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드리히 니체는 현대 철학의 문을 연 역사적인 철학자로 기억되지만, 그의 삶은 음악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으며 실제로 어느 부분에서는 음악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니체는 전문적 음악교육을 받은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왔으며 10대 때의 짧은 시기동안이나마 여러 작품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청년기 이후로는 철학 연구에 집중하느라 작곡에서는 멀어졌지만, 이후로도 음악은 그의 삶이나 사상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 니체는 1869년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교수로 채용되었고, 이 무렵 스위스에 머물며 작곡활동을 하던 리하르트 바그너를 만나게 됩니다. 니체는 음악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완숙기에 접어들고 있었던 바그너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여러 해 바그너와 깊은 교우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음악적으로도 새로운 자극을 받았는지, 중단했던 작곡 활동에 다시 손을 대어 몇 개의 작품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 다만 시간이 지나며 니체는 바그너를 차츰 멀리하게 되었는데, 이는 바그너의 사상에서 기독교나 반유대주의 등 니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들이 강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웃기게도 그의 사상은 사후 자신의 후처 코지마와 나치의 합작으로 반유대주의 사상인 것처럼 왜곡되었고, 이러한 오해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1880년대가 되면 니체는 역설적으로 격렬한 바그너 반대자가 되었고, <바그너의 경우>, <니체 대 바그너> 등의 저술을 통하여 바그너를 비판하게 됩니다.
- 1882년경 니체는 작가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루 살로메(1861-1937)과 친교를 맺게 되었고, 살로메가 자신의 철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반한 니체는 그에게 청혼을 하지만 곧바로 차이고 말았습니다. ㅡㅡ; 살로메의 회고에 따르면, 철학적으로야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었지만, 자신보다 17세나 연상인데다 이미 이런저런 지병(매독, 사시, 치질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어가던 니체는 육체적으로는 도무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 다만 두 사람은 철학적으로는 깊은 교감을 나누었고 이후 살로메의 동료인 파울 레에(1849-1901)와 함께 '철학적 교류만이 개재된' 3인 동거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니체는 살로메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결국 얼마 뒤 두 번째로 청혼했다가 다시 거절당했으며 결국 동거 생활은 파탄나게 됩니다. ㅡㅡ; <삶을 위한 찬가>는 살로메의 시를 바탕으로 오케스트라 반주를 붙여 작곡한 합창곡으로 1887년 완성되었습니다.
- 큐이(혹은 퀴)는 '작곡가'로서는 5인조 중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생전에는 주로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며 5인조의 활동을 옹호한 것으로 더 유명합니다. 또한 그는 보로딘과 함께 자신의 본업을 끝까지 고수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큐이는 1835년 비르노(現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망명한 프랑스 군인 출신이었습니다.
- 어려서부터 주로 쇼팽 쪽에 흥미를 가져, 폴란드 작곡가인 스타니스와프 모뉴슈코(1819-1872)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그는 아버지의 직업을 잇기 위해 16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에 입학, 직업군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1857년 졸업 후에는 모교 교수로 채용되어 수십 년간 재직하였는데, 여기서 니콜라이 2세(1868-1918)를 비롯한 수많은 제자를 교육하였습니다.
- 185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큐이는 발라키레프와 만났고, 이때부터 그는 군인으로서의 삶과 함께 음악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둘의 만남은 '러시아 5인조'의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1864년부터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도모스티>에서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며 많은 글을 남겼고, 이후로 그의 음악적 활동은 주로 음악평론 쪽으로 많이 알려지게 됩니다.
- 다만 큐이는 본업과 음악평론으로 바쁜 와중에도 꽤 많은 작품을 작곡한 다작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주로 가곡과 실내악 쪽에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오페라나 관현악곡도 다수 썼지만, 그의 음악적 재능은 (특히 대편성의 관현악에 있어서) 5인조의 다른 인물들보다 낮은 평가를 받으며 5인조 중에서는 민족적 색채도 가장 약합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작품들은 사후에는 거의 연주되지 않으며 <오리엔탈> 등의 몇몇 소품들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 큐이의 본업은 어디까지나 군인(공병)이었고, 특히 축성법(築城法)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의 관련 연구는 러시아-투르크 전쟁(1877-1878)에서 효용성이 입증되었고, 큐이는 이러한 여러 업적을 바탕으로 1906년에는 중장까지 진급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음악 관련 활동은 꾸준히 이어갔는데, 1897년에는 신진 작곡가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의 교향곡 1번에 대혹평을 날려 라흐마니노프가 우울증으로 3년간이나 작곡을 중단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ㅡㅡ;
- 큐이의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힘이 떨어지며, 쇼팽이나 리스트 시절의 실내음악에 머물러 발전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이미 당대로부터)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관현악곡이나 오페라는 별로 볼 것이 없으며, 현재는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이러한 특성 때문에 소품이나 실내악에서는 건질 만한 작품이 좀 있다고 평가되며, <오리엔탈>을 비롯한 몇몇 작품이 그나마 알려져 있습니다.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