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o Clementi (1752-1832)
Piano Concerto in C major WoO12

 

무치오 클레멘티. 1794년

 무치오 클레멘티는 우리에게는 피아노 학원에서 배우는 <소나티네 앨범>에 많은 곡이 수록된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는데,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하나였고 높은 실력을 요구하는 다수의 작품을 작곡한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동시대에 활약한 모차르트와 함께 피아노 연주자로 전 유럽에 명성을 날렸으며 모차르트와 연주 대결을 펼친 적도 있지요. 특히 피아노 연주법 뿐 아니라 악기 개량에도 직접 관여하는 등, 당대 피아노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클레멘티는 이탈리아(당시 교황령)의 로마에서 출생하였고, 은 세공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음을 알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카펠마이스터(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던 친척 안토니오 바로니(1738-1792)에게 음악 수업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지 9세 때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3세 때는 오라토리오와 미사곡을 작곡할 정도의 수준에 올랐습니다. 14세가 되는 1766년 클레멘티는 다마소의 산 로렌초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영국인 귀족 피터 벡포드(1740-1811)가 로마를 방문했다가 클레멘티의 연주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영국에 있는 자신의 장원에서 연주를 하는 대가로 숙식과 교육비를 후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에 클레멘티는 약 7년간 벡포드의 장원에 거주하며 음악 수업에 힘썼고, 1770년에는 오르간 연주자로 첫 대중 연주회를 개최하여 음악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벡포드의 후원 계약이 종료된 이후 런던으로 이주하여 하프시코드 연주자와 극장 지휘자 등으로 활발한 음악 활동을 이어나간 그는 1780년 무렵이 되면 영국을 넘어 유럽에 널리 알려진 정상급 음악가가 됩니다.

 클레멘티는 1780년부터 3년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연주 활동을 벌였는데, 빈에 체류하던 1781년 말 그 유명한 연주 배틀(?)이 벌어집니다. 음악가들을 적극 후원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재위 1765-1790)는 빈에서 건반 연주자로 명성을 날리던 모차르트와 클레멘티를 초청하여, 각각 자신의 작품을 기반으로 즉흥 연주를 펼치도록 공개 경연을 개최하였습니다(연주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황제는 현명하게도(?) 무승부를 선언했다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경연 후 클레멘티는 모차르트를 호평하였는데, 모차르트는 클레멘티를 "실력은 뛰어나지만 너무 기계적"이라며 깠다고 하네요. ㅡㅡ; 아마도 즉흥적이고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중시하던 모차르트는 클레멘티의 기교적이며 정형화된 연주 성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모차르트가 클레멘티를 아예 무시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오페라 <마술 피리> 서곡에 클레멘티의 피아노 협주곡의 모티브를 차용한 적도 있었습니다. 한편 베토벤은 클레멘티를 매우 존경했고 그의 작품도 자주 연주했다고 하니 흥미로운 일입니다.

 연주 여행을 끝내고 영국으로 돌아간 클레멘티는 음악가로서 활동과 함께 음악교육에도 힘썼으며, 존 밥티스트 크라머(1771-1858), 존 필드(1782-1837) 등 유명 음악가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1798년에는 악보 출판회사를 인수하였고 이후 피아노 제조업에도 진출하여 사업가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출판사는 베토벤 작품의 영국 내 독점계약을 체결하여 다수 작품들을 출판하기도 하였는데, 베토벤 작품을 편집하고 해석하는 데 업적을 세웠지만 그의 악보를 일부 수정하는 등 손을 대어 뒷말이 좀 있기도 합니다.

 음악사(史)에서 클레멘티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근대적인 피아노 연주법을 확립한 것으로, 이에 "피아노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합니다. 피아노를 직접 만들었기도 하고 그는 모차르트 등과 함께 당시 최신 악기였던 피아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Gradus Ad Parnassum』이라는 피아노 연습곡의 명저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베토벤, 체르니, 쇼팽 등 19세기를 풍미한 수많은 피아노 연주자와 작곡가들이 그의 작품과 연주기법을 익혔다고 합니다. 피아노 협주곡 C장조는 1796년 작곡되었으며, 2년 전 출판한 피아노 소나타 Op.33 No.3을 협주곡으로 개작한 것입니다.

 

참고자료:
영문 위키피디아 "Muzio Clemeti", "List of compositions by Muzio Clementi"
나무위키 "무치오 클레멘티"
https://blog.naver.com/chaos719kr/60048559988
"[클래식&차한잔] 무치오 클레멘티 소나티네", 조세금융신문(https://www.tfmedia.co.kr/), 2021. 10. 8.



Carl Philipp Stamitz (1745-1801)

Clarinet Concerto No. 3 in Bb



[카를 슈타미츠]


 카를 슈타미츠는 체코-독일계 작곡가로 고전파 초기에 활동한 소위 '만하임 악파'를 대표하는 음악가 중 하나입니다. 그의 아버지 요한 슈타미츠(1717-1757)는 만하임 악파의 형성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이며, 동생 안톤 슈타미츠(1750-1809?) 또한 작곡가 겸 바이올린 연주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만하임에서 태어난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버지를 통하여 처음 바이올린을 익혔습니다.


 아버지 사후에도 음악 수업을 이어간 슈타미츠는 1762년부터 만하임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1770년에는 파리로 이주하여(동생 안톤 또한 함께 이주한 것으로 보임) 유럽 전반에 바이올린 연주자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파리에서는 노아유 공작의 궁정 작곡가로 근무하였고 동시에 헤이그, 상트페테르부르크, 런던 등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주 활동을 벌였습니다.


 1794~95년경 슈타미츠는 독일 중부의 도시인 예나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카펠마이스터와 대학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그는 경제적 곤란을 겪은 듯하고 자녀들도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 등 개인적인 어려움 속에 말년을 보냈습니다. 몇 년 뒤 그는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그의 서재에서 연금술에 관한 다수의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는군요. ㅡㅡ;


 슈타미츠는 매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50편을 넘는 교향곡, 38편 이상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60여 편의 협주곡을 작곡하였으며 실내악곡도 다수 있습니다. 그의 협주곡은 바이올린, 비올라, 비올라 다 모레, 첼로, 클라리넷, 바셋 호른, 플루트, 바순 등 많은 악기를 위하여 만들어졌는데 클라리넷의 경우 명연주자인 요제프 비어(1744-1812)와의 공동 작업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하이든-모차르트 스타일의 고전적 양상을 따르고 있습니다.


[전곡]


[문제의 4악장. 2009 비엔나 필하모닉 신년 콘서트]


Joseph Haydn (1732-1809)

Symphony No.45 in f# Hob I:45 <Farewell>

연주 : 서강대학교 ACES (2016 봄 연주회(4악장))


 - 하이든이 근무한 에스테르하지 악단은 여름 시즌에는 고용주인 에스테르하지 후작을 따라 가문의 여름 별장으로 장기 출장을 떠나곤 했습니다. 1772년에는 가을이 되었는데도 후작이 본궁으로 돌아가지 않는 바람에 악단도 별장에 발이 묶이게 되었는데, 하이든 등 몇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단원들이 가족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후작에게 전하기 위하여, 하이든은 새로운 교향곡을 (당시에는 매우 드문) 올림바단조 조성으로 작곡하고 4악장에서는 연주자가 조명을 끄고 하나하나 나가버리는 퍼포먼스까지 선보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후작은 다음날로 악단에게 휴가를 주었다고 하는군요.


[후기] 앞으로는 앙코르 때 연주한 작품도 블로그에 함께 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고별>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4악장이고, 연주자가 중간중간 나가는 장면에서는 그냥 밋밋하게 퇴장해서는 참 재미가 없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청중이 웃을 만한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하나씩 준비하게 됩니다. 블로거는? 주머니에 숨겨둔 전화를 받으며 나갔지요.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Leonore> "Overture" No.3 Op.72a

연주 : 건국대학교 KUPhil (2015 가을 연주회)


 -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는 파란만장한 개작(改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판본은 1805년 완성되어 그해 말 초연되었는데, 하필 나폴레옹이 비엔나로 침공한 혼란통에 몇 차례 상연되지 못하고 무대에서 내려오고 말았습니다(당시의 서곡은 <레오노레> 2번). 이듬해 초 베토벤은 작품을 다듬어 3막에서 2막으로 축소하고, 새로운 서곡(<레오노레> 3번)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으니 이것이 두 번째 판본입니다. 다만 이는 1차보다도 흥행에 실패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듬해(1807년) 프라하에서 상연 기회가 생기자 베토벤은 서곡을 다시 써서(<레오노레> 1번) 준비를 하였으나 이번에는 상연 자체가 취소. 이후 시간이 지나 1814년이 되어서야 작품은 다시 상연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베토벤은 음악을 대규모로 개작하였고 비로소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서곡을 다시 썼는데(<피델리오> 서곡), 초연 당시까지 완성하지 못하여 얼마 후에야 새로 쓴 서곡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최종본에 이르기까지 3명의 다른 작가가 대본 작업에 참여했고, 제목도 <피델리오> → <레오노레> → <피델리오>로 바뀌었습니다. '레오노레'는 주인공의 본명, '피델리오'는 남장한 주인공의 가명입니다.


[후기] 은근히 어려워서 허를 찔린 기억이 있습니다. 곡 자체의 재미도 재미지만, 완성되기까지의 긴 사연이 더 인상적이었던 작품.





Michael Haydn (1737-1806)

Symphony No.25 in G MH 330

(Mozart Symphony No.37 in G K.444)


 - 먼저 작품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이 교향곡은 오랫동안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알려졌으며 교향곡 37번을 부여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알려진 악보에 모차르트의 서명이 있었으며, 그의 지휘로 비엔나에서 초연된 바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대에 이 곡의 작곡자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고, 이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80-1952) 등 학자들의 검증을 통하여 현재는 1악장의 서주만 모차르트의 것이고 나머지는 미하엘 하이든의 작품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


 - 미하엘 하이든은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입니다. 형과 마찬가지로 음악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형이 비엔나 슈테판 성당 합창단에 입단한 이후 합창단 감독인 칼 게오르그 로이터(1708-1772)의 도움으로 미하엘을 비롯한 동생들 역시 합창단에서 활동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 하이든 형제는 변성기가 오면서 차례로 합창단을 떠났으며, 미하엘의 경우 퇴단 직후 그로스바르다인(現 루마니아 오라데아) 성당의 음악감독을 맡으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1762년부터는 잘츠부르크에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미하엘은 이후 남은 평생을 잘츠부르크에 머물며 360곡 이상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 1768년 미하엘은 성악가로 활동한 마리아 막달레나 리프(1745-1827)와 결혼하였는데, 잘츠부르크에서 친분 관계를 맺게 된 모차르트 가문에서는 마리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군요. 둘 사이에 자식은 딸(알로이지아 요제파)하나가 유일한데, 그나마 생후 1년 남짓만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를 종합하면, 미하엘은 몇몇 부분에 대하여는 형인 요제프보다도 더 뛰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종교음악의 경우 요제프 스스로가 자신보다 미하엘이 뛰어나다고 인정했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미하엘은 주로 교회음악가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대표작들 또한 교회음악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그문트 대주교를 위한 레퀴엠 c단조>는 미하엘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물론 고전시대 작곡가답게, 43개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다수의 세속음악도 만든 바 있습니다.


 - 다만 아무래도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대라, 그의 작품인지 불분명한 작품들이 있으며 요제프의 작품에 섞여들어간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똑같은 '하이든'이다보니 풀 네임을 쓰지 않으면 헷갈리기 딱 좋았다고).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위의 교향곡 25번이죠. 여담으로 미하엘은 술을 상당히 좋아했던 모양인데,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경우 미하엘이 술을 너무 마신다고 비판하기도 했다는군요.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Die Zauberflote> K.620 "Overture"

연주 : 서강대학교 ACES (2015 봄 연주회)


 - <마술 피리>는 모차르트가 죽은 1791년 완성한 징슈필(독일어 오페라)입니다. 이 작품은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 지부에서 함께 활동하던 극작가 에마누엘 시카네더(1751-1812)의 제안을 받아 만들었고, 실제로 프리메이슨 사상이 담겨 있다고도 합니다. 당시의 징슈필은 이탈리아어 오페라에 비하여 낮은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이 작품은 비엔나 변두리의 서민 대상 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당시의 상연은 100회 이상 반복되는 대 흥행을 기록했고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다만 모차르트 자신은 오페라 두 개와 레퀴엠을 동시에 작업하는 무리를 하여 건강을 해쳤고, 결국 완성 두 달 후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후기] 맨 처음의 2연음에 대하여, 일반적으로는 한음 한음 떼어서 연주하는 게 보통인데 특별한 이유는 아니고 대가들이 그런 식으로 연주를 했기 때문에 이를 관례적으로 따르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말년의 모차르트는 바흐의 음악을 연구하여 대위법 마스터가 되어 있었는데, 그걸 잘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Ludwid van Beethoven (1770-1827)

Triple Concerto in C Op.56

연주 : 서강대학교 ACES (2015 봄 연주회)


 - 삼중 협주곡은 세 악기의 합동 협주라는 특이한 형태의 작품으로, 이런 형태의 음악은 주로 바로크 시대 '합주 협주곡(Concerto Grosso)'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만들어진 바 있습니다. 고전 시대 이후로는 찾아보기 어려워진 이러한 형태를 베토벤이 왜 꺼내들었는지는 분명치 않은데, 베토벤의 전기 작가(하지만 신뢰성은 심히 의심받는)인 안톤 쉰들러(1795-1864)에 따르면 피아노는 베토벤의 후원자 중 하나인 루돌프 대공, 바이올린은 루돌프의 전속 음악가인 칼 자이들러, 첼로는 에스테르하지 가문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로 주자인 안톤 크라프트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합니다. 완성은 1804년에 되었지만, 루돌프 대공이 악보를 먹튀개인소장하는 바람에 출판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는군요.


[후기] 블로거는 이 작품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베토벤 특유의 혁신성이 그닥 느껴지지 않거든요. 그래도 역시 (바로크 음악이 아닌) 세 악기의 동시 협주라는 게 독특한 매력이기는 하지요. 첼로를 듣보잡 취급했다는 모차르트와는 달리 베토벤은 나름 첼로를 좋아해서 첼로 소나타를 썼다든지 삼중 협주곡에 첼로를 포함했다든지 정도의 노력은 했으니 경건히 들을 따름입니다.





Franz Xaver Wolfgang Mozart (1791-1844)

Piano Quartet No.1 in g Op.1


 - 모차르트의 자녀는 총 4남 2녀였는데, 생후 1년 내에 죽은 네 명을 제외하고 살아서 장성한 자식은 아들 두 명입니다. 그 중 2남인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1784-1858)는 음악 교육을 중도에 포기하고 공무원으로 평생을 살았으며, 막내아들인 프란츠 크사퍼만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 프란츠 크사퍼는 아버지 모차르트가 사망한 1791년 태어났고, 아버지가 사망할 당시 4개월 남짓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프란츠 크사퍼'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유명한 제자 중 하나인 프란츠 크사퍼 쥐스마이어(1766-1803)의 이름과 같은데, 이 때문에 프란츠 크사퍼가 알고보면 쥐스마이어의 자식일 것이라는 음모론이 있기도 했습니다(사실무근).


 - 어머니 콘스탄체 베버(1763-1842)는 모차르트 사후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1761-1826)과 재혼하였는데, 정식 재혼은 1809년으로 한참 뒤였지만 이미 1790년대 후반부터 두 사람은 연인 관계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니센은 덴마크의 외교관으로 모차르트의 팬이기도 했는데, 콘스탄체가 모차르트의 악보집을 출판할 때 협력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니센은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 아무튼 콘스탄체와 니센의 관계가 진전되면서 모차르트의 두 아들도 두 사람의 밑에서 자라게 됩니다. 때마침 둘 모두 생부를 닮아 음악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 콘스탄체와 니센은 이들에게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시켰습니다. 프란츠 크사퍼의 경우 요제프 하이든, 안토니오 살리에리, 요한 네포무크 훔멜(1778-1837) 등 당대 굴지의 음악가들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 음악적 재능은 동생이 더 많았는지, 중도에 음악을 포기한 형에 비해 프란츠 크사퍼는 아버지 못지않은 재능을 과시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그의 재능을 옥죄었는지 이후 프란츠 크사퍼의 음악은 아버지 시대의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 그는 청장년기에는 주로 렘베르크(現 폴란드 리비우)를 중심으로 피아니스트와 작곡가, 음악교육자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물론 렘베르크뿐 아니라 전 유럽에 걸쳐 연주와 지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는데, 전성기라 볼 수 있는 1820년대에는 400명의 아마추어 가수로 조직된 '성 체칠리아 합창단'을 결성하여 지휘를 맡았고, 유명 작곡가 50인이 공동으로 참여한 변주곡 프로젝트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1838년 비엔나로 돌아왔고,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설립식에서 합창 지휘를 맡았습니다. 모차르트의 아들이었으니 모차르테움의 음악감독을 맡아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는데, 프란츠 크사퍼가 아버지의 후광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1841년부터는 카를스바트(現 체코 카를로비바리)에 거주하면서 교육에 전념하던 중, 1844년 위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 상술했듯이 프란츠 크사버가 음악인의 길을 걷는 데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능과 아버지의 후광이 크게 작용한 바 있습니다. 반면 아버지의 이름값이 그에게 지나치게 많은 영향을 주는 바람에, 그의 작품세계가 아버지의 그것을 벤치마킹한 수준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사후에는 아버지의 명성에 완전히 묻히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값에 눌려 살다 보니 인간적으로도 그리 행복하게 살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와 비교당하는 것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했으며, 성격 또한 전반적으로 내성적이고 겸손한 성향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담감과 성격 문제 때문인지 평생 솔로 독신으로 살았고 자녀도 없는데, 하필 그의 형도 평생 독신으로 사는 바람에 모차르트의 대는 이들을 끝으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ㅡㅡ;


 - 피아노사중주 1번은 공식 작품 번호가 붙은 첫 작품으로, 11세 때 완성하였습니다. 이 작품을 들으면서, 과연 그가 '모차르트'가 아닌 '프란츠 크사퍼'로서 평생을 살았다면 과연 어떤 음악세계를 보여주었을까 하는 생각을 짧게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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