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사에 그 흔적을 남기고 사라져간 대기업은 많습니다. 1990년대 재계 1위까지 다투었지만 엄청난 분식회계로 몰락한 대우그룹이나, 자기 한 몸 쓰러져 IMF를 앞당긴 한보와 기아, 분가(分家)들은 여전히 번창하지만 본가는 형편없이 쪼그라든 현대그룹, 조금 앞으로 가면 부산의 상징이었지만 전두환의 장난질에 공중분해된 국제그룹도 있지요. 그밖에도 재계에서 한가닥 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기업들을 나열하자면 아마 이 지면과 글 쓸 시간이 부족할 겁니다.

 그런 기업들 가운데 '율산그룹'이라는 기업이 있었습니다. 이 기업은 1970년대 창업하여 불과 3~4년만에 재계 10위권을 넘보는 대기업으로 폭풍 성장하였지만, 올라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무너졌지요.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 배경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은데, 아무튼 잠시나마 대한민국 경제의 '주인공'이었던 이들은 이제는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 간신히 기억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갑작스레 등장했다가 뜬금없이 사라진, 율산그룹의 짧은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신선호 율산그룹 창업자 (출처 에브리뉴스)

 

1. 창업과 폭풍성장 : 겁 없는 20대 청년들의 반란

 창업주 신선호(1947-)씨는 전라남도 고흥 출신으로 중학교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는 서울(경기고등학교)에서 다녔습니다. 아버지 신형식(1901-2003)은 와세다대학 경제학부 출신의 엘리트로, 일제강점기 강원도 평창과 전남 등에서 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며 농지개혁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자녀가 9명(7남2녀)이나 있었는데 이들은 아버지의 엄한 교육에 힘입어 대부분 학자와 기업가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중 6남인 신선호씨 역시 경기고등학교(평준화 이전)와 서울대학교 응용수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엘리트 집안 출신이기는 하지만 아버지 신형식의 교육방침에 따라 9남매는 모두 고학으로 학업을 마쳐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신선호씨는 일찍부터 사업에 눈을 떴고, 처음에는 오퍼상(수출-수입업자를 연결하고 커미션을 받는 일)으로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하여 자본금 100만 원을 마련한 그는 1975년 6월 자신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문 몇 명과 함께 '율산실업'을 창업하였습니다. '율산'이라는 이름은 자기 아버지의 호에서 따 왔는데, 이는 동시에 고향 뒷산의 이름이기도 하다는군요.

율산그룹 경영 당시 신선호 (출처 머니그라운드)

 율산실업의 초기 성장을 이끈 것은 중동지역에 시멘트를 수출하는 무역업이었습니다. 율산은 사업성이 낮아 다른 기업들이 꺼려하는 거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수출 선박을 직접 임대하여 운영하는 식으로 채산성을 높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의 항만 사정 때문에 납기일을 맞추기 어려워지자 헬리콥터와 상륙함까지 동원하여 납기일을 지켰고, 현지 바이어의 신임을 얻은 율산실업은 무역량을 크게 늘릴 수 있었습니다.

 

 창업 첫 해, 고작 6개월 남짓 기간 동안 율산실업은 340만 달러 수출실적을 올리고(1975년 대한민국 수출액 총계는 50억 8천만 달러), 같은 해 신진알미늄을 인수하여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수출실적은 해마다 퀀텀(?) 점프를 하여 이듬해(1976년)에는 4,300만 달러, 1977년에는 1억 6,500만 달러를 수출하였으며, 1978년에는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되었습니다. 당시 종합무역상사는 율산을 제외하면 현대, 삼성, 대우 등 12개뿐이었으니, 율산은 창업 3년만에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기업이 된 것입니다.

 작은 무역회사로 출발한 율산그룹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거대 재벌로 성장하였습니다. 사업 첫 해 신진알미늄을 인수하여 제조업에 진출한 것을 시작으로 해운업(금룡해운 인수)과 건설업(동원건설 인수)에도 진출하였고, 계속 사업을 확장하여 중공업, 패션업, 전자, 관광호텔 등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사업분야를 넓혀 나갔습니다. 1979년 당시 율산그룹은 14개의 계열사와 27개 해외지사, 6개의 합작법인을 운영하였으며 직원은 8,000여 명, 자본금은 100억 원에 달했습니다.

 

2. 이들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는가

 우선 전제할 것은 신선호씨, 그리고 그와 학연으로 이어진 경영진이 천재적인 사업 수완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율산그룹은 창업 직후부터 다른 기업이 감히 손대지 못하는 일에 과감히 도전하고, 이를 성공함으로써 급성장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사람들은 초기부터 계속된 성공의 경험이 이들의 사기를 높이고, 더 열심히 일함으로써 더 큰 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리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들이 '무역업'을 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70년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출 중심, 아니 수출에 거의 모든 것을 걸고 경제개발을 하던 시기였으며,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수출과 관계된 일을 하는 기업에 엄청난 특혜를 퍼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럴듯한 수출라인 하나 잡으면 이를 바탕으로 급성장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시절이었습니다.

율산그룹

 당시 수출기업이 누리는 금융 차원의 특혜가 어느 정도였냐면, 이들은 외국 바이어로부터 신용장만 받아 은행으로 가면 이를 담보로 즉시 대출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이율은 6% 정도였습니다. 너무 높은 거 아니냐고요? 당시 은행 대출금리가 25% 정도였습니다. ㅡㅡ; 심지어 이 대출금은 거의 눈먼 돈에 가까워서 기업들이 실제로 이 돈을 가지고 돈놀이를 하든 부동산 투기를 하든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엄청난 특혜지요.

 율산그룹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율산은 1977년 금룡해운을 인수하여 율산해운으로 개편하였는데, 당시 인수자금 10억 원은 서울신탁은행에서 연 9% 이자로 빌린 것이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당시 공식 금리는 25% 이렇게 자기 돈 한 푼 쓰지 않고, 율산그룹은 단기간에 계열사를 늘리고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거의 모든 대기업들의 사업 확장 방법이기도 했지요.

 물론 이를 감안하더라도 경영진의 능력이 탁월하였음은 분명합니다. 애초에 '중동지역에 시멘트 수출하기'라는 대박 아이템을 잡은 것도 그렇고, 인수한 계열사들을 단기간에 각 분야별로 최상위권 기업으로 성장시킨 업적도 부정하기 어렵지요. 이제 갓 서른이 될까 말까한 율산의 젊은 경영진은 대한민국 재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율산그룹은 1977년 말 서울종합터미널(現 센트럴시티) 부지를 사들이고 과천 서울대공원 설계도 맡는 등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 율산그룹 공중분해, 왜?

 1978년 여름 발생한 한 사건이 모든 파국의 시작점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그해 봄 율산실업이 사우디아라비아 법률상 외국 기업이 할 수 없는 유통업에 관여했다가 적발되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거액의 벌금을 납부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건 자체는 그냥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는데, 이것이 대한민국에 알려지며 상황이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율산그룹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모든 사업을 중단하고 쫓겨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 것입니다.

 중동, 그 중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율산그룹에는 매우 중요한 해외 거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문이 사실이라면' 율산그룹에 큰 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산그룹이 이에 해명을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아무래도 이런 소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단기금융회사(단자사)들이 대출자금을 대거 회수하여 그룹은 재정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애초에 기업 자체가 은행 빚을 쌓아올려 성장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금융권의 신뢰가 꺾이는 순간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거기에 1978년 8월 발표된 부동산 투기 억제조치(8·8조치)가 그룹을 한 번 더 직격하였습니다. 그룹의 주요 돈줄이던 율산건설이 새로 아파트를 분양하였는데, 이 조치 때문에 집이 잘 팔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9월쯤 되면 율산그룹 전체가 자금난에 빠져 주거래은행(서울신탁은행)에 긴급 지원을 요청할 만큼 사정이 나빠졌고, 이에 서울신탁은행을 중심으로 시중은행들이 모여 총 70억 원의 구제금융을 퍼주었지만 이 돈은 대부분 단자사 빚을 갚는 데 소진해 버렸습니다.

 해가 바뀌고 1979년 1월에는 실로 괴이한 사건이 터지는데, 경제기획원(現 기획재정부)을 방문하던 신선호씨가 정부기관을 사칭한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간신히 탈출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신선호 납치기도사건). 워낙 해괴한 일이라 그 전말을 두고 권력 개입설, 자작극설 ㅡㅡ; 등등 온갖 추측이 무성하였는데, 분명한 것은 이후 정부와 금융권의 태도가 율산그룹에 비우호적으로 돌변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런 태도 변화에 납치기도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한데, 혹자는 "신선호씨가 언론에 경위를 설명하면서 괴한들이 청와대 비서실을 사칭하였다고 언급하는데, 이것이 비서실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라 추측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서석준(1938-1983)이 재계 인사들에게 "율산은 억울하게 당했다"라고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등 율산그룹 붕괴에 정치적 개입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재판장의 신선호.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출처 해럴드포토)

 당시 정부와 금융계는 율산그룹에 대해 추가 금융지원(총 90억 원)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납치기도사건 이후 모두 무산되었고, 동앗줄이 끊어진 율산그룹은 그대로 무너집니다. 1979년 4월 3일 신선호씨가 횡령, 외환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되고(율산 사건) 3일 후 율산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일괄 부도를 맞으면서 그룹은 그대로 공중분해되고 말았습니다. 해체 당시 율산실업의 부채비율은 2600%, 율산건설은 670%, 율산알미늄은 470%나 되었다니 정치적 개입과 무관하게 기업 자체가 이미 빚 위에 쌓은 모래성이나 다름 없었던 셈입니다.

 

4. 후일담

 율산그룹 회장은 공식적으로는 신선호씨가 아니라 그의 장인이자 언론인, 관료, 친일부역자였던 부완혁(1919-1984)이었는데, 그는 <사상계> 사장으로 재직하던 중 '「오적」 필화사건'에 휘말려 구속되는 등 야당 성향의 인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여기에 신선호씨의 출신(전남 고흥)이 겹치면서 김대중과의 커넥션 의혹, 호남계 기업에 대한 경계 아니냐는 등 이와 관련한 온갖 의혹과 음모론이 판치기도 하였습니다.

 부도 이후 율산그룹의 계열사들은 대부분 다른 대기업에 인수되었는데, 이게 그룹 차원의 자금난 때문에 무너진 것이지 계열사들은 나름 알짜기업이라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이에나 해당 기업들은 인수된 이후에도 나름 잘 나가다가 IMF 전후로 새로운 모기업이 무너지며 함께 사라지거나, 혹은 모기업의 사업 재편으로 이리저리 팔려 다니고 흡수합병되는 등 기구한 운명을 겪게 됩니다.

건설 중인 서울대공원 조감도

 기업 자체는 이제 사람들이 기억하기도 어려울 만큼 먼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율산그룹이 짧은 기간 동안 벌인 일들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흔적처럼 남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서울대공원은 1970년대 말 율산그룹에서 설계 의뢰를 받고 미국 용역회사 PRC와 협력한 계열사를 만들어 작업을 진행하였고, 이를 토대로 건설이 진행되었습니다. 여담으로 당시 서울대공원 부지에 있었던 사이비 종교 '장막성전'은 해체된 후 2020년 초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모 사이비 종교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한국 현대사와도 조금이나마 접점이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율산그룹이 구입한 고속터미널 부지는 그룹 해체 이후로도 오랫동안 신선호씨의 소유로 남았습니다. 당시 서울특별시에서 해당 부지를 매각하면서, '터미널 건물을 완공할 때까지' 제3자에게 양도하지 못하게 막는 바람에 채권단이 처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ㅡㅡ; 율산그룹이 계획한 20층짜리 복합터미널 계획이 날아가고, 신선호씨 및 그와 함께 남은 직원들은 가건물 상태이던 임시 터미널을 20여 년이나 지킵니다. 우주방어 그리고 마침내 2000년 센트럴시티가 완공되고 신선호씨는 수천억 자산가로 화려하게 재기하였습니다... 몇 년 뒤에 다시 경영권을 넘기기는 하지만요.

센트럴시티는 이후 애경그룹, 통일교를 거쳐 현재는 신세계그룹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출처 센트럴시티 홈페이지)

 

# 참고자료 #
 "102세 율산 신형식 옹 타계", 서울신문(https://www.seoul.co.kr/)
 "1970년대 혜성처럼 등장했던 율산그룹 신선호, 첫 공판", 해럴드포토(http://photo.heraldcorp.com/)
 "고흥 출신 신선호 前 율산그룹 회장 재기 성공", 아시아뉴스통신(https://www.anewsa.com/)
 "대우 건설 뒤이어 재계 순위 13위 올랐던 기업이 4년 만에 부도난 이유", 머니그라운드(http://mground.kr/)
 "[서울 만들기] 43. 과천 서울대공원 조성", 중앙일보(https://news.joins.com/)
 "신선호씨 집안 스토리", 일요신문(https://ilyo.co.kr/)
 "[실록! 한국경제]⑨ “무너진 신화”… 율산(栗山)", 블록미디어(https://www.blockmedia.co.kr/)
 "율산그룹의 드라마틱한 기업 흥망사", KOSME 기업나라(http://nara.kosmes.or.kr/)
 "‘율산 신화’ 신선호 20여년 만의 인터뷰", 일요신문(https://ilyo.co.kr/)
 "율산그룹 신선호 회장, 고교시절 100만원으로 기업 성장", 에브리뉴스(http://www.everynews.co.kr/)
 "[한국경제 비화 ㊶]율산실업 신선호 사건", 조세금융신문(https://tfmedia.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부완혁"
 신세계센트럴시티 홈페이지(http://www.shinsegaecentralcity.com/)
 한국어 위키백과 "율산그룹"
 나무위키 "센트럴시티", "율산그룹"

 


- 왕자지(王字之, 1066-1122)는 고려 중기의 문관입니다. 고려 건국 공신이자 해주 왕씨의 시조인 왕유(?-?)의 후손으로, 본래 이름은 소중(紹中)이었고 자지(字之)라는 이름은 나중에 개명한 것입니다. 자는 원장(元長). 무엇으로 불러도 이상하다 일단 그의 부모에 대하여는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긴 하지만, 그가 음서를 통하여 관직에 오른 것으로 보아 그의 아버지 또한 고위관직에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왕자지는 음서로 관직에 올라 서리(胥吏)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에 오릅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출세하게 된 계기는 1095년 왕의 외척이자 권신인 이자의(이자겸의 사촌) 암살사건이었는데, 당시 계림공(훗날의 숙종)의 명을 받아 이자의를 제거한 왕국모에게 협력하여 요직에 진출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 이후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자지는 내시(고려시대의 내시는 '환관'이 아닌 일반적인 관직)와 전중시어사 등의 요직을 거쳤고, 예종 때인 1108년에는 병마판관으로 임명되었는데 바로 이 때 윤관(?-1111) 주도의 동북 9성 침공이 시작되면서 그는 윤관 휘하의 장군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고려시대에는 문관이 부대 사령관을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문관인 왕자지가 장군으로 출전하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총사령관인 윤관 역시 문관이었고, 이전 시대 귀주대첩을 지휘한 강감찬 역시 문관).


 - 이 전쟁에서 왕자지는 실제로 많은 전공을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전황은 순조로워서 여진족을 연파하고 순조롭게 9성을 확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진족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고려군은 많은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한 번은 왕자지의 부대가 행군 중에 여진족의 기습을 당했는데, 이 때 왕자지는 타던 말을 잃고 화살까지 맞는 등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 때 그를 구원한 인물이 바로 한국사 굴지의 인간흉기 척준경. 그는 여진족 부대를 격파하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말까지 한 마리 빼앗아 왕자지에게 넘깁니다. 이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후 왕자지와 척준경은 절친이 되었다는군요.


 - 이후로도 꾸준히 전투를 치렀지만 9성을 여진족에게 반환하기로 하면서 고려군은 다시 천리장성 안쪽으로 철수합니다. 돌아온 이후로도 왕자지는 꾸준히 승진하여, 1115년에는 이부상서(요즘으로 치면 안전행정부 장관)에 취임하고 같은 해 사은겸진봉사(謝恩兼進奉使)로 송나라에 파견됩니다. 그는 이듬해 고려로 돌아오면서 송나라의 대성아악(大晟雅樂)을 전수받아 돌아오는데, 이게 상당히 중요한 것이 그가 전수받은 대성아악은 이후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으로 이어져 조선시대까지 이어집니다.


 - 이후로 그는 동북면 병마사, 호부상서, 이부상서 등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치고, 중서문하성 참지정사를 역임하던 1122년 병으로 개경에서 사망합니다. 예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3일간 조회를 쉬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나중에는 예종의 묘정(廟庭)에도 배향(해당 왕의 시대에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을 종묘에 함께 모시는 것)되는 영광을 안......을 뻔했으나 반대 상소가 이어져 결국 배향은 되지 않았습니다. 이름 때문이 아니라 탐욕이 심하고 부정부패했다는 게 이유라고 합니다.


 - 이후 조선시대에는 이 사람이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문묘제례악의 뿌리인 대성아악을 도입한 인물이고, 조선시대엔 문묘 제례가 굉장히 중요했으니 그랬겠죠. 어쨌든 고려시대 정치사나 문화사에서 꽤 무게있는 인물인 데 비해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역시 그 시대가 문학이나 영상으로 다루어진 적이 별로 없었던 게 커 보이는데, 특히 동북 9성 개척은 척준경의 말도 안 되는 무용담도 그렇고 사극 등에서 다룰 만한데도 제대로 다뤄진 적이 별로 없죠.


 - 거의 유일하게 <푸른바람 척준경>이라는 웹툰이 있었는데, 무슨 사정이라도 있었는지 스토리가 조금 진행되다가 뜬금없이 연재가 끝나 버렸습니다. ㅡㅡ; 우스갯소리로 척준경의 일대기가 사극화되지 못하는 게 다 왕자지 때문이라고 하기도.



 - 제주도는 마치 '여행자를 위한 신비의 장소'와도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블로거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주도편을 읽고 나서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언젠가 제주도는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죠(정작 여행을 갈 때 저 책을 들고 가지도 않았던 건 함정). 어떻게 기회가 닿아 제주도를 다녀올 수 있었고, 예상한 대로(?) 블로거는 제주도의 팬이 되었고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정도의 생각까지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 그런데 과연 제주도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끌어당기는가 하는 것이 분명치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여행자의 자유로움에서 나오는 막연한 동경심에 불과할 따름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제주도만이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일까요? 어쩌면 블로거에게는, 육지와는 다른 제주도의 역사, 그리고 이를 통하여 만들어진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매력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 제주도는 우선 독자적인 창조신화와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육지와는 그 뿌리가 다르다는 의미죠. 당장 한반도의 건국신화 중 난생(卵生)설화가 아닌 것은 (단군신화 정도를 제외하면) 탐라 건국신화밖엔 없습니다. 사실 제주도가 한반도의 일부가 된지 1천 년 가까이 지났다면 탐라 건국신화 역시 한반도의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가르칠 법도 한데, 2015년 현재까지 한국의 교과서는 탐라의 신화와 역사를 철저히 외면합니다. 어찌 보면, 이것이야말로 탐라 소멸 이후 제주도의 역사를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삼성혈 신화는 화산지형과 함께 해 온 탐라인들만의 문화코드)


 - 이후 한반도의 일원으로서 제주도가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폭력과 수난의 연속입니다. 제주도의 소유권은 고려, 몽골, 조선, 일본제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이어집니다만 제주도를 지배한 육지의 권력은 하나같이 제주도를 착취와 탄압의 대상으로 다루게 됩니다. 몽골과 고려 정부에 대항했던 삼별초, 제주도를 전쟁터로 만들었던 삼별초를 이후의 제주도 문화에서 비교적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이후 제주도는 몽골의 식민지가 되어 말 생산지로 변모하였으며, 이후 고려-조선 교체기에 발생한 '목호의 난'은 제주인이 아닌 몽골인 목호(牧胡)들이 벌인 반란입니다.


 - 조선시대 제주도는 본격적인 착취의 대상이 됩니다. 조선의 지배자들은 제주도의 말 목장을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거기에 덧붙여 제주도에서만 생산되는 감귤을 매우 먹고 싶어했죠. 제주인들은 목장의 말을 자신들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다루어야 했고, 운송 과정에서 썩을 경우에 대비하여 계획보다 훨씬 많은 감귤을 생산하여 진상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착취에 주민 이탈이 우려되자, 육지의 권력은 제주도민들에게 번듯한 선박을 생산하지 못하게 합니다. 아예 바다로 나서지도 못하게 한 것이죠.


 - 하지만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이 배를 타지 않을 수 있나요? 그래서 고기잡이 뗏목 '테우'가 등장합니다. 남자들이 뗏목 하나에 몸을 의지하여 어업을 하다 보니 남성들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고, 제주도는 상대적으로 '여자가 많은 지역'이 되어버립니다. 제주도의 3다에 '여자'가 들어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제주도는 결코 평화롭게 한반도의 일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거상 김만덕이 육지로 건너가 금강산 한 번 구경해보는 것을 소원이라 말했던, 그러한 한(恨)을 제주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 일제강점기 말기, 제주도는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수세에 몰린 일본제국은 '옥쇄' 따위를 부르짖으며 본토와 남은 점령지들을 요새화하기 시작하는데, 제주도 역시 일본에 의해 철저히 요새로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제주도 곳곳의 해안 절벽에는 바닷물의 침식으로 생겼다 보기 어려운 동굴들이 많은데, 이는 대부분 일본군의 비밀 요새로 쓰기 위해 뚫어놓은 것입니다. 이 동굴들을 누구의 노동으로 뚫었을까요? 당연히 제주인들이었겠죠.


 - 그나마 다행히도 제주도는 오키나와처럼 실제 전장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방이 되고 한 숨 채 돌리기도 전에 제주도 역사상 최대의 참사, 4.3 대학살 사건이 발생합니다.


 - 일제강점기 제주인들 중에는 일본으로 일하러 건너갔다 돌아온 사람들이 많았고, 이 당시 일본 내에서 활발했던 노동운동의 영향을 받고 좌파 성향을 띠게 된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들의 주도로 만들어진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전반적으로 미군정에 협조적이었는데,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벌어진 인명사고를 계기로 경찰과 제주인들 사이의 대립이 본격화됩니다. 육지의 지배도 매끄럽지 못하던 미군정 쪽에서는 제주도의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고, 상당수의 경찰이 교체되는데 교체된 인원들이 하필이면 서북청년단......


 - 국군이 진주하면서부터 사태는 악화일로를 걷게 됩니다. 한라산과 중산간마을은 출입이 금지되고 기존의 주민들은 모두 해안으로 소개당했으며,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상당수의 주민들은 오히려 한라산으로 숨어들어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되었지만 제주도의 남로당 세력은 단선 반대를 명분으로 봉기를 일으키고,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등 제주도는 그야말로 생지옥으로 바뀌게 됩니다.


 - 이 와중에 국군의 지휘관은 유재흥(劉載興)으로 교체되고, 유재흥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전략을 펼쳐 한라산에 숨어들었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돌아오고 어느 정도 사태는 수습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분위기는 다시 악화되어 대규모의 학살이 계속되었고, 이는 1954년 한라산의 입산 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 4.3은 제주도에 헤어날 수 없는 상처를 안겼습니다. 4.3으로 인해 찍힌 낙인을 벗고자 제주인들은 한국전쟁 기간에 (전사 비율이 매우 높았던) 해병대에 앞다투어 지원하였고, 제주인들에게 찍힌 낙인을 피하고자 이들은 제주인의 언어를 버리고 한국 표준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 노력은 가히 눈물겨울 정도여서 현재는 유네스코가 '제주어'를 '사멸 위기 4단계'로 지정할 지경에 이릅니다. 주변에 제주 출신인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제주어로 대화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블로거는 제주도를 여행하면서도 제주어를 그닥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 섬 특유의 폐쇄성에 더하여 이러한 역사적 상처가 있다 보니, 제주도는 육지 출신자들에게 알게모르게 배타적인 곳이 되었습니다. 이는 수백만의 관광객이 드나들며 육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온 지금까지도 면면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제주도의 여당은 '괸당(친척)'이라는 말이 이래서 나온 것이며, 이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한 결과 제주도의 지방정치는 가히 최악의 상황에 빠지고 말았긴 하지만, 제주인들에게는 이것을 포기할 수 없는 충분하고도 남을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 제주도는 이런 곳입니다. 역사를 좋아하고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제주도의 역사를 알고 거기에 공감하고 싶어질 겁니다. 아마 블로거만의 감성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주도는 남해바다 한가운데 굳게 서 있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어떤 비바람도, 그 어떤 차별과 착취와 탄압에도 제주도에는 제주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어찌 이런 곳에 애정을 갖지 않겠습니까.


 - 결국 블로거는 제주도에 다시 한 번 가게 될 겁니다. 아직 블로거는 중산간지역에도 가 보지 못했고, 한라산에 오르지도 못했으며, 제주도의 사람들과도 충분히 만나보았다고 말하긴 어렵겠습니다. 제주도는 보면 볼수록 더 넓어지는 곳이라는 생각입니다. 조만간, 두 번째 여행기를 올릴 수 있겠지요?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기 힘겨워서, 이번 여행기는 이 쯤에서 갈무리하기로 합니다.




- <ハイサイおじさん(하이사이 오지상)>은 오키나와 출신 싱어송라이터 키나 쇼키치(喜納昌吉)의 데뷔작으로, 1977년 발표 이후 일본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며 '우치나(오키나와) 팝'의 선두주자로 인정받게 된 노래입니다. 오키나와 전통음악 특유의 '류큐 5음계(도-미-파-솔-시)'를 사용하고 있으며, 표제의 의미는 '안녕하세요('하이사이'는 오키나와 어 인사말) 아저씨' 정도의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 전체적으로 흥겨운 곡조를 띤 이 노래는 어느 소년과 아저씨가 실없는 농을 주고받는 내용의 가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작자는 이 노래에 얽힌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 오키나와 출신인 작자의 집 옆에는 오키나와 전투 때 충격을 받고 정신 이상이 된 아주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정신 착란을 일으켜 자신의 어린 딸을 목졸라 죽이고 그 시신을 냄비에 넣어 요리를 하고 있었더랍니다. 이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발견되면서 마을 전체가 뒤집어졌고, 그 아주머니는 어딘가로 끌려갔으며(아마도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것으로 추정) 아주머니의 남편이 이 광경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아 정신 이상이 되어버렸다고 하지요.

 - 이후 그 남편은 옆집에 계속 살면서 작자의 집에 술을 얻어먹으러 오곤 했는데, 딱한 사연을 알고 있던 작자의 집안에서 그 남편을 잘 챙겨주었다고 합니다. 가사는 이 때 소년이었던 작자 자신과 술을 얻어먹으러 온 그 옆집 아저씨와의 대화였던 것입니다. 그저 흥겹고 신나기만 한 이 노래에는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트라우마, 그리고 이를 잊지 못하지만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던 지금까지의 역사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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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昨夜(ゆうび)ぬ三合ビン小(ぐゎ) 残(ぬく)とんな
残(ぬく)とら我(わ)んに 分(わ)きらんな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三合ビンぬあたいし 我(わ)んにんかい
残(ぬく)とんで言ゆんな いぇー童(わらばー)
あんせおじさん 三合ビンし不足(ふずく)やみせぇーら
一升(いっす)ビン我(わ)んに 呉(くぃ)みせーみ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夕べの三合ビンは残っとるかぁ~?
残っとったらワレに分けてくれんかぁ~。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三合ビンの量をワシに
残っとるか聞いとんのかい。えィ小僧

小僧:
あのなぁ、おじさん。三合ビンで不足ちゅうなら
一升ビンをワレくれるとでも言うんなぁ~ 

2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年頃(とぅしぐる)なたくと 妻(とぅむ)小(ぐゎ)ふさぬ
うんじゅが汝(いやー)ん子(ぐわ)や  呉(くぃ)みそうらに
ありー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汝(いやー)や童(わらばー)ぬ くさぶっくいて
妻(とぅむ)小(ぐゎ)とめゆんな  いぇー童(わらばー)
あんせおじさん 二十や余て三十過ぎて
白髪(しらぎ)かみてから 妻(とぅむ)とめゆみ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年頃だで女房が欲しいんだけど
おじさんの娘をくれないかい?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小僧の癖しやがって
女房を娶ろうってか、えィ小僧

小僧:
それならおじさん。二十三十過ぎて
白髪になって女房を娶れってか。

3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カンパチ まぎさよい
みーみじカンパチ 台湾はぎ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頭(ちぶる)んはぎとし 出来やーど
我(わ)ったー元祖(ぐゎんすん)ん むる出来やー
あんせおじさん 我(わ)んにん整形しみやーい
あまくまカンパチ 植(い)いゆがや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ハゲはデッカイねぇ
ミミズハゲだど 台湾ハゲ~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禿とるもんは出来がええのよ。
うちの先祖もものすごう出来が良い。

小僧:
そんならおじさん。ワレも整形してみるわ
あっちこっち、ハゲをこさえてやろうかよ

4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ヒジ小(ぐゎ)ぬ をかさよい
天井(てぃんじょ)ぬいぇんちゅぬ ヒジどやる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汝(いやー)やヒジヒジ笑ゆしが
ヒジ小(ぐゎ)ぬあしがる むてゆんど
あんせんおじさん 我(わ)んにん負きらん明日(あちゃー)から
いぇんちゅぬヒジ小(ぐゎ) 立てゆがや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の髭っておかしいわ。
天井ネズミの髭みたいやなぁ~。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お前は髭を笑うけど、
髭があるからモテるんよ。

小僧:
あのなおじさん。ワレも負けとれん明日からは
ネズミ髭でも生やしょうわい。

5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昨日ぬ女郎(じゅり)小(ぐゎ)ぬ 香(か)ばさよい
うんじゅん一度 めんそーれー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辻、中島、渡地とぅ
おじさんやあまぬ 株主ど
あんせんおじさん毎日(めーなち)あまにくまとして
(※)
我(わ)んねー貧乏(ひんすー)や たきちきゆみ 

※我んねちゅらーさよーがりゆさ(わたしゃはきれいに痩せるわね)
 汝やちゅらーくよーがりゆさ  (おまえさんきれーに痩せられるさ)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ゆんべのお女郎はかぐわしかぁ~。
あんたも一度はやっかいになったら?。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おじさんは辻、中島、渡地(遊郭地)の大旦那よ。

小僧:
そんならおじさん。毎日遊郭にいりびたり
ワレも貧乏なってみようか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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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가 궁금하신 분께서는 이곳의 댓글을 참고하세요.##

 - 이 노래는 오키나와 인들에게는 자신들을 상징하는 노래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시엔 야구 대회에서 오키나와 지역 학교의 응원단이 줄곧 이 노래를 응원가로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오키나와 지역은 1972년 다시 일본 영토로 바뀌어 현재에 이릅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현재, 오키나와는 순조롭게 일본의 일부로 녹아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글쎄, 2010년대에 와서도 오키나와 현이 일본의 많은 도도부현 중에서 가장 가난하고, 실업률도 가장 높은 지역으로 남아 있으며, 주일미군 문제에 있어서 오키나와 섬이 계속 독박을 쓰고 있는 상황임을 생각하면 딱히 나아진 것이 있는가 싶기도 합니다.


 - 오키나와 인의 자기 정체성은 상당히 미묘합니다. 현재 시점에서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일본인임을 인정하지만(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오키나와인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한 상당수), 오키나와 출신의 가수들은 방송에서 기미가요(일본의 국가(國歌))를 부르지 않으며 간혹 부르는 사람은 오키나와 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오키나와를 방문한 황태자(現 히로히토 천황)에 대한 테러사건이 일어난 적도 있습니다. 이곳에는 (비록 당세는 크지 않지만) '류큐 독립당'이 활동하고 있으며 상당수의 주민이 오키나와 독립을 지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 일본 반환 이후 오키나와 지역의 핵심 과제는 미군기지의 이전 문제입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현 전체 면적의 19%를 차지하는 미군기지를 현 밖으로 이전할 것을 꾸준히 요구해 왔고, 일본 정부는 이를 묵살하다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야 간신히 이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정권은 다시 자민당에게 넘어갔고, 모든 것은 다시 원위치로......


 - 결국 자민당 소속인 현지사(한국으로 치면 도지사)가 일본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기지를 현 내부로 이전할 것을 추진하자, 오키나와 주민들은 2014년의 지사 선거에서 반대파인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 후보를 상당히 큰 표차로 선출하기에 이릅니다. 다만 이 문제는 현지사에게 그리 큰 권한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도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상태로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중.


 - 미군 기지가 현내로 이전할 경우 후보지는 오키나와 섬 중부의 헤노코 해변인데, 이 곳에서는 기지 이전 반대시위가 2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위측에서는 아예 반대시위를 관광상품(!!!)으로 만들어서, '헤노코 시위현장 방문 코스'라든지 '반대구호 부착을 조건으로 한 무료 카누 체험'이라든지 하는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고...... 헤노코의 투쟁은 현재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진행되고 있는 해군기지 반대 투쟁에도 참고가 되고 있다는 뒷이야기 또한 있습니다.


 - 흥미롭게도 정치적 여론이나 지형에 있어서 오키나와 현 내에서도 오키나와 본섬과 주변 섬 지역간의 차이는 상당히 큽니다. 앞에서 말한 '인두세' 등의 역사적 문제, 그리고 오키나와 전투에서 본섬 외에는 대량학살이 발생한 곳이 없었다는 사정이 더해져 두 지역간의 정치적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본섬을 제외한 곳에서는 현재도 자민당이 강세이며, 오키나와 전투에 대하여도 일본 본토에 상당히 우호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경향을 보입니다. 심지어 <새역모>의 극우 성향 교과서를 채택한 곳이 있을 정도.


 - 이것만 해도 오키나와의 사정은 상당히 복잡한데, 최근에는 조어도(센카쿠 열도) 문제와 관련하여 난데없이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서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중국의 주장은 오키나와 주민들조차도 철저히 무시할 정도로 언어도단이긴 하지만, 중국이 내세우는 이유라는 게 류큐 왕국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번속국(藩屬國)이었다는 것이니 오키나와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오히려 살펴볼 필요가 있는 주장이기는 합니다. 이 논리가 발전하면 과거 중국과 조공무역을 하던 주변의 모든 국가에 대한 정치적 압력 행사로 이어질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 오키나와의 역사는 그곳에 사람이 사는 이상 계속 이어질 겁니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역사에 주민들이 그토록 원하는 '평화'라는 두 글자가 새겨질 날은 과연 언제쯤에나 찾아올까요. 그들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 현재의 착취자가 사라지면 그래도 무언가 나아질 거라며 실낱같은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 하지만 그것이 단지 누가 그들을 착취하느냐의 차이였을 뿐임은 머지 않아 드러납니다. 일단 본섬 외의 주민들에게 징수하던 인두세는 류큐 처분 이후에도 1900년대까지 그대로 존속됩니다. 새로운 착취자인 일본 정부는, 수백 년간 유지된 주요 수입원을 하루아침에 포기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 한편 본섬과 주변 지역을 막론하고 실시된 것이 바로 가혹할 정도의 동화정책, 아니 '문화 말살' 정책입니다. 전통적인 류큐 언어의 사용은 금지되었고, 그 자리에 표준 일본어의 사용을 강제합니다. 학교에서는 철저한 '황국신민'화 교육이 이루어졌고, 왕성인 슈리성(首里城)을 비롯한 류큐 왕국의 흔적은 방치되고 파괴되어 유명무실해집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식 성씨로의 '창씨개명'을 강요당합니다.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지요? 이로부터 수십 년 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키나와 지배는 일본에게는 식민 지배의 연습장이었던 셈입니다.


 - 명목상 일본 내 행정구역, 실질적 식민지, 오키나와의 여러 섬과 그곳의 주민들에게도 제2차 세계대전의 폭풍은 어김없이 불어닥칩니다.


 - 미국에게 강력한 선빵(진주만 공습)을 한 방 날린 일본군은 잠시간 잘 나가는 듯 보였지만, 본격적인 전쟁모드로 돌입한 미군에게 압도적으로 밀리기 시작하며 태평양 절반을 차지한 판도를 급속도로 잃어갔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다시피하던 일본 군부는 전황이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나서야 자신들이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고, 이 이후로 일본의 지상과제는 '어떠한 피해도 감수하고 천황(과 지배계급)의 자리를 보전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군은 자신들의 피해는 상관없이 연합군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하고, 연합군의 전쟁 수행 의지를 최대한 꺾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됩니다.


 - 이를 위하여 일본군은 본토와 주변의 주요 점령지를 온통 난공불락의 요새로 바꾸어갔고, 몇 년간 일본군을 '사냥'해오던 연합군은 오가사와라 제도의 최남단에 있는 이오지마 섬에서 처음으로 엄청난 피해를 강요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연합군의 피해가 커질지언정 승패에는 변동이 없었고, 연합군의 다음 목표가 된 곳이 바로 오키나와 본섬이었습니다. 물론 이곳은 이미 일본군과 주민의 강제동원으로 섬 전체(특히 인구가 밀집한 남부지역)가 요새화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 일본군과 주민들은 섬 곳곳에 파놓은 동굴 속에 틀어박혀 있었고 해안 방어는 사실상 포기 상태였던지라, 매우 순조롭게 상륙할 수 있었던 연합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이 섬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전에는 점령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항복하느니 자결할 것을 '사실상' 강요하고, 이들을 일회용 자살병기로 써먹기까지 하였습니다. 임산부에게 폭탄을 짊어지고 연합군에게 자살돌격하도록 한다거나......


 - 일본의 철저한 세뇌교육은 일본군과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연합군에 항복했다간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살해당한다'는 인식을 심어놓았고, 이들에게 정서적으로 항복할래야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섬 곳곳에서 학살 뿐만 아니라 집단 자살도 예사로 벌어집니다. 주민들은 연합군이 들이닥치는 상황에서 더 버틸 수 없게 되면 '명예롭게 죽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 자신 또한 죽어갔습니다.


 - 연합군은 곳곳에 산재한 참호와 동굴을 점령하기 위해 화염방사기와 독한 연막탄까지 동원해야 했고, 결국 일본군의 모든 은신처를 파괴하고 섬을 완전히 점령하는 데는 거의 3개월이 걸렸습니다. 그 기간 동안 연합군의 사망자는 약 1만2천명, 일본군 사망자는 6만5천명(미국측 추산), 오키나와 주민 사망자는 12만명(일본측 추산)에 달했습니다. 당시 오키나와 인구는 약 3~40만명 정도였습니다.


 - 다수의 일본군과 자신들의 식민지를 희생하는 대가로 일본은 그들의 목표를 상당 부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예상을 초월하는 피해규모에 질려 다음 계획이었던 본토 침공 작전을 사실상 포기했고, 이는 두 개의 원자폭탄으로 대체됩니다. 20만명의 사망자와 이를 능가하는 방사능 피폭자를 더한 끝에 일본은 항복했고, 히로히토 천황(과 상당수의 지배계급)은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였으며, 인구의 1/3이 사망한 오키나와는 그대로 미국의 식민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 미국은 전략적 요충지인 오키나와 섬 전체를 미군 기지로 만들어갔습니다. 일본군에게 자결을 강요당하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이제 미군에게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고, 미군 전투기의 비행 소음을 매일같이 듣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을 거치며 미군기지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한반도와 베트남을 폭격하는 비행기들은 대부분 오키나와에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인들은 자신들을 죽이는 악마의 비행기가 날아오는 오키나와를 '악마의 섬'이라 부르며 치를 떨었고, 이 말을 듣는 오키나와 주민들은 '우리는 악마가 되기 싫다'며 마찬가지로 치를 떨었습니다.


 -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과 미국의 합의에 따라 다시 일본에게 '반환'되었습니다. 우측통행이 좌측통행으로 바뀐다거나 하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한 가지, 섬의 미군기지만큼은 떠나는 일 없이 그대로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소위 '오키나와 반환'이란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는 그저 지배자가 바뀐 것, 아니 어쩌면 지배자가 둘이 된 것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계속)



 면적

 2,276.49 ㎢

 인구

 1,416,587 명 (2013. 10. 1.) 

 현청소재지

 나하 시 


 - 오키나와(沖縄) 현은 일본 남부의 류큐(流球) 제도의 섬들로 이루어진 일본의 지역입니다. 전체적으로 일본 본토보다는 오히려 타이완 섬 쪽에 더 가까이 붙어 있으며,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하여 북쪽으로 올라오는 태풍의 주요 통과지점이기도 합니다(아마 여름철 태풍예보에서 "지금 태풍의 위치는 오키나와 남동쪽~"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일본 본토와는 조금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본 내외에서 관광지로 각광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 '독자적인 문화'라는 데서 짐작이 가능하지만, 오키나와는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에는 일본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가가 공식적으로는 1879년, 비공식적으로는 1609년까지 존속했습니다. 류큐 왕국은 그 이전 시대에 3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류큐 섬이 쇼(尙) 씨가 지배하는 추잔(中山) 지역을 중심으로 통일되면서 성립되었고, 초기 불안정한 시대를 지나 16세기경에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고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동아시아 각국과 활발한 교역을 하는 등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 하지만 그 전성기는 별로 길지 못해서, 16세기 후반 명,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나라들이 동아시아 무역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이 작은 나라는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은 1609년 일본 본토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사쓰마 번(지금의 가고시마 현)의 군대가 침략하는 것을 막지 못하여 일본(정확히는 사쓰마 번)의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 다만 사쓰마 번은 류큐 왕국을 '멸망'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직후 중국으로의 조공이 막혀 곤란에 처해 있던 일본은, 역시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던 류큐를 이용하여 중국과 간접적으로 조공 무역을 할 요량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중국산 사치품은 일본 지배계급을 회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고, 일본은 류큐가 조공을 통해 사치품을 확보하면 이를 가로채는 방법으로 수요를 해결했습니다.


 - 류큐의 이점은 또 있었는데,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 중에서 사탕수수 농업이 가능한 사실상 유일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을 확보하면 설탕의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동아시아 지역에서 (당시로서는 사치품인) 설탕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이를 통해 류큐를 직접 통제하는 사쓰마 번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이것이 유신시대 사쓰마가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보기도 합니다).


 - 류큐는 일본의 사탕수수+사치품 셔틀로 전락하게 되었고, 일본 본토의 착취와 무역 금지로 인해 경제적으로 파탄지경에 빠진 류큐 왕조는 결국 '세금'을 통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데, 류큐 왕조는 류큐 본섬 이외 주변의 다른 섬들(북부의 아마미 제도는 아예 사쓰마 번에 편입당했으니 빼고)를 더 가혹하게 착취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게 되죠. 다단계 착취......쯤 되려나?


 - 이들 섬들(야에야마라든지, 구메지마라든지 하는 지역)에 류큐 왕조는 '인두세'를 매깁니다. 즉 사람 수대로 세금을 매긴 것인데, 이 세금이 가혹했던데다가 경제적 능력이 없는 어린이나 노인에게까지 인두세가 매겨지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이들 지역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래서 이들 지역에서는 세금이 매겨지는 사람의 머릿수를 줄여가며 발버둥을 치게 됩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불필요한 사람을 죽이는(!!!) 방식으로 세금을 줄인 거죠.


 - 이런 '독립국이지만 독립국이 아닌' 상태가 이백 년 이상 지속되다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 드라이브를 밟고 있던 일본이 이 틀을 깨뜨리게 되었습니다. 서양 열강과 대등한 수준을 목표로 하던 일본은 내부의 문제가 해결되자 본격적으로 주변 지역의 식민 지배를 꿈꾸게 되었고, 그 테스트 무대로 이미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류큐를 선택한 것입니다. 어쨌든 명목상 류큐는 중국과 일본에 이중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기 때문에,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일본은 두 단계에 걸쳐 류큐를 멸망시킵니다. 이를 '류큐 처분'이라 합니다.


 - 1차 류큐 처분은 1872년, 류큐를 일본의 일개 번(藩, 영주가 통치하는 행정구역)으로 격하시키고, 류큐 왕을 '류큐번왕'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얼마 후 타이완 섬에서 류큐 주민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지자 일본에서는 이를 핑계로 군대를 출병시켰는데, 중국에서 타이완 침공에 대응하는 것 이외에 류큐에는 별 관심이 없음을 확인한 일본 정부는 1879년, 류큐 번을 폐지하고 (잠시 가고시마 현에 편입했다가)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여 완전히 일본의 일부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2차 류큐 처분입니다.


 - 당시 류큐 처분에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은 엉뚱하게도 미국이었는데, 이전에 함포외교를 통해 류큐를 강제개항시킨 바 있는 미국에서는 율리시스 그랜트 전(前) 대통령을 중국으로 파견하여 이를 막아보려 노력하지만 정작 중국의 실권자 이홍장은 여기에 별 관심이 없었고, 류큐의 일본 편입은 어영부영 확고한 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 흥미롭게도, 류큐 처분에 대하여 류큐 본섬 이외의 지역은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상술했다시피 류큐 왕조에서 강요하는 '인두세'가 이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했고, 이들의 노력이란 세금 명세서나 다름없는 사람 수를 줄이기 위해 임산부를 죽인다거나 할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기 때문에 지배자가 바뀌는 것을 환영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은 합니다. 적어도 인두세를 낼 필요는 없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 과연 이들의 작은 소망은 실현될 수 있었을까요? 오키나와의 끔찍한 역사가 이제 시작에 불과했음은, 시간이 지나며 명백해지게 됩니다......(계속)



 - '마다가스카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평소 세계지리에 관심 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름 한 번 들어봤기 힘들 그런 나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의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를 떠올릴지도 모르겠군요.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 동남부 인도양에 있는 섬나라로, 마다가스카르 섬은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이며 한반도 면적의 3배에 달합니다. 근대 이후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당했으며 1960년 독립하였습니다.

 -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은 매우 특이하게도, 바로 옆 아프리카 대륙이 아니라 거의 지구 반대편인 동남아시아-태평양 쪽에서 건너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의 언어인 '말라가시어'는 말레이어, 인도네시아어 등을 포함한 '오스트로네시아 어족'(대만 원주민 언어를 기원으로 하며, 동남아시아 남부와 태평양 일대에서 사용된다)의 일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인도양의 끝에서 끝까지 횡단했을지는 미스테리인데, 이 어족이 반대편으로는 태평양 한가운데의 하와이나 이스터 섬까지 퍼져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의 항해술로 충분히 가능은 했으리라 여겨집니다.

# 라치라카 : 독재와 경제난

 - 아무튼 마다가스카르는 독립 이후 (아프리카 상당수 나라들이 그랬듯이) 사회주의 성향의 일당 독재국가가 됩니다. 하지만 (역시 아프리카 상당수 나라들이 그랬듯이) 잦은 군사 쿠데타로 인한 사회 불안 속에서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고, 1992년 헌법을 개정하여 다당제 민주 공화국이 됩니다. 1976년부터 장기 집권 중이던 디디에 라치라카(1936~)는 헌법 개정 이후에도 대통령직을 계속 해먹다가, 1993년 알베르 자피(1927~)와의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게 됩니다.

 (사진 1 : 디디에 라치라카)


 - 하지만 자피 정권은 라치라카를 압도(?)할 만큼 무능하였고, 사회가 갈수록 난맥상에 빠지는 속에 자피는 탄핵당하고 정치적 혼란 끝에 라치라카는 다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재집권한 라치라카는 외국 투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지만, 얼마 뒤 동아시아 경제 위기(우리의 기억엔 그 이름도 찬란한 IMF...)를 계기로 외국 자본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면서 마다가스카르 경제는 완전히 붕괴지경에 처하게 됩니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마크 라발로마나나(1949~)였습니다.



 (사진 2 : 마크 라발로마나나)


 - 라발로마나나는 젊은 시절 요구르트 등의 유제품 생산에서 시작하여, 마다가스카르 굴지의 대기업을 설립한 기업가였습니다. 그는 이후 정계에 진출하여 1999년 안타나나리보(마다가스카르의 수도) 시장에 선출되었고, 이 시기의 인기를 등에 업고 2001년 대선에 출마하여 라치라카와 경쟁하게 됩니다(대한민국의 어떤 전직 대통령이 생각나지만 넘어가기로). 투표 결과는 라발로마나나 46%, 라치라카 40%로 규정상 결선투표를 시행해야 했으나, 라발로마나나와 그가 소속된 TIM 당은 선거가 공정하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자신이 과반 득표를 했다고 주장, 결선투표를 거부하고 자신이 당선되었다고 선언해 버립니다.


 - 졸지에 마다가스카르는 두 개의 정부가 양립한 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의 여론은 라발로마나나 쪽으로 쏠려 있었고, 헌법재판소 역시 라발로마나나의 손을 들어주고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쯤 되자 궁지에 몰린 라치라카는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던 군부를 움직여 쿠데타를 시도하나, 아무 지지도 받지 못하는 쿠데타는 그야말로 처참히 실패하고, 라치라카 본인은 외국으로 도망치는 처지가 되어 버립니다.


# 라발로마나나 : 신자유주의 드라이브


 - 라발로마나나는 대통령 취임 이후 강력한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정책이라는 게 신자유주의 성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라, 외국 자본에 대한 전면적 개방, 친 기업적 조세 정책, 대규모 토목 사업, 민영화 등......의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정책들을 시행하였고, 이는 빈부 격차의 심화 등의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하지만 IMF의 경제 지원이나 외국 자본의 투자를 실제로 얻어내는 등 어쨌거나 경제는 급성장하기 시작했고, 이 가시적인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다음 대선에서도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재선에 성공하게 됩니다.


 - 하지만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2007년 대통령의 권한을 지나치게 강화한 헌법 개정을 관철시키는 등, 점차 독재자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거기에 그의 임기 동안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는 극심해졌고, 거기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마다가스카르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엄한 소리를 해서(어 이거 진짜 누구하고 똑같다;;) 위헌 논란에 휩싸이는 등,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던 마다가스카르 인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있었습니다.


 - 이 때 혜성처럼 등장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안드리 라조엘리나(1974~)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안타나나리보에서 DJ로 활동하던 그는, 당시 정부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통해 시민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오죽하면 거침없다고 해서 별명이 TGV). DJ로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2007년 안타나나리보 시장 선거에 출마한 라조엘리나는, 라발로마나나 쪽에서 깜짝 놀라 대항마로 출마시킨 후보를 압도적 표차로 눌러버리고 시장에 당선됩니다.



 (사진 3 : 안드리 라조엘리나)


# 라조엘리나 vs 라발로마나나, 그리고 대우로지스틱스


 - 거칠 것이 없어진 라조엘리나는 자신의 별명을 따 TGV 당을 창당하고, 정부의 언론 통제에 맞서 '비바TV'라는 독립언론을 설립하여 대놓고 라발로마나나와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라발로마나나 정부는 안타나나리보에 들어가는 모든 정부 지원을 끊어버리는 무리수를 두었고, 누가 봐도 대놓고 라조엘리나를 억압하는 형세가 되자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민심이 더욱 라조엘리나 쪽으로 쏠리는 결과만 낳게 됩니다.


 - 이 와중에 마다가스카르 전체를 뒤흔들 초대형 사건이 터지는데, 정부가 한국의 대우로지스틱스(이하 대우)에게 엄청난 규모의 토지를 농장 경영을 위해 99년간 임대하는 계약을 체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대우가 임대 경영에 대한 대가조차 사실상 거의 지불하지 않는 조건이었고(선금 정도는 있었는데 줄 생각도, 받을 생각도 없었다고), 대우가 임대한 토지는 총 130만㏊에 달했는데 이는 공식적으로 발표된 마다가스카르 전체 농경지의 절반을 넘는 규모라고 합니다.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정부에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 이 문제가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일부를 제외하면 언론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오히려 외국 쪽에서 더 큰 사건으로 조명을 받았는데, 신식민주의적 경제 침략이라는 비판과, 엄청난 규모의 농장 개발을 통한 환경 파괴에 대한 우려가 많았던 것입니다. 가치 판단은 독자들께 맡기겠지만, 적어도 세계적으로 논란이 된 사건이며 한국의 농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문제에 대해 언론이 지나칠 정도로 침묵했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습니다.]]


 - 정부는 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 위기를 돌파하고자 하였고, 라조엘리나는 대립의 수위를 더욱 높여갔습니다. 더 나아가 라조엘리나의 비바TV는 아예 정부에 대놓고 BJR(배째라)을 선언(?)하기에 이르는데, 망명 중이던 라치라카 전 대통령을 인터뷰하고 그가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을 여과 없이 방송으로 내보낸 것입니다. 라치라카는 라발로마나나에 대항해 쿠데타까지 일으켰던 인물이니, 정부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있는 수위를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 방아쇠가 당겨지다


 - 결국 참다못한 정부는 보안군을 투입하여 방송국을 급습하기에 이릅니다. 일단 프랑스 대사관저로 피신하여 체포를 면한 라조엘리나는 본격적으로 안타나나리보 시민들에게 정부에 대항할 것을 선동하기 시작했고, 동시다발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들불처럼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대는 슈퍼마켓과 친정부 언론사를 습격한 후 대통령궁을 향하여 행진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통령궁을 지키던 군부대가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집니다. 이에 라조엘리나는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의 즉시 사임을 요구하였고, 정부는 라조엘리나를 국가반역죄로 법정에 고발하는 등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 곳곳에서 군부대와 시위대의 충돌로 사상자가 늘어가는 와중에 극적인 전기가 마련됩니다. 국방장관이 시민에 대한 발포에 항의하여 장관직을 사퇴하고, 군부는 더 이상의 시위 진압을 거부하고 오히려 시위대 쪽으로 돌아서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총구를 돌린 군대는 곧바로 대통령궁을 장악했고, 라발로마나나는 자신의 권한을 군부에 이양하고 도망쳐 버립니다. 군부는 이 권한을 다시 라조엘리나에게 이양, 라조엘리나는 라발로마나나가 사라진 마다가스카르의 임시 대통령직에 취임하고, 곧바로 사태의 도화선이었던 대우와의 계약을 무효로 선언합니다.


 

(사진 4 :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대통령궁으로 향하는 라조엘리나)


@@동영상 링크 - BBC


 - 여기까진 순조로워 보이지만 라조엘리나의 대통령 취임은 상당한 불안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단 마다가스카르에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연령 제한이 40세였기 때문에, 34세에 불과한 라조엘리나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지만 법정의 판결과 헌법 개정을 통하여 대통령 자리를 인정받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라발로마나나 지지파는 극력 반발하였고, 이들의 보이콧 운동으로 헌법 개정 국민투표는 50% 투표를 간신히 넘기며 가까스로 통과됩니다. 이 외에도, 어쨌거나 쿠데타라는 과정을 통한 집권이었다보니 세계 여론 또한 그에게 호의적이질 않았습니다. 단적으로 아프리카 연합은 그의 집권 과정을 문제삼아 마다가스카르의 회원 자격을 정지시켜 버렸고, 서방세계의 경제지원도 잇따라 끊어지게 됩니다.


# 세 사람의 이전투구泥田鬪狗, 그리고 (아직은) 현재진행형


 - 라조엘리나는 이 상황을 타개할 필요가 있었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제이콥 주마의 중재를 받아들여 망명 중인 라발로마나나와 회담을 가졌고, 둘 모두 차기 대선에 불출마하기로 합의를 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난데없이 프랑스에서 망명 중이던 라치라카가 돌아와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고, 이에 라조엘리나는 합의를 뒤집고 자신이 직접 출마하겠다고 말을 바꿔 버립니다. 당연히 가만 있을 수 없었던 라발로마나나는 자신의 아내인 랄라오 라발로마나나(1953~)를 내세워 대선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 사태가 점점 개싸움으로 흘러가자, 국제적 여론 또한 최악으로 치닫게 됩니다. 특히 마다가스카르를 식민 지배했던 프랑스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어서, 프랑스는 세 명 모두의 불출마를 강력히 요구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대선 자체를 인정치 않겠다고까지 말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우여곡절 끝에 선거당국은 세 명의 후보 등록을 모두 불허하였고, 예정보다 미루어진 2013년 12월 마침내 대선이 치루어지게 됩니다. 결선투표까지 치르는 접전 끝에, 라조엘리나 정부에서 재정장관을 역임한 헤리 라자오나리맘피아니나(1958~)가 라발로마나나 계열의 장 루이 로빈슨(1952~)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사진 5 : 헤리 라자오나리맘피아나나 현 대통령)


 - 국제사회는 이 선거 결과에 대해 '조건부 승인'을 내렸는데, 라자오나리맘피아니나 대통령이 라조엘리나 전 대통령의 영향력에 휘둘리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달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해피엔딩......이라 말하고는 싶은데, 아직까진 섣불리 마무리짓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일단 망명 중이던 라발로마나나는 2014년 마다가스카르로 돌아가자마자 체포되었는데, 2009년의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으로 궐석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라발로마나나 측은 정치보복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중. 한편 라조엘리나 역시 차기 대선에 재출마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하니, 모든 상황의 종결까진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ps. : 라자오나리맘피아니나 현 대통령의 풀네임은 'Hery Martial Rakotoarimanana Rajaonarimampianina'로, 현재 세계 국가수반 중 가장 긴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고, 사진 출처 : 

위키백과 한국어판 - "안드리 라조엘리나" "마르크 라발로마나나" "마다가스카르 정치위기 사태"

위키백과 영어판 - "Andry Rajoelina" "Marc Ravalomanana" "Hery Rajaonarimampianina" "Didier Ratsiraka"

엔하위키 미러 - "마다가스카르 혁명"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4/01/03/0505000000AKR20140103197300099.HTML

http://www.voakorea.com/content/article/1732196.html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4kia&articleno=15852543&categoryId=599183&regdt=20090318004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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