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dály Zoltán (1882-1967)

<Háry János> Suite



[코다이 졸탄]


 코다이는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이며, 음악학자이자 음악교육자이기도 합니다. 바르토크와 함께 헝가리의 '진짜' 민속음악을 발굴하여 세계에 알렸으며, '코다이 교수법(Kodály method)'이라는 음악교육이론을 제창하여 음악교육에도 큰 업적을 남긴 바 있습니다. 그는 1882년 헝가리 중부의 케치케메트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철도노동자였기 때문에 자주 이사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음악가 집안은 아니었지만 부모 모두 취미로 악기와 성악을 즐기는 음악애호가여서 그는 어릴 적부터 음악과 친숙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코다이 역시 어릴 적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익혔습니다. 그는 중등학교에 다니던 10대 시절 처음으로 작곡을 시도했는데, 16세 때 학교 오케스트라를 위하여 작곡한 서곡이 처음 세간에 알려지며 호평을 받았습니다. 18세 때 그는 부다페스트 대학에 입학하여 독일어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고, 음악 또한 포기하지 않고 리스트 음악원에 동시 입학하여 한스 쾨슬러(1853-1926)를 사사하였습니다.


 다만 그의 아버지는 음악애호가였음에도 자신의 아들이 음악 전공자가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여 "작곡가는 남자가 할 만한 직업이 아니다"라고 ㅡㅡ; 코다이를 말렸고, 그는 일단 자신의 진로를 교사 쪽으로 결정했습니다. 1905년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아다지오>로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때마침 헝가리의 다른 대작곡가인 바르토크를 처음 만났는데, 바르토크는 이미 헝가리 민속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를 거치며 브람스의 <헝가리 춤곡> 등 집시 음악이 헝가리 음악으로 세계에 알려져 진짜 헝가리 민속음악은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축음기를 들고 헝가리 각지를 돌아다니며 농민과 서민들의 음악들을 채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1906년 첫 결실인 <헝가리 민요집>을 출판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코다이는 「헝가리 민요의 운율구조」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따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도 수십 년간 코다이와 바르토크는 헝가리의 수백 개 마을에서 수천 곡의 민요를 수집하여 진정한 '헝가리 음악'을 세우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이들을 후원하던 샹도르 엠마(1863-1958)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코다이와 결혼하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헝가리가 잠시 공산화되자 코다이는 이에 협력하였지만, 이 정권이 얼마 뒤 무너지자 잠시 정치적으로 곤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상관 없이 음악 관련 활동은 지속하여 1923년 <헝가리 시편가>를, 1926년에는 오페라 <하리 야노슈>를 완성하는 등 작곡가로서 그의 대표작을 다수 발표하였습니다. 물론 헝가리 민속음악 연구도 꾸준히 진행하고, 음악교육 관련 활동도 지속하였습니다.


 1940년대 들어 헝가리는 나치 독일의 동맹국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나치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바르토크와 달리 코다이는 끝까지 헝가리에 남아 음악교육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리고 종전과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에는 전쟁 기간을 포함하여 그가 음악교육 등에 남긴 공로를 인정받아 헝가리 음악계의 정점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그는 헝가리 국립음악원장, 음악가협회장, 과학기술원 명예회원을 역임하고, 헝가리 정부로부터 많은 훈장과 포상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958년 첫 아내 엠마가 사망하자 다음 해 58세 연하인 셔롤터 피첼리(1940-)와 재혼하였습니다. ㅡㅡ;


 말년에는 작곡가, 음악학자, 음악교육자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가 제창한 특유의 리듬 및 선율학습, 모국어처럼 어린이에게 친숙한 민요 선율을 바탕으로 한 음악교육 등 '코다이 교수법'은 1960년대 이후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아 음악교육학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권위와 명성의 정점에 오른 그는 1967년 사망하였고, 그의 두 번째 부인은 현재까지 생존하여 코다이의 음악을 알리고 있다고 합니다.


 <하리 야노슈> 모음곡은 동명의 오페라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리 야노슈'란 헝가리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로, 한 시골 마을에서 나폴레옹 전쟁 당시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허풍을 떨곤 했다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이 곡은 관현악의 '재채기'로 시작하는데 헝가리의 속설에 따르면 이야기를 하다가 듣는 사람이 크게 재채기를 하면 그 이야기가 진실하다는 말이 있다는군요.




참고 : 

http://sound.or.kr/bbs/view.php?id=music3&no=872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ovegalaxy1&logNo=60039228809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yu5071&logNo=120190904187

http://ihsnews.com/11125

한글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Alexander Nikolayevich Scriabin,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Скря́бин (1872-1915)

Symphonic Poem(Symphony No. 4) <The Poem of Ecstasy> Op. 54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 스크랴빈은 러시아 모스크바 출신의 작곡가 겸 피아노 연주자입니다. 어머니 또한 피아노 연주자였는데 스크랴빈을 낳고 얼마 뒤 사망하였고,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와 숙모에게 양육되었습니다. 숙모 또한 아마추어 연주자였으며 그는 숙모를 통해 음악을 처음 접할 수 있었습니다. 1882년 10대에 접어든 스크랴빈은 군사유년학교에 입학하여 1889년까지 군사교육을 받았지만, 몸이 작고 약했기 때문에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 일단 유년학교 시절에도 스크랴빈은 음악교육을 계속하였는데, 특히 피아노 연주에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내어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음악원 연주회에 참여할 정도였다는군요. 결국 그는 군사유년학교를 그만두고 1888년 음악원에 정식 입학하여 세르게이 타네예프(1856-1915), 바실리 사포노프(1852-1918), 안톤 알렌스키(1861-1906)에게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 스크랴빈은 피아노 연주자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는데, 음악원 시절 라이벌인 요제프 레빈(1874-1944)을 의식한 나머지 과도한 연습을 하다가 오른손에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고 합니다(다행히 회복됨). 1892년 피아노과 졸업 학위를 딴 그는 작곡과 학위도 따려고 했지만 작곡 스승인 알렌스키와 작품 스타일 관련 문제로 갈등하였고 결국 학위를 받지 못하고 졸업하게 됩니다.


 - 1894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데뷔하였고, 얼마 뒤 음악 관련 기획자인 미트로판 벨랴예프(1836-1903)을 만나 그의 지원 하에 러시아와 유럽 각지를 돌며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1897년에는 동료 피아니스트인 베라 이사코비치와 결혼하였고, 이듬해에는 모스크바에 다시 정착하여 모스크바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가 되었습니다.


 - 모스크바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던 스크랴빈은 1904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스위스로 이주하여 활동하였는데, 하필 이 때 타티아나 슐뢰저라는 사람과 바람이 나서 스캔들이 나는 바람에 아내와는 이혼하고 <법열의 시> 뉴욕 초연이 취소되는 등의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파리와 브뤼셀을 오가며 작곡 활동에 전념하였고, 1909년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습니다.


 -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쇼팽 등의 낭만파 경향을 이어받았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급속히 변화하여, 다분히 철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띠게 됩니다. 실제로 그의 후기 음악은 불협화음을 과감히 활용하는 등 아주 몽환적인 모습을 띠고 있으며, 후년에는 음악과 색채의 결합을 시도하여 1910년 교향곡 5번 <프로메테우스> 초연 때는 아예 '색광(色光) 피아노'라는 특수한 장치를 동원하기도 하였습니다.


 - 이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많은 지역을 돌며 연주와 작곡을 계속하던 스크랴빈은, 1915년 어느 날 윗입술에 생긴 작은 종기(혹은 뾰루지)를 잘못 건드린 것이 세균에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번져 ㅡㅡ;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법열의 시>는 1907~1908년 사이 작곡되었고, 간혹 교향곡(4번)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대체로 그의 작품이 신비주의로 완전히 넘어가는 과도기의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작곡가는 같은 제목으로 신비주의적 내용의 긴 시를 쓰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연주 : 비엔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98. 지휘 :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


Franz Lehar (1870-1948)

Waltz <Gold und Silber> Op. 79


 - 프란츠 레하르는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헝가리계 작곡가로, 헝가리식 이름은 '레하르 페렌츠(Lehár Ferenc)'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코마롬에서 출생하였고, 헝가리계인 아버지는 군악대에서 지휘자로 근무했습니다. 프라하 음악원에서 안토닌 베네비츠(1833-1926)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이 때 안토닌 드보르자크를 만나 작곡에 도전해 볼 것을 권유받았지만 당시 음악원 규정상 연주와 작곡을 함께 전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규정에 따르면서 작곡을 독학해야 했습니다.


 - 1888년 음악원 졸업 후 레하르는 아버지의 악단에 부지휘자로 합류하여 음악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2년 후에는 최연소로 정식 밴드마스터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육군 쪽에서 활동하던 그는 중간에 잠시 해군으로 옮겼고, 이 때 첫 번째 오페라를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다시 육군으로 옮겨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 1905년 초연한 오페레타 <메리 위도우(유쾌한 미망인)>가 큰 호평을 받으며 레하르는 인기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후 그는 비엔나로 거처를 옮겼고, 오페레타 작곡 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레하르는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비엔나의 오페레타 작곡가로 입지를 굳혔고, 큰 명성과 그에 걸맞는 부를 함께 거머쥐게 됩니다. 이 시기 그는 오페레타 뿐 아니라 왈츠, 교향곡 등의 기악곡 또한 다수 작곡하였습니다.


 - 승승장구하던 레하르도 1930~40년대를 풍미한 나치의 격동기를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출신이 헝가리계였고 심지어 부인은 개종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의 핍박을 받을 처지였지만, 히틀러가 그의 작품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ㅡㅡ; 그는 일단 나치의 탄압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나치에 협력하는 모습은 보여야 했기 때문에 그는 히틀러 50세 생일 기념 음악회를 주도한다거나 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 그 와중에 그는 자기 주변에 있던 유대계 인사들을 인종청소로부터 보호하고자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나치의 인종청소가 강화되자 그는 자기 아내와 함께 스위스로 망명, 취리히에 머물게 됩니다. 그는 금방 비엔나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했지만 망명지에서 자기 아내가 사망하고 유대계 친구들이 학살당한 사실을 알게 되자, 비엔나 복귀를 포기하고 종전 후 잘츠부르크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습니다.


 - <금과 은>은 1902년 작곡되었으며, 메테르니히 공주가 주최한 '금과 은' 무도회의 음악으로 위촉받아 만들었습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일족의 전통을 따르라는 주문에 레하르는 자기 고유의 색깔을 더해 작품을 썼고, 많은 인기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여담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말년의 레하르는 "새로 왈츠를 쓰게 된다면 '금과 은' 정도는 어림도 없으니 <우라늄과 원자폭탄> 이라고 이름을 붙여 볼까?"라는 개드립 농담을 한 적이 있다는군요.



Ivo Josipović (1957-)

<Samba da Camera>



 - 요시포비치는 크로아티아의 작곡가, 법학자 겸 정치인ㅡㅡ;입니다. 작곡가나 법학자로서의 업적도 볼만하지만, 특히 2010년부터 2015년까지 크로아티아의 대통령을 역임한 거물급 정치인으로 더 유명합니다.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의 중요 인물이었고, 현재는 '전진 크로아티아'당을 이끌고 있습니다.


 - 요시포비치는 1957년 유고슬라비아의 자그레브(現 크로아티아 수도)에서 출생하였습니다. 학창시절에는 축구선수로 활동한 적도 있다고 하며,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자그레브의 2차 음악학교에서 음악 수업을 함께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자그레브 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하였는데, 그와 함께 자그레브 음악학원에도 등록하여 음악 수업을 계속 받았습니다. 진정한 복수전공


 - 그는 1985년 형법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1994년에는 범죄과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84년부터는 모교에서 강사로 활동을 시작, 이후 법학부 교수로 선임되기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ㅡㅡ; 1983년 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작곡한 <삼바 다 카메라>가 1985년 유럽방송연합 상을 수상하면서 작곡가로서도 인정받게 됩니다. 1987년부터 2004년까지는 자그레브 음악학교의 강사 또한 역임하였습니다. 도대체 못하는 게 뭐냐 당신은


 - 정치 활동은 1980년 크로아티아 공산당(당시 크로아티아는 유고슬라비아 내의 '자치공화국'이었음을 감안합시다)에 입당하면서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1990년 전후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시기에 요시포비치는 공산당을 '사회민주당'으로 재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사회민주당의 첫 번째 법령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1994년 그는 너무 바빠서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작곡가와 법학자로서의 활동에 집중하였습니다.


 - 이후 2003년 그는 당시 총리였던 이비차 라찬(1944-2007)의 권유로 정계에 복귀하였고, 국회의원과 사회민주당 부대표로 활동하였습니다. 이후 2010년에는 사회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제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대통령 요시포비치는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 내전 때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사이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해 사과하였고, 집권 초기에는 지지율 88%를 찍는 등 대단한 인기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 하지만 집권 내내 계속된 경제난 등 악재가 겹쳐 집권 말기에는 인기를 상당히 잃었고, 2014년 대선에서는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크로아티아 민주동맹 소속 콜린다 그라바르키타로비치(1968-)에게 근소하게 패배, 대통령 임기를 마쳤습니다. 퇴임 이후에는 '전진 크로아티아'라는 중도좌파 성향의 당을 창당하고, 자유인민당과 연합하여 총선에 후보도 내 봤지만 역시 크로아티아 민주동맹에 패배하였습니다.이후로는 전진 크로아티아 당 대표로 정치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여담으로 그는 대통령 재직 말기인 2014년 태권도 명예9단을 수여받은 적도 있습니다. ㅡㅡ; 이는 요시포비치 자신이 태권도를 잘 해서라기보다, 크로아티아가 동유럽에서 태권도 인기가 가장 높은 편이고 세계랭킹 상위권 선수들도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Camille Saint-seans (1835-1921)
Symphonic Poem <Danse Macabre> Op.40
연주 : 한국교사오케스트라 (2016 겨울 연주회)

 - <죽음의 무도>는 중세 말기 이래로 전해진 유럽의 괴담에 기원하고 있습니다. 중세 말기는 흑사병의 대유행 등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한 시기였고, 이 시기의 예술은 죽음을 소재로 한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시체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산 사람을 만나거나 무덤에서 춤추는 모습을 그린 미술작품이 이 시기 이래로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죽음의 무도>라고 합니다. 이는 죽음의 보편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 생상스의 이 작품도 그러한 흐름을 따르고 있는데, 직접적인 소재는 앙리 카잘리스(1840-1909)가 쓴 시에서 따 왔습니다. 시에서 따 온 작품이라 처음에는 성악곡으로 작곡하였는데, 이후 성악 파트를 바이올린 독주로 바꾸어 순수 관현악곡으로 만든 버전이 일반적으로 연주됩니다. '죽음'이 주제이긴 하지만, 해골들이 춤추고 노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것이라 곡의 분위기는 어둡거나 슬프지는 않습니다. 생상스는 이 작품의 선율을 <동물의 사육제>에 살짝 인용하여 써먹기도 하였습니다.


[후기] 이 작품을 언젠가 연주해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입니다(이 작품과 헷갈렸던 듯). 이 작품에서 상당히 인상깊었던 점이라면, 솔로 바이올린이 평소와 다른 음으로 튜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E현을 Eb로 튜닝해야 하는데, Eb 음을 개방현으로 소리내기 위해서지요(이러한 기법을 '스코르다투라'라고 합니다).




Iannis Xenakis (1922-2001)

<Metastasis>



 - 크세나키스는 그리스 출신의 건축가, 작곡가입니다(본업은 건축가). 출생지는 루마니아의 브러일라이며, 부모는 그리스계 인텔리 계층에 속해 있었습니다. 부모가 모두 음악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크세나키스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5세 때 세상을 떠났고, 이는 그에게 큰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 크세나키스는 10세 때 그리스로 보내져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후 1938년에 그는 아테네 공과대학에 입학하여 건축을 전공하였는데, 전공 교육을 받는 틈틈이 화성학과 대위법 등 음악 쪽 공부도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리스가 이탈리아와 독일의 연이은 침공으로 전쟁에 휘말려들자 그의 인생도 뒤흔들리게 됩니다.


 - 1941~1944년까지 계속된 추축국 점령기동안 크세나키스는 그리스 민족해방전선에 참여하여 저항군으로 활동하다가 부상을 입고 한쪽 눈을 실명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간 크세나키스는 간신히 학교를 졸업하고 학위를 받았는데, 이 무렵 좌우파의 대립이 외국의 개입을 등에 업고 내전으로 번지자(그리스 내전) 그는 그리스 민주군(좌파)에 참여하여 다시 전쟁에 나섰습니다.


 - 내전은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은 우파 쪽의 승리로 끝났고, 좌파 계열 인사들이 대거 학살당하는 와중에 그는 가까스로 몸을 피하고 프랑스로 망명하였습니다. 망명지에서 크세나키스는 대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의 조수로 들어가 활동하였고, 작곡을 더 배우기 위해 아르튀르 오네게르(1892-1955), 다리우스 미요(1892-1974) 등을 찾아갔지만 큰 성과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코르뷔지에가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 이후 크세나키스는 올리비에 메시앙(1908-1992)을 찾아갔고, 메시앙에게서 비로소 가능성을 인정받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메시앙이 특히 높게 평가한 것은 크세나키스가 건축가이며 고급 수학을 배웠다는 것인데, 실제로 크세나키스는 확률론을 비롯한 각종 수학적 이론을 음악에 도입하여 독특한 음악적 세계를 만들어낸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 크세나키스는 1959년 코르뷔지에 사무실을 떠나 독립하였고, 이후 건축가와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인디애나 대학, 소르본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코르뷔지에 사무실에서 일하던 1958년에 사무실은 브뤼셀 엑스포의 전시관인 필립스관(館)을 설계하였는데, 크세나키스는 이 건물의 구조와 기술적 요소를 적극 활용한 <Metastasis(전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가 작곡가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Gioacchino Rossini (1792-1868)

<La Cenerentola> "Overture"

연주 : 서강대학교 ACES (2016 봄 연주회)


 - <신데렐라>는 본래 유럽 지역의 전래 동화로, 17세기 이후 여러 작가들이 나름대로 정리, 각색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신데렐라 이야기는 대부분 프랑스를 대표하는 동화작가 샤를 페로(1628-1703)가 쓴 것이며, 특히 20세기에 디즈니 만화영화에 페로가 쓴 줄거리가 채택되면서 전 세계로 퍼지게 됩니다. 로시니의 오페라 역시 페로의 버전을 기초로 대본을 만들었으며, 로시니는 (늘상 그렇듯이) 마감에 쫓기며 불과 3주만에 전곡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이 곡은 여주인공 역할을 메조소프라노~콘트랄토에게 맡겼기 때문에 해당 파트의 가수가 드물어진 20세기 들어서는 거의 잊혀지다시피 했지만, 20세기 후반 들어 잊혀진 오페라들이 재조명될 때 함께 부활(?)하여 다시 상연되고 있습니다.


[후기] 이 작품을 MP3로 넣어놓고 많이 들어놓고서, 정작 곡 이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ㅡㅡ; 이제 로시니 서곡을 제법 많이 했다보니 이 곡도 전형적인 로시니 것이로구나...... 싶어집니다. 로시니가 고전파-낭만파 중간쯤에 있던 작곡가다보니, 첼로 같은 경우 곡 전반에서 고전파 스타일의 기계적인 부분들이 자주 나옵니다.






Gabriel Faure (1845-1924)

<Dolly> Suite Op.56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5 가을 연주회)


 - 가브리엘 포레는 작곡가, 오르간 연주자, 음악교육자로 활동하였으며 20세기 초 프랑스 음악계의 개혁에도 일정 부분 공헌한 인물입니다. 포레는 1883년 조각가 엠마누엘 프레미에(1824-1910)의 딸 마리 프레미에와 결혼하였으나, 결혼 생활에 충실하지 못했고 여기저기 바람을 피우고 다녔습니다. 그 중 유명한 사례가 엠마 바르다크(1862-1934)와의 불륜염문이었는데, 바르다크는 가수이며 은행가의 부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바르다크에게는 엘렌이라는 딸이 있었고 '돌리'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포레는 엘렌을 위하여 네 손을 위한 피아노곡을 만들고 그의 애칭을 제목에 붙였습니다. 이 작품은 이후 관현악으로 편곡되어 연주되고 있습니다.


[후기] 어느 시점부터 (듣거나, 연주하거나를 막론하고) 요란한 작품만큼이나 이런 잔잔한 곡들이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글쎄, 그만큼 정신이 성숙해서일지 낡아서(?)일지는 잘 모르겠네요. 따지고 보면 저 둘은 비슷한 말 아니던가? 연주할 때 특별할 건 없는데, 리듬을 꼬아놓은 곡이 몇 있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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