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Symphony No.6 in b <Pathetique>
연주 : 한양대학교 하나클랑 (2009 정기연주회), 중앙대학교 루바토 (2011 가을 연주회)


 - 차이콥스키의 마지막 교향곡. 차이콥스키는 이 곡의 표제를 두고 고민을 거듭하다가, 동생의 제안을 받고 <비창(Pathetique)>이라는 표제를 붙였다고 합니다. 4악장은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매우 우울하며 조용하게 사라지듯 끝나는데, 이는 차이콥스키의 최후를 예견하고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실제로 차이콥스키는 <비창>이 초연된 지 불과 9일 후에 급사하였으며, 사인(死因)은 콜레라설, 자살설, 비소 중독으로 인한 명예살인설 등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여담으로 <비창>은 조카인 다비도프에게 헌정하였는데, 둘 사이가 동성애 관계라는 설도 있지만 이 역시 확실치는 않습니다. 다비도프는 차이콥스키가 사망한 지 13일 후 자살로 생을 마칩니다.


[후기] 연주를 해 보면 힘든 곡이 있고, 어려운 곡이 있는데 이 곡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도 있고, 4악장 같으면 생소한 리듬감에 그 느낌을 살리기가 아주~아주 어렵죠. 뭐 그래도 눈 앞에 닥치면 어떻게든 하더이다.



 - 지난 17일 방콕 도심의 에라완 사원 근방에서 폭탄테러로 인해 (18일 현재) 최소 21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태국 총리는 이번 테러가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지지세력 쪽에서 태국의 관광산업에 타격을 주기 위해 벌인 테러행위라고 주장하였고, 정부에서는 최근 중국으로 추방된 위구르 독립운동세력의 일원일 수도 있다는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합니다. 이번 테러는 방콕에서 발생한 사상 최악의 테러사건입니다. 관련기사


- 탁신 전 총리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닌데, 최근의 태국 정치는 군부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과 탁신의 지지세력으로 양분되어 시위와 쿠데타가 빈발하는 등 그야말로 난장판입니다. 군부의 쿠데타는 태국 현대정치사에서 특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며, 이것이 푸미폰 아둔야뎃(1927-, 라마 9세) 현 국왕의 권위와 뒤엉켜 현대 태국의 역사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1. Round 1 : 군부 vs 국왕

  - 태국은 1932년까지 절대군주제 국가였습니다. 이후 입헌군주정으로 전환하는데, 엉뚱하게도 이런 전환이 벌어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군부 쿠데타입니다. 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쿠데타(?)였던 당시의 쿠데타를 라마 7세 국왕이 받아들이고 입헌군주제 전환을 인정한 이후 태국의 정치체제는 '사실상 군부가 권력을 독점하는' 입헌군주제로 이어져 왔습니다.


- 얼마 후 라마 8세가 즉위하였지만 1946년 의문의 총기사고로 급사하자, 그의 동생인 푸미폰 아둔야뎃이 왕위를 이어받아 라마 9세가 되었습니다. 비록 왕이 되었다지만 권력은 군부가 틀어쥐고 있었으며, 푸미폰 국왕은 국가의 상징이자 구심점으로서의 권위를 쌓아나가며 권토중래를 노립니다. 푸미폰이 실질적인 권력자로 부상하게 되는 것은 1992년 수찐다 크라쁘라윤이 주도한 쿠데타 때입니다.


 - 수찐다의 쿠데타가 발생하자 잠롱 스리무앙(1935-)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반대시위가 발생하였고, 군부가 진압 과정에서 총기를 발포해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푸미폰은 자신을 알현하러 온 수찐다를 면전에서 강하게 비난하였고, 이 한 방으로 수찐다 내각은 붕괴하였으며 수찐다 본인은 외국으로 망명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총선거를 통해 사실상 최초의 본격적인 민주정부가 들어섰고, 푸미폰 국왕은 그야말로 태국 국민들의 숭배의 대상으로 떠오릅니다.


- 이후 십수년간 태국은 그럭저럭 민주적인 입헌군주국가로 잘 나가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2001년 2월 탁신 친나왓(1949-)이 총리로 취임하며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2. Round 2 : 탁신 vs (군부+국왕)

  - 탁신은 타이 굴지의 대기업을 창업한 화교 출신의 기업가입니다. 그러한 인물이 총리가 되었는데 특이하게도 그의 정책은 태국 역사상 가장 친서민적인 것이었고, 주로 하층민을 중심으로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이 생겨납니다. 태국은 발전 과정에서 상당히 심한 빈부격차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하층민들이 탁신에 지지를 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 당연하게도 이러한 정책은 보수파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보수파의 양대산맥인 왕실과 군부가 힘을 합쳐 탁신을 권좌에서 축출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스라윳 쭐라논 육군참모총장의 주도로 쿠데타가 발생하고, 푸미폰 국왕이 이를 승인한 것입니다. 이후 군부의 관리 하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흥미롭게도 친 탁신 세력이 승리를 거둡니다.


 - 다만 이 무렵부터 타이의 정치구도는 완전히 둘로 쪼개지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하층민이 중심이 된 탁신 지지세력과 왕실-군부를 중심으로 한 보수(기득권)세력입니다. 2010년에는 친 기득권 성향인 아파싯 웨차치와(1964-) 총리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는데, 이에 보수세력도 맞불을 놓으며 거의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 2011년에는 탁신의 동생인 잉락 친나왓(1967-)이 총리직에 올랐는데(이것 자체가 탁신 세력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보여주죠), 그는 탁신에 대한 사면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2013년 다시 대규모 시위를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탁신이 하층민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상당한 부패혐의를 받는 등 그리 깨끗하다고는 볼 수 없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 탁신 반대세력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또다시 찬성-반대측 사이에 사망자까지 발생하는 대규모 충돌이 벌어졌고, 이는 푸미폰 국왕의 생일인 12월 5일 휴전을 선언하며 진정되나 싶었지만 2014년 5월 잉락 총리가 '권력남용'을 이유로 헌법재판소로부터 총리직 상실 판결을 받으며 다시 폭발합니다.


 - 혼란이 커지는 와중에 5월 20일 난데없이 군부에 의해 계엄령이 선포되고, 22일 쁘라윳 짠오차(1954-) 육군참모총장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음을 인정합니다. 이 쿠데타는 푸미폰 국왕에게 승인받으며 태국 역사상 12번째 '성공한 쿠데타'로 기록되었습니다. 쁘라윳은 선거 없이 총리직에 올랐으며, 이후 2015년 현재까지 태국에서는 새로운 총선이 실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3. 태국 정치에 봄날은 오는가

  - 태국의 정치는 과연 다시금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타이에서는 1932년 이후 12번의 '성공한 쿠데타'와 7번의 '실패한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이를 합쳐 평균하면 대략 4년에 한 번 꼴로 쿠데타가 발생한 셈입니다. 애초에 태국 군부는 정치에 깊숙히 개입해왔고, 정치가 혼란에 빠졌을 때 마치 끝판왕(?)처럼 등장하여 모든 상황을 종결시키곤 하였습니다.


 - 이는 마치 터키의 정치와도 비슷해 보이는데, 다만 터키의 쿠데타는 군부가 세속주의를 대표하며 쿠데타 이후 정치권력을 잡지 않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데 비해(이는 현대 터키의 건국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의 유산) 태국은 쿠데타 세력이 직접 정치권력을 잡는다는 차이는 있습니다.


 - 왕실이 있지만 군부가 권력을 독점하는 태국의 정치 지형에서 군부와 왕실은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1992년의 쿠데타에서 잘 드러납니다. 국왕이 민주화세력과 힘을 합쳐 군부를 억누르는 구도가 되었죠. 이 결과 국왕은 태국의 수호자라는 절대적 권위를, 민주화세력은 민주정부를 얻게 됩니다.


 - 그런데 민주정치 하에서 탁신으로 등장하는 포퓰리스트(블로거는 이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로 쓰고 있지 않습니다)의 시대가 열리자, 이를 원치 않는 왕실은 이번에는 군부와 손을 잡게 됩니다. 2006년과 2014년의 쿠데타는 다 푸미폰 국왕의 승인을 통하여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국왕의 승인이 없으면 아무리 강력한 쿠데타라도 한 방에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아시겠지요?


 - 다만 최근의 난장판을 단순히 왕실과 군부의 잘못으로만 돌리기에는 부족한 부분도 있습니다. 탁신은 현재 태국의 하층민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처럼 되어 있지만, 그 자신이 기업가 출신이고 이런저런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있는 등 지도자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탁신에 대한 사면 시도가 대대적인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도 분명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 태국 정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2006년 이후 태국의 보수세력을 지탱하는 것은 푸미폰 국왕 개인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 지지입니다. 국왕에 대한 모독이 과도할 만큼 금지되어 있다거나, 이러한 지지가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은 있지만 어쨌든 국민들이 그를 거의 신급으로 존경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푸미폰은 다시금 절대권력에 가까운 권력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 하지만 이러한 지지가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 푸미폰 국왕은 이미 나이 90을 바라보면서 각종 건강 문제에 시달리고 있으며, 와찌랄롱꼰 왕세자(1952-)는 성격과 사생활 문제, 역시 건강이상 의혹까지 겹쳐 있어 국민들에게 매우 평판이 나쁩니다. 따라서 푸미폰 사후 그의 자녀들이 뒤엉켜 권력투쟁을 벌일 것이라는 전망도 있죠. 이래저래 태국 정치의 민주적 정상화는 아직도 요원해 보입니다.


참고 : 1 2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Piano Concerto No.1 in bb
연주 : 한양대학교 하나클랑 (2009 정기연주회)

- 차이콥스키는 1874년 12월 대략 1개월 남짓의 빠른 시간동안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여, 모스크바 음악원의 원장이던 니콜라이 루빈슈타인(1835-1881, 피아니스트 안톤 루빈슈타인의 동생)에게 조언을 구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당시 루빈슈타인은 이 곡에 대해 "연주가 불가능하다" 등의 대혹평을 쏟아냈고, 격분한 차이콥스키는 곧장 악보를 들고 뛰쳐나갑니다. 루빈슈타인이 당황하여 약간의 수정만 있으면 자신이 초연을 맡겠다고 말했지만 "음표 한 개도 고칠 수 없다"고 선언한 차이콥스키는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한스 폰 뷜로(1830-1894)에게 초연을 부탁하였고, 이 곡을 좋게 평가한 뷜로는 기꺼이 초연을 맡아 대성공을 거둡니다. 나중에 루빈슈타인은 차이콥스키와 화해하고 곡의 모스크바 초연을 직접 협연하기도 하였습니다. 작곡 당시의 우여곡절과는 반대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3개 중 압도적으로 인기 있는 작품이 되어 있습니다. 여담으로 뷜로는 보스턴에서의 초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 차이콥스키에게 소식을 알리는 전보를 보냈는데, 이것이 보스턴-모스크바 사이의 최초의 전보라는 말도 있습니다.

[후기] 어쩌다보니 러시아 쪽에서 온 피아니스트와 연주를 했더랍니다. 지휘자 때문에 영 신뢰성이 가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어쨌든 연주 자체는 상당히 파워풀하고 좋았던 것으로 기억.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Slavonic March Op.31

연주 : 한양대학교 하나클랑 (2009 정기연주회), 중앙대학교 루바토 (2011 가을 연주회)


 - 이 작품은 1876년 발발한 세르비아-투르크 전쟁(나중에 러시아-투르크 전쟁으로 확대)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민족주의가 발흥하던 시대에 이 전쟁은 슬라브 민족 전체의 전쟁으로 선전되었고, 슬라브 민족의 맹주를 자처하는 러시아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 전부터 이미 세르비아를 지원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의 원장이던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의 주도로 상이군인에 대한 의연금을 모금하는 자선 음악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작품은 루빈슈타인의 위촉을 받고 작곡한 것입니다. 작곡 배경이 배경이다보니 곡 전반에 슬라브 민요풍의 선율이나 러시아 황제 찬가 등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요소들이 잔뜩 들어가 있습니다.


[후기] 보통 서곡 자리에 많이 들어가죠. 하나클랑에서 연주회를 할 땐 지휘자가 영 이상한(?) 사람이라 서곡-협주곡-교향곡의 일반적인 순서를 거꾸로 뒤집어 연주하는 바람에, 이 곡을 가장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기억이 납니다.



- 왕자지(王字之, 1066-1122)는 고려 중기의 문관입니다. 고려 건국 공신이자 해주 왕씨의 시조인 왕유(?-?)의 후손으로, 본래 이름은 소중(紹中)이었고 자지(字之)라는 이름은 나중에 개명한 것입니다. 자는 원장(元長). 무엇으로 불러도 이상하다 일단 그의 부모에 대하여는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긴 하지만, 그가 음서를 통하여 관직에 오른 것으로 보아 그의 아버지 또한 고위관직에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왕자지는 음서로 관직에 올라 서리(胥吏)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에 오릅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출세하게 된 계기는 1095년 왕의 외척이자 권신인 이자의(이자겸의 사촌) 암살사건이었는데, 당시 계림공(훗날의 숙종)의 명을 받아 이자의를 제거한 왕국모에게 협력하여 요직에 진출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 이후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자지는 내시(고려시대의 내시는 '환관'이 아닌 일반적인 관직)와 전중시어사 등의 요직을 거쳤고, 예종 때인 1108년에는 병마판관으로 임명되었는데 바로 이 때 윤관(?-1111) 주도의 동북 9성 침공이 시작되면서 그는 윤관 휘하의 장군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고려시대에는 문관이 부대 사령관을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문관인 왕자지가 장군으로 출전하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총사령관인 윤관 역시 문관이었고, 이전 시대 귀주대첩을 지휘한 강감찬 역시 문관).


 - 이 전쟁에서 왕자지는 실제로 많은 전공을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전황은 순조로워서 여진족을 연파하고 순조롭게 9성을 확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진족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고려군은 많은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한 번은 왕자지의 부대가 행군 중에 여진족의 기습을 당했는데, 이 때 왕자지는 타던 말을 잃고 화살까지 맞는 등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 때 그를 구원한 인물이 바로 한국사 굴지의 인간흉기 척준경. 그는 여진족 부대를 격파하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말까지 한 마리 빼앗아 왕자지에게 넘깁니다. 이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후 왕자지와 척준경은 절친이 되었다는군요.


 - 이후로도 꾸준히 전투를 치렀지만 9성을 여진족에게 반환하기로 하면서 고려군은 다시 천리장성 안쪽으로 철수합니다. 돌아온 이후로도 왕자지는 꾸준히 승진하여, 1115년에는 이부상서(요즘으로 치면 안전행정부 장관)에 취임하고 같은 해 사은겸진봉사(謝恩兼進奉使)로 송나라에 파견됩니다. 그는 이듬해 고려로 돌아오면서 송나라의 대성아악(大晟雅樂)을 전수받아 돌아오는데, 이게 상당히 중요한 것이 그가 전수받은 대성아악은 이후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으로 이어져 조선시대까지 이어집니다.


 - 이후로 그는 동북면 병마사, 호부상서, 이부상서 등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치고, 중서문하성 참지정사를 역임하던 1122년 병으로 개경에서 사망합니다. 예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3일간 조회를 쉬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나중에는 예종의 묘정(廟庭)에도 배향(해당 왕의 시대에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을 종묘에 함께 모시는 것)되는 영광을 안......을 뻔했으나 반대 상소가 이어져 결국 배향은 되지 않았습니다. 이름 때문이 아니라 탐욕이 심하고 부정부패했다는 게 이유라고 합니다.


 - 이후 조선시대에는 이 사람이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문묘제례악의 뿌리인 대성아악을 도입한 인물이고, 조선시대엔 문묘 제례가 굉장히 중요했으니 그랬겠죠. 어쨌든 고려시대 정치사나 문화사에서 꽤 무게있는 인물인 데 비해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역시 그 시대가 문학이나 영상으로 다루어진 적이 별로 없었던 게 커 보이는데, 특히 동북 9성 개척은 척준경의 말도 안 되는 무용담도 그렇고 사극 등에서 다룰 만한데도 제대로 다뤄진 적이 별로 없죠.


 - 거의 유일하게 <푸른바람 척준경>이라는 웹툰이 있었는데, 무슨 사정이라도 있었는지 스토리가 조금 진행되다가 뜬금없이 연재가 끝나 버렸습니다. ㅡㅡ; 우스갯소리로 척준경의 일대기가 사극화되지 못하는 게 다 왕자지 때문이라고 하기도.




Jac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

Symphony No.4 in A <Italy>

연주 : 한양대학교 하나클랑 (2009 신입생 환영 연주회)


 -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멘델스존은 어려서부터 여러 차례 여행을 다니곤 하였으며, 이 때의 인상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교향곡 4번 <이탈리아>의 경우는 1829~31년 사이 장기간의 유럽 여행 중 이탈리아에서 받은 인상과 느낌을 바탕으로 작곡되었고, 1833년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지만 여러 차례 개작하여 출판은 그의 사후에야 이루어집니다. 4악장은 '살타렐로'와 '타란텔라'라는, 이탈리아에서 당시 유행하던 두 춤곡 양식을 따왔으며 매우 빠르고 격렬한 느낌으로 유명합니다.


[후기] 1악장이 보통 유명하긴 하지만 이 곡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4악장. 어려운만큼의 성취감(혹은 도취감)은 반드시 주는 부분이죠.




Antonin Dvorak (1841-1904)

Slavonic Dance No.10 in e (Op.72 No.2)

연주 : 한양대학교 하나클랑 (2009 신입생 환영 연주회)


 - 평소 브람스를 존경하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드보르자크는, 브람스가 <헝가리 무곡> 시리즈로 호평을 거두자 이에 자극을 받아 슬라브 민속음악에 바탕을 둔 모음곡 작곡에 착수합니다. 그는 이전부터 슬라브 음악에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총 8곡으로 된 피아노 연탄곡 <슬라브 무곡집> (Op.46)을 발표하여 성공을 거둡니다. 처음에는 가정 등에서 소규모로 연주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작곡하였지만, 곡이 큰 인기를 끌자 관현악으로 편곡하였고 이후 8곡을 추가한 <신 슬라브 무곡집> (Op.72)를 새로 발표하여 총 16곡이 되었습니다. Op.72에 포함된 10번은 그 중에서도 가장 널리 연주되는 곡으로 유명합니다.


[후기] 곡의 인기에 비해서는 그렇게 많이 연주한 기억은 없습니다. 앙코르 곡으로도 한 번쯤 연주한 적이 있었지 싶은데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네요. 아무튼 워낙 유명하고, 길이도 적당하기 때문에 연주 자체는 많이 되고 있습니다. 정식 순서로도 많이 들어가고, 앙코르 곡으로도 많이 연주하죠. 2009년 당시에는 (이제 막 첼로를 다시 잡은 시점이라) 주선율을 첼로가 하이포지션으로 연주하는 부분이 상당히 까다로웠던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Pietro Mascagni (1863-1945)

<Cavalleria Rusticana> "Intermezzo"

연주 : 한양대학교 하나클랑 (2009 신입생 환영 연주회),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4 봄 연주회)


 -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마스카니의 데뷔 작품이자 실질적인 대표작으로, 1889년 밀라노의 한 음악출판사가 공모한 오페라 작곡 경연대회에 출품하여 대상을 차지한 1막 오페라입니다. 제목은 한국어로 '시골 기사도'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네요. 마스카니는 이 작품 하나로 일약 유명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이후의 작품들은 신통치 않았고, 말년에는 무솔리니에 협력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재산이 몰수당하는 등 썩 매끄럽지 못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후기] 워낙 유명하고, 길이도 적당히 짧고, 연주 난이도 역시 크게 높지 않다보니 어느 오케스트라에서든 애용되고 뭔가 틈새가 생겼을 때 스페어(?)로도 많이 들어가는 작품입니다. 앙코르 연주에도 많이 쓰이고 블로거 역시 몇 번인가 앙코르 연주를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저기 연주목록에는 정식으로 기록에 남은 클래식 곡들만 올리다 보니 누락시키게 됐네요(사실 앙코르 곡은 별로 기억나는 게 없기도 하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