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한국의 4대 PC통신망


 - 케텔-하이텔의 성공을 시작으로 한국에서도 PC통신망이 여럿 등장하여 시대를 풍미하였는데, 이 중 가장 큰 규모의 4개 통신망을 일반적으로 '4대 통신망(유니텔을 빼고 3대 통신망으로 부르기도 함)'으로 묶어 부릅니다. 당시 한국의 PC통신 세계를 주도한 게 이 네 곳이었기 때문에, PC통신에 대해 논할 때는 이들만 언급해도 되겠지요. 하나씩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하이텔 자료광장]


 - '최초 그리고 최대' 하이텔 : 앞서 서술했듯 케텔을 전신으로 하는 하이텔은 시장을 선점한데다 한국통신이라는 거대한 뒷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시종 가장 큰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이텔에서는 미니텔과 비슷하게 하이텔 접속만 가능한 단말기(2400bps 모뎀을 사용)를 무상 대여하는 정책으로 이용자를 적극 유치하였는데, 이걸 또 제대로 회수하지 않아서 아직 단말기를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는군요. ㅡㅡ;(블로거도 국딩(초딩) 시절 친구 집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 규모가 가장 큰 만큼 이용자의 커뮤니티(채팅, 게시판, 동호회)도 가장 활발하게 돌아갔고, 사회적인 영향력도 가장 컸습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만개한 여러 문화컨텐츠가 PC통신, 그 중에서도 하이텔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판타지 소설의 시대를 열어젖힌 곳도 하이텔이었고(이우혁, 이영도 등), 게임동호회 개오동('개털 오락 동호회'의 약자)은 초창기 프로게이머의 산실 역할을 했습니다. 안철수씨도 하이텔 유저였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 최초의 통신망이라는 점 때문에 하이텔의 헤비 유저 중에는 PC통신 경력이 오래된, 비교적 나이 많은 유저가 많은 편이었습니다(물론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30대 중반 이상은 별로 없었다고 보아야). 이렇다 보니 하이텔 커뮤니티의 분위기는 동시기 다른 통신망과 비교해도 비교적 차분하고 중후한 편이었다고 하는군요.


서비스 시작 : 1988년(케텔)

전용 전화번호 : 01410, 01411, 01412, 01432



[천리안 접속화면. <응답하라 1988>에서 살짝 보신 적이 있다면 바로 그 화면입니다]


 - '부르주아 통신망' 천리안 : 한국 최초로 비디오텍스 서비스를 운영한 데이콤(한국데이타통신)은 1985년 자사의 서비스에 '천리안'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후 데이콤은 여러 시험적인 통신 서비스에 이 이름을 붙여가며 본격적인 서비스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1989년부터 시작된 단말기 보급 사업 이후, 1990년에는 전국으로 서비스를 확대하여 본격적인 PC통신으로 발돋움하였습니다.


 - 그런데 천리안은 초기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한국통신의 전화망을 이용할 수 없었던데다 독과점의 횡포 단말기 및 서비스 이용료가 워낙 비싸서 사용자들이 제대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접근성 문제는 하이텔과 데이콤이 전화망 사용 관련 협약을 맺고, 데이콤 또한 자체적으로 고속 통신망(아 물론 현재의 초고속인터넷을 생각하시면 곤란)을 적극 확충하면서 비로소 해결되었습니다.


 - 이러한 노력의 결과 천리안은 1990년대 중반쯤에는 하이텔 못지 않은 규모를 가진 대형 통신망으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다만 천리안의 비싼 요금제는 여전했고(오랫동안 종량제(물론 전화요금 별도)로 과금하다가 막판에야 정액제 도입), 그래서 '돈 많은 사람의 통신망'이란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커뮤니티에 대한 관리가 허술한 편이었고(동호회 설립 기준이 지나치게 낮아 소규모 동호회가 난립한다든지), 그래서 커뮤니티가 상당히 지저분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서비스 시작 : 1990년(전국 서비스 시작)

전용 전화번호 : 01420, 01421



[프로게이머의 산실이기도 했던 나우누리 나모모(나우누리 모뎀플레이 모임)]


 - 'Young World' 나우누리 : 나우콤(現 아프리카TV)의 통신망으로, 대표 문용식(1959-)씨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낸 학생운동 지도자 출신으로 유명합니다. 나우누리는 초기에는 하이텔 전용번호(01410, 01411)나 일반 전화번호와 동일한 자체 접속번호를 써야 하고, 속도 또한 지나칠 정도로 느려 이용자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1990년대 말에 가서야 01443이라는 전용 번호가 부여되어 어느 정도 문제가 해소됩니다.


 - 그래도 PC통신이 폭발적 성장을 하던 시대에 적절히 등장한지라, 나우누리 또한 크게 활성화될 수 있었습니다. 하이텔과 천리안에 비해 비교적 이용자의 연령대가 적은 편이었고, (모기업 대표의 성향이 성향이라 그런지) 한총련 등의 운동 단체의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그래서 한총련 사태 때 나우콤 본사가 압수수색을 당한 적도 있다고).


 - 나우누리는 특이하게 다른 통신망이 몰락하는 시점에서도 상당 기간 강고한 커뮤니티를 유지했습니다. 이들은 2000년대 초중반까지 인터넷 커뮤니티에 대항할 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소위 '나우폐인'으로 불린 이들은 '햏자'로 대표되는 초창기 디시인사이드와 함께 한국의 온라인 세계를 양분하였습니다. 비교적 후발주자임에도, 사회와 문화에 끼친 영향력은 하이텔 다음으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비스 시작 : 1994년

전용 전화번호 : 01443(1990년대 말 개통)



[유니윈 공개자료실]


 - '무서운 후발주자' 유니텔 : 1990년대 초 PC통신이 폭발적 성장세를 보이자, 삼성SDS에서 뒤늦게 뛰어들어 개설한 통신망입니다. 역시 삼성의 자본과 기술력이 들어가니, 4대 통신망 중 가장 후발주자였음에도 상당히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시장에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영화 <접속>에서 유니텔 채팅 서비스가 중요한 매개체로 등장하고, 만13세 이하 초등학생에게 이용료를 받지 않는(물론 전화요금 별도 ㅡㅡ;) 파격적인 정책이 겹치며 이용자가 단기간에 급증하였습니다.


 - 특이점으로는 당시 일반적으로 쓰이던 '이야기'나 '새롬 데이터맨' 등의 텍스트 기반 프로그램이 아닌, GUI 기반의 전용 프로그램 '유니윈'으로 접속하도록 (사실상) 강제했다는 게 있습니다(물론 이야기 등으로도 접속은 가능한데, 꽤 많은 기능을 사용할 수 없었음). 이는 다른 통신망과의 확실한 차별점이 되어 오랫동안 유니텔의 정체성으로 기능했습니다(다른 통신망도 전용 프로그램이 없었던 건 아닌데, 유니텔에 비해서는 확실히 기능이 떨어졌고 일반화되지도 못했음).


 - 무엇보다 역시 유니텔은 블로거가 이용한 통신망이었기 떄문에......ㅡㅡ; 그래서 블로거는 앞 글에 나온, 텍스트 기반 접속프로그램을 사용해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유니텔은 유니윈만 쓰면 됐으니까요. 이러한 바탕 때문에 유니텔은 다른 통신망이 하지 못한 많은 서비스를 할 수 있었는데, 아바타 기반으로 돌아가는 '유니챗'이라든지 일종의 미니홈피와 유사한 서비스도 있었습니다.


서비스 시작 : 1996년

전용 전화번호 : 01433



 - 이외에도 넷츠고, 신비로, 에듀넷(그나마 이쪽은 무료라는 점 때문에 4대 통신망 못지 않게 이용자가 많았음) 등 중소규모 통신망도 여럿 존재했습니다. 그렇게 1990년대 후반 PC통신은 최전성기를 맞이했고, 4대 통신망은 제각기 수백만 단위의 가입자를 보유하고 막강한 위세를 자랑했습니다. 그렇게 PC통신의 시대는 영원할 줄 알았는데......(계속)



 - 2017년은 대한민국 국군의 건군 69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안타깝게도 국군은 출범 단계에서 옛 일본군 출신자들을 많이 받아들였고, 이들에 의해 일본군의 흔적이 상당 부분 이식되어 오늘까지 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첩보 및 보안업무의 중심에는 관동군 첩보부대원으로 근무했던 김창룡(1920-1956)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해방 전후에 걸쳐 있는 김창룡의 활약상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김창룡]




1. 국경의 관동군 첩보원


 - 김창룡의 고향은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요덕 수용소의 그 요덕)입니다. 빨갱이 때려잡은 사람의 출신지로 심히 적절하다 집안은 평범한 빈농(貧農)이었고, 그래서 김창룡 역시 고등교육을 받지는 못하고 2년제 농잠(농업+양잠)학교를 나왔습니다. 졸업 후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직물회사에서 잠시 일하다가 (신세를 바꾸어 볼 요량이었는지) 만주로 건너가 만주국 철도부(통칭 '만철')에 지원하여 합격, 역무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만철 특급열차 '아시아'호. 당시 만철은 만주지역 철도 뿐만 아니라 군대와 행정조직까지 갖춘 거대한 집단이었습니다]


 - 확실히 그는 머리가 좋고, 또 성실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만철에서 일하던 김창룡은 그의 성실성과 명석함을 눈여겨본 일본인 상관의 추천으로 관동군 헌병대에 입대, 헌병보조원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임무는 소련과 국경 일대에서의 첩보활동으로, 이 때부터 그의 기나긴 첩보 인생이 시작됩니다.


 - 헌병교습소에서 첩보요원으로 훈련을 마친 김창룡은 주로 소련 · 중국공산당에 대한 첩보활동을 벌였습니다. 1943년에는 중국공산당 소속 왕진리(王近禮)와 그가 이끄는 지하조직을 일망타진하는 공을 세웠는데, 이는 왕진리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2년여간 점원으로 위장근무하며 벌인 첩보 활동의 성과였다고 합니다.


 - 이렇듯 김창룡의 장기는 위장 · 침투와 역공작(逆工作)이었습니다. 이후로도 그는 철도노동자 감독으로 위장취업하여 첩보를 입수, 공산당 지하조직을 50여 개나 적발해내는 공적을 세웠습니다. 일반 병사 신분이었던 김창룡은 일련의 공적으로 1945년 1월 오장(伍長, 하사)으로 진급할 수 있었습니다.


 - 이렇게 관동군의 첩보요원(이건 좋게 표현한 것이고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밀정')으로 맹활약하던 김창룡에게 큰 시련이 닥쳐왔으니, 만주 작전으로 만주국이 멸망하고 만주 일대가 소련의 영향 하에 들어온 것입니다.




2. 빨갱이 때려잡기 전문가


 - 당연하게도, 공산당 때려잡던 밀정이 소련 치하에서 무사할 거라는 생각을 하긴 어렵겠지요. 해방 직후 김창룡은 황급히 고향으로 돌아왔고, 얼마 뒤에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딸과 결혼했습니다(대충 속내가 무엇인지 냄새가 좀 나지요?). 하지만 만주에 이어 한반도 북부를 장악한 소련군은 신분을 숨기고 조용히 살던 그를 가만 놓아두지 않았고, 김창룡은 철원과 영흥에서 보안대에 잇따라 체포되어 사형당할 처지에 놓이지만 두 번 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 더 이상 북쪽에 사는 건 불가능하니, 두 번째 탈출 이후 김창룡은 거지꼴이 다 된 채로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남쪽에서 그는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격렬한 좌우 대립 속에서 공산당 때려잡던 김창룡의 경력은 대단한 스펙(?)이 되었던 것입니다. 서울에서 한동안 백수로 지내던 그는 지인이자 만주군 출신인 박기병(당시 3연대 소대장)을 만나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였습니다.


 - 김창룡은 처음에는 일반 사병이었지만, 나름 하사관 출신인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박기병에게 부탁하여 3연대 하사관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곳에서 자신의 장기인 정보 관련 업무를 하던 김창룡은 역시 만주군 출신인 김백일(1917-1951, 당시 3연대장)의 추천으로 조선경비사관학교(現 육군사관학교)에 1947년 1월 입교, 4월(?!)에 소위로 임관하게 됩니다(당시는 국군 태동기였고, 장교를 일단 충원부터 해야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김삼룡과 이주하의 검거 소식. 1950년 4월 1일 동아일보]


 - 임관 이후 그의 진가가 발휘되는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군 내에 남아 있던 좌익 계열 장교들을 숙청하는 데 활약하게 된 것입니다. 군대 안팎에 있던 남로당(남조선노동당) 계열 인사들을 잇따라 체포하였고(그 중에는 김삼룡(1908-1950), 이주하(1905-1950) 등 남로당 최고위급 인사들도 있음), 여순사건 때는 반란의 진압과 사후처리(라고 해봐야 국군 내 좌익인사 숙청)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 반공주의가 대한민국의 국시로 굳어지면서 '빨갱이 때려잡기 전문가' 김창룡은 급속한 출세를 거듭하여 1948년에는 육군본부 정보장교, 1949년에는 방첩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는 활약을 바탕으로 대통령 이승만의 신임까지 얻게 되었고, 많지 않은 나이에 권력의 중심부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3. 김창룡식 빨갱이 관심법


 - 하지만 김창룡의 '빨갱이 때려잡기'는 여러 모로 무리가 많았습니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잡아들인 사람들에게 자신이 좌익인사라고 자백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어떤 식의 강요일지는 다들 짐작하시겠지요? 엄한 사람들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고통에 못 이긴 사람이 기억나는 아무 지인의 이름이나 내뱉으면 그 사람을 또 잡아다 고문하고......


[김정렬 초대 공군참모총장]


 - 한번은 창설 준비중인 공군 소속 장교 대부분(약 40여 명)을 한꺼번에 체포한 적이 있었는데, 깜짝 놀라 그들의 체포 경위를 묻는 김정렬(1917-1992,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로 불림) 대령에게 "증거는 없지만 앞으로 좌익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고. ㅡㅡ; 당연히 사방에서 욕을 먹었지만 그럼에도 권력에게는 유용한 존재였기 때문에 출세에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 권력이 그에게 원한 건 무엇일까요? 바로 권력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1949년 김구 암살사건이 있는데, 당시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는 육군 방첩대 소속 장교였기 때문에 방첩대장 김창룡 또한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김구 살해를 지시한 배후로 널리 의심받았지만, 정권의 비호를 받아 안두희와 함께 별 탈 없이 사태를 넘어갔습니다.


 - 1950년 한국전쟁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일단 그는 전쟁 발발 직후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로 추정되며(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후방지역 보도연맹원 학살을 지휘했다는 것), 서울 수복 후에는 인민군 부역자를 색출 · 처벌하는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김창룡은 부산 방첩대장, 평양지구 특무대장을 거쳐 1951년 육군 특무부대(現 기무사령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53년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여 별을 달았습니다.




4.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 특무부대장 김창룡은 권력(이승만이죠 뭘)을 위하여 각종 공안 사건을 조작하였습니다. '조작'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시 그가 처리한 대부분의 간첩 및 용공분자 사건이 허위라는 게 밝혀졌기 때문. ㅡㅡ; 물론 그가 처리한 공안 사건들은 권력에서 아주 유용하게 써먹었습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의 빌미가 된 소위 '금정산 공비 사건'을 처리한 것이 바로 김창룡의 특무부대였습니다. 


 - 이외에 1953년 국제간첩사건(이범석계 숙청을 위한 것이라는 설이 있음), 1955년 개천절 이승만 암살음모사건(실제 암살 시도가 있었던 건 사실이나 사건 경위는 크게 과장되었다는 게 정설) 등 권력과 직접 연관된 공안사건에는 김창룡과 특무부대가 끼지 않는 데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권력의 중추에 서게 된 김창룡은 그야말로 권력을 '남용'하게 됩니다.


[이승만에게 훈장을 수여받는 김창룡]


 - 1954년 김창룡은 특무부대와 사사건건 충돌하던 헌병사령관 공국진(-2014)을 해임하려 모종의 혐의를 뒤집어씌웠고, 정일권(1917-1994) 육군참모총장이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경무대(청와대) 빽을 내세우는 김창룡의 공세에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이후 공국진이 제2군사령부 참모장에 발령되려 하자 이것도 방해하여 무산되게 만들었고, 당시 제2군사령관 강문봉(1923-1988)까지도 빡치게 만들었습니다.


 - 결국 빡치다 못한 정일권과 강문봉은 이승만에게 직접 찾아가 김창룡을 제지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이승만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김창룡을 중용하였습니다. 이후 김창룡은 두 장군의 비리를 몰래 캐내는 등 쩔어주는 뒤끝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흥미롭게도 이승만은 김창룡에게는 두 장군의 뒷조사를, 정일권에게는 김창룡의 뒷조사를 지시했다는군요). 여하간 이런 식으로 좌충우돌하며 김창룡은 사방에 적을 만들었습니다.


 - 결국 일이 터졌으니, 1956년 1월 30일 특무부대로 출근하던 김창룡은 탑승한 지프가 잠시 정차한 사이에 허태영(1919-1957) 대령, 이유회(1929-1957) 중사 등의 습격을 받아 총알세례를 받고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승만은 소식을 듣자마자 친히 왕림하시어 그의 유해를 확인했고, 전군 장병의 외출 금지령까지 내려가며 범인을 찾았습니다. 2월 3일 김창룡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는데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葬)이었다고 합니다.




5. 정리 : 친일파의 반공주의 신분세탁


 - 김창룡은 일본의 충실한 개로 활약하다가, 일본의 후광이 사라진 뒤에는 반공주의의 선봉으로 변신하여 영광의 시절을 지속하였습니다. 이는 김창룡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친일파, 특히 군과 경찰 분야의 종사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김창룡은 거기에 관동군 시절의 행보, 그리고 해방 직후 공산주의 세력에게 당한 개인적 고난이 더해져 공산주의에 대한 순수한 증오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지고 그 양상이 공산주의 vs. 자본주의 대결구도로 재편되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이전 행위를 심판받을 기회를 뛰어넘어버렸고, 오히려 공산주의에 앞장서 싸우는 '반공투사'가 되어 새로운 사회의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친일 권력자들은 반공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이승만 세력과 손을 잡고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그대로 이어갔으며, 오히려 김창룡처럼 이를 몇 배로 불리기까지 하였습니다.


 - 물론 애초에 제국주의 일본 자체가 극렬 반공주의 사회였으니 그들에 협력한 사람들이 반공주의자인 것을 이상하게 볼 건 없습니다. 그리고 반공주의 자체도 민주사회에서 충분히 주장할 수 있고, 그들의 의견도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반공주의를 삐딱하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소위 '과거 세탁'을 위해 반공주의를 이용한 자들이 한국 내에서 반공의 선봉에 섰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 땅의 반공주의자들은 친일행위에 대한 진상규명 자체를 친북행위로 규정해 왔습니다]


 - 이것이 이후의 한국 사회에 얼마나 큰 폐해를 끼쳤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 중에서도 뼈아픈 부분은 일제점기 반민족행위를 규명하려는 노력 자체가 '빨갱이들의 준동' 쯤으로 치부되어 버렸다는 점입니다. 친일파를 비판하는 게 곧 '반공투사'를 욕하는 것으로 치환되어 버렸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아직도 일본 밀정이자 대한민국의 악질 정치군인 김창룡을 구국의 영웅으로 맹목적으로 칭송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입니다.


 - 네. 물론 김창룡은 유능한 정보군인이었고, 투철한 반공투사였을 수 있습니다. 그걸 공이라고 하면 그 의견은 존중해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과오(일본에 대한 협력, 무고한 이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를 없이하는 건 결코 아니지요. 이런 식의 흑백논리가 계속되는 한, 한국 사회는 뒤틀린 역사인식과 해석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어려울 겁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theme.archives.go.kr/next/history/kimcy/mean/mean_01.do (김창룡 저격사건과 김창룡 일대기 요약)

http://egloos.zum.com/nasanha/v/10987122 (산하의 오역)

http://www.idomin.com/?mod=news&act=articleView&idxno=484869 (경남도민일보 기사)

http://www.allinkorea.net/sub_read.html?uid=22154 (김창룡에 대한 긍정적 시각의 글)



[2016년 실업률. 출처 : 통계청 <2016년 12월 및 연간 고용동향>]


 - 2017년 1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고용동향에 따르면, 2016년 대한민국의 실업률은 3.7%로 전년 대비 0.1% 증가하였습니다. 사실 실업률 3%대라면 굉장히 양호한 것으로, 일시적 취업준비나 이직 등의 요소를 감안하면 거의 완전고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그리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상황이 영 다른 것 같습니다.


 - 분명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취업을 못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쩔쩔매고 있는데, 통계는 우리 사회가 아주 양호한 상태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실업률 통계가 우리의 체감과 다르게 나오고 있는지, 통계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 말입니다.




1. 실업률 산출의 진실 : 이 사람이 실업자가 아니라고요?


 - 일단 단어 정의부터 해 봅시다. 실업이란 "일할 의사와 능력이 있지만 일을 하지 않는(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실업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을 할 능력이 있고(즉 어디 중대한 장애가 있다거나 하지 않고)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즉 일자리를 구하고 있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상태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 '일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통틀어 경제활동인구라고 합니다. 실업자란 어디까지나 경제활동인구 중 일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가 생각하기엔 실업자이지만, 경제활동인구로 잡히지 않아 실업률 통계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대한민국 사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X라게 많습니다. ㅡㅡ;


 - 우선 학생은 경제활동인구에서 제외됩니다. 공부를 하고 있으니, 당장 일자리를 구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란 고등학교나 대학교 등 정규 교육기관에 재학하는 경우 뿐만 아니라, 입시학원이나 취업(공무원, 고시 등)준비학원 등에 다니는 경우도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학원에서 공무원시험 준비하는 수험생은 돈 한 푼 벌지 않지만 실업자가 아니게 됩니다. 물론 학원에 다니지 않고 취업을 위한 공부를 할 경우에도 경제활동인구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 그리고 그냥 쉬었을 경우에도 제외됩니다. 군 입대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경우, 일을 그만두고 이직하기까지 빈 시간이 있을 경우, 아예 취업을 포기해버린 동네 백수 등등 우리가 보기에는 놀고먹(?)는 실업자이지만, 국가에서는 이들을 실업자로 보지 않는 경우가 생깁니다. 연로한 사람들도 빠집니다(일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 전업주부 중에서도 취업을 하고 싶으면서 못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역시 일률적으로 비경제활동인구가 됩니다.




2. 실질적 실업률 : 한국은 실업률이 매우 높은 국가이다!


 - 즉 실업률 통계가 체감과 다른 것은 우리가 보는 '실업자'와 국가에서 보는 '실업자'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의 '백수'들이 모두 실업자인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사실상의) 실업자들을 합치면 실제 실업률은 얼마나 높아질까요?


[2016년 비경제활동인구 활동상태별 현황. 출처 : 상동]


 - 간단하게 통계를 가지고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일단 저기서 '기타' 항목의 인원(교육기관 외 취업준비, 진학준비, 군입대대기, 순수백수 등)은 거의 포함된다고 보겠습니다(+2,359,000명). '재학·수강 등' 항목에서 정규교육기관 재학생(2016년 기준 대학+전문대학 2,782,000명. 참고)을 제외하고 포함할 수 있겠습니다(+1,214,000명). '가사', '육아' 및 '연로' 항목의 경우 명확한 기준을 잡기 어려우니, 여기서는 일단 제외하겠습니다.


 - 이걸 가지고 계산을 해 보겠습니다. 공식적인 실업률은 실업자 수(2016년 1,012,000명) ÷ 경제활동인구(2016년 27,247,000명) 로 계산됩니다. 여기에 위에서 구한 '사실상 실업자'들은 분모와 분자 모두에 더해야 합니다(경제활동인구가 아니므로).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실질적 실업률'은 단순히 계산해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1,012,000+2,359,000+1,214,000 ÷ 27,247,000+2,359,000+1,214,000 × 100

     = 14.88(%)


 - 그렇습니다. 몇 가지 요소를 빼고도 실제 실업률은 15% 가까이 나옵니다! 이쯤 되면 통계적으로 실업률이 엄청나게 높아 보이는 미국이나 유럽 각국과 비교해 보아도 결코 꿀리지 않습니다. ㅡㅡ; 물론 그 쪽에서도 우리처럼 누락되는 '사실상 실업자'들이 다수 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는 수치입니다.


[2016년 취업자 수 및 고용률. 출처 : 상동]


 - 이번에는 통계를 뒤집어서, 고용률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얼핏 보기에도 고용률이 결코 높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고용률은 OECD 평균보다 대체로 약간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여성 전업주부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음을 감안해야겠지만(한국의 남녀 고용률 격차는 OECD 내 1위를 달립니다), 결국 그 빈 자리를 누군가 채울 것임을 감안하면 큰 변수가 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통계대로라면 한국은 실업률과 고용률이 모두 낮은 희한한 사회가 되어버립니다.




3. 정리 :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통계의 위험성


 - 본래 실업률 통계는 경기 동향을 파악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자료 중 하나지만, 이런 식으로 통계가 체감과 동떨어져서야 어디에도 써먹기 어려운 의미 없는 자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서 함부로 음모론스러운 이야기를 하지야 않겠지만, 중요한 참고가 되어야 할 자료가 이런 상태라는 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통계가 사회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점입니다. 실업률 통계만 보면 현재의 한국 경제는 역사상 최대 호황기라는 1990년대 초중반(당시 실업률은 2% 초반대였습니다)에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습니다. 바꿔 말하면 현재의 경제가 적어도 상당한 호황이라는 소리인데,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아마 별로 없지 싶습니다.


 - 이런 자료를 가지고 정부에서 제대로 된 경제정책을 세울 수 있을까요? 미국만 보아도 실업률 추이는 미국 경제의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데이터이며, 실업률 변화는 경제정책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대통령 선거 결과에까지 큰 영향을 주곤 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실업률 통계는 그 어느 곳에도 써먹을 수가 없습니다. 통계는 현실을 보여주지 못하고, 사람들은 통계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거의 유일한 용도가 있다면, 실업률이 낮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의 불만을 잠깐 동안 잠재우는 역할 정도일까요? 이는 통계의 거대한 함정에 빠지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줍니다. 통계를 통하여 세상을 본다는 것은 곧 그 통계에 의해 세뇌당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의미니까요. 우리가 생각 없이 접하는 통계를 좀 더 주의 깊게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참고 : 

http://kostat.go.kr/portal/korea/kor_nw/2/3/1/index.board (통계청 고용/노동 관련 통계)

http://www.index.go.kr/potal/main/EachDtlPageDet... (한국지표체계 고등학교 유형별 현황)

http://37start.tistory.com/595 (대학생 수 통계 출처)

http://oecd.mofa.go.kr/webmodule/htsboard/te... (OECD 실업률 동향)


 - 늦은 나이에 대학엘 다시 다니다 보니 나이 어린 동기나 선배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세대차이를 절감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최근에 한 동기와 대화를 하다가 그 친구가 '모뎀'이라는 것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을 알고 놀란 경험이 있었는데요, 블로거는 PC통신의 시대를 지나온 거의 마지막 세대였기 때문에 이런 주제를 갖고 생각을 하다 보면 소싯적 PC통신 하던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이 글은 PC통신이 세상을 풍미했던, 짧다면 짧은 시대를 추억하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추억의 PC통신 접속화면. 블로거는 사실 이 화면에 대한 추억은 그닥 없는데, 그 이유는 후술]



1. PC통신 출현의 배경 : 모뎀과 전화선


 - 'PC통신'이라는 말을 넓게 해석하면 개인용 컴퓨터로 하는 모든 통신 행위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터넷도 여기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당연히 이러면 이야기가 전개가 안 되니 여기서는(그리고 일반적으로도) PC통신의 정의를 '전화선 혹은 전용선을 이용하는, 국내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BBS(게시판) 등의 독자적 서비스' 정도로 한정하기로 합니다.


 - PC통신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시 컴퓨터에서 다른 컴퓨터 시스템을 연결할 수 있는 기술의 발전이 필수적이었습니다. 1958년 미국 항공관제시스템 SAGE(Semi Automatic Ground Environment)를 개발하던 IT 기술자들은 미국 전역에 있는 컴퓨터간 연락 기술을 개발할 필요성을 가지고 최초의 모뎀(MODEM, MOdulator-DEModulator)을 개발하였습니다. 이는 컴퓨터의 디지털 데이터와 전화선의 아날로그 신호를 서로 변조하여, 전화선으로 데이터 전송이 가능하도록 하는 장치였습니다.


[벨 103]


 - 이후 1962년 AT&T에서 개발하여 내놓은 보급형(물론 PC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니 대중에게 널리 보급했다는 의미는 아님) 모뎀인 '벨 103A'가 출시되었는데, 당시의 데이터 전송속도는 무려 300bps(초당 전송 가능한 byte)였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1초당 0.3KB입니다. ㅡㅡ; 물론 당시는 지금처럼 데이터량이 많은 시대도 아니었으니, 이 정도로도 컴퓨터를 이용한 통신의 시대를 열기에는 충분했습니다.


 - 당연히 초창기의 컴퓨터는 모두 메인프레임이었기 때문에, 컴퓨터 통신을 접하고 이용할 수 있는 계층도 이를 사용하는 일부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일반 기업과 대학으로 컴퓨터가 확산되면서 일반인들 또한 조금씩 컴퓨터 통신을 접할 수 있게 되고, 1970년대 후반부터 PC의 시대가 열리면서 컴퓨터 통신은 일반인에게 활짝 열리게 됩니다.



2. 태동기 : BBS와 비디오텍스


 - 그럼 이렇게 컴퓨터 통신 기능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아마 처음에는 단순히 상대 컴퓨터에 접속하여 텍스트로 된 문서를 받아오거나, 혹은 상대에게 보내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후 이러한 문서 전송을 좀 더 쉽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개념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BBS(Bulletin-Board System)입니다. 일종의 '게시판' 서비스입니다.


[세계 최대의 BBS 서비스 중 하나인 Exec-PC BBS]


 - BBS는 호스트(서비스 제공자)가 있어 게시판 공간을 제공하고, 이 호스트의 컴퓨터에 이용자가 자유롭게 접속하여 그 게시판을 사용하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오늘날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게시판 기능만 뚝 떼어놓았다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당연히 당시에는 전화선과 모뎀을 사용했고, 컴퓨터로 통신을 한다는 것은 상대 컴퓨터가 연결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연결하는 개념이었습니다.


 - 전화는 하나의 전화선에 하나의 통화만 가능하죠. 그런데 BBS에는 전화번호만 알고 있으면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동시에 접속하여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전화선 하나만 가지고는 이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제대로 서비스를 돌리는 호스트는 여러 개의 전화선을 확보하여 동시에 다수의 접속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BBS 서비스는 PC의 보급과 함께 그 영역을 폭발적으로 넓혀갔고, 1990년대 초 미국에서는 대략 6만 개의 사설 BBS 서비스가 성업중이었다고 합니다.


 - 다른 한 쪽에서는 '비디오텍스'라는 개념이 등장하여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각각의 단말기가 멀리 떨어진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하여, 텍스트나 그래픽으로 된 데이터를 전송받아 이용하는 형태의 서비스입니다. 1960년대 말 처음 등장한 비디오텍스는 양방향 통신이 가능했기 때문에 시설 예약이나 쇼핑, 금융업무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이렇게 컴퓨터 통신은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며 발전하였고, 모뎀 성능의 발전(규격화와 기술 발달로 통신 속도는 1200, 2400, 4800, 9600bps 등 계속 빨라지고 있었음)과 함께 점차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 통신의 가능성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PC의 대중화와 맞물려 다양한 서비스가 종합된 대규모의 컴퓨터 통신 업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좁은 의미의 'PC통신'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3. PC통신의 시대가 열리다


 - 비디오텍스 기반의 대형 PC통신 서비스는 1980년대 초를 전후하여 여러 국가에서 등장하였습니다. 그 중 주목할 만한 서비스는 1982년 서비스를 시작한 프랑스의 '텔레텔'(이하 '미니텔'. 보통 텔레텔 단말기의 이름을 따서 미니텔이라 호칭)입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개발이 진행되었지만 자금 부족으로 허덕이던 미니텔은, PC통신을 활용해 전화번호부 서비스를 하려는(종이책으로 인쇄하면 돈이 많이 드니까) 프랑스텔레콤의 지원으로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전역에 무차별 보급된 미니텔 단말기]


 - 이는 영국 자본과의 합작도 있었기 때문에 서비스는 양국에서 함께 시작했는데(영국에서는 '프레스텔'이라 부름), 그리 대중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영국과 달리 프랑스의 미니텔은 단말기 무료 보급이라는 실로 파격적인 정책과(이는 나중에 한국의 하이텔에서도 비슷하게 따라합니다) 프랑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1980년대 말에는 500만 대 이상의 단말기를 보급하는, 말 그대로 폭발적 성장을 하게 됩니다.


 - 한국은 어떨까요? 한국 역시 1980년대 초부터 PC 보급이 시작되면서 사설 BBS 중심으로 조금씩 컴퓨터 통신 서비스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1984년 한국데이터통신(데이콤의 전신)에서 전자사서함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기업 차원의 통신 서비스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생활정보DB 등의 서비스가 잇따라 출범했지만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다가, 1988년 9월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케텔(Ketel)을 서비스하면서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PC통신 시대가 개막하게 됩니다.


[케텔 접속화면. 출처]


 - 케텔은 처음에는 한국데이터통신의 통신망에 얹어 가는 형태였다가 이후 자체 통신망을 갖추고, 서비스도 (모기업이 모기업이니) 뉴스 중심에서 점차 다양한 생활서비스와 게시판 등을 확충하며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전체 서비스가 무료였다보니 저녁시간대에는 이용자가 폭주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곧 수익구조가 전무하다는 것이었고, 한국경제신문사는 돈 먹는 하마가 되어가던 케텔을 1991년 한국통신(現 KT) 중심 합작사에 매각해 버립니다.


 - 케텔을 인수한 한국통신은 케텔의 명칭을 코텔(KORTEL) → 하이텔로 바꾸고, 이듬해 서비스 유료화를 단행하였습니다. 당시 하이텔의 과금제(가입비 + 월정액료, 전화요금은 당연히 별도)는 당시 서비스되는 유료 PC통신의 일반적인 과금 형태였습니다.케텔을 이용하던 사용자들은 내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촛불시위(!!!)까지 벌여가며 반발했지만,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유료화를 수용했다고 하는군요.


 - 이후 데이콤의 천리안, 나우콤의 나우누리, 삼성SDS의 유니텔 등이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한국에도 PC통신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PC통신의 '짧지만 강한' 전성기는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 전후까지 10여 년간 지속됩니다. (계속)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영문 위키피디아

http://www.linxus.co.kr/main/view_post.asp?post_seq_no=7027 (모뎀의 개발과 발전)

구글 도서검색

http://www.mofat.go.kr/webmodule/htsboard/template/read/hbdlegationread.jsp?typeID=15&boardid=11316&seqno=945605&c=TITLE&t=&pagenum=1&tableName=TYPE_LEGATION&pc=&dc=&wc=&lu=&vu=&iu=&du= (프랑스의 미니텔 보급)

http://www.venturesquare.net/531865 (BBS 관련)



 - 최근 영화 <밀정>이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영화의 모티프가 된 실제 사건이 새삼 주목받고 있습니다. 통칭 '황옥 경부 폭탄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중심에는 당시 일본 경찰에서 경부로 일하던 황옥(1887-?, <밀정> 이정출의 모티프)이 있었는데, 그는 일반적으로 친일파로 분류되지만 정말 친일파가 맞았는지에 대해 현재까지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의 정체는 소위 '위장 친일파'의 존재와도 연관되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데, 그의 일생을 논하며 함께 고민해 보도록 하지요.


[간신히 찾아낸 황옥의 사진. 1923년 4월 12일 동아일보 호외]



1. 의열단에 뛰어든 일본 경찰


 - 황옥의 이명(異名)은 황만동(黃晩東)이며, 1887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경기도 경찰부에 특채로 임용, 일본 경찰의 일원으로 근무하였으며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대단히 높은 계급인 경부(현재의 경감)로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하였습니다. 황옥은 고등계에서 근무하였으며, 고등계가 주로 독립운동가 등의 정치범을 다루는 부서였음을 생각하면 그가 일본 권력의 개로 활약하여 출세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그런 그가 독립운동과 연을 맺게 된 것은 1920년,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김시현(1883-1966)을 만나면서부터입니다. 이 때 황옥은 김시현의 설득을 받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황옥은 계속 일본 경찰로 근무하면서도 독립운동가들(주로 의열단 단원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게 됩니다.


[김시현]


 - 그는 의열단 단원이며 총독 암살 계획을 세웠던 김상옥(1890-1923)이 경찰의 수사망에 포위당할 처지가 되자, 이를 김상옥에게 몰래 알려 상하이로 망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시 의열단 단원인 김지섭(1884-1928)이 군자금을 모으다 발각되자 몸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김시현이 1921년 극동인민대회 참석차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 황옥은 50원(현재 환율로 수백만 원)을 여비로 지원해 주기도 했습니다.


 - 그리고 운명의 1923년, 한국으로 돌아온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으로 온 한반도를 발칵 뒤집어 놓자 황옥은 김상옥의 배후 세력을 색출할 임무를 받아 중국으로 출장을 떠났습니다. 1923년 2월 중국 톈진에 도착한 황옥은 김시현과 함께 의열단 단장 김원봉(1898-1958?)을 만나고, 의열단의 일원으로 활동할 것을 서약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그는 국내 주요 시설을 폭파하기 위해 폭탄 36개와 권총 5정을 국내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2. 황옥 경부 폭탄사건


 - 황옥은 김시현 등의 의열단 단원들과 함께 다른 짐으로 위장한 폭탄들을 들고 경성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함께 임무를 맡은 단원 중 김재진이 일본에 매수되어 계획을 밀고하는 바람에 실패로 끝나고 황옥과 김시현을 포함한 9명이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직접 관련자 중 김원봉과 김지섭 정도만 체포되지 않았는데, 황옥은 이들의 피신을 도운 후 자신은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 현직 일본 경찰이 독립운동에 관여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온 세상이 뒤집어졌고, 이들에 대한 재판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판이 해를 넘겨 진행되는 와중에 피고석에 선 황옥은 충격적인 진술을 하게 됩니다.


 - "나의 처지를 이용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일망타진한다면 상관들도 나의 역량을 인정하고 경시(현재의 경정)로 승진도 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본래는 폭탄을 경성까지 오도록 한 이후 체포할 생각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일찍 발각되는 바람에 나까지 범인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황옥 재판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 1923년 8월 9일]


 - 당연히 여론은 난리가 났고, 뒤통수의 대가 황옥은 사람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진술과는 관계없이 황옥은 김시현과 함께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됩니다. 이후 1925년 황옥은 건강 문제(장결핵, 폐렴 등)로 형집행정지 석방되었으며, 1928년 다시 수감되었다가 다음 해 출옥하였습니다. 그가 사건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이 사건을 '황옥 경부 폭탄사건(이하 폭탄사건)'으로 불렀습니다.



3. 도대체 당신의 정체가 뭐요?


 - 출옥 이후 해방 때까지 황옥의 행적은 별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던 김시현을 비롯하여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이를 봤을 때 그와 함께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법정에서의 진술과는 관계없이 황옥을 자신들의 일원으로 계속 인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24년에는 동료 김지섭이 도쿄 황궁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폭탄을 옮길 수 있었던 것도 체포 전 황옥이 도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하지만 그를 말 그대로 '밀정'으로 볼 여지도 얼마든지 있는데, 일단 자신의 진술이 그러했고 그의 상관이었던 시로가미 유키치(당시 경기도 경찰부장) 역시 "나의 재가를 받고 작전의 일환으로 벌인 일"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황옥의 정체성이 일본 밀정 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김지섭의 사진과 거사 관련 기사. 1924년 4월 25일 동아일보]


 -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의 태도를 보면 그게 맞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도쿄 황궁 폭탄투척사건으로 체포된 김지섭은, 변호를 맡은 후세 다쓰지(1880-1953)와 대화하던 중 "황옥은 결코 밀정이 아니다"라며 강하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황옥을 직접 만난 김원봉 역시 그를 "경기도 소속 경찰이었으나 의열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불행하게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이는 사실인지 불명).


 - 황옥은 해방 이후 <조선독립운동사> 편찬에도 참여하였고 반민특위 활동에서는 증인으로 출석, 동료 친일경찰의 범행을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동료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과거사 정리 관련 활동을 하던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남아 있다가 납북당했고, 얼마 뒤 외국군 철수를 주장하는 선전방송에 출연한 이후의 삶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4. 정리 : '위장 친일파' 논란이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


 - 대체로 학계에서는 친일파로 행세하면서 뒤로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소위 '위장 친일파'들이 다수 실존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은 정체를 절대 밝혀서는 안 되는 특성상 그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고, 후세에 알려진 것은 그들이 친일파의 이름으로 가졌던 공식적인 지위, 그리고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주변인의 증언 정도 뿐입니다.


 - 황옥 또한 비슷해서, 그의 활동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폭탄사건에 관한 재판기록이나 그 주변인의 단편적인 증언(의열단원들, 동료 경찰 등) 말고는 없습니다. 심지어 그것들은 서로 모순되기까지 해서, 황옥의 실체를 소상히 밝히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지요. 그나마 황옥 자신이라도 계속 있었다면 언젠가는 진실을 들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한국전쟁 때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렸으니...... ㅡㅡ;


 - 실상 이는 한국 사회가 일제강점기의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이유가 커 보입니다. 해방 직후 친일분자들의 행적을 소상히 밝혀내고 심판했다면, 친일파인 척 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행적 또한 필연적으로 소상히 밝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당시는 해방 직후였으니, 이를 검증할 자료 또한 충분히 있었을 것입니다.


 - 하지만 그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 버리는 바람에 이들의 실체를 밝히기 너무나도 어렵게 되고 말았습니다. 최근에는 아예, 명백한 친일파였던 이들을 '알고보니 위장 친일파였네'라며 호도하는 데 악용되기까지 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ㅡㅡ; 요즘에는 이 때문에 위장 친일파에 대한 논의가 더 어려워진 측면도 있습니다. 이게 어떤 쪽으로 악용될 지 모르니까요.


 - 처음으로 돌아가서, 황옥은 정말 친일 밀정이었을까요, 아니면 위장 독립운동가였을까요? 현재는 여기에 아무도 확실한 답을 내지 못합니다. 글쎄요, 하늘에 있을 당사자들에게 물어보면 혹시나 알 수 있을런지. 이들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사를 제때 정리하지 못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씁쓸한 노릇입니다.


 - 여담으로 그와 함께한 독립운동가들의 운명도 참으로 기구합니다. 김지섭은 도쿄 황궁 폭탄투척사건으로 복역 중 옥사, 김원봉은 해방 후 왕년의 친일경찰에게 수모를 당한 후 빡쳐서 월북했다가 숙청, 김시현은 대한민국에서 정치가로 활동했지만 이승만의 횡포에 역시 빡쳐서 암살 기도를 했다가 실패, 다시 여러 해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egloos.zum.com/nasanha/v/10977125

http://news.mt.co.kr/newsPrint.html?no=2015081314472814366&type=1&gubn=undefined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24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media.daum.net/m/channel/view/media/20150815060507538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42809



1. 1972 아타리 오디세이 : (1)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


 - 아직까지 전문가들과 학생들의 전유물이던 비디오게임이 일반 대중에게 급속히 전파된 시발점은 1972년입니다. 독일 출신으로, 나치를 피해 어릴 적에 미국으로 이주한 전기공학자 랠프 헨리 베어(1922-2014)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양반이 군수업체 샌더스 어소시에이츠에서 기술자로 근무하던 1966년 어느 날, 버스를 기다리던 중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꼭 대형 컴퓨터로만 게임을 즐겨야 하나? 기기를 작고 간단하게 만들어서 가정용 TV에 연결해서 플레이할 수는 없을까?"


 - 메모광(?)이었던 그는 이를 잊지 않고, 2년 정도 틈틈이 작업하여 그럴 듯한 기계를 하나 만들어 냈습니다. 이 기계의 겉면은 나무 무늬 테이프로 포장이 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는 '브라운 박스'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프로토타입까지 만들어진 이 기계는 그의 직장인 샌더스 사에서는 출시되지 못했고, 이런저런 사정 끝에 TV 제조업체인 마그나복스와 계약을 하여 1972년 10월에야 정식 출시되었습니다. 출시 당시 명칭은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 이 기계는 사실 아주 단순해서, TV 화면에 몇 개의 점을 띄워놓고 이를 이리저리 조종하는 정도의 기능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해당 게임에 맞는 셀로판지를 TV에 붙이고 그것에 맞추어 점을 움직여야 했습니다. ㅡㅡ; 그래도 선으로 연결된 조종기라든지, 게임의 종류를 바꾸는 일종의 카트리지(사실 이 때는 단순히 회로의 연결을 조작하는 스위치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카트리지라기엔 애매하지만) 개념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 개발자인 베어 본인이 화면에 대고 쏘는 광선총을 개발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는 정작 그렇게 큰 흥행을 기록하지는 못했습니다. 가격이 $100 정도로 당시로서는 꽤 비싼 편이었기도 하고(1970년대 초입니다), 마그나복스 대리점에서만 판매하는 바람에 많은 소비자들은 이 게임기가 마그나복스 TV 전용 기기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ㅡㅡ; 그래도 첫 해 10만 대, 최종 33만 대가 팔려나가며 가능성만큼은 충분히 제시하였습니다. 한편......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를 플레이하는 모습]



2. 1972 아타리 오디세이 : (2) 최초로 성공한 아케이드 게임기


 - 1편 끝에 잠깐 등장한 놀런 부슈넬, <스페이스워!>를 보고 흥분했던 이 사람은 1971년 이 게임의 아류작인 <컴퓨터 스페이스>를 만들었습니다. 이 게임(기)은 그럭저럭 주목을 받아서 2500대 정도가 팔려나갔는데, 개발 및 생산비용이 만만찮게 들어서 최종적으로는 적자를 냈다고 합니다.


 - 그래도 이게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판단한 부슈넬은 뛰어난 엔지니어인 앨런 알콘(1948-) 등을 끌어들여 아타리(Atari)를 창업하였습니다. 아타리는 바둑용어 '단수(單手)'의 일본식 용어로, 바둑팬이기도 했던 부슈넬이 직접 지은 이름이라는군요. 그 부슈넬이 알콘을 부추겨(큰 계약건이라고 구라(?)를 쳤다고 함) 1972년 말 2인용 탁구 게임을 개발하였으니 그 이름은 <(Pong)>입니다.


 - 아직 시작 단계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 부슈넬은 일단 자신과 친분이 있던 어느 선술집에 기기를 설치하고 운영해보기로 합니다. 그런데 며칠 후 선술집 사장이 "기기가 고장났다"고 알려와서 달려갔더니, 기기가 고장난 게 아니라 동전이 가득 들어차 동전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ㅡㅡ; 이에 확신을 얻은 부슈넬 일당(?)은 이 게임기를 대량생산하여 팔기 시작했고, 공전절후의 히트를 쳤습니다.


[퐁]


 - 이 게임기는 동전을 넣고 플레이하는 형태였고, 그래서 비슷한 형태의 게임기(하지만 비디오게임은 아닌)를 운영하던 '아케이드(오락실)'에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퐁>의 성공에 자극받아 이후 수많은 게임기들이 나왔고, 핀볼 등 컴퓨터 없는 게임기들이 있던 아케이드는 머지않아 비디오게임 일색으로 변신하였습니다. 1975년에는 <퐁>을 가정용 게임기로도 출시하여 역시 대히트를 쳤습니다.


 - 그런데 성공가도를 달리던 아타리와 부슈넬에게 느닷없이 태클이 날아왔으니, 마그나복스와 베어가 특허 위반으로 소송을 걸어왔습니다.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에 <퐁>과 비슷한 탁구(?) 게임이 있었고, 나중에 출시된 <퐁>이 자기들 게임을 베꼈다는 거죠. 이 소송전은 결국 아타리가 이들에게 돈을 주는 조건으로 합의하게 됩니다. 이후 이들은 특허 관련 소송으로 오디세이 게임기 판매 수익보다 더 큰 돈을 벌어들였다고 합니다. ㅡㅡ;



3. 1970년대 후반 : 게임 '산업'이 열리다


 - 오디세이와 <퐁>은 그 때까지 축적된 가능성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아타리 뿐만 아니라 미드웨이, 콜레코, 마텔 등 많은 기업들이 비디오게임에 돈을 투자하고, 들어오는 돈과 인력에 비례하여 게임 분야는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게 됩니다. 1976년에는 페어차일드 사에서 '채널 F'라는 가정용 게임기를 출시하였는데, 최초로 '프로그램'이 내장된 카트리지(흔히 말하는 게임팩)를 쓰는 게임기였습니다.


 - 한편 1977년에는 아타리에서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VCS), 통칭 '아타리 2600(이하 2600)'을 출시하였습니다(2600이란 당시 컴퓨터 해커 사이에서 상징성 있는 숫자인데, 아마 여기서 따온 명칭으로 추정). 8비트급 CPU에 128바이트 RAM을 장착한 위엄 넘치는 물건이었던 2600은 처음에는 흥행이 시원찮았지만, 이후 급성장하여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석권하기에 이릅니다.


[(左)아타리 2600, (右)2600용 게임 <핏폴> 플레이 화면]


 - 이렇게 게임들이 잇따라 흥행하고 대자본이 몰려들면서, 비디오게임은 단숨에 거액을 벌어들이는 '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는 당연히 더 많은 자본과 더 많은 인력을 끌어모았고, 시장은 끝없이 커져갔습니다(다만 이것은 거품이었다는 것이 몇 년 후에 밝혀집니다). 1977년에 출시되어 개인용 컴퓨터(PC) 시대를 개막한 애플 II 또한 게임 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당연히 PC에서도 게임을 만들고, 플레이할 수 있었으니까요.


 - 미국에서의 열기는 다른 지역으로도 번졌고, 특히 당시 전자산업의 총아로 떠오른 일본에서는 타이토, 닌텐도, 남코 등 많은 기업이 게임 산업에 뛰어들었습니다. 1978년에는 타이토에서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출시하면서, 일본은 미국에 버금가는 게임 대국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일본 내에서 이 게임의 인기는 엄청나서 일본 내에 동전 품귀현상이 발생하고, 동전 수거를 크레인 달린 트럭으로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ㅡㅡ;


 - 이렇게 시장이 급성장하는데, 정작 시장의 선두주자인 아타리는 그에 걸맞는 투자를 받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고민 끝에 부슈넬은 자본이 충분한 대기업의 밑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 1976년 회사를 워너브라더스에 2800만 달러에 매각하고 그 산하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재앙의 씨앗이 될 줄은, 당시로서는 아무도 몰랐겠지요.



4. 아타리 쇼크 : 초고대문명의 멸망


 - 문제는 워너와 아타리의 분위기 차이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아타리는 설립자인 부슈넬부터가 히피 출신이었고, 히피 아니면 오타쿠(?)가 모인 기업이다보니 회사 내에서 대마초를 피우면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다니는, 심히 화기애매(?)한 가축적(?)인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ㅡㅡ; (당시 아타리의 직원 중에는 히피짓을 하던 때의 스티브 잡스도 있었다고) 당연히 이런 분위기를 새 주인이 된 워너가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 결국 2600의 초기 판매부진을 빌미로, 워너는 1978년 부슈넬을 해고하고 레이 카사르(1928-)를 새로운 CEO로 앉혔습니다. 이 양반은 나름 베테랑 경영인이라 회사의 급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2600 버전으로 출시하는 등의 노력으로, 초기 판매가 부진하던 2600을 시장의 1인자로 올려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카사르는 게임 개발자들의 성향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회사의 영광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새기지 못하게 하는 방침에 불만을 품고, 아타리의 한 개발자는 1979년 말 출시된 <어드벤처>라는 게임에 '특정 방식으로 플레이하면' 자기 이름이 나오도록 몰래 만들어 넣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이스터 에그'의 시초]


 - 아타리의 분위기는 기껏 개발한 게임이 대히트를 쳐도 보너스는 커녕 크레딧에 개발자 이름 넣는 것 하나 허용되지 않을 만큼 경직되어 버렸고, 이전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익숙한 개발자들은 크게 반발하였습니다(항의하러 찾아간 개발자들에게 카사르가 '타월 디자이너' 운운하며 엿을 날렸다는 일화는 유명).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한 개발자들은 하나 둘 회사를 떠나갔고, 이들은 대부분 액티비전과 일렉트로닉 아츠(EA)에 모여 '서드파티'라는 개념의 게임회사를 만들었습니다(설명은 후술).


 - 유능한 개발자들이 사라진 아타리는 저질 게임을 양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들 뿐만 아니라, 1980년을 전후하여 나온 게임들은 몇몇 명작을 제외하면 대부분 양에 비해 질이 크게 떨어졌고, 심지어는 그 조악한 그래픽에도 불구하고 19금 포르노 게임들이 마구잡이로 출시되기까지 했습니다(2600용으로 나온 포르노 게임을 '아타리 포르노'라 부르기도 합니다). 시장은 초 호황이었지만, 밑둥부터 썩어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 거기에 1980년 전후 벌어진 2차 오일쇼크로 경제불황이 찾아오자 그동안 잔뜩 끼어 있던 거품이 꺼지기 시작합니다. 게임계의 최전성기라던 1982년, 아타리는 4분기 실적 예측을 이전보다 낮춰 잡았고 이는 곧바로 워너를 비롯한 게임회사들의 주가 폭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때부터 본격화된 시장의 축소에 위기의식을 느낀 아타리와 워너는 부랴부랴 스티븐 스필버그와 계약, 당시 최고의 영화 <E.T.>를 게임으로 만들어 출시하는데......


[AVGN의 <E.T.> 리뷰. AVGN 영상의 특성상 온갖 욕설이 난무하니 주의]


 - 이런 걸 게임이라고 내놨습니다. ㅡㅡ; 애초에 개발자들에게 주어진 개발 시간은 단 5주. 좋은 게임이 나올리가. ㅡㅡ;; 오죽하면 그 카사르마저도 "이건 무리"라고 반대했다지만, 워너 경영진은 달랑 저 시간을 주고서는 개발을 강요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날림으로 나온 게임의 운명이란 뻔했습니다. FXck!! 재고가 엄청나게 남았고, 아타리는 남은 카트리지를 모두 애리조나의 사막 한가운데 묻어버리는 위엄 넘치는 짓을 하였습니다. ㅡㅡ;;;


 - 결국 거품으로 간신히 유지되었던 게임 시장은 이 한 방을 맞고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다음 해인 1983년에는 판매량에서는 선전했지만, 이는 가격을 거의 1/10까지 떨어뜨리는 무시무시한 덤핑의 결과물로 회사들이 거두는 수익은 크게 줄었습니다. 결국 이를 버티다 못한 대기업들은 잇따라 게임 시장에서 철수해버렸고, 거기에 빌붙어 게임을 만들던 중소 개발사들은 대부분 파산, 액티비전과 EA 등 PC 게임으로 갈아탄 극소수 회사만 살아남았습니다.


[미국 비디오게임 시장 규모를 나타낸 그래프. 출처]


 - 그리고 아타리는 1982년 말 2600의 후속작으로 아타리 5200을 출시하지만 폭망했고(컨트롤러의 감도가 개판이었다고 합니다), 적자가 계속되자 결국 워너마저 아타리를 매각하고 게임 시장에서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비디오게임 시장 자체가 붕괴했고, 특히 가정용 게임 시장은 1985년 무렵에는 전성기(그래봤자 1982년)의 2%까지 쪼그라들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비디오게임 산업은 한때의 광풍으로 끝났습니다. 아니, 끝난 줄 알았습니다. (계속)



###게임회사 분류에 관한 보충설명###

 1) 퍼스트 파티 : 게임기 제조사가 직접 만든 게임. 당연히 게임기 제조사 이름으로 출시됩니다. (ex. 슈퍼마리오 시리즈)

 2) 세컨드 파티 : 게임기 제조사가 자회사나 다른 게임 개발사에 하청을 주어 만든 게임. 시장에 나올 때는 게임기 제조사의 이름으로 출시됩니다. 말 그대로 하청.

 3) 서드 파티 : 게임기 제조사와 무관한 게임 개발사가 그 게임기에서 돌아가도록 자체적으로 만든 게임. 게임 개발사의 이름을 붙여 출시됩니다. 다만 게임기 제조사에서 '이 게임기용으로 게임을 출시해도 좋다'는 라이센스를 게임 개발사에 걸어놓을 수는 있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싫다(딴지라디오)> 中 42. "기본교양 게임사의 잉해" / 43. "기본교양 콘솔사의 잉해"

http://www.gamemeca.com/feature/view.php?gid=503754 (놀런 부슈넬과 아타리의 일대기)

http://thisisgame.com/webzine/series/nboard/212/?series=113&n=57382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http://vgsales.wikia.com/wiki/Video_game_industry (게임 시장 관련 데이터)

Google 도서 검색 (1) (2)



 -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은 한국인에게 정치에 대한 권한을 거의 주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하죠. 그나마 제2차 세계대전 후반이 되어서야 조금씩 문을 열어주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수작이었고, 그나마 제대로 실현되기도 전에 끝납니다. 그런데 굳게 닫힌 문을 뚫고 일본 의회에 입성한 한국인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박춘금(1891-1973)입니다. 그가 어떻게 그런 기적적인 출세를 할 수 있었는지, 그의 일생을 살펴보겠습니다.


[박춘금]



1. 물 건너간 조폭, 정치에 맛들이다


 - 박춘금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습니다. 빈민층이라 학력이랄 건 딱히 없었고, 동네 서당에서 천자문 정도를 배운 게 학업의 전부였다고 합니다. 나이 14세 때 러일전쟁이 터지자 한반도 전체는 사실상 일본군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고, 박춘금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대구에 주둔한 일본군 밑으로 들어가 급사(심부름꾼)로 일했습니다. 여기서 일하면서 일본어를 익힌 그는 1907년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 광부 등 육체노동을 전전하게 됩니다.


 - 그런데 이 사람은 폭력배 기질을 타고났는지, 이후 폭력조직에 몸담고 나고야에서 조선인회장에 취임하는 등 거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무렵 박춘금은 그의 인생 길을 활짝 열어 줄 인연을 얻게 되는데, 극우 사상가인 도야마 미츠루(1855-1944)와 교류하게 된 것입니다. 도야마는 사상가이면서 동시에 비밀결사(사실상 폭력조직) 흑룡희의 막후 실세이기도 했으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일본 극우파의 기틀을 잡은 인물로도 평가됩니다.


[도야마 미츠루. 그가 배후조종한 폭력집단은 이후 현대 야쿠자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 그와 교류하면서부터 박춘금은 본격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1920년에는 이기동(1885-1952) 등과 함께 도쿄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을 규합한 상구회(相救會, 이후 상애회(相愛會)로 개편)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하는데, 이는 겉으로는 사회사업 단체였지만 실제로는 폭력조직이었습니다. 이 단체는 한국인 노동자를 위한 다양한 사업을 벌였지만, 뒤에서는 일본인 자본가를 도와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폭력과 착취에 앞장섰습니다.


 - 1923년 관동대지진에 이어 대규모의 한국인 학살이 벌어지자 상애회는 시체 처리와 한국인 색출(!!) 등 일본 당국에 적극 협력하였고(이들이 한국인임을 잊지 맙시다), 이후 당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박춘금은 상애회 조직을 일본 전역으로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1924년에는 한국에도 지부 개념으로 '노동상애회'를 조직한 후 친일조직인 '각파유지연맹'에 동참하였습니다.


 - 이를 두고 동아일보에서 사설을 통해 극딜을 퍼부었는데, 이에 박춘금은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를 요정(요릿집)으로 초대한 후 납치, 폭행 및 협박하는 위엄 넘치는 테러행위로 보답했습니다. ㅡㅡ; (이후 이 사건의 전말을 놓고 동아일보에서 난리가 나게 됩니다. 여기서는 생략) 이후 노동상애회는 일본에서 하던 짓 그대로, 하의도 소작쟁의 등 한국인의 저항운동을 폭력으로 억압하는 데 협력을 아끼지 않게 됩니다.



2. 정치깡패, 제국의회 입성!


 - 박춘금을 '정치깡패'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조직 활동이 철저히 정치적이었으며 일본 정계에도 폭넓은 인맥을 만드는 등 정치와 밀착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박춘금과 상애회의 맹활약이 일본의 지배층을 꺼뻑 죽게 만들기에 충분했는지, 그는 본격적으로 일본 정계에 합류하였고 1932년 중의원 선거에서 도쿄 제4구에 입후보, 당선되기에 이릅니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한국인 중의원이었습니다.


[당선 확정 후 환호하는 박춘금과 지지자들]


 - 이후 박춘금은 제국의회 중의원으로 4년간 활동하다가 1936년 선거에서는 낙선했지만, 절치부심(?)하여 1940년과 1942년 선거에서는 다시 당선되었습니다. 중의원 내에서 그가 목소리를 낸 것은 주로 조선인 참정권이나 조선 내 일본군 증원과 같은, '한국에 대한 차별 완화' 쪽이었습니다(이에 대한 비판은 앞 글들에서 많이 언급했으니 생략).


 - 그러니까 그는 제국의회 내 유일한 한국인으로 (딴에는) 한국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자임한 셈인데, 실상 이것은 한국을 일본에 완전히 편입시키는, 독립운동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제국의회 내에서 유일한 한국인이다보니, 박춘금의 활동과 발언들은 다른 중의원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화제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 나름 사회지도층이라는 국회의원이 됐으니 예전처럼 대놓고 깡패질은 못 할 테고, 대신 그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광산 경영 등 이권사업에 손을 대며 자신의 뱃속을 실컷 채워나갔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 말부터 일본이 전쟁체제에 들어가자, 그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시국강연을 여는 등 군국주의의 충실한 스피커 노릇을 다하게 됩니다. "학도병이 사오천 명쯤 죽어서 2500만 민중이 잘 된다면 더 좋을 게 없지 않은가" 따위의 망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 1945년 초 박춘금은 친일단체 '대화동맹(大和同盟)'의 이사에 취임하고, 얼마 뒤에는 또 다른 친일단체 '대의당'을 조직하였습니다. 해방 직전인 7월 24일 대의당이 주최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에서 조문기(1927-2008), 강윤국(1926-2009), 유만수(1923-1975)가 설치한 폭탄이 터지며 회의장이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는 일제강점기 마지막 항일 사건으로 '부민관 폭탄 의거'라 불립니다.


[사건이 발생한 경성부민관(現 서울시의회 건물)]


 - 이 사건을 전후하여 총독부에서는 반일인사 30만여 명을 체포, 학살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박춘금은 데인 게 있으니까 여기에 적극 동조하였습니다. 부민관 사건을 계기로 8월 8일부터 반일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시작되었고, 이들의 운명은 경각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데......



3. 해방 이후


 - 일주일 후에 덜컥 해방이 되었고, 체포당한 인사들이 일제히 풀려났습니다. 이 와중에 박춘금은 잽싸게 우디르 태세를 전환하여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거액을 헌납하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히 "ㅗ" 뿐이었습니다. ㅡㅡ; 한국의 분위기가 자신에게 좋을 게 없다는 것을 눈치챈 박춘금은 곧바로 일본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를 가만 놓아 줄 이유가 없지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발족한 반민특위는 해외로 도피한 친일분자들도 가만 놔둘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을 지배하던 GHQ와 맥아더에게 박춘금을 송환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반민특위는 얼마 뒤 와해되었고, 박춘금은 한국으로 끌려가는 일 없이 일본에 그대로 눌러앉게 됩니다.


[박춘금의 일시 귀국을 다룬 기사. 1962년 5월 27일 경향신문]


 - 이후 그는 일본에서 재일교포 유지 노릇을 하며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통칭 민단) 창설에 관여하여 고문을 맡기도 했고, 조국통일촉진협의회니 일한문화협회니 하는 사회단체를 조직하는 등 정치적 활동도 놓지 않았습니다. 1962년에는 아세아상사 사장으로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 돌연 한국을 방문하여 며칠간 고향(밀양)에 체류하였는데, 한일회담 문제로 시끄럽던 시기라 악질 친일파인 그의 방문이 큰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 이후 1973년 사망하였고, 그의 유해는 조용히 한국으로 돌아와 고향의 아버지 묘소 곁에 묻혔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마무리......될 줄 알았는데, 1992년 일한문화협회에서 그의 무덤에 송덕비(!!!!)를 건립하면서 박춘금의 이름이 다시 세간에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고향 밀양을 비롯한 각지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쇄도했고, 결국 2002년 송덕비는 철거, 그의 무덤은 파묘하기에 이릅니다.


[박춘금의 무덤과 송덕비 앞에서 벌어진 항의 시위]



4. 정리 : 정치깡패는 답이 없다


 - 블로거의 생각에, 그의 일생을 정리하려면 '친일파'보다는 '정치깡패'에 중점을 두는 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의 삶은 이후 등장하는 모든 정치깡패들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박춘금은 자신이 가진 힘을 가지고 기득권층을 위하여 피지배민을 착취하고 억압하였고, 나아가서는 이 활약(?) 바탕으로 자기 자신이 기득권의 일원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 그에게 있어서 '한국인'이라는 타이틀은, 자신의 출세를 위한 도구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일본 정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을 탄압하는 한국인'으로써 일본의 식민 지배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니까요. 이를 좀 스케일 크게 벌임으로써 일본인 부럽지 않은 권력자까지 될 수 있었던 셈인데, 그런 그가 해방 후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고향을 찾았던 것이 또 웃기는 노릇입니다.


 - 박춘금이 몸담았던 일본의 암흑세계는 이후 야쿠자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일본의 큰 사회문제로 각종 이권사업과 정치에 관여하며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특히 시작이 그랬던지라 이들은 일본 우익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해방(일본 입장에서는 패전) 이후 일본의 좌익·노동운동에 대한 탄압과 테러에도 앞장서게 됩니다. 이 야쿠자 조직에는 많은 수의 재일교포가 참여해 왔습니다(이들에 대한 차별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성장하기 어려웠기 때문).


[민단 중앙본부가 위치한 도쿄 한국중앙회관]

 - 박춘금은 해방 이후 재일교포 사회에도 그림자를 남깁니다. 남북분단 이후 재일교포 사회 역시 조총련(좌익, 친북)과 민단(우익, 친남)으로 갈라졌는데, 우익 측 민단에는 박춘금 등 정치깡패 출신자들과 현직 야쿠자까지 대거 참여하여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야쿠자 중요 인물인 양원석(야나가와 지로, 1923-1991)의 경우 민단에서 야쿠자를 몰아내려 노력하던 지부장 김용환을 대놓고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 이들이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 때문에' 폭력배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들의 폭력 자체가 정당화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더구나 그 폭력을 그 차별의 주체인 강자를 위하여, 약자를 향하여 발산했다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들 뿐 아니라, 세계 대부분 지역의 폭력집단이 공통적으로 가진 성향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느 사회에서든지 조직폭력배는 척결해야 할 암덩어리 이상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협객? 의리? 그딴 거 없습니다. 정말로.]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27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www.idomin.com/?mod=news&act=articleView&idxno=483121 (경남도민일보 특집기사)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iBzz&fldid=EnMW&datanum=30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3151 (흑룡회 관련)

https://www.minjok.or.kr/archives/76257 (동아일보 사주 폭행사건)



 - 지금까지 다루었던 많은 인물들은, 대부분 당대 최고수준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지식과 경륜을 갖고 있었으며, 이를 자신의 영달을 위해, 혹은 비뚤어진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왜곡하고 악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악질 친일파로 비판받는 자들 중에는 진심으로 일본의 침략이 한국에 좋을 것으로 믿었던 순진한, 아니 멍청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동학 지도자 중 하나였더 이용구(1868-1912)의 일생이 좋은 표본이 될 것입니다.


[그의 위엄 돋는 콧수염을 보라!]



1. 동학군의 행동대장 이상옥


 - 이용구는 1868년 경상도 상주에서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로 근근이 생계를 잇다가 19세 때는 청주로, 20세 때는 충주로 옮겨 살았습니다. 초명은 우필(愚弼)이었고, 뒤에는 상옥(祥玉), 만식(萬植)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합니다.


 - 가난한 농민으로 자라난 그의 인생은 나이 23세 때, 1890년경 동학에 입교하면서 크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동학 입교 후 그는 당시 동학 교주 최시형(1827-1898)의 밑에서 수학(修學)할 기회를 얻었고, 훗날 3대 교주가 되는 손병희 등과 함께 최시형의 고족제자(高足弟子. 학식, 품행 등이 뛰어난 제자)로 동학의 중요 인물이 되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터질 무렵, 이용구는 호서지방(충청도)을 중심으로 한 북접의 중심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남접과 북접의 세력권. 화살표는 1차 봉기 때의 진로]


 - 북접은 전라도 쪽 남접에 비하여 온건한 성향이었고, 1차 봉기 때는 아예 농민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북접 쪽에 있었던 최시형은 현실정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둘 것을 원했고, 그래서 정치성이 강한 남접의 봉기를 지지하지 않았음). 하지만 1차 봉기의 여파로 청군과 일본군이 들어오고, 특히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남접 쪽에서 2차 봉기가 터졌습니다.


 - 이 때도 최시형, 이용구 등 북접의 지도부는 정부와의 타협을 주장하였지만, 남접군이 파죽지세로 정부군을 격파하자 마침내 동학군에 참여하기로 합니다. 손병희와 이용구(당시 이름은 이상옥) 등이 이끄는 북접군은 전라도에서 올라온 남접군과 합류하고, 충청도의 중심지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였습니다. 이용구, 아니 이상옥은 충주와 청주 일대에서 정부군·일본군을 격파하고, 이후 공주로 진격하는 손병희 군대의 우익부대를 이끌었습니다.


[우금치에 있는 동학농민군 위령탑]


 - 하지만 공주 근처 우금치에서 동학의 주력군은 일본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고 참패하였으며, 다른 전선에서도 잇따라 밀리며 동학군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용구의 부대는 논산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섬멸되고, 이용구는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로 간신히 포위를 뚫고 충주로 도망쳐 몸을 숨겼습니다.



2. 일본 물 먹고 오더니 좀 이상해졌다


 - 이후 이용구는 수년간 가족을 데리고 피난 생활을 해야 했는데, 먼저 그의 아내가 체포되어 수감된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이용구 역시 1898년 체포당하기에 이릅니다. 얼마 뒤 최시형도 체포되었고, 최시형은 결국 처형당했는데 이용구는 어찌어찌하여 죽지 않고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 한편 최시형 사후 3대 교주가 된 인물이 바로 손병희였는데, 그는 계속 탄압이 이어지는 국내에서는 더 이상 동학의 포교와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세계 돌아가는 정세도 익힐 겸) 등 몇몇 지도자들과 함께 1901년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이용구 역시 손병희를 따라 일본으로 향하게 됩니다.


 -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이용구는 얼마 뒤 손병희의 지시를 받고 먼저 귀국, 지하에서 포교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돌아온 이용구의 행보가 어딘가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할 무렵 이용구는 국내의 동학교도를 규합하여 '진보회'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진보회는 송병준(1857-1925) 등이 이끌던 듣보잡 단체에 흡수통합되었는데, 그 단체의 이름은 일진회(一進會).


[일진회 회원들의 단체사진. 1908년]


 - 비록 진보회가 흡수당하는 형태였지만, 인원은 진보회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일진회는 단숨에 거대 조직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습니다. 통합 일진회의 지도자로 떠오른 이용구는 러일전쟁 중 일본 지지를 선언하고,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습니다. 일진회는 회원 수천 명을 동원하여 경의선 철도 건설(본래 대한제국 정부에서 지으려고 하였으나, 만주 쪽으로 가려는 일본에게 선수를 빼앗김)에 노역을 하도록 했습니다.


 - 당연히 일본에 있던 손병희는 이용구의 이러한 행보를 보고 경악하였고(동학이 원래 극렬 반외세 성향임을 생각합시다), 이용구의 행보를 적극 제지하려 하였지만 이용구가 이를 들을 턱이 없었습니다. 결국 일진회가 을사조약 지지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을 계기로, 손병희는 직접 귀국하여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하였으며 이용구와 그를 따르던 62명의 신자를 제명하였습니다.


 - 이에 이용구는 깨갱......할 리가 있나요. 제명당한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시천교(侍天敎)라는 신흥종교를 만들고, 자신이 교주가 되어버렸습니다. ㅡㅡ; 물론 출신이 출신인지라 시천교는 실제로는 동학과 별 차이가 없었으며, 두 종교가 양립한 상황에서 정치적 이유 등으로 서로간에 전향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ㅡㅡ;



3.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


 - 이후 이용구는 정식으로 회장 자리에 올라 일진회를 이끌었는데, 실제로는 우치다 료헤이(1874-1937) 등 일본인 고문들이 단체를 배후조종하고 있었습니다. 통감부 설치 이후 사실상 통감부 산하의 어용조직처럼 되어버린 일진회는 이후 일본 침략의 앞잡이로 맹활약(?)했는데, 두드러진 분야는 성명문, 유세, 강연 등 친일 여론을 조장하는 프로파간다 활동이었습니다.


[1907년 일본의 요시히토 황태자(훗날의 다이쇼 덴노)의 한국 방문 때 일진회가 세운 환영 아치]


 - 당연히 일진회의 행보는 모두의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했고, 특히 이 시기 대대적으로 일어난 항일 의병은 너나할 것 없이 일진회 회원들을 우선 타겟으로 삼아 공격하였습니다. 1907~1908년 사이 1년여간 의병의 공격으로 사살된 일진회 회원만 9천여 명에 달했다고. ㅡㅡ;


 - 물론 이미 일본에 먹히다시피 한 일진회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급기야 1909년 말부터는 소위 '합방청원서'를 잇따라 발표하며 한국-일본 간 병합을 청원(!!!)하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습니다. 일진회에 대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고, 일진회 내부에서도 탈퇴자가 속출할 만큼 많은 반발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정부 내에서도 일진회 수괴인 송병준과 이용구를 처형하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 여기저기서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송병준과 이용구는 몸을 피하여 일본 군경의 비호를 받아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 와중에도 일진회 산하 조직들을 동원하여 합방청원을 지지하도록 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 무렵 일진회는 '100만 회원'을 자처하고 있었지만, 실제 회원은 기껏해야 10만 명 미만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심지어는 4천 명 남짓에 불과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경찰추산 vs. 주최측추산? 


[송병준과 이용구가 사이좋(?)게 찍은 사진. 우측이 이용구]


 - 당시 이용구를 비롯한 일진회 지도부는 일본 총리 가쓰라 타로(1848-1913)에게 '합방 청원운동 비용과 합방 후 간도 이주비용'으로 야반도주? 300만 엔(현재 환율로 1000억 원을 넘습니다)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가쓰라는 "300만이 아니라 3000만 엔이라도 지원해줄 것"이라 약속하였습니다. 하지만 1910년 8월 마침내 한일병합이 실현된 이후, 일진회에 대한 일본의 대답은 "ㅗ"였습니다. ㅡㅡ;


 - 병합 직후 일본 당국은 모든 한국인 단체를 강제해산하였고, 거기에는 일진회 등 친일단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해체와 함께 일진회에 지급된 보상금은 300만은 커녕 고작 15만 엔에 불과했으며, 10만 회원이라 치면 1인당 1.5엔에 불과한 ㅡㅡ;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에 심한 충격을 받은 이용구는 결국 몸져누웠고, 그 길로 병세가 악화되어 1912년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4. 도대체 왜 그랬을까 : 그는 순진, 아니 멍청했다


 - 이용구는 죽기 얼마 전 문병을 온 우치다에게 "우리는 참 멍청한 짓을 했어요. 어쩌면 처음부터 속았던 건 아닐까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스스로 '속았다'고 생각했던 건 물론 일진회의 협력에 뒤통수를 날린 일본의 행동이 일차적인 이유였겠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보기는 어려운 속사정도 있습니다.


 - 흥미롭게도 이용구는 당시 일본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아시아주의(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인종이 단결하여 백인 세력에 맞서자는, 일종의 동아시아판 인종주의)'를 진심으로 신봉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처음 우치다를 만났을 때 이용구가 제시한 한일병합의 형태는 일본의 식민지가 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도 유사한 '이중제국'의 형태였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일종의 '동군연합'으로, 헝가리는 국방, 재정, 외교를 제외한 분야에서 자치권을 보유]


 - 즉 일본의 덴노가 전체를 다스리는 공동의 황제이되, 한국과 일본은 독자성을 유지하고 서로간에 평등한 병합을 하자는 이야기. 물론 이 말을 들은 우치다 등의 일본인들은 겉으로는 이에 적극 동감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 병합은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한국이 일본의 일개 식민지로 전락하는 형태였습니다. 애초에 아시아주의 자체가 이 무렵에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옹호하는 논리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 병합 직후 일진회가 별 대가도 받지 못하고 해체당하는 모습을 겪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이 그동안 속아서 살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고, 전국민에게 매국노 소리를 들어가며 벌였던 자신의 활동이 모두 헛짓거리였다는 것을 절감한 이용구는 말 그대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차는 떠나갔는데요.



5. 정리 : 우리가 멍청해서는 안 되는 이유


 - 이용구는 분명 대단한 역량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별 볼 일 없는 농민이 거대한 집단의 지도자가 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하지만 그는 그에 걸맞는 통찰력을 갖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이미 일본 내에서도 변질되어버린 아시아주의를,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으며 그 이상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중제국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가 나올 수밖에요.


 - 이 정도의 지도력을 갖추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갖춘 사람이 이렇게 멍청해 놓으면, 당연히 사회 전체가 피해를 보게 됩니다. 이용구 자신이 어떻게 생각했든 그와 그가 이끄는 일진회의 활동은 일본의 한국 침략에 말 그대로 길을 닦아주는 꼴이었으며, 그들은 만고의 매국노로 역사에 영원히 기록을 남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 물론 그 멍청함이란 이용구에게 어떠한 변명도 되지 못합니다. 그의 이상은 이미 뜬구름 잡는 구시대의 유물이나 마찬가지였고, 일본의 침략으로 이미 한국인들이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었음에도 그는 일본의 침략에 협력하는 짓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정말 몰라서 그랬든, 아니면 알고도 그랬든간에 그의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은 어디까지나 이용구 자신에게 있습니다.


 - 이러니 그가 나중에 "내가 속았다"라고 아무리 울분을 토한들 소용이 없지요. 우리는 그를 한심하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불쌍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그가 속은 게 맞다 치더라도, 그것은 누군가에게 속은 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인'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일생에 대하여 '멍청함으로 만고에 죄를 지은 매국노'라는 평가를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가 속았다고 해서, 여기에 그의 이름이 빠질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tangchil.egloos.com/958648

http://blog.ohmynews.com/jeongwh59/tag/%EC%9D%B4%EC%9A%A9%EA%B5%AC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9&cp_code=cp0530&index_id=cp05300109&content_id=cp053001090001&search_left_menu=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45/read/22293702 (이용구의 이중제국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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