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r Michael Kemp Tippett (1905-1998)

Symphony No.3 Part.2




 마이클 티펫은 영국 출신의 작곡가로, 벤자민 브리튼(1913-1976)과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영국 작곡가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합니다. 그의 집안은 영국 서남부의 콘월 출신이고, 할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였지만 아버지는 성공하여 집안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결혼 후 런던 근교에 정착하였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둘째가 바로 마이클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후 그의 가족은 동부 서포크 주의 웨더덴으로 이사하였는데, 티펫은 이곳에서 유년기 교육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재능은 그 때부터 있었는지 어린 나이에도 나름 즉흥연주 같은 것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이후 1914년 그는 남부 스와니지에 있는 기숙학교에 진학하고, 1918년에는 에딘버러의 명문학교인 페테스 스쿨에 진학하여 다른 과목들과 함께 파이프 오르간 등의 음악교육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별로 유쾌하지 못했는데 주변 학생들의 괴롭힘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얼마 뒤 그는 부모에게 자신이 친구 남학생과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고 밝히고, 부모는 그를 학교에서 퇴학시켰습니다. 이후 그는 링컨셔의 스탬포드 스쿨로 전학하여 계속 공부하였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득이 되었는데, 학문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스탬퍼드 스쿨에서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전반적인 학업에 매진하면서도 그는 음악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조금씩 음악인의 길로 들어갔습니다. 이후 티펫은 케임브리지 대학 진학을 기대하는 부모와 선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인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였고, 그 무렵 무신론 옹호 등 반항적인 활동으로 학교와 충돌한 끝에 결국 스탬퍼드 스쿨도 그만두게 됩니다.


 이후 티펫은 동네 교회의 음악가들 등을 통하여 음악 공부를 이어나갔고, 자신의 가능성과 의지를 인정한 아버지가 그를 지원하면서 왕립음악학교에 정식으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작곡과 지휘 등을 체계적으로 배웠고, 아마추어 합창단을 지휘하는 등 음악 경력도 착실하게 쌓아 올렸습니다. 1928년 학위 시험을 통과하여 학사 학위를 딴 그는 박사 과정에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이를 포기하고 학교를 떠났습니다.


 이후 옥스테드에 정착한 그는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전개하면서 생계를 위해 작은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는데, 때마침 그곳에는 시인이자 극작가인 크리스토퍼 프라이(1907-2005)가 교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훗날 공동 작업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1931년에는 옥스테드 합창단과 함께 헨델의 <메시야>를 지휘하였는데 그는 당시에는 드물었던 '원전 연주'를 선보여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1932년에는 인근 림스필드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곳에서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특히 이 때의 정치적 교류를 바탕으로 그는 좌파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 뒤 그는 런던 카운티 정부가 후원하여 백수실직한 음악가들을 모아 설립한 사우스 런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위촉됩니다. 당시 그는 런던 근교의 광산을 돌며 노동자를 위한 음악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티펫은 1935년 영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는데,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를 읽고 감명받아 트로츠키주의자가 된 그는 스탈린주의를 지지하던 공산당과 노선이 맞지 않아 결국 또다시 결별하게 됩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사회의 혼란상, 자신의 동성애 성향에 관한 정체성 혼란 등(그가 동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분명치 않은데, 한 여성과의 결혼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의 문제 때문에 그는 정신적으로 대단히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그는 이를 이겨내기 위해 심리 치료를 받았고, 독일의 유대인 탄압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이를 배경으로 한 오라토리오 <우리 시대의 어린이>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본격적으로 전쟁이 터지자 그가 재직하던 몰리 칼리지가 폭격으로 파괴되는 등 사회는 난장판이 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재판 후에 3개월 징역을 선고받습니다(이후 2개월간 복역하고 어찌어찌 출소했다고).


 전쟁이 끝난 이후 그는 활발하게 활동을 재개하여 작곡가로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미국을 오가며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그는 이 과정에서 미국의 음악에 대한 많은 경험을 얻었고 그의 음악에 재즈와 블루스 등 미국적 요소를 많이 가미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BBC에서 방송 진행을 맡기도 했고, 평화주의자 단체의 대표를 역임하는 등 사회정치적 활동도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쌓은 업적을 인정받아 티펫은 1966년 기사 작위를 받고 Sir 가 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병역거부까지 한 사람에게 선선히 작위를 내리다니 한국적 정서에서는 신기하긴 하지만 이후 1970년대를 지나며 그는 시력이 크게 악화되는 등 건강 문제로 고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여전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83년에는 런던 음악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기도 했고, 1998년 노환으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세계 각지에서 음악적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티펫은 처음에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음악을 통해 작곡을 배웠고, 따라서 초기 작품은 비교적 보수적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현대적 요소들을 받아들여 대담한 음악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교향곡 3번은 1972년 완성되어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초연되었는데, 이 작품에는 블루스 요소가 적극적으로 들어가 있으며 특히 2부에는 곳곳에 베토벤 교향곡 <합창>의 부분들이 패러디로 들어가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Paul Dukas (1865-1935)

Symphony in C




 - 폴 뒤카스는 프랑스 출신의 작곡가로, 드뷔시와 동시대에 활동했고 실제로 절친한 사이였지만 음악적으로는 상당히 다른 길을 추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파리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고, 어머니는 그가 5세 때 동생을 출산한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지만 아주 특별한 재능을 보이지는 않았고, 14세 때 병에서 회복하는 동안 작곡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1881년 16세의 나이로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조르주 마티아스(1826-1910)에게 피아노를, 테오도르 뒤부아(1837-1924)에게 화성학을, 에르네스트 기로(1837-1892)에게 작곡을 배웠습니다. 당시 함께 공부한 학생 중 클로드 드뷔시가 있었고, 두 사람은 이를 계기로 평생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 음악원에서 뒤카스는 나름 주목받는 학생으로 음악원 내부 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1888년 로마 대상 콩쿠르에서는 대상 수상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실망한 그는 이듬해 음악원을 자퇴한 후 작곡가 겸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첫 평론은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구스타프 말러가 지휘한 <니벨룽겐의 반지> 공연의 리뷰였다고 합니다.


 - 작곡가로서는 1892년 초연된 <폴리우크트> 서곡이 본격적인 데뷔작이었는데, 그는 이후 많은 작품을 쓴 모양이지만 워낙 완벽주의자라 많은 곡을 그냥 폐기했고, 세상에 알려진 작품은 많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빡세게 비평했던 모양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의 작품들은 분명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가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였음을 후세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 그의 작품세계는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독일 고전 스타일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프랑스의 음악 정신이 살아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라모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간주곡, 종곡>(1903)이 있으며, 유일한 교향곡 C장조는 1896년 작곡되어 이듬해 1월 폴 비달(1863-1931)의 지휘로 초연되었습니다. 총 3악장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Sophie-Carmen Eckhardt-Gramatté (1898(1899)-1974)

Symphony No.1 in C E.104



 - 이 비범한 ㅡㅡ; 이름을 가진 인물은 러시아계 캐나다인으로, 작곡가, 피아니스트,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였습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으며(출생연도가 1898년과 1899년으로 각기 다르게 적혀 있는데, 그레고리력(세계 표준)과 율리우스력(제정 러시아 사용)의 차이로 보입니다), 초명은 Sofia (Sonia) Fridman-Kochevskaya입니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8세에 파리 콘서바토리에 유학하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작곡을 트리플복수전공하게 됩니다.


 - 11세에는 파리, 제네바, 베를린을 순회하며 첫 번째 연주회를 열었는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번갈아가며 연주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음악가로 활발히 활동하던 그는 1920년 화가 발터 그라마테(1897-1929)와 결혼하였고, 이후에도 1925년 에드윈 피셔(1886-1960)와 독일에서 연주회를 여는 등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1929년 그는 남편을 결핵으로 잃고 말았습니다.


 - 이후 그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자신의 첫 번째 피아노/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하였고, 1934년에는 저널리스트 겸 예술사학자인 페르디난트 에크하르트(1902-1995)와 재혼하였습니다. 1936~39년 사이에는 베를린에서 막스 트라프(1887-1971)에게 작곡을 배웠고, 이후 남편과 함께 비엔나로 이주하여 작곡가로 활동하였습니다(제2차 세계대전도 겪었을 텐데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찾기 어렵네요).


 - 1953년에는 다시 아메리카로 이주, 캐나다의 위니펙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작곡 활동과 함께 음악 교육자로 활동하며 몇몇 학생을 지도하였습니다. 1974년 트럼펫 협주곡을 작업하던 도중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교향곡은 2개가 있으며, 1번 교향곡은 1939년에 작곡하였습니다.



[전곡]


[문제의 4악장. 2009 비엔나 필하모닉 신년 콘서트]


Joseph Haydn (1732-1809)

Symphony No.45 in f# Hob I:45 <Farewell>

연주 : 서강대학교 ACES (2016 봄 연주회(4악장))


 - 하이든이 근무한 에스테르하지 악단은 여름 시즌에는 고용주인 에스테르하지 후작을 따라 가문의 여름 별장으로 장기 출장을 떠나곤 했습니다. 1772년에는 가을이 되었는데도 후작이 본궁으로 돌아가지 않는 바람에 악단도 별장에 발이 묶이게 되었는데, 하이든 등 몇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단원들이 가족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후작에게 전하기 위하여, 하이든은 새로운 교향곡을 (당시에는 매우 드문) 올림바단조 조성으로 작곡하고 4악장에서는 연주자가 조명을 끄고 하나하나 나가버리는 퍼포먼스까지 선보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후작은 다음날로 악단에게 휴가를 주었다고 하는군요.


[후기] 앞으로는 앙코르 때 연주한 작품도 블로그에 함께 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고별>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4악장이고, 연주자가 중간중간 나가는 장면에서는 그냥 밋밋하게 퇴장해서는 참 재미가 없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청중이 웃을 만한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하나씩 준비하게 됩니다. 블로거는? 주머니에 숨겨둔 전화를 받으며 나갔지요.





Alexander Borodin (1833-1887)

Symphony No.1 in Eb


 - 알렉산드르 보로딘은 러시아 출신의 과학자, 작곡가, 사회운동가입니다. 사후에는 작곡가로서의 모습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생전의 본업은 화학자로 그의 이름을 딴 화학반응(보로딘 반응. 이후 하인츠(1904-1981)와 클레어 훈스디에커(1903-1995) 부부가 연구를 진전시켜 '훈스디에커 반응'으로도 불림)이 있을 정도의 업적을 남긴 바 있습니다.


 - 일단 출생 배경부터가 막장 범상치 않은데, 조지아계 귀족인 아버지와 유럽계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고, 정식으로 호적에 오를 수 없어 아버지 소속의 농노의 가문으로 입적하고 그의 성을 따라 '보로딘'이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출생 이후에는 어머니가 양육하였으며, 경제적으로 꽤 유복한 생활을 했습니다. 다만 당시 가족 중 대부분이 여성이라 어릴 적에는 반(半) 여성 취급을 받을 정도로 유순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군요.


 - 취미로 악기를 배우며 9세 때 짧은 곡을 작곡하였을 정도로 음악에는 재능이 있었지만, 딱히 음악가 쪽 진로는 고려하지 않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화학과 의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이후 독일로 유학하여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로 돌아와 교수로 재직하던 1862년 발라키레프를 만나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 이후 첫 번째 교향곡을 완성하기까지 5년이 걸렸는데,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수행하는 틈틈이 작곡을 병행했기 때문에 실제로 보로딘이 작곡에 투자하는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그가 활동 영역을 넓힌 후기에 더 심해져 거의 작곡에 신경쓰지 못할 지경까지 갔고, 결국 그가 말년에 작업하던 여러 작품들은 대부분 미완성으로 남거나 후배 작곡가들의 추가적인 작업을 통해서야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 교향곡 1번은 완성 2년 후인 1869년 발라키레프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호평을 받으며 작곡가 보로딘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힘을 얻은 보로딘은 곧바로 교향곡 2번과 오페라 <이고르 공> 작곡에 착수하였는데,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에 논문 표절 논란까지 겹쳐 연구 및 논문 관련 활동에 집중하는 바람에 두 작품은 오랫동안(<이고르 공>은 죽을 때까지) 완성하지 못하게 됩니다.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Symphony No.1 in g Op.13 <Winter Dreams>

연주 : 건국대학교 KUPhil (2015 가을 연주회)


 - 차이콥스키의 첫 번째 교향곡은 그가 28세 때 완성하였습니다.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던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법무관으로 진로를 틀어야 했는데, 법률학교에 재학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음악원이 신설되면서 그는 음악원에 입학하여 음악을 다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졸업 후에는 니콜라이 루빈시테인(1835-1881)의 권유로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는데, 음악원에 재임한 1866년부터 교향곡 작곡에 착수하여 2년 후 완성한 작품이 바로 교향곡 1번입니다. 차이콥스키는 각 악장에 각각 "겨울 여행의 몽상" "어둠의 땅, 안개의 땅" "춥고 오랜 여행에 지친 여행자의 꿈" "꽃망울이 열리고"라는 표제를 붙였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불분명하나 대체로 고향 러시아를 상징하는 '추운 겨울'에서 온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초기 작품이라 작곡 기법상으로는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데,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초연에서 평이 괜찮았음에도 몇 차례 곡을 고쳐 1875년 출판하였습니다.


[후기] 블로거는 별로 연주해본 적 없는 새로운 작품을 더 좋아합니다. 물론 완전 새롭게 연습을 해야 하니 부족한 실력에 고생이 많지만, 그래도 하던 것만 자꾸 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이 작품은 예전에 다른 곳에서 딱 한 번 연습만 해 본 곡이라 어딘가에서 꼭 한 번 연주해보고 싶었는데, 감사하게도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Michael Haydn (1737-1806)

Symphony No.25 in G MH 330

(Mozart Symphony No.37 in G K.444)


 - 먼저 작품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이 교향곡은 오랫동안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알려졌으며 교향곡 37번을 부여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알려진 악보에 모차르트의 서명이 있었으며, 그의 지휘로 비엔나에서 초연된 바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대에 이 곡의 작곡자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고, 이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80-1952) 등 학자들의 검증을 통하여 현재는 1악장의 서주만 모차르트의 것이고 나머지는 미하엘 하이든의 작품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


 - 미하엘 하이든은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입니다. 형과 마찬가지로 음악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형이 비엔나 슈테판 성당 합창단에 입단한 이후 합창단 감독인 칼 게오르그 로이터(1708-1772)의 도움으로 미하엘을 비롯한 동생들 역시 합창단에서 활동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 하이든 형제는 변성기가 오면서 차례로 합창단을 떠났으며, 미하엘의 경우 퇴단 직후 그로스바르다인(現 루마니아 오라데아) 성당의 음악감독을 맡으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1762년부터는 잘츠부르크에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미하엘은 이후 남은 평생을 잘츠부르크에 머물며 360곡 이상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 1768년 미하엘은 성악가로 활동한 마리아 막달레나 리프(1745-1827)와 결혼하였는데, 잘츠부르크에서 친분 관계를 맺게 된 모차르트 가문에서는 마리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군요. 둘 사이에 자식은 딸(알로이지아 요제파)하나가 유일한데, 그나마 생후 1년 남짓만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를 종합하면, 미하엘은 몇몇 부분에 대하여는 형인 요제프보다도 더 뛰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종교음악의 경우 요제프 스스로가 자신보다 미하엘이 뛰어나다고 인정했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미하엘은 주로 교회음악가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대표작들 또한 교회음악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그문트 대주교를 위한 레퀴엠 c단조>는 미하엘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물론 고전시대 작곡가답게, 43개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다수의 세속음악도 만든 바 있습니다.


 - 다만 아무래도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대라, 그의 작품인지 불분명한 작품들이 있으며 요제프의 작품에 섞여들어간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똑같은 '하이든'이다보니 풀 네임을 쓰지 않으면 헷갈리기 딱 좋았다고).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위의 교향곡 25번이죠. 여담으로 미하엘은 술을 상당히 좋아했던 모양인데,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경우 미하엘이 술을 너무 마신다고 비판하기도 했다는군요.





Giovanni Sgambati (1841-1914)

Symphony No.1 in D Op.16


 - 스감바티는 이탈리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지휘자 겸 작곡가입니다. 로마에서 태어나,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이탈리아 움브리아 주의 트레비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가수이자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약간의 교회 음악을 작곡하기도 하였습니다.


 - 1860년부터 로마로 돌아와 정착하였고, 때마침 1861년 로마로 이주한 프란츠 리스트의 지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휘자 활동은 독일계 작곡가의 음악을 이탈리아에 소개한 것이 돋보이는데, 베토벤 교향곡 3번과 7번의 이탈리아 초연을 맡았고 리스트의 <단테 교향곡> 등 여러 작품을 이탈리아에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 1860년대 후반 뮌헨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여기서 바그너의 음악을 접하게 됩니다. 작곡가로서는 주로 피아노곡을 많이 썼으며, 1901년 완성한 레퀴엠 같은 대작도 있습니다. 교향곡은 총 두 곡이 있고, 1번 교향곡은 1881년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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