행도 '친일행적' 있다" (web.archive.org/web/20190109013236/storyfunding.daum.net/episode/4740)

한국어 위키백과 "유일한", "유명한(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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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년은 대한민국 국군의 건군 69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안타깝게도 국군은 출범 단계에서 옛 일본군 출신자들을 많이 받아들였고, 이들에 의해 일본군의 흔적이 상당 부분 이식되어 오늘까지 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첩보 및 보안업무의 중심에는 관동군 첩보부대원으로 근무했던 김창룡(1920-1956)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해방 전후에 걸쳐 있는 김창룡의 활약상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김창룡]




1. 국경의 관동군 첩보원


 - 김창룡의 고향은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요덕 수용소의 그 요덕)입니다. 빨갱이 때려잡은 사람의 출신지로 심히 적절하다 집안은 평범한 빈농(貧農)이었고, 그래서 김창룡 역시 고등교육을 받지는 못하고 2년제 농잠(농업+양잠)학교를 나왔습니다. 졸업 후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직물회사에서 잠시 일하다가 (신세를 바꾸어 볼 요량이었는지) 만주로 건너가 만주국 철도부(통칭 '만철')에 지원하여 합격, 역무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만철 특급열차 '아시아'호. 당시 만철은 만주지역 철도 뿐만 아니라 군대와 행정조직까지 갖춘 거대한 집단이었습니다]


 - 확실히 그는 머리가 좋고, 또 성실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만철에서 일하던 김창룡은 그의 성실성과 명석함을 눈여겨본 일본인 상관의 추천으로 관동군 헌병대에 입대, 헌병보조원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임무는 소련과 국경 일대에서의 첩보활동으로, 이 때부터 그의 기나긴 첩보 인생이 시작됩니다.


 - 헌병교습소에서 첩보요원으로 훈련을 마친 김창룡은 주로 소련 · 중국공산당에 대한 첩보활동을 벌였습니다. 1943년에는 중국공산당 소속 왕진리(王近禮)와 그가 이끄는 지하조직을 일망타진하는 공을 세웠는데, 이는 왕진리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2년여간 점원으로 위장근무하며 벌인 첩보 활동의 성과였다고 합니다.


 - 이렇듯 김창룡의 장기는 위장 · 침투와 역공작(逆工作)이었습니다. 이후로도 그는 철도노동자 감독으로 위장취업하여 첩보를 입수, 공산당 지하조직을 50여 개나 적발해내는 공적을 세웠습니다. 일반 병사 신분이었던 김창룡은 일련의 공적으로 1945년 1월 오장(伍長, 하사)으로 진급할 수 있었습니다.


 - 이렇게 관동군의 첩보요원(이건 좋게 표현한 것이고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밀정')으로 맹활약하던 김창룡에게 큰 시련이 닥쳐왔으니, 만주 작전으로 만주국이 멸망하고 만주 일대가 소련의 영향 하에 들어온 것입니다.




2. 빨갱이 때려잡기 전문가


 - 당연하게도, 공산당 때려잡던 밀정이 소련 치하에서 무사할 거라는 생각을 하긴 어렵겠지요. 해방 직후 김창룡은 황급히 고향으로 돌아왔고, 얼마 뒤에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딸과 결혼했습니다(대충 속내가 무엇인지 냄새가 좀 나지요?). 하지만 만주에 이어 한반도 북부를 장악한 소련군은 신분을 숨기고 조용히 살던 그를 가만 놓아두지 않았고, 김창룡은 철원과 영흥에서 보안대에 잇따라 체포되어 사형당할 처지에 놓이지만 두 번 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 더 이상 북쪽에 사는 건 불가능하니, 두 번째 탈출 이후 김창룡은 거지꼴이 다 된 채로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남쪽에서 그는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격렬한 좌우 대립 속에서 공산당 때려잡던 김창룡의 경력은 대단한 스펙(?)이 되었던 것입니다. 서울에서 한동안 백수로 지내던 그는 지인이자 만주군 출신인 박기병(당시 3연대 소대장)을 만나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였습니다.


 - 김창룡은 처음에는 일반 사병이었지만, 나름 하사관 출신인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박기병에게 부탁하여 3연대 하사관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곳에서 자신의 장기인 정보 관련 업무를 하던 김창룡은 역시 만주군 출신인 김백일(1917-1951, 당시 3연대장)의 추천으로 조선경비사관학교(現 육군사관학교)에 1947년 1월 입교, 4월(?!)에 소위로 임관하게 됩니다(당시는 국군 태동기였고, 장교를 일단 충원부터 해야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김삼룡과 이주하의 검거 소식. 1950년 4월 1일 동아일보]


 - 임관 이후 그의 진가가 발휘되는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군 내에 남아 있던 좌익 계열 장교들을 숙청하는 데 활약하게 된 것입니다. 군대 안팎에 있던 남로당(남조선노동당) 계열 인사들을 잇따라 체포하였고(그 중에는 김삼룡(1908-1950), 이주하(1905-1950) 등 남로당 최고위급 인사들도 있음), 여순사건 때는 반란의 진압과 사후처리(라고 해봐야 국군 내 좌익인사 숙청)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 반공주의가 대한민국의 국시로 굳어지면서 '빨갱이 때려잡기 전문가' 김창룡은 급속한 출세를 거듭하여 1948년에는 육군본부 정보장교, 1949년에는 방첩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는 활약을 바탕으로 대통령 이승만의 신임까지 얻게 되었고, 많지 않은 나이에 권력의 중심부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3. 김창룡식 빨갱이 관심법


 - 하지만 김창룡의 '빨갱이 때려잡기'는 여러 모로 무리가 많았습니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잡아들인 사람들에게 자신이 좌익인사라고 자백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어떤 식의 강요일지는 다들 짐작하시겠지요? 엄한 사람들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고통에 못 이긴 사람이 기억나는 아무 지인의 이름이나 내뱉으면 그 사람을 또 잡아다 고문하고......


[김정렬 초대 공군참모총장]


 - 한번은 창설 준비중인 공군 소속 장교 대부분(약 40여 명)을 한꺼번에 체포한 적이 있었는데, 깜짝 놀라 그들의 체포 경위를 묻는 김정렬(1917-1992,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로 불림) 대령에게 "증거는 없지만 앞으로 좌익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고. ㅡㅡ; 당연히 사방에서 욕을 먹었지만 그럼에도 권력에게는 유용한 존재였기 때문에 출세에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 권력이 그에게 원한 건 무엇일까요? 바로 권력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1949년 김구 암살사건이 있는데, 당시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는 육군 방첩대 소속 장교였기 때문에 방첩대장 김창룡 또한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김구 살해를 지시한 배후로 널리 의심받았지만, 정권의 비호를 받아 안두희와 함께 별 탈 없이 사태를 넘어갔습니다.


 - 1950년 한국전쟁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일단 그는 전쟁 발발 직후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로 추정되며(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후방지역 보도연맹원 학살을 지휘했다는 것), 서울 수복 후에는 인민군 부역자를 색출 · 처벌하는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김창룡은 부산 방첩대장, 평양지구 특무대장을 거쳐 1951년 육군 특무부대(現 기무사령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53년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여 별을 달았습니다.




4.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 특무부대장 김창룡은 권력(이승만이죠 뭘)을 위하여 각종 공안 사건을 조작하였습니다. '조작'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시 그가 처리한 대부분의 간첩 및 용공분자 사건이 허위라는 게 밝혀졌기 때문. ㅡㅡ; 물론 그가 처리한 공안 사건들은 권력에서 아주 유용하게 써먹었습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의 빌미가 된 소위 '금정산 공비 사건'을 처리한 것이 바로 김창룡의 특무부대였습니다. 


 - 이외에 1953년 국제간첩사건(이범석계 숙청을 위한 것이라는 설이 있음), 1955년 개천절 이승만 암살음모사건(실제 암살 시도가 있었던 건 사실이나 사건 경위는 크게 과장되었다는 게 정설) 등 권력과 직접 연관된 공안사건에는 김창룡과 특무부대가 끼지 않는 데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권력의 중추에 서게 된 김창룡은 그야말로 권력을 '남용'하게 됩니다.


[이승만에게 훈장을 수여받는 김창룡]


 - 1954년 김창룡은 특무부대와 사사건건 충돌하던 헌병사령관 공국진(-2014)을 해임하려 모종의 혐의를 뒤집어씌웠고, 정일권(1917-1994) 육군참모총장이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경무대(청와대) 빽을 내세우는 김창룡의 공세에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이후 공국진이 제2군사령부 참모장에 발령되려 하자 이것도 방해하여 무산되게 만들었고, 당시 제2군사령관 강문봉(1923-1988)까지도 빡치게 만들었습니다.


 - 결국 빡치다 못한 정일권과 강문봉은 이승만에게 직접 찾아가 김창룡을 제지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이승만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김창룡을 중용하였습니다. 이후 김창룡은 두 장군의 비리를 몰래 캐내는 등 쩔어주는 뒤끝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흥미롭게도 이승만은 김창룡에게는 두 장군의 뒷조사를, 정일권에게는 김창룡의 뒷조사를 지시했다는군요). 여하간 이런 식으로 좌충우돌하며 김창룡은 사방에 적을 만들었습니다.


 - 결국 일이 터졌으니, 1956년 1월 30일 특무부대로 출근하던 김창룡은 탑승한 지프가 잠시 정차한 사이에 허태영(1919-1957) 대령, 이유회(1929-1957) 중사 등의 습격을 받아 총알세례를 받고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승만은 소식을 듣자마자 친히 왕림하시어 그의 유해를 확인했고, 전군 장병의 외출 금지령까지 내려가며 범인을 찾았습니다. 2월 3일 김창룡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는데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葬)이었다고 합니다.




5. 정리 : 친일파의 반공주의 신분세탁


 - 김창룡은 일본의 충실한 개로 활약하다가, 일본의 후광이 사라진 뒤에는 반공주의의 선봉으로 변신하여 영광의 시절을 지속하였습니다. 이는 김창룡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친일파, 특히 군과 경찰 분야의 종사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김창룡은 거기에 관동군 시절의 행보, 그리고 해방 직후 공산주의 세력에게 당한 개인적 고난이 더해져 공산주의에 대한 순수한 증오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지고 그 양상이 공산주의 vs. 자본주의 대결구도로 재편되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이전 행위를 심판받을 기회를 뛰어넘어버렸고, 오히려 공산주의에 앞장서 싸우는 '반공투사'가 되어 새로운 사회의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친일 권력자들은 반공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이승만 세력과 손을 잡고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그대로 이어갔으며, 오히려 김창룡처럼 이를 몇 배로 불리기까지 하였습니다.


 - 물론 애초에 제국주의 일본 자체가 극렬 반공주의 사회였으니 그들에 협력한 사람들이 반공주의자인 것을 이상하게 볼 건 없습니다. 그리고 반공주의 자체도 민주사회에서 충분히 주장할 수 있고, 그들의 의견도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반공주의를 삐딱하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소위 '과거 세탁'을 위해 반공주의를 이용한 자들이 한국 내에서 반공의 선봉에 섰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 땅의 반공주의자들은 친일행위에 대한 진상규명 자체를 친북행위로 규정해 왔습니다]


 - 이것이 이후의 한국 사회에 얼마나 큰 폐해를 끼쳤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 중에서도 뼈아픈 부분은 일제점기 반민족행위를 규명하려는 노력 자체가 '빨갱이들의 준동' 쯤으로 치부되어 버렸다는 점입니다. 친일파를 비판하는 게 곧 '반공투사'를 욕하는 것으로 치환되어 버렸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아직도 일본 밀정이자 대한민국의 악질 정치군인 김창룡을 구국의 영웅으로 맹목적으로 칭송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입니다.


 - 네. 물론 김창룡은 유능한 정보군인이었고, 투철한 반공투사였을 수 있습니다. 그걸 공이라고 하면 그 의견은 존중해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과오(일본에 대한 협력, 무고한 이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를 없이하는 건 결코 아니지요. 이런 식의 흑백논리가 계속되는 한, 한국 사회는 뒤틀린 역사인식과 해석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어려울 겁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theme.archives.go.kr/next/history/kimcy/mean/mean_01.do (김창룡 저격사건과 김창룡 일대기 요약)

http://egloos.zum.com/nasanha/v/10987122 (산하의 오역)

http://www.idomin.com/?mod=news&act=articleView&idxno=484869 (경남도민일보 기사)

http://www.allinkorea.net/sub_read.html?uid=22154 (김창룡에 대한 긍정적 시각의 글)



[2016년 실업률. 출처 : 통계청 <2016년 12월 및 연간 고용동향>]


 - 2017년 1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고용동향에 따르면, 2016년 대한민국의 실업률은 3.7%로 전년 대비 0.1% 증가하였습니다. 사실 실업률 3%대라면 굉장히 양호한 것으로, 일시적 취업준비나 이직 등의 요소를 감안하면 거의 완전고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그리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상황이 영 다른 것 같습니다.


 - 분명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취업을 못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쩔쩔매고 있는데, 통계는 우리 사회가 아주 양호한 상태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실업률 통계가 우리의 체감과 다르게 나오고 있는지, 통계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 말입니다.




1. 실업률 산출의 진실 : 이 사람이 실업자가 아니라고요?


 - 일단 단어 정의부터 해 봅시다. 실업이란 "일할 의사와 능력이 있지만 일을 하지 않는(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실업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을 할 능력이 있고(즉 어디 중대한 장애가 있다거나 하지 않고)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즉 일자리를 구하고 있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상태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 '일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통틀어 경제활동인구라고 합니다. 실업자란 어디까지나 경제활동인구 중 일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가 생각하기엔 실업자이지만, 경제활동인구로 잡히지 않아 실업률 통계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대한민국 사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X라게 많습니다. ㅡㅡ;


 - 우선 학생은 경제활동인구에서 제외됩니다. 공부를 하고 있으니, 당장 일자리를 구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란 고등학교나 대학교 등 정규 교육기관에 재학하는 경우 뿐만 아니라, 입시학원이나 취업(공무원, 고시 등)준비학원 등에 다니는 경우도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학원에서 공무원시험 준비하는 수험생은 돈 한 푼 벌지 않지만 실업자가 아니게 됩니다. 물론 학원에 다니지 않고 취업을 위한 공부를 할 경우에도 경제활동인구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 그리고 그냥 쉬었을 경우에도 제외됩니다. 군 입대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경우, 일을 그만두고 이직하기까지 빈 시간이 있을 경우, 아예 취업을 포기해버린 동네 백수 등등 우리가 보기에는 놀고먹(?)는 실업자이지만, 국가에서는 이들을 실업자로 보지 않는 경우가 생깁니다. 연로한 사람들도 빠집니다(일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 전업주부 중에서도 취업을 하고 싶으면서 못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역시 일률적으로 비경제활동인구가 됩니다.




2. 실질적 실업률 : 한국은 실업률이 매우 높은 국가이다!


 - 즉 실업률 통계가 체감과 다른 것은 우리가 보는 '실업자'와 국가에서 보는 '실업자'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의 '백수'들이 모두 실업자인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사실상의) 실업자들을 합치면 실제 실업률은 얼마나 높아질까요?


[2016년 비경제활동인구 활동상태별 현황. 출처 : 상동]


 - 간단하게 통계를 가지고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일단 저기서 '기타' 항목의 인원(교육기관 외 취업준비, 진학준비, 군입대대기, 순수백수 등)은 거의 포함된다고 보겠습니다(+2,359,000명). '재학·수강 등' 항목에서 정규교육기관 재학생(2016년 기준 대학+전문대학 2,782,000명. 참고)을 제외하고 포함할 수 있겠습니다(+1,214,000명). '가사', '육아' 및 '연로' 항목의 경우 명확한 기준을 잡기 어려우니, 여기서는 일단 제외하겠습니다.


 - 이걸 가지고 계산을 해 보겠습니다. 공식적인 실업률은 실업자 수(2016년 1,012,000명) ÷ 경제활동인구(2016년 27,247,000명) 로 계산됩니다. 여기에 위에서 구한 '사실상 실업자'들은 분모와 분자 모두에 더해야 합니다(경제활동인구가 아니므로).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실질적 실업률'은 단순히 계산해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1,012,000+2,359,000+1,214,000 ÷ 27,247,000+2,359,000+1,214,000 × 100

     = 14.88(%)


 - 그렇습니다. 몇 가지 요소를 빼고도 실제 실업률은 15% 가까이 나옵니다! 이쯤 되면 통계적으로 실업률이 엄청나게 높아 보이는 미국이나 유럽 각국과 비교해 보아도 결코 꿀리지 않습니다. ㅡㅡ; 물론 그 쪽에서도 우리처럼 누락되는 '사실상 실업자'들이 다수 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는 수치입니다.


[2016년 취업자 수 및 고용률. 출처 : 상동]


 - 이번에는 통계를 뒤집어서, 고용률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얼핏 보기에도 고용률이 결코 높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고용률은 OECD 평균보다 대체로 약간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여성 전업주부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음을 감안해야겠지만(한국의 남녀 고용률 격차는 OECD 내 1위를 달립니다), 결국 그 빈 자리를 누군가 채울 것임을 감안하면 큰 변수가 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통계대로라면 한국은 실업률과 고용률이 모두 낮은 희한한 사회가 되어버립니다.




3. 정리 :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통계의 위험성


 - 본래 실업률 통계는 경기 동향을 파악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자료 중 하나지만, 이런 식으로 통계가 체감과 동떨어져서야 어디에도 써먹기 어려운 의미 없는 자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서 함부로 음모론스러운 이야기를 하지야 않겠지만, 중요한 참고가 되어야 할 자료가 이런 상태라는 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통계가 사회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점입니다. 실업률 통계만 보면 현재의 한국 경제는 역사상 최대 호황기라는 1990년대 초중반(당시 실업률은 2% 초반대였습니다)에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습니다. 바꿔 말하면 현재의 경제가 적어도 상당한 호황이라는 소리인데,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아마 별로 없지 싶습니다.


 - 이런 자료를 가지고 정부에서 제대로 된 경제정책을 세울 수 있을까요? 미국만 보아도 실업률 추이는 미국 경제의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데이터이며, 실업률 변화는 경제정책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대통령 선거 결과에까지 큰 영향을 주곤 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실업률 통계는 그 어느 곳에도 써먹을 수가 없습니다. 통계는 현실을 보여주지 못하고, 사람들은 통계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거의 유일한 용도가 있다면, 실업률이 낮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의 불만을 잠깐 동안 잠재우는 역할 정도일까요? 이는 통계의 거대한 함정에 빠지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줍니다. 통계를 통하여 세상을 본다는 것은 곧 그 통계에 의해 세뇌당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의미니까요. 우리가 생각 없이 접하는 통계를 좀 더 주의 깊게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참고 : 

http://kostat.go.kr/portal/korea/kor_nw/2/3/1/index.board (통계청 고용/노동 관련 통계)

http://www.index.go.kr/potal/main/EachDtlPageDet... (한국지표체계 고등학교 유형별 현황)

http://37start.tistory.com/595 (대학생 수 통계 출처)

http://oecd.mofa.go.kr/webmodule/htsboard/te... (OECD 실업률 동향)


 - '헬조선'이라는 말이 중요한 화두가 될 정도로 요즘 한국인들에게는 한국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그 중 일부는 아예 한국인과 한국 사회를 '뭘 해도 안될 열등종족'으로 비하하며 소위 '선진적'인 다른 사회를 찬양하는 극단적 행태를 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요즘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면? 이번에는 '한국인은 답이 없다'로 일관한 신념형 친일파, 박중양(1872?-1959)의 일생을 살펴보겠습니다.


[박중양. 1900년경]



1. 근성으로 출세한 가난뱅이


 - 박중양의 출신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었습니다. 아버지 박정호는 몰락한 향리 가문 출신으로, 경기도 양주에서 지주 집 마름 노릇으로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출신이 이렇다 보니 그의 초년은 분명히 알려진 게 별로 없는데, 일단 출생년도가 1872년인지 1874년인지 분명치 않고, 심지어 그가 반남 박씨인지 밀양 박씨인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ㅡㅡ; 초명은 박원근이었고, '중양'은 성인이 된 후 개명한 것입니다.


 - 초년의 박중양은 과거 시험을 보러 갈 돈도 없을 만큼 가난했지만,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출세욕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1880년대 처음 실시된 일본 유학생 선발에 응시하였지만 여러 차례 낙방하였습니다. 그는 급진개화파의 수장인 김옥균을 존경하였는데, 갑신정변 실패 이후 김옥균 일파가 죽거나 망명하고 결국 김옥균이 암살까지 당한 것에 크게 분노했다고 합니다.


[<김옥균씨 조난사건>.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을 소재로 하고 있다]


 - 유학생 선발에 계속 도전하면서, 박중양은 서울에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인들과 교류하면서 이런저런 기회를 타진하였습니다. 이후 1896년 독립협회가 출범하자 거기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드디어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약 7년간 일본에 국비장학생으로 유학하게 됩니다. 그런데 국비유학생인데도 생활비는 제대로 지원되지 않았는지, 유학기간 내내 그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다는군요.


 - 박중양은 우선 기독교 목사인 혼다 요이츠(1848-1912)의 식객으로 지내다가 그가 운영하던 아오야마학원(現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중학부로 진학하여 공부하였습니다. 이 무렵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이토는 그에게 경찰, 행정 쪽으로 집중해 보라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아오야마가쿠인대학]


 - 그렇게 그저 가난한 유학생1에 불과했던 박중양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의 아내가 바다에 빠져 위급한 상황에 빠졌고, 하필 거기 있던 박중양이 곧장 바다로 뛰어들어 그를 구했던 것. 자기 아내를 살려주고 그에 대한 사례와 선물도 일절 사양한 박중양의 태도에 이토는 꺼뻑 죽었다고 합니다. ㅡㅡ; 이후 박중양은 이토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박중양 또한 (의외로) 한국인을 차별대우하지 않는 이토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2. '한국인은 답이 없다'


 - 그런데 이 시기 고종 황제와 대립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와 관련하여, 박중양을 비롯한 유학생들은 '혹시 박영효의 일파가 아닌가' 의심하는 대한제국 정부의 감시와 미행을 당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유학비와 자객을 동시에 선사하는 고국의 모습에 진절머리를 냈고,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대한 혐오를 점차 키워가게 됩니다.


 - 일본에서 그가 전공한 것은 (이토의 조언을 따라) 경찰과 행정 업무 쪽이었습니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박중양은 도쿄 부기학교에서 금융 업무를 전공하였고, 동시에 도쿄 경시청(경찰청)에 연구생으로 들어가 경찰 분야를 깊이 공부하게 됩니다. 그의 일본 생활은 매우 성실해서 다른 유학생들이 흔히 빠지는 유흥과 잡기에도 거의 손을 대지 않았으며, 야마모토(山本)라는 일본식 성을 쓰며 일본의 엘리트 계층과 활발한 교유를 했다고 합니다.


 - 1903년 귀국하여 곧바로 관리서(管理署) 주사(主事)로 임용되었지만, 개혁세력을 적극 등용해야 한다는 자신의 상소가 황제에게 올라가지도 못하는 일을 겪은 후 바로 관직을 박차고 나와버렸습니다. 다음 해 러일전쟁이 터지자, 박중양은 일본군 고등통역관으로 취직(?)하여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활동하였습니다. 유학시절과 일본군 종군시절을 통하여 그는 일본인의 신의와 친절함에 매료되었고 ㅡㅡ; 이는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대한 혐오를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 1904년 11월 농상공부 주사에 임명되었지만, 자신의 상소가  외면당하자 자청하여 대구로 내려가 한국인 관료와 일본인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박중양은 상대적으로 일본 편을 들거나 중립적 입장에서 일을 처리하였고, 일본인들의 신뢰와 호의를 얻게 됩니다. 1905년 2월에는 잠시 진주 판관 겸 진주군수 서리에 임명되는데,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유명한 촉석루를 제외한) 진주성의 일부를 해체하는 위업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ㅡㅡ; 지방관으로 가서 반달리즘이라니


[진주성은 해방 이후 수십 년이 지나서야 옛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게 됩니다]


 - 이후 6월에는 의친왕 이강을 대표로 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도쿄를 방문,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습니다. 이 때 스승 이토 히로부미를 다시 만난 박중양은 "한국은 도저히 답이 없으니, 미국 유학이나 하고 싶은데 좀 도와달라"고 요청하였지만, 이토는 엄격 진지 근엄한 표정으로 계속 관직에 있을 것을 권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수행원 임무가 끝난 이후 도쿄에 남아 다시 유학하고, 다음 해 귀국하였습니다.


 - 귀국한 박중양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으로 임용되었고, 이후 그는 이토와 통감부를 뒷배경으로 쾌속승진을 할 수 있었습니다. 1906년 7월 대구 판관으로 파견된 박중양은 그 길로 대구군수로 임명되었으며, 취임하자마자 대구군청 신축부터 강행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는 대구군수 재임기에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구읍성을 해체하는 또 하나의 위업을 세웠습니다. ㅡㅡ; 성곽 해체 전문가


[당시 대구 동쪽 성벽을 허문 자리에 개설한 도로가 그 유명한 대구 동성로]


 - 그래도 이때까지는 나름 생각은 있었는지, 을사조약과 고종 강제퇴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그는 이후 평안남북도와 전라남도, 경상북도 관찰사(도지사)를 역임하였으며 한일병합 직전에는 충청남도 관찰사로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한일병합 당시에는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에 국민이 충성할 의무는 없다"며, 슬퍼하지 말 것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말하는 사람이 사람이라



3. 일제강점기의 활약(?)상


[박중양의 친필 휘호]


 - 병합 이후로도 박중양은 지방과 중앙을 오가며 관료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1910년대 후반과 1930년대 두 번에 걸쳐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1940년대에는 중추원 고문으로 승진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충청남도, 황해도(2회), 충청북도 도지사를 역임하는 등 지방 관료로서 활동도 두드러집니다.


 - 3·1운동 때는 자제단(시위 중단을 설득, 종용하며 적극 참여자를 신고하는 일을 하였던 친일 성향 단체)의 창설을 주도하였고, 경성(서울)과 대구 지역 자제단을 조직하여 이끌었습니다. 재미있게도 박중양 개인은 한국인 노점상을 괴롭히던 일본인을 아끼던 지팡이로 두들겨 팬다든지, 일본인들 앞에서 대놓고 비판적 언사를 서슴지 않는 등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딱히 한국인으로서라기보단 '조선인도 똑같이 일본 신민이 되었는데 왜 사람 차별하는가'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 1923~25년 사이 충북도지사로 재임하던 시기에는 이런저런 스캔들을 일으켜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1924년 속리산을 유람하던 중 비 내리는 진흙탕 길(現 말티재)에서 진종일 고생한 박중양은, 빡친 나머지 보은군수에게 대대적인 신작로 공사를 지시하였습니다. 이후 공사 과정에서 인근 지역 주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노역을 해야 했고, 심지어 농번기에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크게 반발하여 토목기사와 순사를 집단폭행하는 등 소요사태로 번지기까지 했습니다.


[박중양이 지시한 도로공사와 농민 소요 기사. 1923년 6월 16일 동아일보]


 - 그해 말에는 더 큰 스캔들을 일으켰으니, 속리산의 산사(山寺)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 등 귀빈을 대동하고 술자리를 가진 후 취중에 여승 한 명과 성관계를 하고, 그 여승이 며칠 후 변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이 사건은 '권력자의 성추문'이라는 특성상 수사조차 제대로 되지 않다가, 다음해가 되어서야 동아일보 등의 폭로로 세간에 알려졌고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박중양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처벌은 받지 않았다


 - 이런 대형 스캔들을 연달아 일으키고도 총독부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위해 유용한 인물이었으니, 이후로도 박중양은 중추원과 지방행정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 박중양은 조선인 참정권 운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얼핏 보기엔 좋은 취지같지만 일본 중의원에 조선인 쿼터를 허용해달라는 등 '일본 국민의 일원'으로서 참정권을 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같은 시기 유행한 자치론과도 통합니다).


 - 당연하게도, 1930년대 후반부터는 다양한 친일단체에 이름을 걸고 활동하며 일본의 전쟁 수행에 협조하였습니다. 1944년에는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발기인과 대주주로 참여하였고, 1945년 초에는 조선인 몫으로 할당된 일본 귀족원 의원 7명(박중양, 윤치호 등)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1942년에도 선임되었으나 본인이 거부). 당시 일본은 중의원(하원) 임기가 만료되면 다음 선거에서 조선인 몫으로 23명을 선출하도록 할 생각이었다는군요. 소원이 이루어졌다! 정말로??



4. 해방 이후 : 나는 떳떳하다. 너희들이 노답일 뿐


 - 귀족원 의원에 선임된 후 박중양은 윤치호 등과 함께 감사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는데, 그 직후 이탈리아와 독일의 패망 소식을 듣고 '일본도 머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합니다. 그는 해방 직전인 8월 10일 집안의 하인과 피고용인들을 약간의 퇴직금과 함께 내보내고, 해방 직후 자신의 집과 재산을 모두 처분하였습니다. 그는 이 재산을 경성 근처의 양로원과 보육원에 무기명 기부한 후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 당연히 그는 친일 반민족분자의 수괴로 지목되어 가는 곳마다 욕설과 드잡이, 심하면 투석(投石)까지 당하곤 했는데, 그는 시종일관 당당했고 "나는 민족에 반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에 더하여 "조선시대보다 일제강점기가 훨씬 살기 좋았으며, 일본은 한국을 착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원조가 여기에 또한 독립은 미국의 은총으로 우연히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독립운동가라고 어깨에 힘 주는 사람들은 전부 위선자에 불과하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 1945년 말 박중양은 미군정 간부들과 이승만 등을 만나, "가뜩이나 인재가 부족한데 친일행위자를 왜 처벌하려 드는가? 난 어차피 위선자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으니 처단하려거든 나를 처단하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좌우 대립이 격화되자 한국인이 과연 독립할 자격이나 있는 놈들인지 모르겠다고 조롱한 적도 있다는군요. ㅡㅡ;


[반민특위에 출두하는 박중양]


 - 당연히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 수감되었는데 당시 그를 조사한 수사관은 "다른 기회주의 친일파와는 다르게 박중양은 몸만 한국인이지 생각과 행동은 그냥 일본인 그 자체였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재판에서도 자신의 주장과 조롱을 굽히지 않았고, 애국지사연하며 부정하게 산 놈들보다 자신은 훨씬 떳떳하다고 항변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는 평생 관료로 살면서도 부정축재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반민특위가 흐지부지된 뒤 병보석으로 석방되었고, 부모의 묘소를 대구 오봉산(現 침산공원)으로 이장한 뒤 자신도 그곳에 은거하며 남은 생을 살았습니다. 1957년 신년에는 이승만더러 "미군 없으면 도망이나 칠 놈"이라며 조롱하는 등 개X끼 vs. X발놈 당시의 정부통령을 싸잡아 욕하다가 명예훼손으로 입건된 적도 있었고, 정부는 주둥이를 멈추지 않는 박중양을 아예 정신병원에 처넣으려 했지만 그는 1959년 사망할 때까지 완강하게 버티며 정신병원 수감을 거부하였습니다. ㅡㅡ;



5. 정리 : '국개론'은 지극히 위험하다


 - 실로 뭐라 판단하기 어려운 박중양의 일생을 훑어보았습니다. 박중양은 자기 민족이 쓰레기이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은, 앞서 살펴본 기회주의자들과는 다른 '확신범'이었습니다. 그가 이런 생각에 도달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가 누구보다 영민하고 현실을 정확하게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친일행위는 개인의 출세를 위한 기회주의적 친일과는 엄연히 다르면서도 그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얼핏 보면 비슷한 행보를 걸었던 윤치호와 비교해도 그 차이가 드러납니다. 윤치호의 사상이 '한국인은 현상태로는 답이 없으니 일본의 지배를 받아서라도 근대로 발전해보자'였다면, 박중양의 그것은 '한국인은 뭘 해도 답이 없으니 그냥 일본인이 되어버리자'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끝까지 놓지 못하고 애매한 태도를 유지한 윤치호와 다르게, 박중양의 행적은 (심지어 그게 한국인에게 이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철저히 '일본인으로서의 한국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 여기까지 보고 나서 현재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 살짝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한국 사회의 침체와 혼란이 장기화되면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국은 더 이상 답이 없다" "한국인은 썩어빠진 놈들" "한남충을 재기하자" "노무현 운X하盧?" 등등 극단적인 담론이 창궐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거, 곰곰이 생각해 보면 100년 전 박중양이 내린 결론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 박중양이 결국 어떤 인생을 살았나 생각하면, 이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어쨌거나 이런 사회에 살고 있는 당신은 어떤 결론을 내리시겠습니까?]


 -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라면, 박중양도 윤치호도 처음에는 자신들의 사회에 대한 건설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들의 의지를 꺾은 것은 자신의 이상과 반대로 돌아가는 세상,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한 절망감이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피와 땀을 흘리며, 결국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헌신한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들의 절망은 '너무 성급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 박중양과 윤치호가 뭐라 생각했든, 한국이 강대국에 의해 독립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일정한 역할을 했음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도 "한국인은 노답"이라며 욕설과 한탄을 멈추지 않는 분들께 (거기에 일정 부분 동의하면서도) 이 말 하나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한두 해 노력한다고 역사는 전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든다면, 백 년이든 천 년이든 역사는 결국 전진합니다. 포기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egloos.zum.com/nasanha/v/11014289 ('산하의 오역')



 -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1906-1965)가 친일행위를 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면서, 수년 전 큰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애국가의 작사자로 가장 유력하게 추정되는 윤치호 역시 민족반역자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국가(國歌)를 친일파들이 만들었다는 게 논란의 핵심. 당시에는 국가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지만 현재는 흐지부지 넘어가게 된 듯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국민이 알지만 동시에 제대로 알지는 못하는, 안익태라는 사람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안익태]



1. 숭실학교의 유망주, 유학길에 오르다


 - 안익태는 1906년 12월 평양에서 7형제 중 셋째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집은 객주(위탁판매, 중개 등을 하는 중간상인)업을 하였다고 하며, 그의 바로 앞 형인 안익조(1903-1950)는 일제강점기 의사와 군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안익조 또한 안익태처럼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고 하며, 일본군 장교(군의관)로 복무한 이력 덕분에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형제가 사이좋게 친일행위


 - 안익태는 평양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숭실고등보통학교(해방 이전에는 숭실학교가 평양에 소재)에 재학하였는데, 여기서 서양음악을 배우면서 재능을 보였습니다. 음악 외에 특이한 이력으로는 숭실학교 야구선수로 활동한 적이 있는데, 숭실중학의 4번타자로 전조선야구대회까지 출전했다니 운동선수로도 꽤 재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1922년 10월 17일 동아일보에 실린 야구대회 기사. 선수명단에 안익태의 이름이 있습니다]


 - 이후 안익태는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는 흔히 1921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확실한 것은 아닌데 상술했듯이 1922년 야구대회에 숭실학교 대표로 출전한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세이소쿠 중학교(現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에 음악특기자 자격으로 입학하였고, 1926년에는 구니타치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첼로를 전공하였습니다.


 - 안익태는 구니타치 학교를 졸업한 1930년 미국으로 유학, 신시내티 음악원과 커티스 음악원 등에서 첼로와 지휘를 전공하였습니다. 미국에서 그는 유명 지휘자인 레오폴드 스토콥스키(1882-1977)와 교류하였고, 스토콥스키의 도움으로 카네기홀에서 연주회를 가지는 등 음악가로 본격적인 데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인교회의 음악감독을 맡는 등 지휘 활동도 이어갔습니다.



2. 유럽 진출과 활동


 - 안익태가 처음 유럽 땅을 밟은 것은 1936년이었습니다. 이 때 그는 파울 힌데미트(1895-1963), 펠릭스 바인가르트너(1863-1942) 등을 만나 교류하고, 바인가르트너의 도움으로 헝가리 부다페스트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를 맡아 유럽 무대에 데뷔하였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하고, 1938년 아일랜드에서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유럽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안익태. 1940년]


 - 이 때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사실과 다르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이 인연을 맺은 건 빨라도 1941년 이후이고, 그나마도 후술할 안익태의 친일 행적과 연관이 있다는 것. 일단 확실한 것은 1938년부터 3년간 헝가리 리스트 음악원에서 코다이 졸탄(1882-1967) 등에게 작곡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 안익태의 대표작인 <한국 환상곡>의 경우, 미국과 유럽을 오가던 1936~37년 사이에 작곡되었고 1938년 더블린에서 초연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애국가의 그 선율은 그 이전인 1935년 미국에서 구상하였고(애국가 작곡 시기는 표절 논란과도 관련이 있어 중요), 6.25 전쟁 이후 마지막 부분이 추가되어 현재 우리가 아는 <한국 환상곡> 전곡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인데, 자세한 논란은 후술합니다.


 - 지금이야 작곡가로 알려져 있지만, 안익태의 주요 활동은 어디까지나 지휘였고 1930년대 후반~40년대 초반에 걸쳐 유럽 각지의 오케스트라에서 지휘를 맡아 활동하였습니다. 자, 그런데 바로 이 시기의 활동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3. '에키타이 안'의 친일 행적


 - 2006년 유럽에 유학하여 음악학을 공부하던 송병욱씨는 1942년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1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안익태가 자신이 작곡한 <만주국 환상곡>을 지휘한 동영상을 소개하며, 안익태의 친일 의혹을 본격적으로 제기하였습니다. 이미 2000년경 비슷한 의혹이 제기된 적은 있었는데, 당시 단순히 '안익태의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 영상'으로 알려진 게 사실은 만주국 기념 음악회였음을 밝혀낸 것입니다.


[안익태의 <만주국 환상곡> 지휘 장면]


 - 더 나아가서 <만주국 환상곡>의 음악이 <한국 환상곡>과 상당 부분(특히 6.25 이후 추가된 부분) 일치한다는 것도 새롭게 알려졌습니다. 당연히 음악계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고, 거센 논란이 벌어집니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도 안익태의 해방 전 유럽 활동은 그 세부적인 내용이 잘 밝혀져 있지 않았는데, 이를 파헤쳐 보니 대부분 친일 행적이었다는 것입니다.


 - 이후 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는 게 속속 드러납니다. 일단 안익태는 유럽 활동 내내 일본식 이름인 '에키타이 안'으로 활동하였으며, 흔히 '유럽 각지에서 지휘 활동을 하면서 <한국 환상곡>을 연주했다'고 막연히 알려진 것도 대부분 <에텐라쿠>나 <교쿠토(극동)> 등 프로파간다성 작품들을 연주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심지어 1941년에는 명치절(메이지 덴노 생일) 축하 음악회에서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연주한 것까지 새로 알려졌습니다. ㅡㅡ;


 - 이 과정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관계 또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당초 슈트라우스의 도움으로 유럽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통설과는 달리, 실제 안익태를 도운 것은 주로 '일본-독일협회'의 지원이었고 슈트라우스와 인연을 맺은 것도 오히려 이 단체의 주선을 통해서였다는 것. 실제로 안익태는 슈트라우스의 제자도 아니었으며 단순히 한두 번 만났을 때 자기 작품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을 들은 게 크게 부풀려졌을 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습니다.


[에하라 고이치의 기고문]


 - 2015년에는 안익태의 후원자로 알려진 일본 외교관 에하라 고이치의 글이 새롭게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1952년 일본 음악잡지에 기고한 <안익태 군의 편모>라는 글에는 안익태의 이런저런 친일 행적과, 슈트라우스와의 관계 등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일단 여기서도 안익태가 슈트라우스에게 지도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 여부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안익태 본인이 '슈트라우스의 제자'라는 간판을 이용하여 유럽 각지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4. 마요르카에서의 말년


 - 어쨌거나 유럽 각지에서 활동하던 안익태는 1944년 파리에서의 지휘를 마지막으로 스페인으로 거점을 옮겼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전범으로 몰릴 위험을 피하고자(안익태는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독일에서의 친일 활동이란 곧 나치에 협력하는 것이기도 했으므로) 중립국인 스페인으로 도피한 것이라는 주장이 많습니다.


 - 이후 1946년에는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선임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임하였고, 같은 해 스페인인 롤리타 탈라베라(1915-2009)와 결혼, 스페인 국적을 취득합니다. 이후로는 마요르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스위스와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객원 지휘를 맡기도 하였습니다. 1958년에는 미국 할리우드에서 <한국 환상곡>의 완성된 버전을 공연한 바 있습니다.


[1960년대 초, 5.16 '혁명' 기념식에서 지휘하는 안익태]


 - 해방 이후 안익태가 처음 한국을 찾은 것은 1955년인데, 하필이면 대통령 이승만의 생일 기념 연주회를 지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ㅡㅡ; 이후 고국에 뭔가 봉사하고 싶었는지 잠깐, 친일파였잖아 군사정부와의 협조로 1962년부터 3년간 서울 국제음악제를 주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음악제는 이후 재정난과 국내 음악계와의 마찰 등의 사유로 이어지지 못했고, 여기에 안익태는 큰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 결국 얼마 뒤 안익태는 간경화증 진단을 받았고, 1965년 7월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이후 더 이상의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두 달 뒤인 9월, 안익태는 간경화가 악화되어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병원에서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5. 정리 : 사후의 논란과 애국가 문제


 - 그의 사후 <한국 환상곡>은 한국의 역사와 정신을 상징하는 관현악곡으로 평가되며, 적어도 한국 내에서는 꾸준히 연주되는 레퍼토리였습니다. 애초에 그의 생전인 1940년대에 <한국 환상곡>의 일부인 애국가가 대한민국의 국가로 선정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안익태와 애국가는 심지어 안익태 본인의 생전부터 이런저런 논란에 휩싸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 일단 1960년대 처음 불거진 애국가 표절 논란입니다. 1964년 서울 국제음악제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불가리아계 미국인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는 "애국가는 불가리아 노래를 표절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연구로는 애국가가 만들어진 것이 안익태의 유럽 방문 전이었고, 유럽 지역의 노래를 일일이 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표절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게 유력합니다.


[애국가 표절 논란의 주인공인 불가리아 노래 <오 도브루자의 땅이여>. 정말 비슷하게 들리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 표절 논란은 이렇게 흐지부지됐지만, 2000년대 안익태의 친일 행적이 잇따라 발굴되면서 애국가는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친일파의 곡을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쓸 수 있는가'라는 것. 뿐만 아니라 애국가 저작권 문제도 제기되면서 그야말로 '노래 하나에 전국이 들끓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일단 저작권 문제는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롤리타 안이 쿨하게 저작권을 포기하면서 일단락되었고, 애국가 교체 논란도 현재는 어느 정도 잦아든 것으로 보입니다.


 - 어쩌면 안익태의 일생은, 왕족이나 엘리트 관료의 삶보다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더 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모로 생각해 볼 때, 그의 친일 행적은 유럽에서 음악가로 출세하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적극 이용한 결과가 아닐까 추측됩니다. 물론 그가 서양음악 불모지에서 대단한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한 음악가임에는 틀림 없지만, 그와 함께 그 재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항상 고민해야 한다는 교훈을, 그의 일생은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는 건 아닐까요?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ahneaktai.or.kr/?page_id=62 (안익태 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osen.mt.co.kr/article/G1109303001 (야구선수 안익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15474 (송병욱씨 인터뷰)

http://weekly.donga.com/List/3/all/11/78800/1 (친일논란 관련 주간동아 기사)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5102808201102638&mobile=Y (에하라 고이치 관련 기사 1)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575 (에하라 고이치 관련 기사 2)



 박흥식(1900-1994)은 화신백화점으로 유명한 화신그룹의 창업자로,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한국인 기업가입니다. 당시 화신백화점은 시대를 앞서간 경영을 통하여 일본의 백화점 체인과 대등하게 맞짱 뜨는 굴지의 대기업체였지요. 하지만 그 뒷면에는 박흥식과 조선총독부의 긴밀한 유착관계가 깔려 있었고, 이는 해방 이후 만개한 정경유착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의 백화점 왕, 박흥식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박흥식]




1. 쌀집 주인에서 백화점 재벌까지


 박흥식은 1900년(호적상으로는 1903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이천 석 부농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 박창식은 평양 대성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1910년대 중반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 박제현 또한 민족운동에 참여한 것이 알려져 있고, 1916년 홧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박창식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졸지에 일가를 떠맡게 된 16세의 박흥식은 학업을 중단하고 진남포(남포)에 미곡상을 개업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박흥식의 상술이 장난이 아니었던지라, 박흥식의 가게는 날로 번창하였습니다. 박흥식은 1920년에는 자본금 5만 원(대략 ×1만~10만 정도를 하면 현재 환율과 대강 맞는다고 합니다)으로 인쇄업을 시작했고, 이후 지물(종이)업, 학용품 등 단기간에 대단한 사업 확장을 이루어내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미곡상은 곡물 수탈과도 연관되어 중요한 사업이었습니다]


 진남포를 평정(?)한 박흥식은 지금까지의 사업체를 정리한 후 1926년 경성에 레이드입성, 황금정(現 을지로2가)에 '선일지물주식회사'를 개업하였습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박리다매 원칙으로 경성 일대의 종이 소매상과 문구업자, 인쇄업자, 신문사 등을 끌어들였고, 때마침 조선총독부의 초등교육 확대로 교과서와 종이 수요가 급증하면서 선일지물은 불과 1년 남짓만에 경성 종이 수요의 20%를 담당하는 거대 기업체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흥강자의 등장에 기존 일본인 거상들이 적잖은 견제를 하였고,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이 한반도와 일본에도 직격탄을 날리면서 박흥식의 사업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박흥식이 주목한 것은 다양한 품목을 다루면서 대량의 상품을 거래하는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경성에는 미쓰코시, 조지야 등 일본의 백화점 체인이 일본인 상권을 중심으로 영업하고 있었습니다.


 백화점 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정한 박흥식은 1931년 종로2가에 자리한 귀금속상 화신상회를 인수하고, 이를 화신백화점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신화(神話)가 시작됩니다.




2. 화신백화점의 신화창조


 박흥식은 거금을 투자하여 화신상회 자리에 지상 7층의 고층건물을 지었습니다(당시에 이 정도면 한반도 전체에서 손꼽히는 대형 건물). 그런데 화신백화점은 시작부터 거친 경쟁에 내몰려야 했으니, 바로 옆에 최남(역시 한국인 거상이었으며 덕원상회, 요정 국일관 등으로 유명)이 '동아백화점'을 개업한 것입니다. 박흥식과 최남 모두 시대를 앞서가는 경영의 달인이었으며, 종로 바닥에서 그야말로 불꽃 튀는 혈전이 펼쳐집니다.


 동아백화점이 개업 첫 날 매상의 1%를 빈민구제사업에 내놓자, 화신백화점은 주택 한 채를 경품으로 내놓으며 맞섭니다.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마케팅 전쟁이 펼쳐졌고, 경성 상업대전(?)의 승자는 결국 화신백화점이 되었습니다. 출혈경쟁 과정에서 악재가 겹친 동아백화점이 경영난에 빠지자, 박흥식은 최남으로부터 동아백화점을 인수하고 두 백화점 건물 사이에 구름다리를 연결하여 하나의 쇼핑센터로 만들었습니다.


[전성기의 화신백화점]


 이제 화신백화점은 미쓰코시-조지야에 대항하는 조선인 상권의 상징이 되어 있었습니다. 화신백화점은 1935년 경영난과 파업에 시달리던 평양 평안백화점을 인수, 화신백화점 평양지점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박흥식은 다시 새로운 형태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전국의 잡화상을 가맹점으로 만들어 화신의 이름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일종의 프랜차이즈 사업이었습니다.


 1934년 가맹점 모집 광고를 시작으로, 쇄도하는 신청자 중 300여 곳을 엄선하여 화신연쇄점 프랜차이즈가 출범하게 됩니다. 이들은 화신백화점의 거래선을 활용하여 일본 등지의 수입품을 수월하게 조달받고, 고객이 상품을 고르는 견본시장과 상품을 보관하는 대형 창고 등 당시로는 획기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사업도 대박을 냈고, 거상 박흥식은 금광왕 최창학, 경성방직 김연수와 함께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박흥식이 승승장구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1935년 1월에는 화신백화점 본점의 두 건물 중 한 쪽(서관)이 큰 화재로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보험을 통하여 피해액은 거의 보전할 수 있었고, 박흥식은 오히려 서관을 더욱 큰 규모(지하1층, 지상6층)로 재건하여 1937년 11월 오픈하였습니다. 이 건물에는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5층에는 고급 식당가가 있어 부유한 한국인의 나들이 코스로 인기가 높았다고 합니다.


[화신백화점 내부 구성]




3. 조선총독부와의 유착, 그리고 친일


 물론 화신백화점의 급성장은 기본적으로는 박흥식의 경영 수완으로 가능했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했던 것이 박흥식과 일본 지배자들과의 유착관계였습니다. 선일지물을 경영하던 1920년대부터 박흥식은 조선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1935년 화신연쇄점 사업을 시작할 때는 식산은행으로부터 3천만 원이나 대출을 받았고, 화신백화점 화재사건 때는 '경성 내 소방장비 부족'을 핑계로 총독부로부터 종로경찰서 구관을 임시 사옥으로 임대하기도 했습니다.


 노골적인 봐주기라며 여론이 들끓었지만, 이를 수습한 건 오히려 총독부였습니다. 이러한 특혜가 과연 그냥 가능했을까요? 그래도 이 무렵까지는 박흥식-총독부 사이의 유착이 직접적인 친일행위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급속히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사정이 좀 달라졌습니다. 이제 박흥식이 총독부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1938년 발족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 이사로 재임한 것을 시작으로, 박흥식은 이런저런 친일부역단체의 중역을 맡거나 <매일신보> 등 언론을 통해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등 일본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건 주로 예술가나 언론, 정치인에게 어울리는 것이죠. 조선의 대재벌 박흥식은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하나, 바로 '자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44년 2월, 박흥식은 자본금 5천만 원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이하 조선비행기)'를 설립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쩨쩨하게 전투기 값 정도 헌납하는 게 아니라, 아예 비행기 공장을 만들어버린 겁니다! 당연히 회사 설립은 총독부의 적극 지원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조선비행기는 경기도 안양에 있는 조선직물회사와 동양방적 공장 부지를 접수하고, 주변 토지까지 강제수용(즉, 강탈)하여 거대한 공장을 구축하였습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군수공업이었으므로), 공장 노동자는 대부분 강제징용자로 채워졌습니다. 첨단 기술이 필요한 비행기 생산라인은 총독부의 중개로 관동군(만주 일대의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으며, 조선비행기(내지는 화신재벌)는 그 보답으로 한반도의 생산물(직물과 해물 등)을 관동군에 헌납하였습니다. 일본 당국의 전폭적 지원으로 시작된 조선비행기는, 박흥식에게는 친일행위임과 동시에 새로운 노다지 사업이기도 하였습니다.


 애석하게도(?) 조선비행기는 본격적인 비행기 생산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사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1945년 5월 테스트 1호기가 완성되어 8월에 시험비행까지 마쳤고, 9월에는 2, 3호기를 만들어 테스트한 후 대량생산에 들어갈 계획이었지만, 1945년 8월 15일에 모두가 아시다시피......




4. 해방 이후, 흔들리는 박흥식 신화


 8·15 해방은 일본과의 유착으로 성장한 박흥식에게는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물론 박흥식 본인이야 당시에는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현재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3~40대의 나이에 한국 최고의 재벌이 된 박흥식은 아직 일생의 절반도 지나지 않은 이 시기부터 기나긴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일단 박흥식은 군수기업이었던 조선비행기를 잽싸게 매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장 청산자금을 횡령하거나(5천만 원 중 2천만 원), 미군정에서 주민에게 배급할 물자를 불법으로 매매하여 수백만 원의 폭리를 취한 혐의로 1946년 기소되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ㅡㅡ; 이후 박흥식은 화신백화점, 흥한피복, 화신무역을 중심으로 그룹을 재편하였고, 1947년에는 흥한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박흥식의 친일행위를 모르는 바 아니었고, 1947년에는 산하 기업인 흥한피복 노동자들이 그를 친일파라고 비난하자 그 주동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쭉 살펴보면 박흥식은 해방 후에도 권력자들과 유착하여 자신의 탈법행위를 정당화하고 자신과 기업을 보호하는, 전형적인 매판자본가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박흥식 체포 뉴스. 경향신문 1949년 1월 11일자]


 어쨌든 혼란 속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친일반민족분자 청산을 목표로 특별법과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하자 박흥식은 미국행 여권을 가지고 도피하려 하지만 실패, 제1호 검거자라는 영예(?)를 안게 됩니다. 체포 당시 박흥식은 "서류 정리를 위해 5분만 시간을 달라"고 체포조에 간청해놓고, 뒷문으로 몰래 도주를 시도했다고 합니다. ㅡㅡ;


 박흥식이 제1호 타겟이 된 것은 그가 미국으로 도피하려고 한다는 정황이 입수되었고, 그가 정치계에 광범위한 인맥(특히 장택상 등 경찰 쪽 인맥)을 가지고 있어 반민특위 활동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후 반민특위 자체가 와해당하고, 박흥식은 재판에서 '공민권 2년 정지'라는 같잖은 구형을 받았으며 이조차도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게 됩니다.


[한국전쟁으로 불탄 화신백화점]


 일단 단죄받지는 않았지만 이후 박흥식의 사업은 갈수록 꼬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단 1950년 한국전쟁으로 화신백화점 전체가 불타버렸고, 뼈대만 남은 건물은 어찌어찌 재건했지만 전쟁기 물자부족으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박흥식은 본래의 화신백화점 점포를 민간에 대규모로 임대하는 한편, 1955년 백화점 맞은 편에 2층 가건물을 지어 '신신백화점'으로 개업했습니다.


[1970년대 신신백화점. 딱 봐도 허접(?)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유리창을 넓게 다는 등 꽤 볼만한 건물이었던 모양]


 이렇게 계속 사업이 계속되긴 했지만, 1950년대 경제적으로 피폐한 한국에서 대규모의 유통업이 번창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충무로 일대의 옛 일본계 백화점을 인수한 새로운 경쟁자들에게도 조금씩 밀리면서 박흥식의 신화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박흥식은 말 그대로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게 됩니다.




5. 시대에 뒤처진 매판자본가의 몰락


 1961년 5·16 쿠데타가 발생하자 박흥식은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고, 거액의 정치자금을 헌납한 후 풀려났습니다. 권력자가 바뀌어도 그놈의 매판자본가 기질은 어디 가질 않아서, 화신그룹 주도의 신도시 개발을 추진하거나(이미 1930년대에 박흥식은 현재의 불광동 일대에 신도시 개발을 추진한 바 있음) 정부의 협조로 거대한 섬유공장을 짓는 등 권력을 등에 업고 유통업 중심의 사업을 다각화하려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박흥식의 경영은 먹히지 않게 됩니다. 새로운 권력자들이 박흥식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선 박정희는 박흥식의 1930년대 신도시 개발계획을 접한 후 한강 남쪽에 대규모 택지개발을 계획하도록 지시했지만, 정작 박흥식이 신나게 계획안을 수립하자 이런저런 이유로 개발 사업 자체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ㅡㅡ;


[흥한화섬 도농공장 기공식. 박정희가 직접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섬유공업에 뛰어들어 산업자본으로 변신을 시도한 박흥식의 도전 또한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박흥식은 흥한화섬을 설립하고 1966년 양주군 도농리(現 남양주시 도농동)에 비스코스 인견사 공장을 건립하였습니다. 이 때 주특기 정경유착을 활용하여 은행에서 대규모 자금을 융통할 생각이었지만, 이것이 특혜 논란에 휩싸이며 정부도 은행도 박흥식을 외면해버리자 그는 사옥까지 팔아가며 무리하게 돈을 끌어모아 공장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실적부진이 계속되자 박흥식은 견디지 못하고 불과 2년여만에 공장을 산업은행에 넘기고 말았습니다(그리고 그 공장은 1980년대 환경재해와 산업재해의 상징 원진레이온이 됩니다). 흥한화섬이 망할 당시 68세의 박흥식은 "나는 아직도 현역이다"라며 큰소리를 쳤다지만, 현실은......


 1970년에는 전기전자산업 진출을 목표로 일본의 소니(그 SONY)와 합작으로 '화신소니'를 창업하였지만, 이후 오일쇼크를 맞으며 경영부진에 빠졌고 이를 본 소니가 자본을 빼버리면서 망했습니다. 이렇게 산업계 진출이 번번이 실패하는 와중에 그룹의 본가인 화신백화점은 차남 박병찬이 맡았지만 거하게 말아먹고 해외도피까지 하는 등 ㅡㅡ;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이 되었고, 1980년 화신그룹은 공중분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해방 후 화신그룹의 몰락에는 박흥식의 경영철학이 큰 몫을 차지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유통업으로 사업을 이룬 박흥식은 모든 사업에서 현금박치기 원칙을 고집했고, 이는 유통업 중심의 경영에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산업자본에는 전혀 맞지 않는 스타일이었습니다(당연하게도 공장을 세우려면 대규모의 초기투자가 필수적이라, 금융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음). 더구나 인플레이션이 심한 1950~70년대에는 현금은 가만 쥐고 있을수록 가치가 줄어들게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박흥식은 경영 원칙을 바꾸지 못했않았고, 이는 1960년대 이후 산업자본으로의 진출 시도가 잇따라 파탄나면서 그룹 전체를 무너뜨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룹이 공중분해된 이후 박흥식은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광신학원(광신중고등학교 재단)을 장남 박병석씨에게 물려주고 경영에서 완전히 은퇴하였습니다. 은퇴 후 박흥식은 일체의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말년을 보냈으며, 자신이 살던 저택을 팔아치운 후 전셋집을 전전하며 조용히 살다가 1994년 94세로 사망하였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는 파킨슨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가회동에 있었던 박흥식 자택. 그는 1931년부터 57년간 이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사업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지금도 광신학원 재단은 박흥식 가문의 소유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는 수년 전 박흥식의 동상을 학교 내에 건립하려다 각계의 비판과 반발을 맞고 철회한 바 있습니다.




6. 정리 : 그의 그림자는 아직까지도 드리운다


 박흥식은 일제강점기(즉, 20세기 초) 한국 최고의 기업가였습니다. 분명 그는 작은 상점에서 시작하여 전국을 아우르는 거대한 유통재벌을, 그것도 30대의 나이에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일본에서 건너온 거대 유통자본과의 경쟁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성과였으니, 박흥식이 당대 최고의 수완을 가진 경영자였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드리우는 분명한 그림자는, 그의 성장이 상당부분 정치권력과의 유착을 통하여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서울에서의 사업 초기부터 박흥식은 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각종 사업에서 특혜를 받았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특혜의 대가로 박흥식은 일본의 전쟁 수행에 (자발적이든 아니든) 협조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그것까지도 자신의 사업에 이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박흥식은 자신의 친일부역행위가 절대 자발적인 게 아니었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친일파는 아니었다고 최후의 순간까지 항변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설령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한들 그의 사업 과정을 들여다보면 '적어도 자업자득'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정작 독립운동가였던 그의 형과 아버지의 일생과 대조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쓴웃음을 안겨줍니다.


 박흥식이 처음으로 선보인 정경유착이라는 그림자는, 그의 시대가 끝난 이후 그의 수많은 후진들에 의해 만개하게 됩니다. 해방 직후 적산기업 불하를 시작으로 미군정, 자유당, 군부 등 권력자들과 결탁한 기업가들은 한국경제의 개미지옥에서 승승장구하였고, 이들은 삼성, 현대, 대우 등 세계적 규모의 대재벌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권력의 부정부패를 금전적으로 지원하며 각종 특혜를 얻었고, 나아가서는 권력 그 자체를 돈으로 좌우할 수도 있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웃기게도 그 정경유착의 원조 박흥식은 정작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아마도 이른 나이에 출세한 자들의 일반적 결함 - 자신의 성공 공식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결국 그는 정경유착이라는 그림자, 그리고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자의 말로......라는 두 가지를 남기고 역사에서 퇴장하였던 것입니다.


 화신그룹 해체 후 화신백화점 건물은 몇몇 소유자의 손을 거쳐 한보그룹으로 넘어갔고, 종로 일대의 도로확장 계획에 백화점 부지 상당부분이 포함되자 한보그룹은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옛 백화점의 모양을 살린 18층짜리 고층 건물을 새로 짓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철거가 시작된 이후 소유권이 삼성생명(당시 동방생명)으로 넘어갔고, 골조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던 건물은 지상 33층의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설계가 변경되어 완공, 현재의 종로타워가 되었습니다.


[화신백화점 자리에 세워진 종로타워]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오리위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2&levelId=tg_004_1950&ganada=&pageUnit=10

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67900

http://blog.ohmynews.com/jeongwh59/291437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30706463389581




[2018. 5. 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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