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o Clementi (1752-1832)
Piano Concerto in C major WoO12

 

무치오 클레멘티. 1794년

 무치오 클레멘티는 우리에게는 피아노 학원에서 배우는 <소나티네 앨범>에 많은 곡이 수록된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는데,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하나였고 높은 실력을 요구하는 다수의 작품을 작곡한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동시대에 활약한 모차르트와 함께 피아노 연주자로 전 유럽에 명성을 날렸으며 모차르트와 연주 대결을 펼친 적도 있지요. 특히 피아노 연주법 뿐 아니라 악기 개량에도 직접 관여하는 등, 당대 피아노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클레멘티는 이탈리아(당시 교황령)의 로마에서 출생하였고, 은 세공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음을 알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카펠마이스터(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던 친척 안토니오 바로니(1738-1792)에게 음악 수업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지 9세 때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3세 때는 오라토리오와 미사곡을 작곡할 정도의 수준에 올랐습니다. 14세가 되는 1766년 클레멘티는 다마소의 산 로렌초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영국인 귀족 피터 벡포드(1740-1811)가 로마를 방문했다가 클레멘티의 연주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영국에 있는 자신의 장원에서 연주를 하는 대가로 숙식과 교육비를 후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에 클레멘티는 약 7년간 벡포드의 장원에 거주하며 음악 수업에 힘썼고, 1770년에는 오르간 연주자로 첫 대중 연주회를 개최하여 음악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벡포드의 후원 계약이 종료된 이후 런던으로 이주하여 하프시코드 연주자와 극장 지휘자 등으로 활발한 음악 활동을 이어나간 그는 1780년 무렵이 되면 영국을 넘어 유럽에 널리 알려진 정상급 음악가가 됩니다.

 클레멘티는 1780년부터 3년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연주 활동을 벌였는데, 빈에 체류하던 1781년 말 그 유명한 연주 배틀(?)이 벌어집니다. 음악가들을 적극 후원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재위 1765-1790)는 빈에서 건반 연주자로 명성을 날리던 모차르트와 클레멘티를 초청하여, 각각 자신의 작품을 기반으로 즉흥 연주를 펼치도록 공개 경연을 개최하였습니다(연주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황제는 현명하게도(?) 무승부를 선언했다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경연 후 클레멘티는 모차르트를 호평하였는데, 모차르트는 클레멘티를 "실력은 뛰어나지만 너무 기계적"이라며 깠다고 하네요. ㅡㅡ; 아마도 즉흥적이고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중시하던 모차르트는 클레멘티의 기교적이며 정형화된 연주 성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모차르트가 클레멘티를 아예 무시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오페라 <마술 피리> 서곡에 클레멘티의 피아노 협주곡의 모티브를 차용한 적도 있었습니다. 한편 베토벤은 클레멘티를 매우 존경했고 그의 작품도 자주 연주했다고 하니 흥미로운 일입니다.

 연주 여행을 끝내고 영국으로 돌아간 클레멘티는 음악가로서 활동과 함께 음악교육에도 힘썼으며, 존 밥티스트 크라머(1771-1858), 존 필드(1782-1837) 등 유명 음악가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1798년에는 악보 출판회사를 인수하였고 이후 피아노 제조업에도 진출하여 사업가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출판사는 베토벤 작품의 영국 내 독점계약을 체결하여 다수 작품들을 출판하기도 하였는데, 베토벤 작품을 편집하고 해석하는 데 업적을 세웠지만 그의 악보를 일부 수정하는 등 손을 대어 뒷말이 좀 있기도 합니다.

 음악사(史)에서 클레멘티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근대적인 피아노 연주법을 확립한 것으로, 이에 "피아노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합니다. 피아노를 직접 만들었기도 하고 그는 모차르트 등과 함께 당시 최신 악기였던 피아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Gradus Ad Parnassum』이라는 피아노 연습곡의 명저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베토벤, 체르니, 쇼팽 등 19세기를 풍미한 수많은 피아노 연주자와 작곡가들이 그의 작품과 연주기법을 익혔다고 합니다. 피아노 협주곡 C장조는 1796년 작곡되었으며, 2년 전 출판한 피아노 소나타 Op.33 No.3을 협주곡으로 개작한 것입니다.

 

참고자료:
영문 위키피디아 "Muzio Clemeti", "List of compositions by Muzio Clementi"
나무위키 "무치오 클레멘티"
https://blog.naver.com/chaos719kr/60048559988
"[클래식&차한잔] 무치오 클레멘티 소나티네", 조세금융신문(https://www.tfmedia.co.kr/), 2021. 10. 8.

 

 

Friedrich II von HohenzollernFriedrich der Große (1712-1786)

Flute Concerto No.4 in D




 이전에 철학자와 대통령의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왕입니다. 그것도 독일과 유럽의 근대사에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왕,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입니다. '대왕'이라는 칭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왕으로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며 18세기 계몽군주의 대표자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만, 그와 동시에 음악의 훌륭한 후원자였고 자기 자신이 음악가이기도 했던 '음악가 군주' 였습니다.


 프리드리히가 음악과 문학에 심취하게 된 것은 프랑스인 교사의 영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하노버 왕가 출신. 1687-1757)는 학문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는데 아들의 교육에도 신경을 써 프랑스 귀족 출신의 가정교사를 채용, 프리드리히를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문제는 그의 아버지인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1688-1740)가 좋게(?) 말하면 군국주의적이고, 대놓고 말하면 반(反)지성주의자에 매우 폭력적이기까지 한 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프리드리히는 어릴 적에 꽃 대신 전쟁용 북을 선택하여 치고 놀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결코 유약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철두철미한 군국주의자였던 아버지의 눈에는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자식이 예술이나 문학에 심취해 있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되지 않았던지, 프랑스인 교사를 해임하고 음악을 즐기는 아들에게 몽둥이 찜질을 하는 등 거의 가학적인 벌을 가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가정교육은 아주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었다는군요.


 이런 식이니 부자지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프리드리히는 혼담이 오갔던 것을 기회로 영국으로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장기간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당시 암살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아들을 의심하여 사형에 처하려고까지 하였지만 사방에서 뜯어말려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몇 년 후에야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복권될 수 있었습니다(그가 즉위 후 교양과 예술에 탐닉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 이러한 막장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리 때문이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왕위에 올랐습니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는 매우 다행히도 그는 그 때까지의 고난에도 미쳐버리지 않고 자신의 재능과 인간성, 교양을 지켜냈으며 이후 왕으로서 이룩한 일들은 굳이 여기서는 나열하지 않기로 합니다. 다만 여기서 소개할 것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이어진 그의 음악 사랑과 아마추어 음악가로서의 활동입니다.


 실제로 그는 재위 초기부터 음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음악가들의 후원자로 나섰습니다. 1747년 프리드리히는 (당시에는 건반 연주자로 더 유명했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궁정으로 초청하였는데, 바흐는 왕이 직접 만든 주제 선율을 가지고 3성 푸가를 만들어 보라는 주문을 즉석에서 훌륭하게 해냅니다. 프리드리히는 다시 바흐에게 6성 푸가를 만들어 볼 것을 주문하였고, 바흐는 그 자리에서는 아니고 나중에 따로 완성하여 왕에게 헌정하니 그 유명한 <음악적 헌정>입니다(그런데 정작 프리드리히 2세는 이 곡을 거의 듣지 않았다는군요).


 사실 바흐와의 인연은 그의 아들인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1714-1788)가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에서 쳄발로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C. P. E. 바흐는 프리드리히가 왕세자였던 시절부터 궁정악단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즉위 후에는 정단원으로 승진하였고, 왕을 위한 작품들도 여럿 작곡하는 등 여러모로 프리드리히의 신임을 얻었다고 합니다. 다만 후에는 음악적 관점에서 차이를 좀 보였다는데 그 때문인지 1768년 C. P. E. 바흐는 프리드리히의 만류까지 뿌리치고 함부르크 궁정악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외에도 그는 즉위하자마자 카를 하인리히 그라운(1704-1759)을 이탈리아로 보내 음악가들을 채용하는 등 궁정음악의 수준을 높이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고,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요한 요하임 크반츠(1697-1773) 등 여러 음악가들이 그의 궁정에서 활동하였습니다. 크반츠는 프리드리히 개인의 플루트 교습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중요한 것은 프리드리히 2세가 단순히 음악의 후원자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상당한 수준의 음악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는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상당한 수준을 가지고 있었던 듯한데, 그의 궁정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왕이 직접 협연한 플루트 협주곡에 대하여 영국 출신의 음악가이자 음악사학자인 찰스 버니(1726-1814)는 "지금까지 내가 그 어느 애호가들이나 전문 플루트 연주자들에게서 들은 것보다 월등했다"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립서비스 아닌가


 이를 보면 그가 음악가로서 적어도 아마추어의 평균보다는 훨씬 훌륭한 기량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다만 문제는 그의 음악적 성향으로, 말년이 되어서까지도 젊은 시절의 음악 취향을 그대로 가져가는 바람에 그의 말년에는 궁정에서 철 지난 음악만 줄창 연주되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C. P. E. 바흐처럼 새로운 시대의 음악을 추구하는 음악가들이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도 있었고 말입니다. 


 아무튼 '음악가 군주' 프리드리히 2세는 높은 음악적 소양으로 자신의 곡을 세상에 남긴 극히 드문 군주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자작곡들 또한 그의 음악적 성향을 그대로 반영하여 '수준은 괜찮지만 철저히 구시대적'인 범작으로 평가받고 있긴 하지만요. 그냥 국왕의 신분으로 후대인이 들어줄 만한 음악을 남겼다는 데 의의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고문헌 : 

 나주리, 「북독일의 ‘전고전주의’ -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 음악과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의 클라비어 음악」, 『서양음악학』 12(2), 한국서양음악회, 2009.

 한국어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바흐(J. S. Bach) 음악의 헌정(A Musical Offering) BWV.1079", 곽근수의 음악이야기(http://sound.or.kr/)

 



Carl Philipp Stamitz (1745-1801)

Clarinet Concerto No. 3 in Bb



[카를 슈타미츠]


 카를 슈타미츠는 체코-독일계 작곡가로 고전파 초기에 활동한 소위 '만하임 악파'를 대표하는 음악가 중 하나입니다. 그의 아버지 요한 슈타미츠(1717-1757)는 만하임 악파의 형성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이며, 동생 안톤 슈타미츠(1750-1809?) 또한 작곡가 겸 바이올린 연주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만하임에서 태어난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버지를 통하여 처음 바이올린을 익혔습니다.


 아버지 사후에도 음악 수업을 이어간 슈타미츠는 1762년부터 만하임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1770년에는 파리로 이주하여(동생 안톤 또한 함께 이주한 것으로 보임) 유럽 전반에 바이올린 연주자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파리에서는 노아유 공작의 궁정 작곡가로 근무하였고 동시에 헤이그, 상트페테르부르크, 런던 등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주 활동을 벌였습니다.


 1794~95년경 슈타미츠는 독일 중부의 도시인 예나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카펠마이스터와 대학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그는 경제적 곤란을 겪은 듯하고 자녀들도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 등 개인적인 어려움 속에 말년을 보냈습니다. 몇 년 뒤 그는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그의 서재에서 연금술에 관한 다수의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는군요. ㅡㅡ;


 슈타미츠는 매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50편을 넘는 교향곡, 38편 이상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60여 편의 협주곡을 작곡하였으며 실내악곡도 다수 있습니다. 그의 협주곡은 바이올린, 비올라, 비올라 다 모레, 첼로, 클라리넷, 바셋 호른, 플루트, 바순 등 많은 악기를 위하여 만들어졌는데 클라리넷의 경우 명연주자인 요제프 비어(1744-1812)와의 공동 작업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하이든-모차르트 스타일의 고전적 양상을 따르고 있습니다.



Henryk Wieniawski (1835-1880)

Violin Concerto No. 2 in d Op. 22




 -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는 폴란드 출신의 음악가로, 생전에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유명하였습니다. 파가니니 사후 파블로 데 사라사테(1844-1908), 앙리 비외탕(1820-1881), 요제프 요하임(1831-1907) 등과 함께 19세기 중후반을 수놓은 전설적인 바이올린 연주자 중 하나로, 작곡가로서는 다수의 바이올린 곡을 남겼습니다.


 - 당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폴란드의 루블린에서 출생한 비에니아프스키는 여느 대음악가들이 그렇듯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1843년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하였는데, 그가 프랑스인도 아니었고 나이도 너무 어렸지만 그의 재능을 확인한 음악원에서 특별히 입학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졸업 이후 그는 유럽 각지를 돌며 연주회를 하였는데, 그의 동생이자 피아니스트인 조제프 비에니아프스키(1837-1912)와 함께 하기도 했다는군요.


 - 1847년에는 첫 작품인 <Grand Caprice Fantastique>을 작곡하였는데 그 때 그의 나이가 12세...... 이후로도 그는 연주와 작곡 활동을 병행하였는데,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활동이 주였기 때문에 그가 작곡한 작품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1860년 그는 이사벨라 햄프턴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였는데, 부모가 그의 결혼을 반대하자 <Légende>(Op. 17)라는 작품을 써서 부모의 마음을 돌려놓았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 그 무렵 비에니아프스키는 안톤 루빈슈타인의 초청을 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고, 1872년까지 10여 년간 살았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러시아 음악 협회의 일원으로 오케스트라와 현악사중주 등의 연주활동과 바이올린 교육 등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1872년부터 2년간은 루빈슈타인과 함께 미국을 여행하였고, 1875년에는 브뤼셀 왕립음악원에 비외탕의 후임으로 선임되는 등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로 각지에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 하지만 이 때부터 건강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는데, 심할 때는 연주회를 중단해야 할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합니다. 1879년에는 러시아 각지를 돌며 연주회를 진행하던 도중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오데사의 병원에 입원했고, 차이콥스키의 후원자로 유명한 나데주다 폰 메크(1831-1894)와 비에니아프스키의 친구들 등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결국 그는 이듬해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생전 그는 파가니니의 뒤를 잇는 바이올린 테크니션으로 명성을 떨쳤고, 그에 걸맞(?)게 그의 바이올린 곡들은 대부분 그 난이도로 악명이 높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은 1856년부터 작곡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초연은 186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루어졌고, 1879년 출판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친구이자 역시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인 사라사테에게 헌정되었습니다.




Max Bruch (1838-1920)

<Kol Nidrei> Op.47

연주 : 한국교사오케스트라 (2016 겨울 연주회)


 - '콜 니드라이'의 어원은 아람어 '콜 니드레(כָּל נִדְרֵי)'입니다. 이는 유대교의 속죄일에 부르는 성가 중 하나로 아람어 단어로는 원래 '모든 서약'이라는 의미이며, '신의 날'이란 '욤 키푸르'라는 속죄일 명칭의 의미입니다. 이 노래는 신(야훼)과 유대인 사이에 맺어진 약속(서약)을 유대인들 자신이 지키지 못한 데 대하여,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브루흐는 평소 각국의 민속음악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가 지휘하는 합창단의 유대인 단원 하나가 이 성가의 선율을 그에게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속죄일에 부르는 노래답게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좋은 협주곡을 많이 남긴 브루흐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여담으로 브루흐는 유대인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작품 하나 때문에 유대인으로 오인받고 나치 독일 시대에는 그의 작품이 금지곡이 되기까지 했다는군요.


[후기] 소싯적에는 웅장하고 힘차고 신나는 곡을 주로 들었는데,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물론 지금도 그렇게 나이든 건 아닙니......) 경건하고 차분한 작품에도 조금씩 흥미가 붙더군요. 작품의 배경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단히 종교적이며 경건한 작품입니다. 이런 작품들을 감상하노라면 듣는 사람의 마음도 차분해지고,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는 게 참 좋습니다.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

Violin Concerto in e Op.64

연주 : 서강대학교 ACES (2016 봄 연주회)


 -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총 2곡이 알려져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두 번째 작품이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1번은 멘델스존이 유년기에 작곡한 것으로,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20세기 후반에야 재발견). 이 작품은 1843년부터 작곡이 진행되어 1845년에 초연이 이루어졌으니, 멘델스존이 사망하기 불과 2년 전에 완성된 후기 작품입니다. 베토벤, 브람스, 차이콥스키의 작품과 함께 최고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걸작이기도 합니다. 전체적인 구성은 일반적인 3악장이지만, 각 악장이 끊어지지 않고 끝까지 이어지는 독특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후기] 음악을 듣다 보면 작곡가의 인생이 그들의 작품에 얼마나, 어떤 형태로 투영되는가 생각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멘델스존은 역대 클래식 음악 작곡가들 중에서 최강급의 금수저(?)였고, 경제적인 어려움은 평생 겪지 않고 산 사람이죠. 그의 음악세계는 고도의 세련미, 편안하고 밝은 느낌으로 정리할 수 있을텐데 아무래도 그가 처한 환경이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이건 이전에도 어딘가에서 연주한 적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기억이 분명치 않네요.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Concerto for Two Violins in d BWV 1043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5 가을 연주회(2, 3악장))


 - 바흐는 총 3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남겼는데, 그 중 BWV 1043은 두 명의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717~1823년 사이에 작곡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는 바흐가 안할트쾨텐 후국(侯國)의 궁정에서 활동하던 때입니다. 이 무렵 바흐의 창작 활동은 절정에 달해 있었고, 바흐의 대표작 중 상당수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BWV 1043입니다. 이 작품은 작곡 이후 악보가 분실되었는데, 바흐의 차남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1714-1788)가 기억을 되살려내어 복원할 수 있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다수 연주자의 협연으로 연주되는 협주곡(합주 협주곡) 형식은 고전파 이후에는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바로크 시대에는 상당히 인기있는 형태의 음악이었습니다.


[후기] 1악장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연주해본 적이 있었는데(물론 블로거가 바이올린 협연을 했다는 소리는 아니고), 이 곡을 연주한다고 해서 편한 마음으로 갔더니 해 본 적 없는 2, 3악장만 연주한다고 해서 순간 당황할 뻔한 일이 있었지요. 바로크 시대의 첼로와 베이스는 기술적으로 어려운 부분을 연주할 일이 거의 없는데, 이 시기까지는 첼로에 엔드핀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불편한 자세로 연주를 해야 했고(다리 사이에 끼워놓고 연주), 당연히 어려운 패시지는 거의 연주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Alessandro Marcello (1673-1747)

Oboe Concerto in d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5 봄 연주회)


 - 마르첼로는 베네치아 원로원 의원 집안에서 태어나, 음악 뿐 아니라 미술, 문학 등에서도 재능을 나타내었고 취미로 예술 활동을 한 전형적인 귀족 음악가입니다. 동생 베네디토 마르첼로(1686-1739) 역시 음악가로, 오보에 협주곡은 기존에는 베네디토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716년 출판된 악보가 뒤늦게 발굴되면서 알레산드로의 작품으로 밝혀졌습니다. 한동안은 잊혀져 있었으나 동시대 활동한 바흐가 건반악기용으로 편곡(BWV 975)하면서 세상에 알려진 바 있습니다.


[후기] 바로크 음악이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가 분명히 있겠지요. 블로거는 바로크 음악의 친숙하고 편안한 느낌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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