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is Pasternak (1890-1960)

Piano Sonata in b minor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로 유명한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때 음악가 지망생이었고 심지어 꽤 재능도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요. 철학자, 대통령, 왕을 언급하였으니 이번에는 대문호의 음악세계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189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아버지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1862-1945)는 유대계 출신으로 톨스토이와 레닌의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을 만큼 러시아에서 꽤 저명한 화가였으며 어머니는 역시 유대계 피아니스트 로자 카우프만(1867-1939)였습니다. 부모의 영향으로 그의 집안은 상당히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살았는데 그의 부모는 일찍이 톨스토이의 사상운동에 동조하였고, 그의 집에는 톨스토이 뿐 아니라 릴케, 라흐마니노프 등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자주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성장 환경 속에서 파스테르나크는 자연스럽게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가 처음 지망했던 길은 문학이 아닌 음악이었는데, 이는 물론 어머니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의 이웃에 살았던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의 영향 역시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재능도 있었던지 그는 1904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약 6년 정도 음악을 전공하였고 이 때 스크리아빈을 사사하였습니다(여담으로 그의 아버지는 스크리아빈의 초상을 그려 준 적도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1910년 그는 돌연 모스크바 음악원을 자퇴하였고, 이후 다시는 음악가로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왜 갑자기 음악을 그만두었는지는 불분명한데 아마도 소심한 그의 성격과 연관이 있었지 않나 추측됩니다. 파스테르나크의 자전적 에세이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자작곡을 스승 스크리아빈에게 들려주는 것도 어려워하였으며 스승이 보기에 별 쓰잘 데 없는 부분까지 고민하고 걱정하곤 하였다고 합니다. 거기에 당시 그는 스크리아빈의 영향으로 신비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여러 요소들이 결합하여 점차 그의 자신감을 잃게 만들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음악을 그만둔 파스테르나크는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1912년에는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유학하여 헤르만 코헨(1842-1918) 등에게서 신칸트주의 철학을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 유학을 한 것이었지만 그는 결국 그것마저 포기하고 이듬해 귀국,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그가 혁명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숱한 정치적 논란과 압박 속에서 세계적인 대문호로 인정받게 된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스크리아빈을 사사하였고, 당시 사상적으로도 큰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음악을 공부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그의 음악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스크리아빈의 그것과 비슷한 신비주의적 색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1909년 만들어진 피아노 소나타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블로거는 6년 반 동안 사용한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도 고급기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RAM을 추가로 다는 선택을 한 덕분에(당시에 8GB면 작은 건 아니었으니까요) 지금까지 어떻게든 써 오기는 했습니다. 다만 이제는 배그도 최저사양으로 간신히 돌아가는 너무나 느려진 컴퓨터에 속앓이를 하다가, 부품을 하나하나 모아서라도 어떻게든 컴퓨터를 바꾸어야겠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습니다.

 

 다만 컴퓨터를 새로 사려니 내년까지는 공부에 매진해야 하니 굳이 많은 돈 들여서 새 컴퓨터를 살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몇몇 중요 부품만 구해서 업그레이드를 하기로 결정. 컴알못이라 이리저리 알아보고, D모 가격비교 사이트(?)를 열심히 눈팅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목록이 나왔습니다.

 

 1. CPU : Intel Core i3-3220(아이비브릿지) → Intel Core i7-3770(아이비브릿지)

 CPU는 고유 소켓 규격이 있어서, 이게 맞지 않으면 메인보드까지 통째로 갈아야 한다네요. 거기까지 일을 벌이고 싶지는 않아서 같은 소켓 내에서 업그레이드를 하기로 합니다. 뭐 1년 반만 쓸 것이고, 나름 2코어 4스레드 → 4코어 8스레드가 되는 것이니 빨라지기는 할 겁니다. 해당 세대 CPU는 이제 신품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중고를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거 중고가격 방어가 너무 잘 된다는 이야기가......

 

 2. 그래픽카드 : NVIDIA GeForce GT 630 → NVIDIA GeForce GT 1030

 6년 전의 보급형에서 현재의 보급형으로? 사실 저거 주문해 놓고 돈 좀 더 쓸까 순간 후회하긴 했는데, 그래픽카드가 쓸데없이 좋으면 공부 안 하고 게임이나 할 테니까 ㅡㅡ; 라는 기적의 논리로 자기위안을 삼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6년 된 고물보다야 확연히 낫지 않겠어요?

 

 3. RAM : DDR3 4GB×2 → DDR3 8GB×2

 처음에는 8GB짜리 하나만 사서 추가로 끼워 쓸까 했는데, 알고 보니 메인보드에 RAM 슬롯이 2개밖에 없네요 ㅡㅡ; 위 두 개만으로 돈이 은근히 많이 빠져서 일단 이 녀석은 조금 미루기로. DDR3 RAM은 16GB 용량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8GB 2개를 구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결정하고 주문을 합니다. 하필이면 연휴 기간과 겹쳐서 며칠 지나서야 택배가 옵니다.

 

 흐음 저 위용 넘치는 자태......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습니다. 컴퓨터 회로는 정전기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별로 조심하지 않긴 했지만 넘어가기로 ㅡㅡ;

이렇게 생겼습니다. 중고 CPU는 은박지에 싸여 배달이 됐는데, 저렇게 하면 정전기가 겉의 은박지에만 흘러서 부품을 보호할 수 있다고 하네요.

 

 자 이제 컴퓨터의 전원을 분해하고 배를 쨉니다(?).

 오우 저 먼지 ㅡㅡ; 일단 그래픽카드를 먼저 빼고, 그 다음 CPU로 향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CPU에는 쿨러가 달려 있지요.

 

 조심스럽게 쿨러를 뺍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꼽혀 있는지 몰라서 빼는데 고생을 좀 했습니다. ㅡㅡ; 다행히 부셔먹지는 않고...... 쿨러를 제거하니 저 자리에서 6년 반동안 수고한 CPU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쿨러와 CPU 사이에 발라 놓은 써멀구리스는 아주 말라붙었네요. ㅡㅡ; 저 녀석은 둘 사이에 열 전달을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다시 발라 줘야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제거한 쿨러는 다시 써야 하므로, 에어스프레이로 먼지를 제거해 줍니다. 웬만하면 실내에서 하는 것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ㅡㅡ;

 

 오른쪽에 고정된 레버를 살짝 빼서 돌리면 CPU를 고정시키는 덮개가 열립니다. 그러고 나서

 

 CPU를 뺍니다. 인텔 CPU는 메인보드 쪽에 핀이 있고 그 위에 CPU가 얹혀 있는 형상이기 때문에 설치할 때는 핀 위에 살짝 얹는다는 느낌으로, 뺄 때는 살짝 들어낸다는 느낌으로 하면 됩니다. 이 부분이 가장 위험한데 저 핀 하나라도 구부러지면 CPU가 인식이 되지 않거든요.

 

 그리고 그 자리에 위풍당당한 i7-3770을 살짝 얹어 놓고

 

 레버와 덮개를 다시 돌려서 고정시켜 놓습니다. 다행히 핀을 구부러뜨리는 따위의 사고는 없었습니다.

 

 이제 동네 컴퓨터가게에서 바가지(?) 쓰고 구매한 써멀구리스가 나올 차례입니다. 사실 표기법상 '그리스'가 맞지만 저 유럽에 철학과 탈세(?)로 유명한 어떤 나라가 있기 때문에...... 다들 구리스라고 발음들 하시지요. 택배 기다리기 귀찮아서 동네로 갔는데 택배비 or 버스요금 감안해도 이 쪽이 더 비쌌습니다. 그냥 대전 테크노월드 가볼걸......

 

 구리스를 CPU 위에 발라 줍니다. 어차피 쿨러 설치하면 눌려 펴지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양을 퍼부을 필요는 없다고 해요~

 

 쿨러를 다시 설치하면 CPU 쪽은 끝납니다. 그래픽카드는 그냥 슬롯에 잘 끼워 넣고 나사못으로 케이스에 고정시키면 되니 훨씬 쉽습니다.

 

 그리고 이제 컴퓨터의 배때지(?)를 다시 봉합합니다. 블로거도 최신 강화유리 케이스 쓰고 싶어요...... 전원과 모니터, 키보드 선을 끼우고 전원을 켭니다.

 

 ?????? 부팅이 되질 않네요. 뭐가 문제지?

 

 인터넷을 뒤져 보니 메인보드 BIOS 업데이트를 먼저 했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뭐 이렇게 복잡해...... 일단 이 컴퓨터에서 쓰는 메인보드 모델은 다음과 같습니다. ASUS니 MSI니 하는 브랜드만 알다가 그 폭스콘이 메인보드도 만들었던 건 처음 알았네요. 차피 대만회사

 다시 원래 부품들로 갈아 끼우고 BIOS 업데이트를 진행합니다. 방법은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무턱대고 하다 보니 어쩌다 된 것이라, 어떻게 해낸 건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ㅡㅡ; 아무튼 한참이 지나서야 바이오스 업데이트를 마치고 다시 아까의 순서로 부품을 갈았습니다. 여담으로 원래 CPU를 다시 설치할 때 귀찮아서(어차피 다시 뺄 거니까) 쿨러를 같이 설치하지 않았는데, 잠깐 켜 놓았을 뿐인데 CPU 온도가 95℃를 찍네요. 이래서 쿨러가 필요......

 

 다행히 이번에는 정상적으로 부팅이 됩니다. 저 위풍당당한 모델명이 보이시나요?

 

 그리고 동봉된 CD를 넣고 그래픽카드 드라이버를 설치해 주면 모두 끝납니다. RAM을 아직 바꾸지 않아서 덜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조금 빨라진 게 체감되네요.

 

 지난 6년 반동안 수고한 CPU와 그래픽카드여 이젠 안녕......

0. 서문

 

 최근 블로거는 사진에 취미를 들이고 있는데, 언제나 그랬듯이 사진과 그 도구인 카메라의 역사에도 관심이 가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어떻게 시각을 복제하여 보관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을 디지털 방식으로 바꾸고 지구상 수십억의 사람들이 자신의 사진을 남길 수 있게 한 과정은 무엇일까요? 나의 취미가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해 왔는지 탐구하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일임에 틀림 없습니다.

 

 카메라와 사진은 근대의 중요한 발명으로 여겨져 왔고 분명 그것이 맞지만, 사진을 만드는 원리 자체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인류는 어떤 방식으로든(실용적으로든, 놀이로든) 이를 활용해 왔습니다. 지금하고 똑같네 사진이라는 도구가 단순히 흥미로운 장난감에서 어떻게 인류 사회의 중요한 도구로 발전하고, 나아가서는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게 되었는지 한 번 간단하게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친구들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요? (저 중 두 개를 팔아치운 건 안자랑)]

 

 

1. 고대와 중세의 '카메라'

 

 필름도 센서도 없던 먼 옛날, 사람들은 암실 벽면에 작은 구멍을 내면 반대편에 바깥의 상(像)이 그림처럼 맺힌다는 사실을 발견해 내었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추측하건대 누군가 어두운 방의 벽이나 칸막이에 뚫린 구멍으로 빛이 들어와 상이 맺히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고 그 원리를 알아냈을 것입니다. 이후 사람들은 상자 등에 작은 구멍을 내고 내부에 상이 맺히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한 번쯤 만들어 보았을 바늘구멍 사진기를 생각하면 됩니다.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

 이를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고 하는데 이러한 원리 자체는 아주 오래 전, 고대 시절부터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나 유클리드가 버들가지 바구니의 작은 홈을 통하여 외부의 풍경이 비추이는 것을 관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고대 중국의 묵가(墨家)를 창시하였다는 묵자는 "바늘구멍을 통과하여 맺힌 상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뒤집어져 보인다"라고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카메라 옵스큐라로 그림을 그리는 원리]

 이러한 원리를 활용할 방안은 없을까요? 사람들은 그림을 그릴 때 바늘구멍을 통과한 상을 활용할 수 없을지 고민하였고, 구멍을 통과하여 맺힌 상을 따라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고안해 내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개념의 카메라 옵스큐라는 중세 이슬람 제국의 학자 알하젠(965-1040)이 실질적 도구로서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처음으로 개발하였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또한 자신의 그림 작업에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트레이싱? 카메라 옵스큐라가 그림에 활용되면서 17세기 무렵에 그림의 사실적 묘사력이 대폭 향상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주전자를 든 여인>과 그 물주전자에 비추인 카메라 옵스큐라의 모습]

 또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네덜란드 출신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의 몇몇 그림은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한 실제 사례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물주전자를 든 여인>에는 물주전자의 겉면에 카메라 옵스큐라로 추정되는 어떤 장치의 모습이 비추어 보입니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는 정약용이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하는 등 조선에도 잘 알려져 있었으며, 조선의 화가들도 이러한 장치를 활용하지 않았겠느냐는 학설도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필름이나 센서가 없을 뿐 현대의 카메라와 그 원리가 거의 동일합니다. 필름, 센서가 하던 일을 당시에는 화가의 붓과 캔버스가 대신했을 따름입니다. 화가가 상을 베껴 그리는 것이 아닌, 상 그 자체를 그림(?)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데 이는 18세기 감광 원리의 발견 이후로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2. 감광물질의 개발

 

 많은 물질은 빛, 특히 햇빛을 받으면 색이 변합니다. 당장 옷장에 처박혀(?) 있는 옷 중에는 직사광선 아래에서 건조나 보관을 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강한 햇볕에 말리면 색이 바랜다든지, 소재가 변질된다든지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햇빛을 지속적으로 쪼인 책이나 건물 역시 서서히 색이 바래게 되지요. 이처럼 빛은 물질을 변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라면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건 무리가 있겠지만(노출시간이 못해도 월 단위는 되어야 하겠지요), 특정한 물질들은 빛에 반응하여 변형되는 속도가 상당히 빠른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 빛에 짧은 시간만 노출시켜도 충분한 변형이 일어나지요. 흔히 우리가 감광물질이라고 하면 이러한 물질들을 가리킵니다. 이들 감광물질을 넓은 판에 칠해 놓고 바늘구멍이나 렌즈를 통과한 상을 맺히게 하면 각 부위에 노출되는 빛의 양 차이에 따라 물질이 변형되는 정도 역시 달라지게 됩니다(초등학교 때 한 번쯤 써보았을 '청사진' 실험을 생각하면 됩니다).

 

[요한 하인리히 슐츠]

 1724년 독일 출신의 과학자 요한 하인리히 슐츠(1687-1744)는 1724년 염화은(AgCl)이 햇빛에 노출되면 검게 변형된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염화은은 중학교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앙금 생성 반응'을 대표하는 백색 물질인데, 이 녀석이 감광물질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물론 슐츠는 카메라에 큰 관심은 없었던 듯하며 당시는 아직 화가들이 바늘구멍 사진기에 종이를 대고 그림을 그리는 데 만족하는 시절이었으니, 염화은이 카메라에 활용되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대체로 감광성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물질은 할로겐화은(염화은, 요오드화은, 브롬화은 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현대 필름이나 인화지에도 이들 물질이 다양하게 활용되는데, 이를테면 브롬화은(AgBr)을 이용하여 만든 인화지의 경우 흔히 '브로마이드'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브로마이드라고 부르는 연예인 화보는 처음에 브로마이드 인화지를 이용하여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도면을 인쇄해 놓은 청사진]

 감광물질은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됩니다. 이를테면 도면 등을 복제하기 위해 활용되었던 '청사진' 역시, 특수한 화학물질을 칠해 놓은 종이에 도면을 놓고 빛을 쬐어 가려지지 않은 부위에만 반응을 일으키는 방식의 인쇄 방법이었습니다(청사진은 근래 대형 프린터와 플로터가 발전하면서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메라 옵스큐라에 화가 대신 감광지를 활용하는 시도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졌는데 조제프 니세포르 니엡스(1765-1833)의 '헬리오그라피'가 그 결과물이었습니다.

 

 

 

3. 헬리오그라피 : 최초의 필름카메라

 

 니엡스는 프랑스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며, 프랑스 혁명 때는 잠시 피신하기도 했지만 다시 돌아와서 나폴레옹 군대에 투신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건강 문제로 군대에서 퇴역한 이후로는 과학 연구와 발명으로 여생을 보냈습니다. 1807년에는 형과 함께 내연기관의 일종인 '피레올로포르'를 발명하는 등 나름 이런저런 분야에서 업적이 있는데, 역시 그의 대표적 업적이라면 최초의 필름(?)카메라를 발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니엡스는 처음에는 당시 기준 신기술이었던 석판 인쇄에 관심이 있었지만 기술이 부족하여 본격적으로 뛰어들지는 못하고, 대신 그림을 그리는 도구였던 카메라 옵스큐라로 관심을 옮겼다고 합니다. 그는 화가가 상을 베껴 그리는 것보다 더 빠르게 상을 본뜨는 방법을 연구했고, 감광물질을 판에 칠하여 상이 거기에 맺히도록 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가 사용한 감광물질은 아스팔트의 일종인 '유대 역청'이었는데, 촬영 후 이를 라벤더 오일로 씻어내면 빛을 받지 않은 부분은 씻겨 내려가고 빛에 노출된 부분만 남는 원리를 활용한 것입니다.

 

[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진 것 중 하나. 몇 시간에 걸쳐 촬영했기 때문에 햇빛을 받은 방향이 제각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1826(혹은 25)년 만들어진 이 최초의 필름(?)은 '태양의 그림'이라는 뜻의 '헬리오그라피(Heliography)'로 불렸습니다. 이는 획기적인 발명이었지만 최초라는 데 의미가 있을 뿐 아직 실용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는데, 이는 사진 한 장을 촬영하기 위하여 노출 시간을 최소 몇 시간이나 잡아야 하는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광물질로 사용한 유대 역청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당연히 그 자리에 항상 서 있는 물건들을 제외하면, 인물사진이나 활동사진으로는 전혀 활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진 것 중 다른 하나. 플랑드르의 조각상을 촬영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헬리오그라피 발명 이후로도 니엡스는 사진 기술의 실용화를 위하여 계속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여기에는 미술가인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1787-1851)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다만 니엡스는 형이 내연기관 개발 등에 가산을 탕진하는 등의 이유로 말년에는 경제적 어려움에 빠졌고 결국 연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최초로 실용화된 사진기술'의 명예는 상당 부분 다게르와 그의 '다게레오타입'에 돌아가게 되는데, 다게르가 공로를 가로챘다거나 한 건 아니고 니엡스의 아들과 공동연구를 계속하여 완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계속)

 

 

 '라무네'라는 음료가 있습니다. 라무네는 일본의 탄산음료로, 입구가 구슬로 막혀 있는 독특한 형태의 병이 라무네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합니다. 집 앞 편의점을 가 보았다가 음료 코너에 라무네가 몇 개 놓여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호기심에 하나 구입해서 마셔 보았습니다.

 

라무네

 

 우선 라무네가 어떤 녀석인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지요. 라무네라는 이름은 19세기 중반 일본의 개항기에 영국에서 유입된 레모네이드에서 유래하는데, 일본인 특유의 외래어 줄여부르기 신공(?) 때문에 그 이름이 와전되어 '라무네'가 된 것입니다. 이후 이 레모네이드에 탄산을 주입한, 흔히 알려진 형태의 라무네가 개발되었고 1872년 공식적으로 제조 허가를 얻게 됩니다.

 

 이 시기 채택되어 라무네의 상징이 된 독특한 모습의 유리병은 코드넥 보틀(Codd-neck Bottle)이라고 하는데, 영국인 기술자 하이럼 코드(1838-1887)가 1872년 고안하여 미국에서 특허를 받은 음료수병입니다. 코드넥 보틀은 병 입구 안쪽에 작은 유리구슬이 하나 있어서 음료수 탄산의 압력으로 병 입구를 막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구슬을 힘으로 밀어넣으면 구슬을 밀어올리던 탄산이 빠져나가면서 입구가 열리고 음료수를 마실 수 있게 됩니다. 이 때 구슬을 밀어넣는 용도로 보통 못 형태로 된 플라스틱 조각이 하나 동봉됩니다.

 

코드넥 보틀의 유리구슬

 

 입구보다 조금 더 큰 이 구슬이 코드넥 보틀의 핵심인데, 구슬이 아예 밑으로 빠지거나 음료수를 마실 때 굴러내려와 입구를 다시 막아버리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병의 상부에는 독특한 구조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병의 한 부분이 잘록하게 좁아지는데 구슬이 거기 걸쳐져 더 밑으로 빠지지 않고, 그 위쪽에 있는 굴곡은 음료수를 마시기 위해 병을 기울일 때 구슬을 붙잡아 다시 입구를 막지 않도록 방지합니다.

 

 이전에는 탄산음료의 병 입구를 코르크(!!)로 막는 게 보통이었고, 당연하게도 음료수에 녹아 있던 탄산은 금새 날아가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ㅡㅡ; 그래서 이러한 형태의 병은 한동안 인기를 끌었지만 이후 왕관 모양의 병뚜껑이 개발되는 등 밀봉 기술이 발전하면서, 만들기도 복잡하고 마시기도 상대적으로 불편한 코드넥 보틀은 자연스럽게 도태됩니다. 다만 라무네의 경우 병 자체가 하나의 아이덴티티로 남아 지금까지 계속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라무네는 백수십 년의 역사를 거치며 일본을 상징하는 음료의 하나로 각광받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해군 장병들은 함정 내에 화재진압용으로 설치된 이산화탄소 발생 장치를 이용, 레모네이드에 탄산을 주입하여 라무네처럼 만들어 먹었다고 합니다. 전쟁 이후 코카콜라 등 다양한 음료수들이 인기를 끌게 되지만 라무네는 다분히 서민적인 음료의 이미지로 남아 나름의 입지를 확보하였고, 1977년에는 일본의 중소기업 관련 법률의 대상이 되어 중소기업에서만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여러 중소기업에서 라무네를 생산해 판매하고 있습니다.

 

 라무네는 '일본식 음료'의 대표처럼 인식되고 있기도 하지만, 사실 서민적인 이미지와 나이 든 사람들이 즐겨 마신다는 이미지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즐겨 마시는 정도는 아니라고도 합니다. 라무네 특유의 병 여는 방법도 잘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네요. 그래도 요즘에는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나라로 수출까지 하고 있는데, 덕분에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블로거 역시 일본산 라무네를 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구입한 라무네를 마셔 보겠습니다. 병의 위쪽이 포장되어 있는데, 여기에 구슬을 밀어넣기 위한 플라스틱 못이 있습니다.

 

 뜯는 선을 따라 포장을 잘 뜯으면

 

플라스틱 못과 병의 입구가 드러납니다. 보시다시피 병 입구는 플라스틱으로 덮여 있고, 구슬이 거기를 막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저 부분도 그냥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는데, 요즘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놓아 나중에 구슬을 빼거나 병을 재활용할 때 편리하다는군요.

 

 플라스틱 못을 가지고 구슬을 밀어넣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힘이 좀 필요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 정도로 단단히 막혀 있지 않으면 밀봉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겠지요?

 

 그러니 이렇게 손가락 한두 개로 눌러서는 절대 입구를 열 수가 없을 겁니다. ㅡㅡ; 아예 병에 붙어 있는 안내문에도 손바닥으로 못을 강하게 누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힘을 강하게 주면 구슬이 빠지면서 병이 열립니다.

 

 이제 구슬이 다시 입구를 막지 않도록 적당히 주의하면서 음료수를 마시면 됩니다. 라무네의 맛은 사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사이다의 맛과 별 차이가 없고, 그냥 라무네 자체가 일종의 사이다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일본에는 오리지날인 소다맛 뿐 아니라 와사비맛, 카레맛 등 온갖 해괴한 맛의 라무네가 있다는군요. ㅡㅡ;

 

 저 구슬은 마실 때마다 항상 신경쓰입니다. 생각 없이 그냥 마시면 구슬이 입구를 다시 막아 음료수가 나오지 않게 되기 때문에, 병을 너무 기울이지 않고 한쪽에 있는 홈에 구슬이 걸리게 만드는 등 나름의 스킬을 발휘해야 합니다. 코드넥 보틀이 왜 도태되었는지 납득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렇게 라무네 한 병이 뚝딱 비워졌습니다.

 

 라무네를 맛으로 먹기에는 바로 곁에서 저렴하게 판매되는 사이다와 별 차이가 없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음료도 종류가 수두룩하니 딱히 매력이 있는 음료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디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형태의 병과, 일본의 상징 음료라는 역사적(?) 특이성을 생각하면 한 번쯤 구입해 마셔 봐도 괜찮을 것 같기는 합니다. 블로거가 마신 라무네 병에는 "일본에서 시작되어 세계인이 사랑하는 라무네"라고 적혀 있는데, 일본인의 생활사(史)를 접해본다 생각하고 한 병 마셔보는 건 어떨까요?

 

 

 

Friedrich II von HohenzollernFriedrich der Große (1712-1786)

Flute Concerto No.4 in D




 이전에 철학자와 대통령의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왕입니다. 그것도 독일과 유럽의 근대사에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왕,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입니다. '대왕'이라는 칭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왕으로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며 18세기 계몽군주의 대표자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만, 그와 동시에 음악의 훌륭한 후원자였고 자기 자신이 음악가이기도 했던 '음악가 군주' 였습니다.


 프리드리히가 음악과 문학에 심취하게 된 것은 프랑스인 교사의 영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하노버 왕가 출신. 1687-1757)는 학문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는데 아들의 교육에도 신경을 써 프랑스 귀족 출신의 가정교사를 채용, 프리드리히를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문제는 그의 아버지인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1688-1740)가 좋게(?) 말하면 군국주의적이고, 대놓고 말하면 반(反)지성주의자에 매우 폭력적이기까지 한 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프리드리히는 어릴 적에 꽃 대신 전쟁용 북을 선택하여 치고 놀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결코 유약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철두철미한 군국주의자였던 아버지의 눈에는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자식이 예술이나 문학에 심취해 있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되지 않았던지, 프랑스인 교사를 해임하고 음악을 즐기는 아들에게 몽둥이 찜질을 하는 등 거의 가학적인 벌을 가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가정교육은 아주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었다는군요.


 이런 식이니 부자지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프리드리히는 혼담이 오갔던 것을 기회로 영국으로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장기간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당시 암살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아들을 의심하여 사형에 처하려고까지 하였지만 사방에서 뜯어말려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몇 년 후에야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복권될 수 있었습니다(그가 즉위 후 교양과 예술에 탐닉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 이러한 막장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리 때문이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왕위에 올랐습니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는 매우 다행히도 그는 그 때까지의 고난에도 미쳐버리지 않고 자신의 재능과 인간성, 교양을 지켜냈으며 이후 왕으로서 이룩한 일들은 굳이 여기서는 나열하지 않기로 합니다. 다만 여기서 소개할 것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이어진 그의 음악 사랑과 아마추어 음악가로서의 활동입니다.


 실제로 그는 재위 초기부터 음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음악가들의 후원자로 나섰습니다. 1747년 프리드리히는 (당시에는 건반 연주자로 더 유명했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궁정으로 초청하였는데, 바흐는 왕이 직접 만든 주제 선율을 가지고 3성 푸가를 만들어 보라는 주문을 즉석에서 훌륭하게 해냅니다. 프리드리히는 다시 바흐에게 6성 푸가를 만들어 볼 것을 주문하였고, 바흐는 그 자리에서는 아니고 나중에 따로 완성하여 왕에게 헌정하니 그 유명한 <음악적 헌정>입니다(그런데 정작 프리드리히 2세는 이 곡을 거의 듣지 않았다는군요).


 사실 바흐와의 인연은 그의 아들인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1714-1788)가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에서 쳄발로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C. P. E. 바흐는 프리드리히가 왕세자였던 시절부터 궁정악단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즉위 후에는 정단원으로 승진하였고, 왕을 위한 작품들도 여럿 작곡하는 등 여러모로 프리드리히의 신임을 얻었다고 합니다. 다만 후에는 음악적 관점에서 차이를 좀 보였다는데 그 때문인지 1768년 C. P. E. 바흐는 프리드리히의 만류까지 뿌리치고 함부르크 궁정악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외에도 그는 즉위하자마자 카를 하인리히 그라운(1704-1759)을 이탈리아로 보내 음악가들을 채용하는 등 궁정음악의 수준을 높이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고,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요한 요하임 크반츠(1697-1773) 등 여러 음악가들이 그의 궁정에서 활동하였습니다. 크반츠는 프리드리히 개인의 플루트 교습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중요한 것은 프리드리히 2세가 단순히 음악의 후원자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상당한 수준의 음악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는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상당한 수준을 가지고 있었던 듯한데, 그의 궁정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왕이 직접 협연한 플루트 협주곡에 대하여 영국 출신의 음악가이자 음악사학자인 찰스 버니(1726-1814)는 "지금까지 내가 그 어느 애호가들이나 전문 플루트 연주자들에게서 들은 것보다 월등했다"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립서비스 아닌가


 이를 보면 그가 음악가로서 적어도 아마추어의 평균보다는 훨씬 훌륭한 기량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다만 문제는 그의 음악적 성향으로, 말년이 되어서까지도 젊은 시절의 음악 취향을 그대로 가져가는 바람에 그의 말년에는 궁정에서 철 지난 음악만 줄창 연주되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C. P. E. 바흐처럼 새로운 시대의 음악을 추구하는 음악가들이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도 있었고 말입니다. 


 아무튼 '음악가 군주' 프리드리히 2세는 높은 음악적 소양으로 자신의 곡을 세상에 남긴 극히 드문 군주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자작곡들 또한 그의 음악적 성향을 그대로 반영하여 '수준은 괜찮지만 철저히 구시대적'인 범작으로 평가받고 있긴 하지만요. 그냥 국왕의 신분으로 후대인이 들어줄 만한 음악을 남겼다는 데 의의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고문헌 : 

 나주리, 「북독일의 ‘전고전주의’ -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 음악과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의 클라비어 음악」, 『서양음악학』 12(2), 한국서양음악회, 2009.

 한국어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바흐(J. S. Bach) 음악의 헌정(A Musical Offering) BWV.1079", 곽근수의 음악이야기(http://sound.or.kr/)

 



Gregorio Allegri (1582-1652)

<Miserere mei, Deus>



[알레그리]


 알레그리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전환기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작곡가로, 로마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경력을 로마에서 활동하며 주로 가톨릭 교회를 위하여 일하였습니다. 동생 도메니코 알레그리(1585-1629) 역시 음악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9살 때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에서 소년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음악 경력을 시작하였고, 1600년부터 1607년까지는 조반니 베르나르디노 나니노(1560-1623)에게 음악 수업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페르모의 성당에서 활동하였는데 이 때부터 작곡가로 다수의 모테트와 성가를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로마 밖에서 음악 경력을 쌓던 그는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주목을 받아, 1630년 시스티나 성당 합창단의 콘트랄토로 부임하여 평생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인 <미제레레>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대체로 그의 음악은 르네상스 - 바로크 사이의 과도기적 모습을 보이는데, 대체로 교회음악은 이전 시대 팔레스트리나(1525-1594)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기악음악 쪽에서는 초기 바로크에 가까운 진보적인 모습도 엿볼 수 있습니다.


 <미제레레>는 시편 51편의 구절에서 유래한 성가로, 각각 5성부, 4성부로 된 두 합창단이 함께 부르는(그러니까 총 9성부) 노래입니다. 1638년경 부활주간의 예배를 위하여 만들어진 이 작품은 이후 시스티나 성당의 '테네브레(부활주간에 시행하는 일종의 촛불 예배)'에서 반드시 연주하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고음이 하이 C음까지 올라가는 등,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이면서 신비로운 음악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황청에서는 이 작품을 교황청 내에서만 전수하며, 다른 곳에서 부르지 못하게 하고 악보를 반출하는 등의 행위도 엄격히 금지하였습니다. 저작권 지키는 방법이 무지막지하기도 하지 그래서 이 작품은 그 작품성에 비하여 후세에 널리 알려지지는 못하였는데, 1770년 로마를 방문한 모차르트가 예배에서 이 곡을 단 두 번 듣고 모두 암기하여 악보로 재현해 냈다는 것으로 후세의 우리에게까지 잘 알려지게 됩니다. 다만 이전에도 다른 필사본 자체는 바깥으로 나돌아다녔다고 하며, 나중에는 교황청의 금지령도 해제되어 정식 출판도 되었다는군요.




참고 : 

영문 위키백과, 이탈리아어 위키백과, 나무위키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메이'"(한겨레)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 '소름' 돋는 곡 알레그리의 '미제레레'"(경향신문)



4. 송유근은 왜 이렇게 되었나 : 육성전략의 대실패


 우선 송유근씨가 어릴 적 우리에게 보여준 것들에 대하여 고민해 봅시다. 송씨가 처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6세 때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면서부터입니다.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은 정보기술 분야의 가장 기초적인 자격증 중 하나로, 2017년경 시험 난이도가 상승하여 요즘엔 조금 다르지만 그 이전에는 합격하기 정말 쉬운 시험이었다고 합니다. 관련 전공자는 공부가 거의 필요 없을 수준에, 비전공자라도 짧으면 며칠 준비해서 붙을 수도 있는 시험이라고 하는군요.


 특히 문항이 문제은행식으로 출제되고, 2016년 이전에는 실기시험도 객관식(!)으로 출제될 정도였다고 하니 그 난이도를 짐작할 만 합니다. 이러다 보니 군인들이 포상휴가를 노리고 상당히 많이 준비하는 자격증이기도 하고(준비에 드는 노력이 적기 때문에), 나이 어린 사람들이 도전하여 합격하는 사례도 종종 있는 모양입니다. 당장 송씨가 합격한 그 해에 7세 아동이 이 시험에 합격한 다른 사례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사]


[정보처리기사 자격증 필기시험 문제 예시]


 난이도보다 주목할 지점은 그 공부 방식인데, 블로거가 찾아본 바 이 시험은 기출문제를 열심히 풀어보는 데서 상당 부분 성패가 갈립니다. 즉 기출문제를 최대한 많이 암기하는 능력이 중요한 시험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송씨가 가진 '재능'의 실체를 파악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됩니다. 송유근씨는 뛰어난 '암기력'을 어릴 적부터 소유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훗날 사람들에 의하여 분석된 그의 어릴 적 모습을 보면 실제로 그렇습니다. 송씨가 방송에 나와서 어려운 미적분이나 물리학 법칙을 술술 풀어내는 모습은 얼핏 보면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이는 그 수식이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암기'해서 칠판에 베껴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발군의 암기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과학적 사고에 필요한 이해력이나 창의력 등에 있어서는 다른 어린이들보다 딱히 나을 것도 없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물론 또래 평균보다는 높았을 가능성이 높지만요).


 여기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사실 뛰어난 암기능력은 오히려 한국의 제도권 교육에서 더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아마 송씨가 초등학교에 제대로 입학하여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모두 밟았다면 시험점수가 매우 우수한 '우등생'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트 영재들이 밟는 과정까지는 몰라도 상당히 순탄한 코스를 밟아 소위 명문대 진학은 무난하게 했을 겁니다. 물론 그래서야 지금처럼 유명인사가 될 일 따위는 없었겠지만, 사태가 이 지경이 되고서야 차라리 이런 평범한 삶이 낫지 않았을까요?


[앞에서 언급했듯이 저 '발명품'은 한 기업의 제품을 그냥 가져온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송씨는 저 기계의 작동 원리를 이해는 하고 있었을지]


 송씨에게 닥친 비극은 바로 주변 사람들(특히 그의 부모)이 송씨의 '재능'을 잘못 분석했다는 데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수식을 잘 외우고 주어진 문제를 잘 푸는 능력이 위대한 과학자의 덕목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송씨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상적인 경로를 거부하고, 자꾸만 송씨에게 부재한 '창의적 사고'를 요구하는 길로 그를 몰아갔던 것입니다. 그 길에 그런 능력이 요구된다는 것을 몰랐던 건 물론이고 말입니다.


 그 결과 송씨는 정상적 교육과정을 통하여 일반적 능력을 기를 기회를 싸그리 날려먹었고, 그렇다고 진정한 창의적 사고력을 기를 기회조차 제대로 가지지 못했습니다. 결국 2018년 '성인'이 된 송씨는 사회인이 가져야 할 사고능력과 덕목을 하나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채, 그저 온갖 지식의 파편들만 녹음기마냥 읊어대는 깡통으로 자라났던 것입니다.




5. 송유근을 둘러싼 여론과 언론의 뒤틀린 시선


 여기서 단순히 '영재가 될 수도 있었던 한 어린이를 잘못 육성'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그냥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송유근이라는 개인의 문제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를 대하는 사회의 자세가 심하게 뒤틀려 있(었)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블로거가 글을 쓰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이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먼저 짚고 싶은 문제는 그를 일종의 '연예인'으로 만든 언론의 작태입니다. 송씨가 처음 정보 관련 자격증을 획득하고 그 부모가 자식을 초등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설치던 때는 2004년 무렵이지만 이 시기에는 그냥 '그런 아이가 있다' 정도로만 가볍게 언급되곤 했습니다. 그러던 송씨가 갑자기 전국민의 관심을 받고 천재소년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은 2005년 <인간극장> 출연이었습니다. 당시 방송 제작진은 실제로는 별 것 없던 송씨를 무지막지하게 '포장'하여 '천재소년'이라는 하나의 '상품'으로 둔갑시켰습니다.


[방송에서 송씨를 어떻게 포장했는지 잘 보여 주는 사진 하나. 사진에서 등장하는 수식은 이차방정식 x^2-12x+36=0 인데, 생판 틀린 풀이법으로 문제를 풀고 있습니다]


 이후 송씨는 이곳저곳 방송에 불려다니며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방송국과 언론사는 그에게 쏠린 대중의 시선을 통하여 쏠쏠하게 돈을 벌었겠지요? 사실 언론의 입장에서는 송씨가 진짜 천재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치 연예인들의 이미지와 실제 삶이 어떻게 다른지 상관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즉 송씨는 철저하게 '천재 이미지를 가진 연예인'으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부모는 이를 인지하고 이용하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정말 자기 아들이 천재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마 둘 모두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그럼 이를 접하는 대중은 왜 그에게 열광하고 맹목적인 지지를 보냈을까요? 사실 송씨가 방송에 나온 것과 같은 '천재'가 아니라는 것은 학계나 교육계에서는 꽤 많이 언급되어왔고, 그가 통상적 교육과정을 계속 건너뛰는 것에 대하여도 많은 우려가 제기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우려가 대중에게 전달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를 접해봐야 대중은 "제도권 교육이 천재를 죽이려 든다"라며 기존 교육계에 비난을 퍼붓기 일쑤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한국의 교육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뿌리깊은 불신 때문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의 교육과정을 성인이 되기까지 밟아왔지만 정작 그 교육과정과 체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분석하려면 글이 하나 더 필요하겠지만 -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한국의 교육체제가 마치 절대악인 것마냥 취급하는 사고가 알게 모르게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송씨에 대한 기존 교육계의 우려가 '꼰대들의 꼰대질' 이상으로 인식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는 이러한 인식을 지금껏 해소하지 못한 교육계에도 책임이 있겠지만, 그와 별개로 교육계의 지적이 합리적인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송씨 문제에 있어서는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고 말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는 송씨가 군입대를 하게 된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송씨를 천재소년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요.


[황우석씨는 과학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와 비뚤어진 애국심을 교묘히 활용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대중의 무지와 비뚤어진 애국심입니다. 대중은 송씨에 대한 언론의 '허술한' 포장조차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였습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이니 상대성 이론이니 하는, '뭔 소리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어려워 보이는' 소리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아무 말이나 떠드니 똑똑한 사람일 것이라고 지레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상술했듯이 사람들이 그의 허상을 파악할 수 있는 식자(識者)들을 무턱대고 배척한 것에는, 어려운 이야기에 대한 막연한 공포 또한 어느 정도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송씨를 민족의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비뚤어진 애국심(?)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열광에는 그가 세상을 호령하는 천재가 되어 사회와 그 구성원들을 잘 먹고 잘 살게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위인전 감성'이 숨어 있습니다. 차라리 종교에 가까운 이 심리 때문에, 여론은 송씨를 비판하거나 걱정하는 목소리를 마치 반사회적 망동인 것처럼 취급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뜨던' 시기 한국 사회를 들끓게 한 황우석 사태와도 통하는 바가 많습니다. 글쎄, 10년 넘게 지난 지금은 뭔가 좀 다를까요?




6. 정리 : 다시는 이런 사람이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송유근 사태'의 최대 피해자는 누가 뭐래도 송유근씨 본인입니다. 사회에 도움이 될 유능한 인재가 될 수도 있었을 가능성이 주변 사람들과 대중의 비뚤어진 의도와 욕심 때문에 자라나지 못했고,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인 양 인식하며 성장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제는 자신에게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게 되어 버렸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이미지 메이킹은 그가 어렸을 때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지적 능력이 필요한 대학원 단계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고, 결국 뭐든지 빨랐던 그는 남들보다도 더 시간을 소모하고도 박사학위 하나 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우리 사회 전체에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위에 언급하였듯이 이 사태에는 자극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려는 언론의 돈벌이 전략과 거기에 무비판적으로 낚이는 대중들, 사회 전반에 만연한 과학에 대한 무지, 지성에 대한 반감, 그리고 비뚤어진 애국심까지 온갖 다양한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래서 송유근씨의 문제는 그 개인의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전세계적인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유럽에서는 극단주의 정당이 세를 불리고 있으며, 도날드 트럼프는 미국 대중의 반지성주의를 잘 이용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어떤지는 차치하고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송유근씨와 같은 '만들어진 천재'들은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되며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 전체의 반성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이처럼 천재를 '만들고' '소비하는' 행태는 사회 전반에 반(反)지성주의를 뿌리깊게 만들고, 이는 한 사회의 과학적 역량을 고갈시킬 뿐 아니라 인문학적 사고 또한 부진하게 만듭니다. 이미 문제는 현실화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공계 대학원이 텅텅 비어가고 인문학적 사유 또한 하지 않는 사회, 어쩌면 지금 우리 자신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한때 '천재소년'으로 세간에 잘 알려졌던 송유근(20)씨가 결국 군입대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사] 송유근씨는 2018년 6월 소속 학교인 UST에서 박사학위 최종심사를 받았으나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등의 사유로 불합격하고, 졸업연한을 초과하여 결국 학위를 따지 못한 채 학교를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워낙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고, 3년 전 논문 표절 사건으로 크게 시끄럽기도 했던 터라 언론 기사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사실 송유근씨는 논문 표절 사건으로 사실상 학자로서의 커리어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고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이 사람을 과연 '천재'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매우 의심스럽기에 크게 신경쓸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여전히 이 사람을 천재로 떠받드는 사회 일반의 여론이 적지 않은 것 같아 이런저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송유근씨는 어떻게 천재가 '되었고' 어떻게 망가졌을까요? 한때 천재라 불리던 소년의 인생을 말아먹은 모든 사태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송유근]




1. 이것부터 고민해 보자 : 도대체 천재란 게 뭔데?


 다른 나라는 모르겠고,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천재라는 말은 상당히 남용되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어릴 적 천재 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한 분 계신가요? ㅡㅡ; 물론 그 용례 중 대부분은 그리 진지하지 않은 의미로 하는 말이겠지만, 자기 자식을 천재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과도한 기대로 자녀를 짓누르는 부모들이 한둘이 아닌 것을 생각하면 이 단어가 어느 정도 잘못 인식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럼 과연 어떤 사람이 '천재'일까요? 임마누엘 칸트는 "예술에 규칙을 부여하는 능력"이 곧 천재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순수예술에 관한 말이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말은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일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블로거가 철학에 조예가 없으므로 더 이상은 깊이 들어가지 않겠지만 ㅡㅡ; 분명한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내고, 이를 정리하여 규칙으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바로 '천재'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칸트. 따지고 보면 이 사람도 천재]


 칸트의 설명을 따른다면, 천재로 불리기 위해 요구되는 가장 핵심적인 능력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될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머릿속으로 생각해 내고, 이를 완성된 형태로 표현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대하여도 다른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주 어려운 미적분 문제를 풀어내고, 남들이 1문제를 풀 시간에 서너 문제를 쉽게 풀어내는 사람을 과연 천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중에서도 칸트의 정의에 부합하는 천재는 당연히 있겠지만, 단순히 '언젠가 할 것을 조금 일찍 하는' 것을 칸트가 정의하는 '천재'라고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역사적인 천재들을 생각해 봅시다. 아리스토텔레스, 뉴턴, 가우스, 모차르트, 피카소, 아인슈타인 등등 자기 분야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천재로 평가되는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사조나 법칙을 창조하고 이를 후대에까지 관철시킨 인물들입니다. 물론 이들 중 많은 수가 남들보다 빨리 성장했고 우리의 고정관념 속 '천재'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천재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개발한 컴퓨터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계산을 했다는 폰노이만 쯤 되면야 인정해 드리지요. 물론 그 역시 매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으니 칸트의 정의에 따른 천재인 것 맞습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사람들에게 천재 소리를 듣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는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묻혀버리곤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언젠가 도달할 경지에 아주 이른 나이에 도달했지만, 결국 그 경지를 뛰어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남들도 다 그만큼(혹은 그보다 더 높은)의 경지에 도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들은 기껏해야 남들만큼 잘하는 평범한 재능의 소유자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천재에 대한 정의를 나름대로 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과연 어릴 적부터 천재로 불리던 송유근씨는 어떨까요? 과연 그는 천재가 맞았는지,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어쩌다 급전직하하고 말았는지 짧게나마 살펴봅시다.




2. 송유근 인생 초기 : 그는 과연 '천재'였는가?


 이젠 이것도 과거형으로 불러야 하겠지요. 어린 시절의 송유근씨는 과연 우리가 말했던 그 말대로 '천재'였을까요? 그가 천재 소리를 듣게 된 것은 대여섯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정보처리기사 시험에 최연소로 합격한다거나, 고등학생~대학생이나 손댈 법한 어려운 수학 문제들을 척척 풀어내는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이야기가 TV 등 언론을 타면서(블로거가 검색하기로는 <인생극장>이라고 합니다. 분명 블로거가 봤던 것 같은데 오래되어 기억이 잘) 그는 전국민적 관심을 받는 '천재소년'이 되었습니다.


[저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는 하고 쓴 걸까요?]


 실제로 그는 초등학교를 초고속으로 졸업하고(6세 때 행정소송까지 하며 6학년으로 입학, 졸업) 중졸, 고졸 검정고시를 몇 달만에 광속 패스, 2005년에는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인하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특별전형으로 합격합니다. 1학년 1학기 때 평점 3.8/4.5를 받는 등 블로거가 딱 한 번 받아본 점수를 대학교에서도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얼마 뒤 "획일적이고 주입식인 대학교육에 흥미를 잃었다"며 학교를 자퇴하고 독자연구를 하겠다는 발표를 하게 됩니다.


 이후 2008년 3월 서울시립대학교 양자컴퓨팅 분야 연구조교로 선임되고, 12월에는 UST(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석박사 통합 과정에 입학 허가를 받았습니다. 잠깐, 그러면 학사 학위는? 2009년 초에 학점은행제로 땄다고 하네요. 아무튼 11세 때 학사 학위를 따고 대학원까지 들어갔으니 정말 '천재적'인 소년으로 보일 법 합니다. 그러면 그는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천재였던 걸까요?


[형들은_이런_거_있어?.jpgee 그래 있다. 그것도 두 개나]


 우선 한 가지 생각해 볼 지점은 송유근씨가 과학영재들이 일반적으로 거치는 교육과정을 거의 하나도 밟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송씨는 영재올림피아드를 비롯하여 이 땅의 영재들이 경쟁하는 다양한 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고, 일반적인 교육기관은 커녕 과학고 등 과학영재를 위한 전문적 교육기관조차 거치지 않았습니다. 대학교 역시 조금 다니다가 자퇴하였으며 앞에 언급한 학점조차 다른 학생들과 별개로 평가를 한 결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송유근씨와 그의 부모가 계속 주장한 대로 한국의 제도권 교육은 과학적 창의력을 길러주는 데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한국의 교육과정을 충실히 거치고 다양한 학문적 업적들을 남긴 수많은 영재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 출신의 인물 중 과학분야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던 벤자민 휘소 리(이휘소, 1935-1977)는 당시 제도권 교육의 정점인 경기중학교(현재의 중고등학교 통합)와 서울대 공대(물리학과 전과가 불가능하여 중퇴)를 나왔습니다. 심지어 제도권에 영재교육 개념 자체가 없던 1950년대에!


[이휘소]


 또한 송씨가 주목받던 어린 시절에도 그의 천재성(?)에 의문을 제기할 기회들은 있었으니, 그가 대학교에 입학할 때 자신의 발명품이라고 소개한 물건이 사실 부모가 빌려 온 한 중소기업의 장비였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기사] 모든 일이 마무리된 지금 보자면 "그렇다면 지금껏 보여 온 천재의 이미지도 부모가 만들어 온 허상이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신기하게도 이 사건은 별 반향 없이 묻혔고 송씨는 계속 천재 이미지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과학계에서는 송씨에 대해 우려의 시선들이 있었지만 '국민 천재소년'으로 추앙받고 있던 그에 대하여 대놓고 문제제기를 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언론과 부모가 계속 '천재성을 죽이는 제도권 교육' 프레임을 쌓아가는 마당에 제도권 학계에서 그에 대한 비판은 곧 제도권의 천재 죽이기로 비추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학계 사람들은 대체로 그냥 입을 닫고 "논문 나올 때 두고보자"라는 입장을 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3. 천재의 몰락 : 알고보니 껍데기였을 뿐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2015년 송씨가 Astrophysical Journal(ApJ)에 투고한 논문이 표절 판정을 받고 게재 취소 처분된 것입니다. 이 과정을 다 쓰려면 글이 너무 길어지기도 하고 블로거가 상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부분도 많이 있으니 [링크]를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흥미로운 점이라면 과거 황우석 연구조작 사건과 진행과정이 조금 비슷한데 디시인사이드 과학 관련 갤러리에서 논란이 불거진 점(물론 이 사건은 일베저장소에서 처음 말이 나왔다고는 합니다만), 문제를 제기하는 쪽이 여론의 뭇매를 맞다가 한 방에 사태가 반전되었다는 점 등등.


 아무튼 이 사건으로 송씨는 천재소년으로 불리던 그간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었고, 이 논문을 바탕으로 취득하려던 박사 학위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황우석 때와 달리 이 사건은 논란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신속하게 사태가 종료되어 황우석 사건처럼 사회가 분열되어 개싸움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렇다 보니 역으로 이 사건의 경과나 그 의미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아직도 그를 천재소년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기는 합니다. ㅡㅡ;


[응 학위 못 준다]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2016년 arXiv(코넬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출판 전 논문 등을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사이트)에 송씨가 올린 논문이 또다시 표절 논란에 휩싸인 것입니다. [기사] [최초 문제제기] 뿐만 아니라 송씨와 관련된 연구보고서에 뜬금없이 그의 부모가 연구원으로 등재되어 있다거나, 보고서들이 온통 Ctrl+CV로 점철되어 있다거나[참조] 하는 등 이후로도 그에 대한 논란은 계속됐습니다. 아마 송씨는 물갤을 철천지원수로 여길 듯하다


 기껏 게재한 논문이 잇따라 표절로 드러나고 그 여파로 모든 지도교수가 날아가는 등등, 연구자로서 그는 그야말로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나마 SCI급이나 그에 준하는 학술지에 어찌어찌 논문을 내긴 했던 모양이지만, UST에서 받은 논문 심사에서 심사관의 질문에 대답조차 못 하는 등 기본조차 안 된 모습을 보이며 결국 박사학위를 받을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누구보다 빠르게 대학교와 대학원에 들어간 사람이 결국 기한초과로 학위 취득에 실패하다니, 어딘가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졸업한다고는_하지_않았다.fact]


 박사 학위는 기본적으로 자기 분야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학설을 만들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부여됩니다. 그러니 (다른 논문도 물론 마찬가지지만) 박사학위 논문을 베낀다는 건 그야말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 겁니다. 물론 한국의 대학원에서는 그 상상도 못할 일이 꽤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사실이긴 합니다만 문도리코라든지 문도리코라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국민의 주목을 받아온 학생이 철저한 검증의 대상이 될 논문을 그렇게 복붙 수준으로 베껴서 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석하면 되겠습니까. 


 이쯤 되고 나서는 그가 어린 시절에 TV에서 보여준 문제풀이나 공식 유도같은 자료들도 죄다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체로 '저건 식 자체를 외워서 외운 그대로 쓴 것이지 문제를 이해하고 푼 것이 전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송씨는 어린 시절에도 뭔가를 기억하는 암기력만 뛰어났지, 그게 뭔 소리인지 이해하는 능력은 전혀 없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모르는 블로거가 보기에도 저건 그냥 여러 변수들을 무의미하게 이리저리 돌려가며 장난친 것으로 보입니다. 블로거가 예전에 저러다가 문제 많이 틀렸는데]


 결국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가 TV같은 데 나와서 어려운 수학 문제 몇 개쯤 베껴쓰는 푸는 것, 그리고 지도교수 논문을 그대로 오려붙여서 논문이랍시고 내는 것 외에는 무언가 결과를 남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까지 와서 보면 송씨가 과연 자신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완료할 역량과 의지가 있기는 한가 싶기까지 합니다. 학자 인생에 평생 따라다닐 학위논문조차 지도교수의 것을 복붙하는 지경이래서야, 어디 그가 자기 머리로 논문은 커녕 번듯한 레포트 한 장이라도 제대로 쓸 능력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도 천재 소리 듣던 사람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걸까요?


(계속)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