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on Stepanovich Arensky (1861-1906)

Piano Trio No. 1 in d Op. 32



[아렌스키. 1895년]


 아렌스키는 러시아 노브고르드에서 출생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입니다. 그의 집안은 부유하였는데 아버지는 의사 겸 첼리스트에,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음악적 환경 아래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아래에서 그는 9살 때 이미 작곡을 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있었고, 18세 때인 1879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를 사사하였습니다. 당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그를 높게 평가하여 자신의 오페라를 작곡할 때 공동작업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882년 아렌스키는 음악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놀랍게도 바로 다음 해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교수님은 22살! 이곳에서 그는 차이콥스키를 만났고 그의 인정을 받아 음악가로 대성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무렵부터 그는 잦은 폭음을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그의 건강과 수명을 갉아먹게 됩니다. 그는 1895년까지 교수로 재임하며 라흐마니노프, 스크랴빈 등 많은 음악가를 가르쳤는데 스크랴빈과는 훗날 음악적으로 대립하는 관계가 되기도 했습니다.


 1895년 교수직을 사임한 아렌스키는 밀리 발라키레프의 뒤를 이어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정예배당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하여 1901년 사임하고, 이후로는 작곡가로서 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알콜중독과 무절제한 생활의 결과 결핵에 걸려 있었고, 결국 이 때문에 1906년 핀란드 페르크예르비(現 러시아 카렐리야 지방의 키릴로프스코예)에 있는 요양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름 러시아 음악사에서는 이름 있는 작곡가이기 때문인지 1987년 소련은 남극의 한 빙하에 그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아렌스키 빙하"). 알렉산더 섬의 베토벤 반도의 보케리니 inlet에 있다


 그의 음악세계는 차이콥스키와 쇼팽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차이콥스키의 영향이 커서 <차이콥스키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한 적도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3개의 오페라와 2개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많은 수가 있지만 대체로 피아노곡을 비롯한 실내악곡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피아노 삼중주 1번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 1894년 완성되었습니다.




참고 : 

영문 위키백과, 러시아어 위키백과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1] [2]

http://classictong.com/artist/950




Kodály Zoltán (1882-1967)

<Háry János> Suite



[코다이 졸탄]


 코다이는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이며, 음악학자이자 음악교육자이기도 합니다. 바르토크와 함께 헝가리의 '진짜' 민속음악을 발굴하여 세계에 알렸으며, '코다이 교수법(Kodály method)'이라는 음악교육이론을 제창하여 음악교육에도 큰 업적을 남긴 바 있습니다. 그는 1882년 헝가리 중부의 케치케메트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철도노동자였기 때문에 자주 이사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음악가 집안은 아니었지만 부모 모두 취미로 악기와 성악을 즐기는 음악애호가여서 그는 어릴 적부터 음악과 친숙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코다이 역시 어릴 적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익혔습니다. 그는 중등학교에 다니던 10대 시절 처음으로 작곡을 시도했는데, 16세 때 학교 오케스트라를 위하여 작곡한 서곡이 처음 세간에 알려지며 호평을 받았습니다. 18세 때 그는 부다페스트 대학에 입학하여 독일어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고, 음악 또한 포기하지 않고 리스트 음악원에 동시 입학하여 한스 쾨슬러(1853-1926)를 사사하였습니다.


 다만 그의 아버지는 음악애호가였음에도 자신의 아들이 음악 전공자가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여 "작곡가는 남자가 할 만한 직업이 아니다"라고 ㅡㅡ; 코다이를 말렸고, 그는 일단 자신의 진로를 교사 쪽으로 결정했습니다. 1905년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아다지오>로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때마침 헝가리의 다른 대작곡가인 바르토크를 처음 만났는데, 바르토크는 이미 헝가리 민속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를 거치며 브람스의 <헝가리 춤곡> 등 집시 음악이 헝가리 음악으로 세계에 알려져 진짜 헝가리 민속음악은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축음기를 들고 헝가리 각지를 돌아다니며 농민과 서민들의 음악들을 채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1906년 첫 결실인 <헝가리 민요집>을 출판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코다이는 「헝가리 민요의 운율구조」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따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도 수십 년간 코다이와 바르토크는 헝가리의 수백 개 마을에서 수천 곡의 민요를 수집하여 진정한 '헝가리 음악'을 세우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이들을 후원하던 샹도르 엠마(1863-1958)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코다이와 결혼하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헝가리가 잠시 공산화되자 코다이는 이에 협력하였지만, 이 정권이 얼마 뒤 무너지자 잠시 정치적으로 곤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상관 없이 음악 관련 활동은 지속하여 1923년 <헝가리 시편가>를, 1926년에는 오페라 <하리 야노슈>를 완성하는 등 작곡가로서 그의 대표작을 다수 발표하였습니다. 물론 헝가리 민속음악 연구도 꾸준히 진행하고, 음악교육 관련 활동도 지속하였습니다.


 1940년대 들어 헝가리는 나치 독일의 동맹국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나치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바르토크와 달리 코다이는 끝까지 헝가리에 남아 음악교육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리고 종전과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에는 전쟁 기간을 포함하여 그가 음악교육 등에 남긴 공로를 인정받아 헝가리 음악계의 정점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그는 헝가리 국립음악원장, 음악가협회장, 과학기술원 명예회원을 역임하고, 헝가리 정부로부터 많은 훈장과 포상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958년 첫 아내 엠마가 사망하자 다음 해 58세 연하인 셔롤터 피첼리(1940-)와 재혼하였습니다. ㅡㅡ;


 말년에는 작곡가, 음악학자, 음악교육자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가 제창한 특유의 리듬 및 선율학습, 모국어처럼 어린이에게 친숙한 민요 선율을 바탕으로 한 음악교육 등 '코다이 교수법'은 1960년대 이후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아 음악교육학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권위와 명성의 정점에 오른 그는 1967년 사망하였고, 그의 두 번째 부인은 현재까지 생존하여 코다이의 음악을 알리고 있다고 합니다.


 <하리 야노슈> 모음곡은 동명의 오페라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리 야노슈'란 헝가리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로, 한 시골 마을에서 나폴레옹 전쟁 당시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허풍을 떨곤 했다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이 곡은 관현악의 '재채기'로 시작하는데 헝가리의 속설에 따르면 이야기를 하다가 듣는 사람이 크게 재채기를 하면 그 이야기가 진실하다는 말이 있다는군요.




참고 : 

http://sound.or.kr/bbs/view.php?id=music3&no=872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ovegalaxy1&logNo=60039228809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yu5071&logNo=120190904187

http://ihsnews.com/11125

한글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최근 네이버 블로그에서 대규모 개편을 예고한 것을 계기로 한동안 잘 묻어두었던 고민 - 블로그 플랫폼을 옮겨볼까 하는 생각이 또 튀어나왔습니다. 이런저런 장점에 이끌려 티스토리에 정착하고, 이후 몇 년간 글을 쌓아올려 이제는 그나마 하루에 몇십 명은 안정적으로 방문하는 블로그가 되었습니다(소위 파워블로그 수준이야 아니지만 어차피 그게 목적은 아니었으니 상관은 없지요). 하지만 잊을 만하면 다른 쪽으로 이전해볼까 여러 번 고민한 것도 사실이고, 실제로 네이버니 워드프레스니 하는 곳들로 이전해 보려고 시도한 적도 있지만 항상 결론은 티스토리 복귀였습니다(이번에도 그럴 것 같고요).


 블로거의 이런 고민이 더 심해진 것은 (확실치는 않지만) 카카오가 본격적으로 다음의 옛 서비스들을 숙청(?)하면서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대로 잘 나가던 다음 TV팟 같은 서비스들도 날아가는 마당에, 벌써 하향세를 탄 지 오래인 블로그 서비스가 무사할지 걱정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더구나 다음-카카오 병합 이후 카카오의 블로그 혹은 그와 유사한 서비스는 다음 블로그, 티스토리, 카카오스토리, 그리고 신규 런칭한 브런치까지 4개나 되니 카카오 입장에서 어떻게든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거기에 티스토리 운영상의 몇몇 논란 또한 블로거를 비롯한 티스토리 이용자들의 우려를 키우는 데 일조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2016년 말 전격 단행된 백업서비스 종료입니다. [당시 블로거의 글] 티스토리가 가진 최대 장점 중 하나로 꼽히는 기능이 사라지는 것이라 논란과 반발이 상당했지요. 이미 당시부터 이 조치가 티스토리 서비스 종료의 시발점이냐, 타 플랫폼으로 이전하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티스토리 블로그를 백업해서 워드프레스 쪽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냐, 공지된 것처럼 단순히 의미 없어진 기능을 폐지한 것이냐 등등 많은 말들이 있었습니다.


 이후로는 사실상 티스토리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것이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려를 의식해서였는지 2017년에 티스토리 측에서는 관리페이지를 일부 개편하고 플래시 제거 등 대규모 개편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였지만, 이후 1년간 딱히 추가로 바뀐 것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주요 경쟁상대라기엔 체급 차이가인 네이버 블로그가 대규모 개편을 예고하면서 티스토리를 검색에서 밀어내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이는 등, 티스토리 이용자들의 불만과 걱정만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사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랬다고 이런 상황이 싫으면 그냥 블로그를 옮기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블로거 역시 이런저런 플랫폼을 찾아보고 실제로 옮기려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도로 티스토리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왜였을까요? 아마 가장 큰 건 지금껏 블로그에 쓴 글들을 옮길 자신이 없어서였을 겁니다. 글 수가 많지 않던 과거에도 글을 일일이 옮기는 건 그야말로 다이나믹 노동이고(네이버 블로그의 경우), 백업 기능이 있던 시절에도 워드프레스 쪽으로 글들을 옮기려면 이런저런 귀찮은 작업들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워드프레스는 만드는 것 자체가 일이고 이젠 백업 기능도 어차피 사라졌기 때문에 ㅡㅡ;


 둘째로는 그동안 쌓아온 방문자 수와 구글 애드센스 수입을 포기하지 못해서일 겁니다. 하루 50~100명이라는 수치가 물론 파워블로거들에 비하면 하꼬방(?) 수준이지만 내 생각을 소소하게 표현할 창구로서는 충분하지요. 그리고 애드센스 수익이야 별 것이 없지만, 3년 이상 광고를 달아두니 그래도 이제 60$ 이상의 수익이 모였습니다. 이대로 한 2년쯤 더 지나면 누적 수익이 100$를 돌파하여 드디어 돈을 인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ㅡㅡ; 블로그를 옮기면 당연히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지요. 특히 워드프레스 쪽으로 간다면 말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다른 플랫폼을 선택하지 못할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블로거가 항상 고민하는 네이버 블로그는 다른 건 몰라도 방문자를 유치하는 데는 이만한 곳이 없습니다(블로거는 처음 네이버로 가려고 했을 때 글 몇 개를 올리니 갑자기 방문자가 하루 500명 이상 몰려오는 경험도 해 봤습니다. 물론 블로그를 만들고 바로 밀어버리기를 반복하니 지금은 글을 써도 그렇게 아니 되지만). 구글 애드센스를 쓸 수는 없지만 어차피 수익을 목표로 운영하는 게 아니니 아쉽지만 상관 없고요.


 그런데 블로거가 느끼는 네이버 블로그의 문제라면 역시 HTML로 블로그를 꾸밀 수 없고(물론 블로거같은 허접 유저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소소하게 불편한 지점은 있더군요), 위에 언급한 글 옮기기의 불편함은 기본에, 무엇보다 서비스의 미래에 대하여 티스토리와 유사한 우려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네이버는 그나마 최근 개편 예고를 하면서 우려를 불식시키고는 있는데, 그 이전만 해도 네이버 포스트를 밀어주고 블로그는 버린다느니 둘을 합병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았습니다(그러고 보니 네이버 포스트와 브런치의 포지션이 좀 비슷하기도 하군요. 서비스의 성격은 좀 다르겠지만).


 워드프레스 쪽은 이제는 거의 포기. 직접 원하는 블로그를 만들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큰 매력이지만 그 만드는 과정이 (블로거같은 허접들에게는) 복잡하고 한국 스타일에 익숙한 형태의 스킨을 찾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방문자를 끌어모으는 게 너무 어려워서 결국 gg 쳤습니다. 거기에 웹호스팅 서비스를 따로 찾아봐야 하는 것도 문제였고 말입니다. 이글루스는? 글쎄, 딱히 티스토리와 견주어서 뚜렷한 장점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텍스트큐브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쪽은 앞으로 개발이 이어질지 어떨지도 불투명하니 ㅡㅡ;


 자아 결국 이리하여 블로거는 티스토리를 여전히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큰 변수가 없다면 앞으로도 이렇게 쭉 이어질 가능성이 높겠지요. 사실 오랫동안 방치플레이(?) 수준으로 운영되고 있다지만 그럼에도 티스토리는 나름대로 매력적인 플랫폼이라는 게 블로거의 생각입니다. 처음에 만들기를 상당히 잘 만든 것도 있고, 초대장 시스템으로 진입문턱을 적당히 둔 것도 돌아보면 괜찮은 운영방식이었고 말입니다(네이버 블로그처럼 홍보에 미친 돈벌이용 블로그로 헬게이트가 열리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불만이나 걱정이 생기면 블로그를 옮겨 볼까 하다가도, 결국 포기하고 돌아오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으니 언젠가는 티스토리를 포기해야 할 때가 오겠지만(티스토리가 사라진다든지), 아직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카카오가 여러 개 난립한 자사의 블로그 서비스를 정리해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분들이 단체로 정신나가지 않는 이상 트래픽 총량 한국 10위권에 십수 년간 방대한 콘텐츠를 쌓아올린 티스토리를 어떤 식으로든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고요. 블로거의 입장에서는 그냥 이제 제발 걱정이나 않게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Carl Philipp Stamitz (1745-1801)

Clarinet Concerto No. 3 in Bb



[카를 슈타미츠]


 카를 슈타미츠는 체코-독일계 작곡가로 고전파 초기에 활동한 소위 '만하임 악파'를 대표하는 음악가 중 하나입니다. 그의 아버지 요한 슈타미츠(1717-1757)는 만하임 악파의 형성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이며, 동생 안톤 슈타미츠(1750-1809?) 또한 작곡가 겸 바이올린 연주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만하임에서 태어난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버지를 통하여 처음 바이올린을 익혔습니다.


 아버지 사후에도 음악 수업을 이어간 슈타미츠는 1762년부터 만하임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1770년에는 파리로 이주하여(동생 안톤 또한 함께 이주한 것으로 보임) 유럽 전반에 바이올린 연주자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파리에서는 노아유 공작의 궁정 작곡가로 근무하였고 동시에 헤이그, 상트페테르부르크, 런던 등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주 활동을 벌였습니다.


 1794~95년경 슈타미츠는 독일 중부의 도시인 예나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카펠마이스터와 대학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그는 경제적 곤란을 겪은 듯하고 자녀들도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 등 개인적인 어려움 속에 말년을 보냈습니다. 몇 년 뒤 그는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그의 서재에서 연금술에 관한 다수의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는군요. ㅡㅡ;


 슈타미츠는 매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50편을 넘는 교향곡, 38편 이상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60여 편의 협주곡을 작곡하였으며 실내악곡도 다수 있습니다. 그의 협주곡은 바이올린, 비올라, 비올라 다 모레, 첼로, 클라리넷, 바셋 호른, 플루트, 바순 등 많은 악기를 위하여 만들어졌는데 클라리넷의 경우 명연주자인 요제프 비어(1744-1812)와의 공동 작업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하이든-모차르트 스타일의 고전적 양상을 따르고 있습니다.



Giuseppe Domenico Scarlatti (1685-1757)

Keyboard Sonata K.96 <La Chasse>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1738년]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겸 건반 연주자로, 바흐, 헨델 등과 함께 바로크 시대의 마지막을 수놓은 작곡가입니다. 그의 아버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1660-1725) 역시 당대의 대표적 작곡가 중 하나로 주로 오페라와 칸타타 등에서 많은 업적을 쌓은 바 있습니다.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음악을 매우 가까이 접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자랐으며, 초기의 음악 수업 또한 아버지에게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외에도 가에타노 그레코(1657?-1728?),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1661-1727) 등의 음악가들이 그를 가르쳤습니다.


 스카를라티는 1701년 나폴리 궁정예배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고, 2년 후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페라 작가로 데뷔하였습니다. 얼마 뒤에는 그의 아버지가 그를 베네치아로 보냈는데 이후 1709년 무렵까지 무엇을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해에 그는 로마에서 당시 망명 중이던 폴란드 여왕 마리 카시미르(1641-1716)의 전속 음악가가 되어 3년간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왕의 소극장에서 공연할 목적으로 만든 몇 편의 오페라 등 작품들이 알려지며 작곡가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1715년에는 교황청 줄리아 성가대의 악장에 취임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1719년 그는 로마를 떠나 런던으로 갔고, 그곳에서 자신의 오페라 <나르시스>를 상연하였습니다. 얼마 뒤에는 포르투갈로 거처를 옮겨 궁정 음악가로 임명되었는데 왕녀 마리아 바르바라(1711-1758)의 하프시코드 교사 일도 병행하였습니다. 계속 포르투갈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1727~28년 사이에는 잠시 로마로 갔다가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1729년 바르바라가 스페인 왕자(후에 왕이 되는) 페르난도 6세(1713-1759)와 혼인하면서 바르바라를 따라 사은품 1+1 스페인으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스카를라티는 세비야를 거쳐 마드리드에 정착하였고, 여기서 바르바라를 위하여 수많은(수백 곡이나 되는!) 건반 소나타를 작곡하였습니다. 이 작품들은 멀찍이 런던에서 출판되어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는 등 전 유럽에 걸쳐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후 페르난도 6세가 정식으로 스페인 왕에 즉위하자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국왕 부부의 지원으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난도 6세 부부는 때마침 전설적 카스트라토인 파리넬리(1705-1782)의 후원자이기도 해서 그는 파리넬리와도 교류하며 그를 위한 성악곡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작곡 뿐만 아니라 건반(특히 하프시코드) 연주자로도 당대를 수놓은 거장이었는데, 한번은 동년배 음악가인 조지 프레드릭 헨델과 건반 연주 대결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 대결에서 하프시코드 연주는 스카를라티가, 오르간 연주는 헨델이 승리하였고 두 라이벌은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친한 사이로 지냈다고 합니다. 헨델은 자신의 작품에 스카를라티 건반 소나타의 주제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사례, 헨델 합주 협주곡 Op.6 No.1의 마지막 악장 - 스카를라티 건반 소나타 K.2).


 스카를라티의 작품은 오페라 등 다른 장르도 많이 있지만, 역시 그를 대표할만한 것은 수백 곡에 이르는 건반 소나타들입니다. 명연주자의 작품답게 화려한 기교를 세련되게 담고 있으며, 고향 이탈리아 뿐 아니라 말년을 보낸 스페인의 음악 스타일이 녹아있는 등 대단히 풍부한 작품세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근대 이전의 음악가답게(?) 그의 작품은 양이 방대하고 소실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도 많은 등 목록을 정리하기 쉽지 않은데, 현재는 건반 소나타에 한하여 대체로 하프시코드 연주자 겸 음악학자인 랄프 커크패트릭(1911-1984)가 총 555개의 목록으로 정리한 번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끝났습니다. 결과야 모두 예상한 대로 나왔고 말입니다(하긴 그것보다도 민주당이 더 싹쓸이를 하긴 했네요). 뭐 전체적인 결과에 대해서야 너무 뻔한 이야기가 나올테니 관두고, 그냥 블로거 개인적으로 흥미있었던 몇몇 동네만 짧게 살펴보겠습니다.




1. 이번 선거 최대 격전지



 이번 선거에서 가장 간발의 차로 당선자가 결정된 곳은 강원도 평창군수입니다. 득표율 50:50에 표차가 단 24표가 나왔습니다. 2위 후보는 아마 두 달은 잠을 못 이룰 듯. ㅡㅡ; 사실 강원도는 도지사는 몰라도 시장-군수는 대부분 보수계열 정당 후보들이 석권하는 곳이었는데, 이곳은 아무래도 평창올림픽 성공 개최가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2. 왕년의 최대 격전지



 강원도 고성군수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현직 군수를 떨어뜨리고 당선되었습니다. 이 곳은 사실 많은 이들에게 유명한데 과거 어떤 일이 있었냐면



 바로 이 사건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ㅡㅡ; 두 후보는 이후 지방선거에서 리벤지(?) 매치를 치렀는데 황종국 후보가 한 번 더 승리하였고, 황종국씨가 시장 재직 중 별세한 이후에는 윤승근 후보가 당선되어 현직 군수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산을 하나 넘어서 군수직을 계속 하나 했더니, 또다른 산이 나타나 버렸네요. ㅡㅡ;




3. 이부망천의 최후




 얼마 전 자유한국당 대변인 정태옥씨의 "이부망천(이혼하면 부천, 망하면 인천)" 발언으로 폭탄을 맞은 두 지역입니다. 뭐 서울에서 망해서 인근 위성도시로 이사간다는 식의 이야기는 블로거가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서도 들은 적이 있는 유서 깊은 이야기이긴 한데, 그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선거에 나서는 정당의 중요 인물이 이런 식으로 대놓고 지역비하를 하는 건 그냥 그 지역에서 선거 포기하겠다는 거나 다름없지요. 당연하겠지만 선거 결과를 보면 수도권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격차가 났습니다.




4. 박정희 본진 털리다



 사실 이번 선거의 숨은 주인공은 바로 이곳일지도 모릅니다. 박정희의 고향이자 이전 시장이 "박정희=반인반신" 드립이나 치던, 박정희 숭배의 끝판왕 구미시장 자리가 더불어민주당에 넘어왔습니다. 민주당 계열에서 후보조차 잘 못 내던 경북 지역에 처음으로 민주당 기초단체장이 배출된 것도 그렇고, 그 자리가 하필이면 박정희의 고향 구미라는 게 더 의미심장하네요. 보수 계열 후보가 난립했던 것, 구미시가 전자산업 중심의 도시라 청장년층의 비중이 생각보다 높은 것 등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5. 어쨌거나 당선!



 이번에는 옆동네 상주시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크게 이슈가 없는 동네에 왜 왔을까요? 바로 1위 득표율 때문입니다. 보시는 대로 1위와 4위의 득표차가 10%도 나지 않습니다. ㅡㅡ; 여기도 무소속 후보가 난립하는 바람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아무튼 TK에서도 자유한국당 후보들의 득표율이 예전보다 많이 낮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겠습니다.




6. 서울 유일의 자유한국당 구청장



 서울은 더불어민주당이 싹쓸이를 해서 제4회 지방선거의 리버스 버전이 되나 싶었지만 유일하게 서초구만 자유한국당이 지켜냈습니다. 딱히 이 지역이 보수라서라기보다 현직 구청장이 인근 강남구에 비해 크게 안 좋은 쪽으로 이슈가 되지도 않았고, 선거 공보물 등 선거운동도 잘 한 측면이 있다고 하네요. 아무튼 덕분에 자유한국당 역시 간신히 고개를 들 껀수가 하나 생기긴 했습니다. 현실은 TK자민련




7. 녹색당에도 털린 자유한국당



 제주지사 선거는 예상대로 원희룡씨가 당선되었지만, 자유한국당 후보가 녹색당 후보에게도 밀리는 대참사(?)가 벌어졌습니다. ㅡㅡ; 이번 제주도 녹색당은 비례대표 선거에서도 꽤 높은 득표율을 얻었는데 아무래도 제주도라는 지역의 특성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8. 이준석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울 노원병 재보궐선거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나 버렸습니다. 이준석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9. 자유한국당 vs. 안티자유한국당



 경북 김천 재보궐선거에서는 자유한국당 후보가 간발의 차이로 당선되었습니다. 사실 이것도 자유한국당이 기뻐할 일만은 아닌 것이 무소속 최대원 후보는 반(反) 자유한국당 연합후보로 민주당 쪽의 지지까지 등에 업고 출마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마터면 민주당 혹은 민주당이 지지하는 후보들에게 재보선 모든 지역구를 다 털릴 뻔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10. 정리


 라고 할 게 있을까요? 이번 선거에서는 아무튼 민주당이 압승할 것이라고 대부분이 예상했고, 결국 그 정도가 문제일 뿐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으니 말입니다. 이재명씨나 김경수씨가 개인적, 정치적 온갖 논란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무난하게 당선된 것을 보면 여론 일반이 자유한국당이나 바른미래당에 어떤 입장인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바른미래당은 반짝 떴다가 사라진 수많은 제3정당들의 뒤를 따를 가능성이 아주 높아졌고, 민주평화당은 역시 호남 자유선진당 노릇이나 좀 하다가 말겠지요. 정의당은 정당득표율은 좀 나온 것 같지만 고질적인 인재부족을 어떻게든 해결 못하면 여전히 답이 없을 겁니다. 그냥 앞으로 4년간 이 사람들이 뭔 짓을 하는지나 잘 감시해 봅시다.



 친일파를 생각할 때 한국인들이 줄줄이 떠오르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습니다만, 일본의 식민 지배에 한국인들만 도움이 되었던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일본인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외 나라에서 온 외국인 중에도 일본 당국에 적극 협력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지요. 특히 그런 사람이 세계적인 종교의 중요 인물 쯤 되는 거물이라면 여기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번에 살펴볼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한국명 민덕효, 1854-1933) 주교는 한국 가톨릭의 기반을 다진 위인이면서, 그와 동시에 일본에 적극 협력한 친일행위자라는 거대한 어두움을 함께 가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귀스타브 뮈텔 주교]




1. 뮈텔 선교사 조선에 오다


 뮈텔은 1854년 프랑스 랑그르에서 출생하였고, 1876년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파송되었는데, 조선에 온 것은 1881년입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면 1886년 조선과 프랑스가 정식 수교하기 전까지 양측은 적대 관계였고(병인양요 등 무력충돌도 있었다보니) 프랑스 선교사의 활동도 그 때까지는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즉 그 역시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사로 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뮈텔은 1885년 본국의 신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조선을 잠시 떠났습니다(30세 무렵에 교수로 임용된 것을 보니 능력은 확실히 인정받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1890년 가톨릭 조선대목구(現 서울대교구) 교구장 장 블랑(1844-1890)이 선종(사망)하자 후임으로 그가 임명되었고, 제8대 조선대목구장으로 다시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이후 그는 사망하는 1933년까지 무려 43년간 교구장 자리를 지켰고, 이제 막 박해에서 벗어난 한국 가톨릭의 기틀을 잡는 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신학교를 설립하여 사제를 양성하였고,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명동성당(당시 종현성당) 또한 그의 재임기에 지은 것입니다. 독일의 성 베네딕토회에 요청하여 한국에 수도원을 설립하도록 힘쓰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제도적 측면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는데, 예를 들어 한국에만 존재하는 판공성사 제도가 그의 재임기에 정착된 것입니다.


[명동성당]


 그가 재임하는 동안 한국 가톨릭의 교세는 꾸준히 성장하여, 1911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일대가 대구대목구로 분리되고(이 때 조선대목구는 서울대목구로 명칭이 바뀝니다) 1920년에는 원산대목구(함경도, 간도)가, 1927년에는 평양지목구(메리놀 외방전교회 관할)가 신설되는 등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그가 처음 부임할 당시 17,000여 명에 불과했던 신자 수도 1930년대가 되면 서울대목구에서만 50,000~60,000명에 달할 정도가 되었습니다(여러 대목구와 지목구가 분리된 이후의 통계입니다).


 뮈텔 주교는 주교로 임명된 날부터 죽기 며칠 전까지 꾸준히 일기를 남겼는데, 이 일기와 편지, 각종 사목문서 등을 통틀어 '뮈텔 문서'라 부르며 초기의 한국 가톨릭과 뮈텔 주교 개인을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한국 가톨릭의 큰어른으로 대접받으며 그와 관련한 사적지들도 있습니다. 확실히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종교지도자로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겠습니다만......




2. 주교 뮈텔의 그림자 : 민족을 팔아 부흥을 얻다


 한국 가톨릭의 성장 뒤에는 바로 일본 당국과의 지저분한 협력관계가 있었습니다. 뮈텔 주교는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옹호하고, 심지어 이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일본의 인정과 협조를 얻어냈고, 그 바탕 위에서 급속한 교세 확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단 잘 알려진 사례로 뮈텔과 안중근 사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안중근은 부자(父子)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뮈텔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하는데,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이후 뮈텔은 그와의 모든 우호관계를 단절해 버립니다. 심지어 안중근에게 세례성사를 준 니콜라 빌렘(한국명 홍석구, 1860-1936) 신부가 사형 직전의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하러 가겠다고 요청하지만, 일본 당국까지 허락한 사안을 뮈텔은 거부하고 빌렘 신부가 안중근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뮈텔의 입장은 '안중근이 자신의 행위를 정치적으로 참회하지 않으면 성사를 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동생 안명근이 그를 찾아 고해성사를 집전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다시 거절하면서 "안명근이 아주 무례했다"고 일기에 써놓기까지 하였습니다. 이후 빌렘 신부는 그의 금지령을 씹고 뤼순으로 건너가 고해성사를 집전하였는데, 뮈텔은 정치적 일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빌렘에게 2개월 성사 금지 징계를 내렸습니다. 이에 빌렘은 파리 외방전교회와 교황청 포교성성에 직접 탄원하였고 교황청은 빌렘 신부가 정당한 행위를 했다고 인정하고 징계를 직권으로 철회했습니다. ㅡㅡ;


[안중근을 면회하고 있는 빌렘 신부]


 안중근과 그의 악연은 이뿐만 아니라 안중근이 추진하던 대학 설립에도 반대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그 이유란 게 무려 한국인이 학문을 익히면 가톨릭 신앙에 소홀해진다는 말 같지도 않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오죽하면 안중근이 충격을 받아 외국어 공부를 그만두기까지 했다는군요. 물론 이후 한국 가톨릭에서 교육사업에 힘쓰긴 했지만 이는 초등교육에 한정된 것이었고, 이는 '교육은 하되 지식인을 양성하는 고등교육은 하지 않는다'는 식민 당국의 정책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유명한 일로는 105인 사건의 결정적 단초가 된 고해성사 밀고 사건이 있습니다. 안명근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계획을 두고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에서 계획을 털어놓자, 미리 뮈텔로부터 안중근 집안의 일을 상세히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은 빌렘은 뮈텔에게 이 사실을 편지로 알렸고 이를 뮈텔이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1864-1919)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안명근 뿐 아니라 그와 연결된 신민회가 풍비박산나고 말았습니다.


[아카시 모토지로]


 이는 종교지도자가 많은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한 것이며, 동시에 종교적으로도 대단히 논란의 소지가 많은 행동이었는데 여기에는 당시 가톨릭계의 골치를 썩이던 명동성당 진입로 문제가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진고개(現 충무로) 방향 진입로는 일본인들이 토지를 침범하여 사실상 길이 막혀 있는 상태였고, 성당 측에서는 1906년부터 계속 소송을 걸었지만 번번이 패소해 왔습니다. 이에 뮈텔은 독립운동 기밀을 일본에 밀고하고 그 대가로 성당의 부지 문제를 즉각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1운동에서도 그는 당연히 신학생들에게 시위 참여 금지령을 내리고 이를 어기고 참여한 학생들은 여지없이 퇴학 처분을 내렸습니다(이러한 입장은 뮈텔 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독립운동 미참여를 비판하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활약(?)상은 그의 일기에 꼬박꼬박 기록되어 있어 후세에 그 전말이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3. 종교적 고찰 : 과연 그는 제대로 된 사제로서 자격이 있는가?


 이런 짓들을 하고 다녔음에도 그가 한국 가톨릭의 기반을 닦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에 가톨릭계에서는 그를 오랫동안 긍정적으로 다루어 왔습니다. 하지만 뮈텔 문서 등 그와 관련한 사료들이 많이 발굴되고, 다양한 각도에서의 연구가 진행된 최근에는 그의 행적이 신앙적으로도 문제가 많다는 비판이 다수 제기되고 있습니다. 특히 후술할 고해성사 밀고 논란까지 가면 그가 아예 사제로서 자격이 없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일단 그는 한반도 선교에 일생을 바친 주제에 심각한 인종차별주의 성향을 보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인 신부가 한국의 법정에 출두하면 한국인의 눈에는 '유럽인이 한국 법정의 재판권에 굴복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면서 대놓고 한국 정부와 법정을 무시하도록 권유한 적이 있는가 하면, 한국인 신자들이 그에게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도 않을 만큼 한국인을 아래로 보았습니다. 한국인 사제들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아, 훗날 부산교구에서 활동하는 사제 김명제(1908-1960)가 그에게 항의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의 재임기에 한국인을 위한 많은 사업이 벌어진 것은 맞지만, 여기에는 '우매한 한국인'을 위한 동정적 시각이 강하게 들어있었고 자신들(유럽인)과 한국인을 동등하게 보고 벌인 일이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안중근과의 일화에서도 드러나듯 뮈텔은 오로지 가톨릭 선교에만 몰두해 있었고 이를 위해서라면 폭압적 식민지배에 협조함은 물론, 선교의 대상인 한국인들을 우매하게 만들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연루된 가장 큰 떡밥으로 단연 '고해성사 밀고'를 들 수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제는 고해성사의 내용을 결코 어디에도 발설해서는 안되며, 이를 어겼을 경우 즉각 파문당하거나 이에 준하는 중징계를 받습니다. 물론 안명근이 '이미 저지른 범죄'에 대한 참회가 아니라 '앞으로 저지를 범죄'에 대해 언급한 것이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고해성사의 형태로 고백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발설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큰 논란을 자초한 셈입니다.


[뮈텔 주교의 일기는 현재 번역 출간되어 있습니다]


 빌렘 신부가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하러 가는 것을 막은 것 또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하는 사제의 기본을 망각한 행동이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빌렘 신부는 비록 105인 사건 당시에는 고해성사의 내용을 발설한 1차 책임자라는 문제는 있지만 뮈텔의 반(反)한국인 성향에 반발하여 사사건건 충돌하였고, 결국 1914년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독립운동을 방해한 뮈텔의 이러한 행적들은 그 상당수가 교회법조차 무시한 월권행위였기 때문에 더 큰 비판을 받습니다. 


 이러한 짓거리들을 행한 결과 한국 가톨릭은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에 거의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했고, 1930년대에는 일본이 강요한 신사참배를 상당히 앞서서 수용하기도 했습니다(다만 이는 일본과의 갈등을 피하려는 교황청에서 직접 이를 수용하도록 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후로도 한국 가톨릭은 몇몇 신자들의 개별적 활동을 제외하면, 김수환 추기경의 등장 이전까지 정치적으로 극히 보수적인 성향을 유지하며 권력에 협조하는 모습을 계속 보이게 됩니다.


 문제는 이것이 당장의 교세를 확대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결국 한국인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비추어졌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 가톨릭의 교세는 일제강점기 들어서도 꾸준히 성장은 하지만 그 정도는 점차 감소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개신교의 폭발적 성장에 밀려 '기독교'라는 명칭 자체를 사실상 개신교에 빼앗기기까지 했습니다. 과연 그의 행적은 한국 가톨릭을 위해 좋은 것이었을까요?




4. 정리 : 무엇을 위한 종교여야 하는가?


 뮈텔 주교의 행적은 이러저러하게 연구가 되고 있지만,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은 비교적 근래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의 재임기가 한국 가톨릭의 (사실상) 태동기였기 때문에 그를 비판한다는 것은 한국 가톨릭의 기반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추일 수도 있겠습니다. 뮈텔과는 거의 반대 방향의 사목을 한 김수환 추기경조차도 그에 대하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라고 옹호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선이 이후의 한국 가톨릭에 두고두고 걸림돌이 된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가톨릭은 한국 사회와 문화에 오랫동안 적응하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동안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외면하였습니다. 1970~80년대 김수환 추기경과 정의구현사제단 등 사회에 대한 진보적 시각을 가진 사제들이 다수 등장하여 활동하고 나면서부터야 가톨릭의 교세가 다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한국 가톨릭에 끼친 해악은 더욱 명백해집니다.


 분명 그가 주장했던 중요한 논리는 '정교분리'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보면 자신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독립운동 기밀을 일본에 밀고하고, 이를 대가로 종교시설 유지에 편의를 얻어내는 모습은 정교분리보다는 차라리 '정교유착'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놓고 다른 이들에게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며 정당한 사회참여마저도 막아세웠던 것입니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한국 순교자 124인 시복미사. 광화문광장]


 사실 블로거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에게서 현재 한국 개신교의 목회자들의 모습이 비추어졌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당시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던 개신교와 이를 막아세웠던 가톨릭의 처지는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정 반대가 되어 있습니다. 가톨릭은 사회문제에 적극적 모습을 보이며 사회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으며, 반대로 개신교는 정교분리 운운하면서 정작 뒤로는 심한 권력지향성을 드러내어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교리를 떠나 사회적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종교의 역할이란 사회의 소외당한 자, 탄압받는 자, 이해받지 못하는 자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주는 것일 터입니다. 그렇다면 교세 확장을 명분으로 탄압받는 한국인의 목소리를 외면한 뮈텔 주교의 행적, 그리고 그 모습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현재 일부 종교인들의 행태는 과연 제대로 된 종교인의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그저 하나의 질문을 던져봅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느 쪽을 더 옳다고 하실까요?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가톨릭평화신문, 「[특집]안중근 하얼빈 의거 100주년④ 안중근과 빌렘 신부, 그 운명적 만남

가톨릭프레스, 「명동성당 길과 바꾼 105인 사건

연합뉴스, 「안중근의사 내용담은 <뮈텔 일기>와 <조선교구통신문> 국내 최초 공개

중앙일보, 「[분수대]뮈텔 주교와 김추기경

한겨레, 「가톨릭의 불편한 진실, 뮈텔 일기

김정환, 「뮈텔 주교의 사목활동」, 『교회사연구』 3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김정환, 「뮈텔 주교 재임기의 교세 변화」, 『교회사연구』 3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최기영, 「뮈텔 주교의 한국 인식과 한국 천주교회 : <뮈텔 주교 일기>를 읽다」, 『교회사연구』 3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 1.


 '선언'이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무엇일까요? 사실 선언이라는 건 그 자체만으로는 어떠한 역사적 의미도 갖지 않습니다. 그냥 말만 한 거니까요. 그것이 무슨 계약이나 판결, 조약처럼 강제력 또는 법적 효력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언의 의미를 논하려면 결국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가지고 따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미독립선언서는 한반도가 결국 해방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고, 군사독재 시대 발표된 많은 선언문들은 결국 민주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사에 그 빛을 남기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번 판문점 선언 또한 마찬가지라 할 것입니다. 좀 더 멀리 간다면 7·4 남북공동성명부터 시작해서 6·15, 10·4에 이르기까지 통일 문제와 관련한 모든 선언문들은, 결과적으로 남북이 통일되어야 역사적으로 그 의의를 평가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이번 선언에 마음 한 구석 불안함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겠지요. 지금까지는 그러한 선언들이 제대로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지금 이 순간까지 이 모양이었던 거니까요.




 - 2.


 그러니 앞으로 이 선언의 내용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겠는가를 따져 보아야 할텐데, 아직 확정적인 이야기를 할 수야 없지만 이전 선언에 비해 훨씬 여건이 좋고 실현 가능성이 크기는 한 것 같습니다(물론 블로거의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이번 회담은 '북미정상회담'과 한 트랙으로 가는 이벤트이고, 또한 한 쪽 당사자인 대한민국 대통령은 임기를 4년 이상 남겨 두고 있습니다. 북미관계라는 변수, 반북세력으로의 정권교체라는 변수를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는 북한 쪽에서 이전과 다르게 매우 즉각적인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핵실험장을 확실히 폐쇄할테니 그걸 직접 와서 확인하라는 이야기나, 몇 년 전에 바꾸어 놓은 북한식 표준시를 다시 원래 기준으로 돌려놓겠다는 이야기나 이전의 북한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물론 이것이 '정치'인 만큼 이것이 진심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별 의미가 없고, 적어도 북한 쪽에서 "우리 지금 진지하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이것 또한 이번 선언의 신뢰도를 높여 주는 건 물론이고 말이지요.




 - 3.


 이번 선언문에 비핵화 문제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지만, 계속 언급이 되었듯이 비핵화 문제에 있어 남북정상회담은 북미정상회담의 전초전 성격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북핵이 '외교적'으로 겨냥하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 되었건 비핵화 안건은 북미정상회담에서 다루어야 하고 거기서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날 겁니다(이 점에 있어서는 플레잉 카...... 아니 트럼프가 장사꾼 답게 협상 하나는 통 크게 한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러므로 판문점 선언에서 언급된 비핵화 이야기는 북미정상회담에서 어떤 기준으로 이야기를 할지 '가이드라인'을 잡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정도 주제와 무게를 가진 회담에 한국 정부가 미국과 협의를 하지 않았을 턱이 없으니, 이번 선언의 내용에 미국의 의중이 들어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북미정상회담에서도 기본적으로 핵을 완전히 없앤다는 전제 하에 북한과 미국의 딜이 이루어진다고 보면 될 겁니다. 기대해도 좋을 것 같군요.




 - 4.


 이번 선언 단독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내용은 역시 '종전선언' 추진 부분입니다. 다만 이것은 아마 남북한만의 합의로 해결되기는 어렵겠지요. 1953년 휴전협정의 당사자가 이들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휴전협정문에 서명한 당사자는 북한, 중국, UN군(사실상 미국) 측으로, 심지어 대한민국은 여기에 서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ㅡㅡ; 다들 아시다시피 이는 당시의 대통령인 저승...... 아니 이승만이 여기에 서명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전 이야기는 남북미중 4자회담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높지요(뭐 이래 놓고 미국과 중국이 그냥 남북에 일임해버리면 또 모르지만). 무엇보다 종전선언이란 곧 기존 정전협정의 폐기를 의미하고, 이는 평화협정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되면 또 외교적으로 만만치 않습니다. 생각보다 따져봐야 할 것들이 많거든요. 한국전쟁의 최종 정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주변국들 - 특히 전쟁과 휴전협정의 직접 당사자였던 미국과 중국의 입장은 어떻게 할지, 군축 문제는 어찌 할지, 서로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등등등등.


 그래도 전쟁이 완전히 끝난 상황이라는 게 상상할수록 흥미로워지기는 합니다. 우선 (옛 동서독이 그랬던 것처럼) 양측간에 제한적이나마 왕래가 가능해질 것이고, 그리 되면 이산가족 상봉 문제는 사실상 완전 해결됩니다. 수시로 창구를 열어 놓고, 고향을 방문하도록 하는 것도 가능하니까요. 그리고 그간 말로만 나왔던 북한 철로를 통한 대륙간 물류수송, 러시아에서 한반도로 오는 석유와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등도 실현될 겁니다. 러시아 싱글벙글 무엇보다도 더 이상 휴전선에 육군 병력을 몰빵할 이유가 사라지고, 휴전선(일단 이름이 바뀌겠군요)의 경비는 일반 국경 수준으로 완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면 양측 군대에도 상당한 변화가 생기겠지요.




 - 5.


 정치는 결국 '쇼'입니다. 특히 대중매체가 극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의 정치라면 더욱 그렇지요. 홍XX씨가 이번 회담을 '위장 평화쇼'라고 주장하는 건 충분히 제시 가능한 의견입니다만 그건 애초에 정치라는 게 그렇다는 걸 무시한, 유아적인 논리에 입각한 주장에 불과합니다. 그분의 말대로라면 이번 회담은 그 목적을 백배 달성한 겁니다. 이 분 정치 오래 하신 분 맞나요? 그대로 종신대표를 하시기를 기원합니...... 에......




 - 6.


 김정은씨는 갑자기 왜 태도를 돌변했을까요? 이건 블로거가 전문가도 아니고 정확히 알 수야 없는 노릇입니다. 일단 이 사람 생각에 북한이 언제까지나 은둔 상태로 있을 수도 없고 핵을 더 이상 크게 키울 수도 없는데(이 이상 핵개발을 더 하려면 이제 메가톤 단위의 핵무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걸 실험하려면 만탑산이 아니라 개마고원이 날아갑니다), 미국의 현 황상대통령을 봤을 때 장사꾼 출신이고 통 크게 쇼부(?)를 칠 수 있는 사람이니 적당히 판을 만들어 최종적으로 핵을 외교카드로 제대로 쓰고 버리자......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개인적으로 의문인 건 김정은씨가 과연 저렇게까지 나와도 괜찮은가 하는 것입니다. 북한이 이 정도까지 전향적으로 나온다면 분명 북한 내부의 체제 유지 프로세스에도 변화가 불가피합니다. 전쟁과 반미라는 두 가지 명분이 한꺼번에 날아가니까요. 그런데 북한에도 분명 냉전체제로 기득권을 유지하는 자들이 있고(남한에도 있듯이), 이들이 북한 지배계층을 점유하고 있는 만큼 예상되는 반발을 과연 제어할 수 있겠는가 의문이 조금 듭니다. 어쩌면 김정은씨는 그동안 이런 식으로 나올 준비를 하기 위해 위협요소들을 대숙청으로 착실히 제거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 김정은씨를 과대평가한 게 아닌가 싶어 일단 판단을 보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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