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The Marriage of Figaro> Overture

연주 : 한양대학교 하나클랑 (2005 정기연주회), 서강대학교 ACES (2014 봄 연주회)


 - 피에르 보마르셰(1732-1799)의 '피가로 3부작' 중 <피가로의 결혼>을 오페라로 만든 것. '피가로 3부작'은 귀족에 대한 높은 수위의 조롱 때문에 당시 비엔나에서는 상연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모차르트는 로렌초 다 폰테(1749-1838)와의 작업을 통하여 '민감한 부분을 충분히 수정하였음'을 주장하여 요제프 2세 국왕에게 상연허가를 얻어냅니다. 자신의 약혼자에게 '초야권'을 행사하려는 귀족에 맞서는 이발사 피가로의 지혜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3부작 중 다른 작품인 <세빌리아의 이발사> 역시 로시니 등에 의해 오페라로 만들어진 바 있습니다. 이 서곡을 모차르트는 '가능한 한 빠르게' 연주할 것을 주문했다고 하는군요.


[후기] 미친듯이 빠릅니다. 9년의 텀을 두고 연주를 해도 손 꼬이는 건 어찌할 수가 없네요.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Divertimento in D (K.136)

연주 : 한양대학교 하나클랑 (2005 앙상블의 밤)


 - '디베르티멘토(Divertimento)'는 고전 시대에 유행한 양식으로, '즐겁게 하다'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Divertire가 어원이라고 합니다. 그 의미에 맞게 대체로 밝고 가벼운 분위기를 가진, 상당히 다양한 형태를 띤 자유로운 형식의 기악곡입니다. 당시에는 대체로 귀족이나 상류층의 여가에 배경음악으로 연주되기도 했습니다. 모차르트 또한 많은 수의 곡을 썼으며 몇몇 곡은 지금까지도 자주 연주됩니다. K.136은 현악 4부로 편성되어 있으며, 악단의 규모에 대하여는 딱히 정해진 것이 없어서 현악사중주로도, 현악오케스트라로도 연주될 수 있습니다.


[후기] 이 곡 또한 첼로는 딱히 어려울 것 없음. 다만 중간에 피치카토로 바뀌는 부분이 한둘 있는데 아무 것도 배운 것 없는 블로거는 당시엔 피치카토 하나 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워했던 기억이 남아 있군요. 지금은 옛날엔 그랬지 하며 웃어 넘깁니다.





George Frederic Handel (1685-1759)

Concerto Grosso in G (Op.6 No.1)

연주 : 한양대학교 하나클랑 (2005 앙상블의 밤)


 - '합주 협주곡(Concerto Grosso)'이란 협주곡 양식의 하나로, 독주자가 아닌 몇 명의 주자로 구성된 '콘체르티노'가 협주를 담당하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바로크 시대 전후에 인기를 끌었고, 이 당시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헨델은 30여 곡의 합주 협주곡을 만들었는데, 이 중 Op.6 에 포함된 12곡이 유명합니다. 이 곡은 그 중 첫 곡으로, 5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후기] 블로거의 첫 연주곡. 악기 처음 들고 간 날 얼떨결에 합주에 끼어 연주를 했던 것만 기억에 남습니다. 그나마 바로크 곡들은 첼로가 비교적 단순한 경우가 많아서(물론 어려운 경우는 어렵지만), 지판에 붙여놓은 테이프로 어찌어찌 따라간 정도. 그래도 바로크는 연주할 때 독특한 매력이 있죠.



대항해시대 2 : 알 베자스 - (3) 인생의 목적


 - 오늘도 열심히 장사삼매경에 빠져있던 알은 어느 날 좀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명성 40000)



 - 만나는 사람들마다 오스만 제국이 벌이는 전쟁으로 삶이 어려워졌다며 원망합니다. 항구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라......



 - 술집에서도 마찬가지. 알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합니다. 그동안 정신없이 돈벌이에만 몰두해왔지만, 자신이 번 돈으로 오스만 제국을 돕는 것이 정작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일 수도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황제가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번민의 와중에 알이 바스라의 주점에 들르자......



 - 드디어 알을 마음으로 인정하게 된 사파. 그런데 어째 사파의 곁에 남자아이 한 명이 있습니다. 설마 아들?



 - ......은 아니고, 부모가 반전운동가전쟁에 반대한 죄로 처형당하여 고아가 되었다고 하네요. 깊은 감명을 받은 알은, 이 기회에 이스탄불에 커다란 고아원을 만들어 전쟁고아들을 돌보기로 마음먹습니다. 바로 이스탄불로 돌아가서 라디아를 만납니다.



  - 알과 사파를 금새 알아보는 라디아. 내란음모계획을 말하는 알에게 라디아는 이스탄불 한켠에 있는 비어 있는 저택 한 곳을 언급합니다. 갈 때마다 문이 잠겨 있는 그 저택은 알고보니 셜록은행장이 채무자에게서 압류한 부동산인 모양. 아무래도 셜록은행장과 쇼부(?)를 쳐 봐야 할 듯하니 앞뒤 따질 것 없이 베네치아로 갑니다. 이러저러하니 그 저택을 팔라고 요구하는 알에게 셜록은......



 - 셜록 개X끼 해봐 엄청난 거액을 요구합니다! 금액은 정확이 알이 들고 있는 현금 + 금괴 500개. 하지만 자신의 진정한 삶의 목표를 찾은 알은 기꺼이 그 돈을 지불하기로 약속합니다. 이제 다른 거 없습니다. 닥치는대로 돈을 법니다. 뭐 지금까지 해놓은 것이 있으니, 조금 노가다스러울 뿐 돈은 금새 벌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show me the money를 시전한 이후 셜록에게 돈을 들이밀면



 - 돌연 태도가 돌변하여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 알고보니 셜록의 요구는 알의 의지를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던 모양. 저택을 공짜로 주겠다고 선언한 셜록은, 알에게 인생의 목적을 찾은 것 같다며 부러워하고 고아들을 돌보며 잘먹고 잘살라(?)는 덕담을 날립니다.



 - 이제 이스탄불로 돌아가서 엔딩을 볼 일만 남았습니다. 이스탄불의 주점에 가서 라디아와 사파에게 결과를 보고하고, 집을 보러 갑니다. 그런데 알이 라디아에게 뭔가 할 말이 남은 것 같습니다.


 - 역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백은 어려운 겁니다. 그리고 그 서툰 프로포즈를 라디아는 인자(?)하게 받아들입니다.




대항해시대 2 : 알 베자스 - (2) 동생 찾아 삼만리


 - 알의 스토리는 꾸준히 투자를 하여 동맹항을 늘려주는 과정의 반복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다른 나라들과의 우호도가 낮아지고 나중이 되면 사략해적이 쫓아다니거나 항구에서 전재산의 절반을 빼앗기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 이런 알의 고충을 아는지 모르는지, 슐레이만 황제는 알에게 자신의 포부를 말하고 "기독교 국가들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항을 늘려달라"고 요구합니다.



 - 계속 투자질(?)을 하며 다니다 보면 교역명성이 어느새 5,000을 넘기게 될 겁니다.이 때 이스탄불의 주점에 가 보면, 라디아가 웬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질투의 화신으로 변신하지 않은 알은 열받은 자신을 진정시키며 그에게 자초지종을 들었고, 포르투갈 공작의 아들인 그가(누군지 아시겠죠? 조안 페레로입니다) 웬 여해적에게 뜬금없이 쫓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차저차하여 알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배에 조안의 깃발을 대신 달아 여해적을 유인해주기로 합니다.



 - 작전 대성공. 조안은 무사히 탈출했고 알 또한 자신을 보고 맥이 풀린 여해적 카탈리나를 말로 구워삶아 손쉽게 탈출에 성공합니다. 다시 장사하는 일상으로 돌아온 알, 얼마동안 놀면서 교역명성을 올리다보면 라디아에게서 여동생 사파의 행방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바스라의 주점에서 여급으로 일하고 있다는군요. 앞뒤 필요없이 바스라로 달려갑니다. 직선거리로는 가까운데 육지로는 건너갈 수 없으니 하릴없이 아프리카를 한 바퀴 빙 돌아서 찾아가야 합니다.



 - 드디어 바스라의 주점에 도착하면 사파를 만날 수 있습니다. 어릴 적에 헤어져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피는 못 속인다고 알은 한 눈에 사파임을 알아봅니다. 그런데 정작 사파는 알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군요. 주점에서 험하게 자라면서 이런저런 고생을 했을테니 그러려니 합니다(이 와중에 사파에게 반한 사람이 한 명 보이는데 알 옆의 자ㅎ......).



 - 일단 사파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무역과 투자질을 합니다. 도중에 잠시 이스탄불의 은행에 들르니 점원이 전출을 간다고 합니다. 처음에 은혜를 입은 것도 있으니 알의 배를 이용하기로.



 - 베네치아의 은행에 도착하면 셜록은행장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알의 성장한 모습을 보며 기뻐한 셜록은 알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는데, 피에트로가 빌려간 돈을 받아와달라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알 또한 피에트로에게 받아낼 돈이 있으니, 겸사겸사해서 의뢰를 받기로 합니다. 그런데 전 세계를 싸돌아다니는 모험가를 무슨 수로 찾지?



 - 이 때 사림이 간만에 좋은 생각을 해냅니다. 피에트로는 페레로 공작가의 후원을 받고 있으니, 그 쪽에 한 번 가보자는 이야기. 리스본의 페레로 공작 저택으로 찾아가서 이전 조안과의 일을 이야기하고, 피에트로가 지팡그(일본)로 갔을 거라는 공작 부인의 전언을 듣습니다. 멀리도 갔군요.



 -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빙빙 돌아서 드디어 일본 땅에 도착합니다. 나가사키에서 피에트로의 행방을 물으면, 이웃 사카이로 갔을 거라는 답이 날아옵니다. 참 사람 하나 찾기 쉽지 않네요.



 - 사카이에 가면 드디어 피에트로를 만날 수 있습니다. 피에트로는 알에게 빌린 돈을 갚고, 셜록에게 빌린 돈도 건네주는데 어째 금액이 쓸데없이 많아 보입니다.



 - 돈을 주면서 피에트로는 알에게 일본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전달해줍니다. '지팡그'는 당시 서양인들에게 황금의 나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당시 일본에서는 은은 대량으로 났을지언정 금이 나오진 않았죠. 아무튼 돌아가서 셜록은행장을 다시 만나면 피에트로가 갚은 빚을 전달해주게 되는데, 셜록은행장은 그 중 일부만 받아가고 남은 돈은 전부 알의 수중에 들어오게 됩니다. ㅡㅡ; 뭔가 삥땅 아닌 삥땅이 되었지만 넘어가기로......




 - 제주도는 마치 '여행자를 위한 신비의 장소'와도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블로거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주도편을 읽고 나서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언젠가 제주도는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죠(정작 여행을 갈 때 저 책을 들고 가지도 않았던 건 함정). 어떻게 기회가 닿아 제주도를 다녀올 수 있었고, 예상한 대로(?) 블로거는 제주도의 팬이 되었고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정도의 생각까지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 그런데 과연 제주도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끌어당기는가 하는 것이 분명치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여행자의 자유로움에서 나오는 막연한 동경심에 불과할 따름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제주도만이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일까요? 어쩌면 블로거에게는, 육지와는 다른 제주도의 역사, 그리고 이를 통하여 만들어진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매력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 제주도는 우선 독자적인 창조신화와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육지와는 그 뿌리가 다르다는 의미죠. 당장 한반도의 건국신화 중 난생(卵生)설화가 아닌 것은 (단군신화 정도를 제외하면) 탐라 건국신화밖엔 없습니다. 사실 제주도가 한반도의 일부가 된지 1천 년 가까이 지났다면 탐라 건국신화 역시 한반도의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가르칠 법도 한데, 2015년 현재까지 한국의 교과서는 탐라의 신화와 역사를 철저히 외면합니다. 어찌 보면, 이것이야말로 탐라 소멸 이후 제주도의 역사를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삼성혈 신화는 화산지형과 함께 해 온 탐라인들만의 문화코드)


 - 이후 한반도의 일원으로서 제주도가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폭력과 수난의 연속입니다. 제주도의 소유권은 고려, 몽골, 조선, 일본제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이어집니다만 제주도를 지배한 육지의 권력은 하나같이 제주도를 착취와 탄압의 대상으로 다루게 됩니다. 몽골과 고려 정부에 대항했던 삼별초, 제주도를 전쟁터로 만들었던 삼별초를 이후의 제주도 문화에서 비교적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이후 제주도는 몽골의 식민지가 되어 말 생산지로 변모하였으며, 이후 고려-조선 교체기에 발생한 '목호의 난'은 제주인이 아닌 몽골인 목호(牧胡)들이 벌인 반란입니다.


 - 조선시대 제주도는 본격적인 착취의 대상이 됩니다. 조선의 지배자들은 제주도의 말 목장을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거기에 덧붙여 제주도에서만 생산되는 감귤을 매우 먹고 싶어했죠. 제주인들은 목장의 말을 자신들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다루어야 했고, 운송 과정에서 썩을 경우에 대비하여 계획보다 훨씬 많은 감귤을 생산하여 진상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착취에 주민 이탈이 우려되자, 육지의 권력은 제주도민들에게 번듯한 선박을 생산하지 못하게 합니다. 아예 바다로 나서지도 못하게 한 것이죠.


 - 하지만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이 배를 타지 않을 수 있나요? 그래서 고기잡이 뗏목 '테우'가 등장합니다. 남자들이 뗏목 하나에 몸을 의지하여 어업을 하다 보니 남성들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고, 제주도는 상대적으로 '여자가 많은 지역'이 되어버립니다. 제주도의 3다에 '여자'가 들어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제주도는 결코 평화롭게 한반도의 일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거상 김만덕이 육지로 건너가 금강산 한 번 구경해보는 것을 소원이라 말했던, 그러한 한(恨)을 제주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 일제강점기 말기, 제주도는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수세에 몰린 일본제국은 '옥쇄' 따위를 부르짖으며 본토와 남은 점령지들을 요새화하기 시작하는데, 제주도 역시 일본에 의해 철저히 요새로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제주도 곳곳의 해안 절벽에는 바닷물의 침식으로 생겼다 보기 어려운 동굴들이 많은데, 이는 대부분 일본군의 비밀 요새로 쓰기 위해 뚫어놓은 것입니다. 이 동굴들을 누구의 노동으로 뚫었을까요? 당연히 제주인들이었겠죠.


 - 그나마 다행히도 제주도는 오키나와처럼 실제 전장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방이 되고 한 숨 채 돌리기도 전에 제주도 역사상 최대의 참사, 4.3 대학살 사건이 발생합니다.


 - 일제강점기 제주인들 중에는 일본으로 일하러 건너갔다 돌아온 사람들이 많았고, 이 당시 일본 내에서 활발했던 노동운동의 영향을 받고 좌파 성향을 띠게 된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들의 주도로 만들어진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전반적으로 미군정에 협조적이었는데,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벌어진 인명사고를 계기로 경찰과 제주인들 사이의 대립이 본격화됩니다. 육지의 지배도 매끄럽지 못하던 미군정 쪽에서는 제주도의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고, 상당수의 경찰이 교체되는데 교체된 인원들이 하필이면 서북청년단......


 - 국군이 진주하면서부터 사태는 악화일로를 걷게 됩니다. 한라산과 중산간마을은 출입이 금지되고 기존의 주민들은 모두 해안으로 소개당했으며,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상당수의 주민들은 오히려 한라산으로 숨어들어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되었지만 제주도의 남로당 세력은 단선 반대를 명분으로 봉기를 일으키고,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등 제주도는 그야말로 생지옥으로 바뀌게 됩니다.


 - 이 와중에 국군의 지휘관은 유재흥(劉載興)으로 교체되고, 유재흥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전략을 펼쳐 한라산에 숨어들었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돌아오고 어느 정도 사태는 수습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분위기는 다시 악화되어 대규모의 학살이 계속되었고, 이는 1954년 한라산의 입산 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 4.3은 제주도에 헤어날 수 없는 상처를 안겼습니다. 4.3으로 인해 찍힌 낙인을 벗고자 제주인들은 한국전쟁 기간에 (전사 비율이 매우 높았던) 해병대에 앞다투어 지원하였고, 제주인들에게 찍힌 낙인을 피하고자 이들은 제주인의 언어를 버리고 한국 표준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 노력은 가히 눈물겨울 정도여서 현재는 유네스코가 '제주어'를 '사멸 위기 4단계'로 지정할 지경에 이릅니다. 주변에 제주 출신인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제주어로 대화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블로거는 제주도를 여행하면서도 제주어를 그닥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 섬 특유의 폐쇄성에 더하여 이러한 역사적 상처가 있다 보니, 제주도는 육지 출신자들에게 알게모르게 배타적인 곳이 되었습니다. 이는 수백만의 관광객이 드나들며 육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온 지금까지도 면면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제주도의 여당은 '괸당(친척)'이라는 말이 이래서 나온 것이며, 이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한 결과 제주도의 지방정치는 가히 최악의 상황에 빠지고 말았긴 하지만, 제주인들에게는 이것을 포기할 수 없는 충분하고도 남을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 제주도는 이런 곳입니다. 역사를 좋아하고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제주도의 역사를 알고 거기에 공감하고 싶어질 겁니다. 아마 블로거만의 감성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주도는 남해바다 한가운데 굳게 서 있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어떤 비바람도, 그 어떤 차별과 착취와 탄압에도 제주도에는 제주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어찌 이런 곳에 애정을 갖지 않겠습니까.


 - 결국 블로거는 제주도에 다시 한 번 가게 될 겁니다. 아직 블로거는 중산간지역에도 가 보지 못했고, 한라산에 오르지도 못했으며, 제주도의 사람들과도 충분히 만나보았다고 말하긴 어렵겠습니다. 제주도는 보면 볼수록 더 넓어지는 곳이라는 생각입니다. 조만간, 두 번째 여행기를 올릴 수 있겠지요?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기 힘겨워서, 이번 여행기는 이 쯤에서 갈무리하기로 합니다.



 - 배를 채우고 조금 일찍 나옵니다. 자전거가 없으니 무거운 가방을 직접 들고 다니기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ㅡㅡ; 아침부터 비가 조금씩 떨어지고, 산간 지역에는 호우특보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별 생각 없이 제주목 관아를 향합니다(바로 저 '호우특보'가 무슨 의미였는지는 얼마 후 알게 됩니다). 아무래도 짐이 무거우니 택시를 타기로.


 - 제주목 관아는 조선시대 제주도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만, 지금 존재하는 관아 건물들은 모두 1990년대 이후 복원한 것들입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입구의 관덕정을 제외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터에는 경찰서와 여러 민가들이 들어서 있다가(그래서 당시에는 관아지(址)로 불림) 1991년부터 기존의 건물들을 철거하고 장기간의 조사를 통해 관아 복원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복원 전에는 관덕정 앞으로 넓은 광장이 있었다는데, 관아가 복원된 지금은 앞에 계단이 놓여있는 등 '광장'이라 부르기엔 살짝 부족한 상태입니다.



 - 복원은 그래도 잘 해 놓은 편이라서, 제주목의 역사를 알려주는 전시실이라든지 다양한 관아 건물들에 대한 설명도 충실하게 해 놓은 편입니다. 다만 모든 건물들을 다 복원한 것은 아니고, 중간중간에 건물 터로만 남아있는 공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 곳도 원래 무슨 건물이 있었다는 설명 정도는 되어 있죠.



 - 한쪽 구석에는 특이하게도 근대유물로 분류될 법한 옛 제주시청 건물의 주춧돌을 전시해 두었습니다.



 - 돌아나온 입구에는 '수령 이하 개하마(皆下馬)'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수령 이하로는 말에서 내려 들어오라는 이야기일테니, 조금 넓게 해석하면 예의를 차리라는 의미도 될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뭘까요, '수령 이하 개하차(皆下車)' 정도쯤 될런지?



 - 다음으로 민속자연사박물관(독특하게도 민속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이 하나로 합쳐져 있습니다). 삼성혈 바로 이웃에 있습니다. 여기도 그럭저럭 볼 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 이 개복치는 어떻게 돌연사를 할까요? ㅡㅡ;


 - 마지막으로 삼성혈에 다시 가 봅니다.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는 것 외에 큰 의미는 없습니다. 어쨌든 삼성혈과 이를 향해 고개를 숙인 주변의 나무들은 언제 봐도 신비함을 느끼게 합니다.



 - 삼성혈에서 나와 바로 택시를 잡고, 공항으로 향합니다. 전화는 계속 산간지역 호우경보라고 난리를 치는데, 공항이야 산간에 있지 않으니 괜찮겠거니 생각했습니다만 공항에 도착해보니......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비행기가 못 뜬다는데 어쩔 수 있나요. 예약을 내일 오후로 변경하고, 내일 수업을 빠지게 되니 결항확인서도 하나 떼고(사무실 쪽으로 가서 떼어달라면 해 줍니다. 필요하신 분들 참고), 하룻밤을 어디서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인연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 더 묵는 것으로 결정합니다.


 - 다음날, 날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맑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울 쪽 기상 상황이 시원찮아서 또 연착이 됩니다. ㅡㅡ; 제주도는 이런 상황이 일상적이라 주민들은 그저 그러려니 한다고 하는군요. 아무튼 다행히 이번엔 결항이 되진 않았고, 비행기를 타고 무사히 김포공항으로 복귀. 비행기에서 바라본 제주도의 모습이 인상적이라 사진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 오늘은 자전거를 이용하는 마지막 날이 될 겁니다. 다리는 아프지만 이제 익숙해질 만하니 끝이 보이네요(물론 자전거 라이딩을 또 하라면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제 체력과는 맞지 않는 듯 ㅡㅡ;). 오늘 다시 제주시내에 들어갑니다. 어제 함께 술 한잔 했던 다른 일행들과 인사를 하고, 자전거에 오릅니다.


 - 얼마 가지 않아 4.3 유적지가 나타납니다. 4.3 유적지를 따로 알아보거나 했던 건 아닌지라, 해안을 쭉 돌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유적지가 많은데 이곳 북촌리 너븐숭이에는 따로 기념관(일단 공식명칭이라 이렇게 씁니다)이 지어져 있습니다. 북촌리는 4.3 당시 가장 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한 곳으로, 소설 <순이 삼촌>의 주요 배경이기도 합니다.



 - 숙연한 마음으로 너븐숭이를 떠나 조천읍으로 향합니다. 조천읍은 1919년 3.1운동이 크게 벌어진 곳 중 하나입니다. 어차피 일요일이기도 하고, 교회에 가기로 하였으니 읍내에서 좀 숨을 고르게 되겠습니다. 조천장로교회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짐작컨대 조천읍 3.1운동과도 연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 예배가 끝나고, 교회의 어느 분이 점심 먹고 가라시는 걸 어영부영 사양하고 다시 길을 출발합니다. 예전 군복무 시절 외박을 나왔을 땐 예배 후 점심까지 먹고 가곤 했는데, 아무래도 그동안 숫기가 더 없어졌는 모양입니다. ㅡㅡ; 어차피 제주시내가 멀지 않았으니 좀 더 가서 점심을 먹기로.


 - 조천읍을 지나 일주도로를 달리면 어느새 제주시내로 들어와 있습니다. 처음 만나는 동네는 삼양동인데, 이곳에는 해변과 선사유적지가 있습니다. 삼양동 선사유적지는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유적으로, 탐라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제주도 역사의 시작부분을 보여주는 흔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략 당시의 움집이나 고상가옥들이 당시의 모습을 추정하여 복원되어 있습니다.



 - 삼양동해변의 모래는 (제주도의 몇몇 해변들이 그렇듯) 상대적으로 검은 색을 띠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주도의 검은 화산암들이 깎여 퇴적된 것이겠죠. 맞은편에서 바라본 모습.



 - 이쯤 오면 아파트가 여럿 세워진 것이 제주시내에 들어왔음을 확연히 알게 해 줍니다.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때우고, 다음 목적지는 국립 제주박물관입니다. 여기까지 왔으면 제주시내로 완전히 들어온 셈이죠.



 -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차분히 박물관을 둘러보기로 합니다. 전 시대에 걸쳐 알찬 전시물들이 있는데, 플래시 터뜨리지만 말라고 붙어 있기에 조심스레 사진 몇 장을 남겨 보았습니다(블로거는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는 등 유물에 훼손을 주지 않는 선에서 박물관에서의 사진촬영을 허용하자는 입장입니다). 박물관을 돌아다녀 보면 사진 촬영을 완전 금지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플래시 정도만 금지하고 사진 촬영은 터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요.



 - 제주도는 전통 갓의 가장 중요한 생산지였는데, 이는 전통 갓이 말총(말꼬리털)을 이용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제주도에서는 몽골 점령기 이래로 말을 많이 길렀죠. 실제로 조선시대 제주도 주민들은 말총으로 다양한 모자를 만들어 생계에 보탰다고 합니다.



 -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조금 더 달리면 바로......



 - 다시 처음의 그곳으로 돌아옵니다. 만감이 교차하는군요. 일주일간의 생고생(?)을 드디어 끝마쳤다는 성취감도 있고, 이제 일상으로의 복귀가 눈앞이라는 섭섭함도 있고, 별로 좋지도 않은 자전거였지만 나름 정이 든 것도 있고요. 수고 많았다는 대여점 사장님의 말을 뒤로 하고 오늘의 숙소로 향합니다.


 - 이 때만 해도 블로거는 내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8일차 게스트하우스 : 예하 게스트하우스 제주시청점 (現 호스텔 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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