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r Michael Kemp Tippett (1905-1998)

Symphony No.3 Part.2




 마이클 티펫은 영국 출신의 작곡가로, 벤자민 브리튼(1913-1976)과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영국 작곡가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합니다. 그의 집안은 영국 서남부의 콘월 출신이고, 할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였지만 아버지는 성공하여 집안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결혼 후 런던 근교에 정착하였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둘째가 바로 마이클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후 그의 가족은 동부 서포크 주의 웨더덴으로 이사하였는데, 티펫은 이곳에서 유년기 교육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재능은 그 때부터 있었는지 어린 나이에도 나름 즉흥연주 같은 것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이후 1914년 그는 남부 스와니지에 있는 기숙학교에 진학하고, 1918년에는 에딘버러의 명문학교인 페테스 스쿨에 진학하여 다른 과목들과 함께 파이프 오르간 등의 음악교육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별로 유쾌하지 못했는데 주변 학생들의 괴롭힘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얼마 뒤 그는 부모에게 자신이 친구 남학생과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고 밝히고, 부모는 그를 학교에서 퇴학시켰습니다. 이후 그는 링컨셔의 스탬포드 스쿨로 전학하여 계속 공부하였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득이 되었는데, 학문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스탬퍼드 스쿨에서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전반적인 학업에 매진하면서도 그는 음악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조금씩 음악인의 길로 들어갔습니다. 이후 티펫은 케임브리지 대학 진학을 기대하는 부모와 선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인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였고, 그 무렵 무신론 옹호 등 반항적인 활동으로 학교와 충돌한 끝에 결국 스탬퍼드 스쿨도 그만두게 됩니다.


 이후 티펫은 동네 교회의 음악가들 등을 통하여 음악 공부를 이어나갔고, 자신의 가능성과 의지를 인정한 아버지가 그를 지원하면서 왕립음악학교에 정식으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작곡과 지휘 등을 체계적으로 배웠고, 아마추어 합창단을 지휘하는 등 음악 경력도 착실하게 쌓아 올렸습니다. 1928년 학위 시험을 통과하여 학사 학위를 딴 그는 박사 과정에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이를 포기하고 학교를 떠났습니다.


 이후 옥스테드에 정착한 그는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전개하면서 생계를 위해 작은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는데, 때마침 그곳에는 시인이자 극작가인 크리스토퍼 프라이(1907-2005)가 교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훗날 공동 작업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1931년에는 옥스테드 합창단과 함께 헨델의 <메시야>를 지휘하였는데 그는 당시에는 드물었던 '원전 연주'를 선보여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1932년에는 인근 림스필드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곳에서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특히 이 때의 정치적 교류를 바탕으로 그는 좌파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 뒤 그는 런던 카운티 정부가 후원하여 백수실직한 음악가들을 모아 설립한 사우스 런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위촉됩니다. 당시 그는 런던 근교의 광산을 돌며 노동자를 위한 음악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티펫은 1935년 영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는데,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를 읽고 감명받아 트로츠키주의자가 된 그는 스탈린주의를 지지하던 공산당과 노선이 맞지 않아 결국 또다시 결별하게 됩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사회의 혼란상, 자신의 동성애 성향에 관한 정체성 혼란 등(그가 동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분명치 않은데, 한 여성과의 결혼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의 문제 때문에 그는 정신적으로 대단히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그는 이를 이겨내기 위해 심리 치료를 받았고, 독일의 유대인 탄압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이를 배경으로 한 오라토리오 <우리 시대의 어린이>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본격적으로 전쟁이 터지자 그가 재직하던 몰리 칼리지가 폭격으로 파괴되는 등 사회는 난장판이 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재판 후에 3개월 징역을 선고받습니다(이후 2개월간 복역하고 어찌어찌 출소했다고).


 전쟁이 끝난 이후 그는 활발하게 활동을 재개하여 작곡가로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미국을 오가며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그는 이 과정에서 미국의 음악에 대한 많은 경험을 얻었고 그의 음악에 재즈와 블루스 등 미국적 요소를 많이 가미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BBC에서 방송 진행을 맡기도 했고, 평화주의자 단체의 대표를 역임하는 등 사회정치적 활동도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쌓은 업적을 인정받아 티펫은 1966년 기사 작위를 받고 Sir 가 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병역거부까지 한 사람에게 선선히 작위를 내리다니 한국적 정서에서는 신기하긴 하지만 이후 1970년대를 지나며 그는 시력이 크게 악화되는 등 건강 문제로 고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여전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83년에는 런던 음악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기도 했고, 1998년 노환으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세계 각지에서 음악적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티펫은 처음에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음악을 통해 작곡을 배웠고, 따라서 초기 작품은 비교적 보수적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현대적 요소들을 받아들여 대담한 음악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교향곡 3번은 1972년 완성되어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초연되었는데, 이 작품에는 블루스 요소가 적극적으로 들어가 있으며 특히 2부에는 곳곳에 베토벤 교향곡 <합창>의 부분들이 패러디로 들어가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Fanny Mendelssohn-Bartholdy / Fanny Hensel (1805-1847)

Notturno in g



[파니 멘델스존. 1842년]


 파니 멘델스존(결혼 후에는 파니 헨셀)은 흔히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로 잘 알려져 있지만, 본인 또한 대단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음악적 활동도 꽤 활발하게 했던 인물입니다. 다만 보수적인 그의 아버지와 사회적 편견 때문에 음악가로 정식 데뷔를 하지 못하고, 평생을 아마추어로 만족해야 했던 비운의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멘델스존은 1805년 태어났고, 부유한 유대계 은행가 집안에서 동생과 함께 음악 교육을 받았습니다. 동생 펠릭스의 재능도 물론 대단했지만, 파니 역시 12세 때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마스터했을 만큼 음악적 재능은 동생 못지 않게 대단했습니다. 동생처럼 그 또한 어린 나이부터 작곡 활동을 시작하였고, 많은 피아노 관련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가 19세기 초 유럽에서 살아간 '여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보수적인 인물이었다는 게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펠릭스가 음악가로 활동하는 것은 허용했지만 파니의 경우에는 연주활동은 물론 자작곡을 출판하는 것조차 못하게 막아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음악은 펠릭스에게는 직업이 될 수 있겠지만, 파니에게는 그저 장식용일 뿐이다" 라고 언급하기까지 했습니다. ㅡㅡ;


 결국 멘델스존은 이러한 부조리에 저항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타협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음악가로 정식 데뷔하는 것을 포기했고, 음악을 아예 놓지는 않았지만 아마추어 음악가로 활동하며 동생의 음악 활동을 돕는 역할에 그쳤습니다. 1829년에는 화가로 활동하던 빌헬름 헨셀(1794-1861)과 결혼하여 가정주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의 동생과 남편만큼은 그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하고, 비공식적으로나마 그가 음악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도록 지지해 주었습니다. 특히 동생 펠릭스와는 음악적, 인간적으로 대단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펠릭스는 "나보다 누나의 음악적 재능이 더 뛰어나다"고도 언급하였습니다. 펠릭스는 파니의 몇몇 작품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기도 했습니다(도용이라거나 작품을 훔쳤다거나 한 건 아니고, 자기 이름을 빌려 누이의 작품을 세상에 알린 것).


 정식 데뷔를 하지 못했을 뿐 그는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460편이나 되는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결혼 이후에는 남편의 지지에 힘입어 자신의 이름으로 조금씩 정식 데뷔를 시도하기도 했는데 1838년에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동생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한 것이 알려져 있고, 1846년에는 몇몇 자작곡을 모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Op. 1이 됩니다.


 이제 정말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세상에 선보일 찰나, 1847년 그는 작은 음악회를 준비하던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대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펠릭스는 며칠 뒤에야 누이의 부고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지만 이미 장례식이 끝난 이후였고, 충격에 과로가 겹쳐 몇 달 뒤 동일한 뇌졸중으로 사망하였습니다(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또한 비슷한 이유로 사망한 것을 볼 때 가족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파니 멘델스존은 헨셀과의 사이에서 아들 한 명을 낳았습니다.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로 초기 낭만파의 일반적인 스타일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동생처럼 다수의 <무언가(無言歌)>도 작곡하였습니다(애초에 무언가 자체가 파니와 펠릭스의 음악적 교감을 통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는 특히 피아노 쪽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이 부분에서는 동생 펠릭스보다도 앞선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유일한 녹턴은 1838년 작곡되었습니다.



 

Louis Moreau Gottschalk (1829-1869)

<Souvenir de Porto Rico>



[루이스 모로 고트샬크]


 - 고트샬크는 미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미국 출신으로는 거의 최초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뉴올리언스에서 출생하였는데 아버지는 영국 출신의 유대인 기업가였고, 어머니는 이 지역 출신 크리올(아메리카에서 태어나 자란 스페인계 백인)이었다고 합니다. 훗날 재즈의 발상지가 되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뉴올리언스는 다양한 음악적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었고, 고트샬크는 이런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 그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에 특출난 재능을 보인 것으로 보입니다. 1840년 11세 때 뉴올리언스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고트샬크는 2년 후 유럽으로 유학하여 파리음악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지만 그의 국적을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습니다(요즘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미국은 문화적으로는 유럽에게 개무시를 당했다고). 그래도 여기서 그는 베를리오즈에게 음악을 배우고 쇼팽, 리스트, 알캉 등 당대 굴지의 음악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 실제로 그는 위의 거장들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례로 쇼팽은 그의 재능을 두고 "피아노의 왕이 될 것이다"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는군요. 유럽에서 활동하던 그는 1853년 미국으로 돌아왔고, 이후 신대륙을 대표하는 피아노 연주자로 전 대륙을 떠돌며 활동하였습니다.


 - 그의 재능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것이었지만 그의 인생은 내내 떠돌이로 점철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1865년에는 오클랜드 여성신학교의 학생과 스캔들을 내고 아예 미국을 떠나버리는 등 사생활도 썩 깔끔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을 떠난 고트샬크는 주로 중남미 쪽에서 활동하였는데 이 때 중남미 특유의 음악 경향을 받아들여 자신의 음악세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 그렇게 떠돌이 인생을 살던 고트샬크는 1869년 브라질에서 활동하던 도중 황열병에 감염되고, 얼마 뒤 사망하였는데 키니네(퀴닌) 과다 복용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푸에르토리코의 추억>은 1857년 작곡되었으며, 그가 카리브 해의 섬들을 돌아다니며 활동하던 시기에 들은 음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시편 12편 (개신교 개역개정판) : 


 -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

1.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2.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4.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기나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7.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8.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한국어판 가사 (<칼빈의 시편찬송가> 시편찬송가 편찬위원회, 진리의깃발, 2009) :


1. 여호와 주여 도와주옵소서 / 경건한 자 끊어지리이다

충실한 자들 없어지나이다 /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2. 그 이웃에게 아첨하는 입술 / 두 맘으로 거짓을 말하니

주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 / 자랑하는 혀 끊으시리다


3.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말해 / 우리 입술 우리의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 주관할 자 누구요 함이라


4. 여호와 말씀 가련한 자들의 / 그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그 탄식 인해 내가 일어나서 / 그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5. 여호와 말씀 순결하심이여 / 흙 도가니 일곱 번 단련한

은과도 같네 은과 같으리다 / 그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네


6. 여호와 그들 지켜주시어서 / 지금부터 영원히 보존해

비열한 자들 높임 받는 때에 / 악인들이 곳곳에 날뛰네


(가사 출처 : http://blog.daum.net/hwang6710/)




시편 11편 (개신교 개역개정판) : 


 -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

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2.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4.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6.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한국어판 가사 (<칼빈의 시편찬송가> 시편찬송가 편찬위원회, 진리의깃발, 2009) :


1. 여호와 주께 내가 피하였네 / 너희가 내 영혼에 말하길 / 그들의 산에 도망하라 하네

악인이 화살 당겨 쏘기를 / 마음이 바른 자를 쏘려 하네

어두운 데서 쏘려고 하네 / 터 무너지면 의인 무엇하랴


2. 여호와 주는 성전 안에 계셔 / 여호와 보좌 하늘에 있네 / 여호와 눈이 인생을 통촉해

여호와 안목 그들 감찰해 / 여호와 의인 감찰하시오며

악인과 폭력 좋아하는 자 / 마음에 미워하시옵나이다


3. 주께서 악인에게 그물 던져 / 유황과 불과 태우는 바람 /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라

여호와 주는 의로우시사 /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주의 얼굴을 / 여호와 주의 얼굴 뵈오리다


(가사 출처 : http://blog.daum.net/hwang6710/)




Dieterich Buxtehude (1637?-1707)

Passacaglia in d minor, BuxWV 161



[비올을 연주하는 북스테후데. 생전의 그를 그린 유일한 그림]


 - 북스테후데는 17세기 북부 독일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특히 오르간 연주자와 작곡가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의 초년에 대하여는 기록이 부족한데(그래서 출생년도가 불분명) 일단 출생지는 스웨덴(당시에는 덴마크령)의 헬싱보리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교회 오르간 연주자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오르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 아버지의 뒤를 이어 헬싱보리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던 북스테후데는 1668년 뤼베크로 이주하여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 교회는 당시 크고 아름다운 대형 오르간과 소형 오르간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츠 툰더(1614-1667)의 후임자로 부임한 그는 툰더 시절에 시작된 '저녁 음악회(Abendmusik)'를 발전시켜 큰 인기를 끌었고, 오르간 연주자로도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 그런데 이 자리는 한 가지 관습이 있었으니 전임자의 딸과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ㅡㅡ; 북스테후데 역시 부임 이후 툰더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7명의 딸을 낳았다니 금슬은 좋았던 모양입니다. 이후 북스테후데는 남은 평생을 뤼베크에서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고, 많은 제자를 두어 후학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그리고 당대의 유명 음악가들과도 교류하였는데 그 중에는 요한 파헬벨(1653-1706, 카논 변주곡의 원작자)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 수십 년이 지나 그가 노년이 되자 후임자 선정이 이슈가 되었는데, 이 무렵 헨델(마테존과 함께)과 바흐가 각각 1703년과 1705년에 그를 방문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특히 바흐는 자신이 일하던 아른슈타트의 교회에서 4주간 휴가를 얻어 400km나 떨어진 뤼베크로 왔는데, 북스테후데의 연주에 큰 감명을 받았는지 복귀를 늦추고 4달 동안이나 머무르며 그와 교류하였습니다.


 - 북스테후데는 헨델과 바흐의 재능을 알아봤는지 후임자 자리와 함께 자신의 큰딸과 결혼할 것을 제안했는데, 큰딸을 본 두 사람은 하나같이 제안을 거절하고 도망쳐 버렸다고 합니다. ㅡㅡ; 음...... 결국 그는 큰딸의 혼사를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얼마 뒤 요한 쉬페르데커(1679-1732)가 큰딸과 결혼하면서 그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으로 정리되었습니다.


 - 당시의 음악가들이 으레 그렇듯이 북스테후데 역시 다양한 장르에 수많은 곡을 썼는데, 그가 쓴 것으로 알려진 작품은 300여 곡 정도가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250곡 정도입니다. 그나마 후대의 작곡가들(바흐 등)이 그의 작품의 필사본을 많이 만들어 놓아서 이 정도라도 전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종교 음악이며 초기 바로크에 가까운 간결한 형식이 특징입니다. 파사칼리아 d단조는 그가 쓴 유일한 파사칼리아입니다.




Alexander Nikolayevich Scriabin,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Скря́бин (1872-1915)

Symphonic Poem(Symphony No. 4) <The Poem of Ecstasy> Op. 54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 스크랴빈은 러시아 모스크바 출신의 작곡가 겸 피아노 연주자입니다. 어머니 또한 피아노 연주자였는데 스크랴빈을 낳고 얼마 뒤 사망하였고,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와 숙모에게 양육되었습니다. 숙모 또한 아마추어 연주자였으며 그는 숙모를 통해 음악을 처음 접할 수 있었습니다. 1882년 10대에 접어든 스크랴빈은 군사유년학교에 입학하여 1889년까지 군사교육을 받았지만, 몸이 작고 약했기 때문에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 일단 유년학교 시절에도 스크랴빈은 음악교육을 계속하였는데, 특히 피아노 연주에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내어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음악원 연주회에 참여할 정도였다는군요. 결국 그는 군사유년학교를 그만두고 1888년 음악원에 정식 입학하여 세르게이 타네예프(1856-1915), 바실리 사포노프(1852-1918), 안톤 알렌스키(1861-1906)에게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 스크랴빈은 피아노 연주자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는데, 음악원 시절 라이벌인 요제프 레빈(1874-1944)을 의식한 나머지 과도한 연습을 하다가 오른손에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고 합니다(다행히 회복됨). 1892년 피아노과 졸업 학위를 딴 그는 작곡과 학위도 따려고 했지만 작곡 스승인 알렌스키와 작품 스타일 관련 문제로 갈등하였고 결국 학위를 받지 못하고 졸업하게 됩니다.


 - 1894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데뷔하였고, 얼마 뒤 음악 관련 기획자인 미트로판 벨랴예프(1836-1903)을 만나 그의 지원 하에 러시아와 유럽 각지를 돌며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1897년에는 동료 피아니스트인 베라 이사코비치와 결혼하였고, 이듬해에는 모스크바에 다시 정착하여 모스크바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가 되었습니다.


 - 모스크바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던 스크랴빈은 1904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스위스로 이주하여 활동하였는데, 하필 이 때 타티아나 슐뢰저라는 사람과 바람이 나서 스캔들이 나는 바람에 아내와는 이혼하고 <법열의 시> 뉴욕 초연이 취소되는 등의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파리와 브뤼셀을 오가며 작곡 활동에 전념하였고, 1909년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습니다.


 -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쇼팽 등의 낭만파 경향을 이어받았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급속히 변화하여, 다분히 철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띠게 됩니다. 실제로 그의 후기 음악은 불협화음을 과감히 활용하는 등 아주 몽환적인 모습을 띠고 있으며, 후년에는 음악과 색채의 결합을 시도하여 1910년 교향곡 5번 <프로메테우스> 초연 때는 아예 '색광(色光) 피아노'라는 특수한 장치를 동원하기도 하였습니다.


 - 이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많은 지역을 돌며 연주와 작곡을 계속하던 스크랴빈은, 1915년 어느 날 윗입술에 생긴 작은 종기(혹은 뾰루지)를 잘못 건드린 것이 세균에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번져 ㅡㅡ;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법열의 시>는 1907~1908년 사이 작곡되었고, 간혹 교향곡(4번)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대체로 그의 작품이 신비주의로 완전히 넘어가는 과도기의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작곡가는 같은 제목으로 신비주의적 내용의 긴 시를 쓰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 지금은 거의 사라진 20세기의 직업으로 식자공(植字工)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직역하면 '글자를 심는 장인'이라는 뜻인데, 인쇄를 위한 활판에 활자를 배열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지요. 아마 활판에 활자를 심어넣는 것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은 것 같습니다. 이 직업은 나름 전문직이었고 꽤 잘 나갔다고도 하는데, 컴퓨터를 이용한 인쇄가 대세가 되면서 불과 이삼십 년 사이에 과거의 유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려일보의 식자공. 출처]


 - 실제로 식자공이 활약하던 시대는 한자를 많이 쓰던 시절이었던데다 활자의 특성상 좌우가 뒤집힌 글자를 노상 판독해야 하기 때문에, 식자공으로 일하려면 글을 해독하는 능력은 기본에 고도의 숙련 기술도 필요했습니다. 특히 인쇄 과정이 분초를 다투게 마련인 신문 인쇄에서는 때때로 식자공이 임시 편집자의 역할까지 맡아야 했기 때문에, 고도로 숙련된 식자공은 비교적 대우가 좋고 인기도 많았다고 합니다.


 - 그런데 그렇게 숙련된 식자공이라도 깨알같이 배열된(심지어 좌우가 뒤바뀐) 수백 수천 자의 한자들을 완벽하게 구별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국 간간이 오타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이 오타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간혹 있었던 모양입니다. 20세기 독재정권 시절 이야기입니다.




1. 대구매일신문의 수난


 - 대구매일신문은 1946년 '남선경제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창간되어 몇 차례의 제호 번경을 거쳐, 현재는 '매일신문'이라는 이름으로 발행되고 있는 대구의 지역신문입니다. 6.25가 발발하여 온 나라가 쑥대밭이던 1950년 8월 29일자 대구매일신문 1면 기사 중, '이(승만)대통령李大統領'이라는 글자가 '이견통령李犬統領'으로 인쇄되는 오타가 나왔습니다. 大(큰 대)와 犬(개 견)의 모양이 비슷하다보니 식자공이 혼동한 것입니다. 설마 의도적인 건 아니었겠지


 - 오타야 아무리 노력해도 간간이 나오기 마련이라 그러려니 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헷갈린 글자가 '개'를 뜻하는 한자였다는 데서 문제가 커집니다. '대통령'이 '견통령'으로 둔갑했으니, 요즘 말로 표현하면 대통령을 '개통령'이라고 본의 아니게 욕해버린 겁니다. 요즘이라면야 그냥 짤방 해프닝으로 웃고 넘어가겠지만 당시는 사정이 좀 달랐습니다. 이 하나의 오타가 추상같은 독재권력의 높으신 분들 심기를 건드린 것입니다.


 - 결국 오타 하나 냈다는 이유로 사장이 구속되고 편집주간은 사임했으며, 신문사는 무기정간 조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사장 이상조는 2개월 후에야 풀려났지만 신문사 운영을 더 못하고 회사를 매각해야 했습니다. 이후 천주교 쪽에서 신문사를 인수하여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구매일신문 습격 사건 관련기사. 1955년 9월 17일자 경향신문 3면.]


 - 그런데 꼭 이 사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대구매일신문은 이승만 정권 내내 탄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955년에는 관제데모 학생 동원을 비판하는 사설이 신문에 실리자, 자유당이 정치깡패들을 동원하여 신문사를 때려부수고 여러 직원을 다치게 한 '대구매일신문 습격 사건'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이 때 "백주(白晝)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경찰 간부의 망언은 길이 전설이 되었습니다.




2. 후폭풍 : 언론사의 오타 노이로제


 - 이후로도 대통령 오타 사건은 몇 차례나 더 벌어졌습니다. 1953년에는 전북의 삼남일보와 충북의 국민일보(지금의 국민일보가 아님)에서 동일하게 '견통령'이라는 오타를 내서 홍역을 치렀고, 국민일보는 몇 달 뒤 똑같은 오타를 한 번 더 내는 바람에 아예 폐간당하고 말았습니다. ㅡㅡ; 이듬해에는 부산일보에서 '이승만 대령'이라는 오타를 냈는데, 이 때는 욕설은 아니어서인지 주의조치만 받고 넘어갔다고 합니다.


 - 다른 오타도 있습니다. 1955년 동아일보는 활자 배치를 실수해서 다른 기사에 들어갈 '괴뢰(꼭두각시)'라는 글자를 '고위층 재가 위해 대기 중'이라는 제목 앞에 붙여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괴뢰 고위층'이라는 말이 나온 건데, 괴뢰는 북한에 붙는 수식어였고(흔히 말하는 '북괴') 당시에 고위층이라 하면 이승만의 최측근을 말하는 게 보통이었기 때문에 역시 난리가 났습니다. 다행히 360부만 발행하고 수정이 됐지만 책임자가 해임되고 신문사는 1개월 정간을 당했습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견통령'을 검색하면 이게 의외로 흔한 실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ㅡㅡ;]


 - 일이 이렇게 되니 신문사들은 오타, 특히 '대통령' 같은 중요 단어에 대한 극도의 노이로제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실수 한 번에 신문사가 날아가게 생기니 각 신문사들은 아예 '개 견犬' 자를 활자에서 없애버리거나 '대통령'이라는 세 글자를 하나로 묶어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ㅡㅡ;


 - 이것도 어찌 보면 필화(筆禍), 혹은 문자옥(文字獄)이라 하겠습니다. 글자 하나에 꼬투리를 잡아 지식인을 탄압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물론 대통령을 '개통령'이라고 인쇄했다면 기분이야 좋지 않겠지만, 이런 사소한 오타에 공권력의 탄압까지 가하는 것은 독재정권의 '언론 길들이기'의 일환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입니다. 오타 하나 무서워서 벌벌 떨어야 하는 마당에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대놓고 실을 엄두가 날까요?




3. 요즘에도 오타는 나오지만......


 - 1990년대 이후 인쇄에 컴퓨터가 사용되고 활판이 퇴출되었지만, 요즘의 인쇄물에도 간간이 오타는 나옵니다. 몇 쪽 이상의 긴 글을 써 보았다면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아도 글 어딘가에 오타가 숨어 있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ㅡㅡ; 어쩌면 컴퓨터가 인간의 일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그만큼 일에 대한 인간의 집중도는 떨어뜨린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 그래도 요즘에는 그 오타 하나로 누군가가 고초를 치를 일은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2012년 7월 3일 조선일보가 1면 톱기사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라는 오타(이명박 대통령은 2013년 2월 퇴임)를 냈을 때도 네티즌들의 비웃음과 함께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난 바 있습니다. 조선일보의 셀프 탄핵 2013년 아시아경제는 '자치단체'를 '자X단체'로 인쇄하는 오타를 내고, 다음날 "19금 바로잡습니다"라는 희대의 정정기사를 내기도 했습니다. ㅡㅡ; [기사보기]


[조선일보의_속내.jpgee 출처]


 - 물론 오타가 자꾸 나온다는 게 언론의 입장에서 바람직할 리는 없습니다. 글자 하나, 띄어쓰기 하나 차이로 '대통령'이 '개통령'으로 변신하는 식의 의미 전달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식자공의 시대에 비해 훨씬 편리해진 작업 환경에서 이런 오타가 나온다는 것, 특히 인터넷으로 올라오는 기사에 툭하면 발견되는 대량의 오타들을 보자면 한국 언론의 최근 수준에 대해 깊은 고민이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여담으로 언론의 오타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과거의 한국 뿐 아니라 독재정치가 이루어지는 수많은 나라의 공통된 현상인 것 같습니다. 2011년 인민일보는 당시 총리 원자바오의 이름(溫家寶)을 '溫家室(찜질방이라는 의미가 있음)'으로 찍어 내는 바람에 무려 17명이 문책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북한 로동신문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ㅡㅡ; [로동신문의 오타 검열]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매일신문", "대구매일신문 습격 사건"

『한국대중매체사』,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7. (Google 도서검색)

노컷뉴스 "이승만 견통령, 대령… 막 나가는 언론 열전"

머니투데이 "대통령이 '犬통령'..오·탈자 사고 처벌사례 보니"

머니투데이 "사라진 식자공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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