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나가의 야망 : 장성록 - (10) 천하통일 완수




 - 오다 가문과의 싸움은 이래저래 성가신 부분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스토리(?)상 오다 가문에는 가신이 많을 수밖에 없어서, 그 많은 가신들을 가지고 간첩이니 뭐니 하면서 플레이어를 매우 귀찮게 만들죠. 거기에 툭하면 다른 가문의 가신들을 오다 가문에서 빼가는데, 아무래도 (삼국지 시리즈로 치면) 장수간 상성에서 유리한 쪽에 있는가봅니다.



 - 그래서 그동안 모아둔 가보(아이템)들을 가신들에게 대거 풀어버리기로 합니다. 다도(茶道)가 유행하던 당시 일본의 상황에 걸맞게, 다도 도구가 따로 한 카테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 실제 역사에서는 오다 노부나가를 살해한 장본인, 아케치 미쓰히데가 시마즈 가문의 깃발 아래 들어왔습니다.



 - 아니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이...... ㅡㅡ;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총사령관 중 하나로, 가톨릭 신자로 유명)



 - 장성록의 공성전이 다 그렇지만, 특히 이런 모양의 성은 공략하기 정말 짜증납니다. 병력을 몇 번 때려박아서 방어도를 충분히 낮춘 다음에 구멍 특기 가지고 있는 장수 한둘 쯤 끼워넣지 않으면 본성 근처에도 접근하기 어렵거든요. 결국 이런 성을 공략하는 건 심한 소모전이 되기 쉽습니다.



 - 1597년 12월 기준 세력지도. 사실 이 게임 역시 (코에이産 전략게임이 많이들 그렇듯이) 후반으로 갈수록 집중도가 좀 떨어지게 됩니다. 판도가 이쯤 됐으면 전투와 점령을 귀찮게 반복해야 할 뿐, 천하통일에는 별 무리가 없거든요(어쩌면 블로거가 좀 세련되게 플레이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럴지도).





 - 아니 뭐라고?!?!?!?!




 - 오다 가문이 완강히 저항하고 있지만 크게 문제될 건 없습니다. 이 정도 세력판도에서 단순 소모전을 걸어버리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 어느 새 오다 가문을 처리하고 아즈치 성 하나만 남았습니다. 사실 저 성은 일부러 남겨둔 건데, 나름 주인공(?) 가문이니까 다른 가문을 처리하고 맨 마지막에 먹을 생각이(었)거든요. 모양은 저렇지만 장기간 철통포위를 한 상태라 현재 아즈치 성에는 군량이고 돈이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 완전 포위된 성에서 수 년째 봉급을 받지 못한 가신들의 놀라운 충성심.



 - 그렇게 임금을 체불당한 가신들은 굶어죽기는 싫으니까 하나둘 오다 가문을 떠납니다.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라는 이름이 생소하시다고요. 음...... 이 양반은 실제 역사에서는 이름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바꿉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오다 가문을 통조림(?)해 놓고 호조 가문을 처리하러 가는데, 호조 가문이 다른 집안으로 바뀌면서 완전 난장판이 되어버렸습니다. ㅡㅡ;



 - 당연 이렇게 되면 처리하기 쉬워지죠. 그래도 처리하는 데 5년 이상 걸렸습니다. 이 부분은 몇 달 전에 플레이를 했는데, 아무래도 이쯤에서 블로거가 점점 귀찮아졌던 것 같습니다. ㅡㅡ;



 - 강에 붙어있는 성 중에는 저렇게 수공이 가능한 곳이 있습니다. 아마 특정한 몇몇 성만 가능한 모양인데 정확히 어느 곳인지는 모르겠네요.



 - 그렇게 (舊)호조 가문을 마무리하고 동북쪽의 자잘한 가문들만 처리하면 끝납니다. 아, 아즈치성에 통조림당한 오다 가문은 가신들이 임금체불을 못 견디고 모두 떠난데다 마지막 당주가 늙어죽으면서 자연스럽게 소멸했습니다. ㅡㅡ;



 - 이미 1610년대를 넘어 1620년대로 가고 있는데, 이 시기쯤 되면 기존의 화려한 장수들이 대거 늙어죽는데다 새로 등장하는 장수는 얼마 없는지라 모든 가문들이 가신 부족에 시달리게 됩니다. 특히 군소 가문의 경우 성 수와 가신 수가 비슷한 수준이 되거나, 저렇게 텅 빈 성이 속출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 당연히 이런 곳은 플레이어의 한 끼 좋은 식사거리가 됩니다.



 - 극단적으로는 유일하게 남은 당주가 늙어죽으면서 세력이 자연스럽게 소멸하기도 합니다. ㅡㅡ;



 - 결국 우에스기 가문도 접수. 이제 남은 건 북쪽의 난부와 쓰루가 가문밖에 없습니다.



 - 헉 우리의 당주가 사망했습니다. 웬만하면 요시히사 생전에 통일을 해 보려고 했는데, 이미 나이가 80을 넘은데다 북쪽 지방은 도로가 제대로 없어서 병력 끌고 가는 데만 한세월이라. ㅡㅡ; 후계자로는 시마즈 가문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남은(요시히로가 살아있긴 한데 이 양반도 나이가 80을 넘었으므로) 시마즈 도요히사를 낙점하였습니다.



- 반복적인 전투를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겠지요. 사실 캡처 떠놓은 게 없어서 이제 남은 건 쓰가루 가문의 성 하나 뿐입니다.



 - 사실 통일이 늦어진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북부지방은 한 해가 멀다하고 폭설이 내리는데, 이 때는 해당 지역에서 유닛의 이동력이 반토막이 나버립니다. 이런 때는 차라리 바다로 나가버리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는데, 미처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지라.



 - 닌자 특기가 있는 장수는 성문을 상당히 쉽게 열 수 있습니다. 성문 공격 커맨드에서 '개문'을 선택하면 높은 성공률로 닌자들이 침투하여 성문을 안에서 열어버립니다.



 - 결국 소모전에는 장사 없습니다. 마지막 전투 승리!




 - 온 열도가 시뻘겋습니다.



 - 엔딩은 살짝 허무. 저 메시지와 엔딩 동영상 하나 나오고 끝입니다. 사실 저 무렵까지 코에이의 전략게임들은 엔딩이 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뭔가 좀 이야기가 가미된 형태의 엔딩은 삼국지6부터 나왔던가요 아마?



 - 블로거가 후반 들어 반복적인 전투에 물려버렸기 때문에 후반부가 대충 지나가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통일까지 가는데 성공했습니다(장성록 전투시스템 자체의 단점인 것 같기도 합니다. 천상기 같은 경우 성의 개수가 많은 대신 여러 성을 묶은 대규모 전쟁이 가능하던가 그렇게 들었는데요). 다음 연재는 무엇이 될까요? 다음 이 시간(?)에......



 박흥식(1900-1994)은 화신백화점으로 유명한 화신그룹의 창업자로,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한국인 기업가입니다. 당시 화신백화점은 시대를 앞서간 경영을 통하여 일본의 백화점 체인과 대등하게 맞짱 뜨는 굴지의 대기업체였지요. 하지만 그 뒷면에는 박흥식과 조선총독부의 긴밀한 유착관계가 깔려 있었고, 이는 해방 이후 만개한 정경유착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의 백화점 왕, 박흥식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박흥식]




1. 쌀집 주인에서 백화점 재벌까지


 박흥식은 1900년(호적상으로는 1903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이천 석 부농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 박창식은 평양 대성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1910년대 중반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 박제현 또한 민족운동에 참여한 것이 알려져 있고, 1916년 홧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박창식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졸지에 일가를 떠맡게 된 16세의 박흥식은 학업을 중단하고 진남포(남포)에 미곡상을 개업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박흥식의 상술이 장난이 아니었던지라, 박흥식의 가게는 날로 번창하였습니다. 박흥식은 1920년에는 자본금 5만 원(대략 ×1만~10만 정도를 하면 현재 환율과 대강 맞는다고 합니다)으로 인쇄업을 시작했고, 이후 지물(종이)업, 학용품 등 단기간에 대단한 사업 확장을 이루어내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미곡상은 곡물 수탈과도 연관되어 중요한 사업이었습니다]


 진남포를 평정(?)한 박흥식은 지금까지의 사업체를 정리한 후 1926년 경성에 레이드입성, 황금정(現 을지로2가)에 '선일지물주식회사'를 개업하였습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박리다매 원칙으로 경성 일대의 종이 소매상과 문구업자, 인쇄업자, 신문사 등을 끌어들였고, 때마침 조선총독부의 초등교육 확대로 교과서와 종이 수요가 급증하면서 선일지물은 불과 1년 남짓만에 경성 종이 수요의 20%를 담당하는 거대 기업체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흥강자의 등장에 기존 일본인 거상들이 적잖은 견제를 하였고,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이 한반도와 일본에도 직격탄을 날리면서 박흥식의 사업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박흥식이 주목한 것은 다양한 품목을 다루면서 대량의 상품을 거래하는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경성에는 미쓰코시, 조지야 등 일본의 백화점 체인이 일본인 상권을 중심으로 영업하고 있었습니다.


 백화점 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정한 박흥식은 1931년 종로2가에 자리한 귀금속상 화신상회를 인수하고, 이를 화신백화점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신화(神話)가 시작됩니다.




2. 화신백화점의 신화창조


 박흥식은 거금을 투자하여 화신상회 자리에 지상 7층의 고층건물을 지었습니다(당시에 이 정도면 한반도 전체에서 손꼽히는 대형 건물). 그런데 화신백화점은 시작부터 거친 경쟁에 내몰려야 했으니, 바로 옆에 최남(역시 한국인 거상이었으며 덕원상회, 요정 국일관 등으로 유명)이 '동아백화점'을 개업한 것입니다. 박흥식과 최남 모두 시대를 앞서가는 경영의 달인이었으며, 종로 바닥에서 그야말로 불꽃 튀는 혈전이 펼쳐집니다.


 동아백화점이 개업 첫 날 매상의 1%를 빈민구제사업에 내놓자, 화신백화점은 주택 한 채를 경품으로 내놓으며 맞섭니다.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마케팅 전쟁이 펼쳐졌고, 경성 상업대전(?)의 승자는 결국 화신백화점이 되었습니다. 출혈경쟁 과정에서 악재가 겹친 동아백화점이 경영난에 빠지자, 박흥식은 최남으로부터 동아백화점을 인수하고 두 백화점 건물 사이에 구름다리를 연결하여 하나의 쇼핑센터로 만들었습니다.


[전성기의 화신백화점]


 이제 화신백화점은 미쓰코시-조지야에 대항하는 조선인 상권의 상징이 되어 있었습니다. 화신백화점은 1935년 경영난과 파업에 시달리던 평양 평안백화점을 인수, 화신백화점 평양지점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박흥식은 다시 새로운 형태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전국의 잡화상을 가맹점으로 만들어 화신의 이름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일종의 프랜차이즈 사업이었습니다.


 1934년 가맹점 모집 광고를 시작으로, 쇄도하는 신청자 중 300여 곳을 엄선하여 화신연쇄점 프랜차이즈가 출범하게 됩니다. 이들은 화신백화점의 거래선을 활용하여 일본 등지의 수입품을 수월하게 조달받고, 고객이 상품을 고르는 견본시장과 상품을 보관하는 대형 창고 등 당시로는 획기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사업도 대박을 냈고, 거상 박흥식은 금광왕 최창학, 경성방직 김연수와 함께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박흥식이 승승장구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1935년 1월에는 화신백화점 본점의 두 건물 중 한 쪽(서관)이 큰 화재로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보험을 통하여 피해액은 거의 보전할 수 있었고, 박흥식은 오히려 서관을 더욱 큰 규모(지하1층, 지상6층)로 재건하여 1937년 11월 오픈하였습니다. 이 건물에는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5층에는 고급 식당가가 있어 부유한 한국인의 나들이 코스로 인기가 높았다고 합니다.


[화신백화점 내부 구성]




3. 조선총독부와의 유착, 그리고 친일


 물론 화신백화점의 급성장은 기본적으로는 박흥식의 경영 수완으로 가능했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했던 것이 박흥식과 일본 지배자들과의 유착관계였습니다. 선일지물을 경영하던 1920년대부터 박흥식은 조선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1935년 화신연쇄점 사업을 시작할 때는 식산은행으로부터 3천만 원이나 대출을 받았고, 화신백화점 화재사건 때는 '경성 내 소방장비 부족'을 핑계로 총독부로부터 종로경찰서 구관을 임시 사옥으로 임대하기도 했습니다.


 노골적인 봐주기라며 여론이 들끓었지만, 이를 수습한 건 오히려 총독부였습니다. 이러한 특혜가 과연 그냥 가능했을까요? 그래도 이 무렵까지는 박흥식-총독부 사이의 유착이 직접적인 친일행위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급속히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사정이 좀 달라졌습니다. 이제 박흥식이 총독부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1938년 발족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 이사로 재임한 것을 시작으로, 박흥식은 이런저런 친일부역단체의 중역을 맡거나 <매일신보> 등 언론을 통해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등 일본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건 주로 예술가나 언론, 정치인에게 어울리는 것이죠. 조선의 대재벌 박흥식은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하나, 바로 '자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44년 2월, 박흥식은 자본금 5천만 원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이하 조선비행기)'를 설립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쩨쩨하게 전투기 값 정도 헌납하는 게 아니라, 아예 비행기 공장을 만들어버린 겁니다! 당연히 회사 설립은 총독부의 적극 지원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조선비행기는 경기도 안양에 있는 조선직물회사와 동양방적 공장 부지를 접수하고, 주변 토지까지 강제수용(즉, 강탈)하여 거대한 공장을 구축하였습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군수공업이었으므로), 공장 노동자는 대부분 강제징용자로 채워졌습니다. 첨단 기술이 필요한 비행기 생산라인은 총독부의 중개로 관동군(만주 일대의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으며, 조선비행기(내지는 화신재벌)는 그 보답으로 한반도의 생산물(직물과 해물 등)을 관동군에 헌납하였습니다. 일본 당국의 전폭적 지원으로 시작된 조선비행기는, 박흥식에게는 친일행위임과 동시에 새로운 노다지 사업이기도 하였습니다.


 애석하게도(?) 조선비행기는 본격적인 비행기 생산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사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1945년 5월 테스트 1호기가 완성되어 8월에 시험비행까지 마쳤고, 9월에는 2, 3호기를 만들어 테스트한 후 대량생산에 들어갈 계획이었지만, 1945년 8월 15일에 모두가 아시다시피......




4. 해방 이후, 흔들리는 박흥식 신화


 8·15 해방은 일본과의 유착으로 성장한 박흥식에게는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물론 박흥식 본인이야 당시에는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현재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3~40대의 나이에 한국 최고의 재벌이 된 박흥식은 아직 일생의 절반도 지나지 않은 이 시기부터 기나긴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일단 박흥식은 군수기업이었던 조선비행기를 잽싸게 매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장 청산자금을 횡령하거나(5천만 원 중 2천만 원), 미군정에서 주민에게 배급할 물자를 불법으로 매매하여 수백만 원의 폭리를 취한 혐의로 1946년 기소되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ㅡㅡ; 이후 박흥식은 화신백화점, 흥한피복, 화신무역을 중심으로 그룹을 재편하였고, 1947년에는 흥한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박흥식의 친일행위를 모르는 바 아니었고, 1947년에는 산하 기업인 흥한피복 노동자들이 그를 친일파라고 비난하자 그 주동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쭉 살펴보면 박흥식은 해방 후에도 권력자들과 유착하여 자신의 탈법행위를 정당화하고 자신과 기업을 보호하는, 전형적인 매판자본가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박흥식 체포 뉴스. 경향신문 1949년 1월 11일자]


 어쨌든 혼란 속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친일반민족분자 청산을 목표로 특별법과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하자 박흥식은 미국행 여권을 가지고 도피하려 하지만 실패, 제1호 검거자라는 영예(?)를 안게 됩니다. 체포 당시 박흥식은 "서류 정리를 위해 5분만 시간을 달라"고 체포조에 간청해놓고, 뒷문으로 몰래 도주를 시도했다고 합니다. ㅡㅡ;


 박흥식이 제1호 타겟이 된 것은 그가 미국으로 도피하려고 한다는 정황이 입수되었고, 그가 정치계에 광범위한 인맥(특히 장택상 등 경찰 쪽 인맥)을 가지고 있어 반민특위 활동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후 반민특위 자체가 와해당하고, 박흥식은 재판에서 '공민권 2년 정지'라는 같잖은 구형을 받았으며 이조차도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게 됩니다.


[한국전쟁으로 불탄 화신백화점]


 일단 단죄받지는 않았지만 이후 박흥식의 사업은 갈수록 꼬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단 1950년 한국전쟁으로 화신백화점 전체가 불타버렸고, 뼈대만 남은 건물은 어찌어찌 재건했지만 전쟁기 물자부족으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박흥식은 본래의 화신백화점 점포를 민간에 대규모로 임대하는 한편, 1955년 백화점 맞은 편에 2층 가건물을 지어 '신신백화점'으로 개업했습니다.


[1970년대 신신백화점. 딱 봐도 허접(?)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유리창을 넓게 다는 등 꽤 볼만한 건물이었던 모양]


 이렇게 계속 사업이 계속되긴 했지만, 1950년대 경제적으로 피폐한 한국에서 대규모의 유통업이 번창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충무로 일대의 옛 일본계 백화점을 인수한 새로운 경쟁자들에게도 조금씩 밀리면서 박흥식의 신화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박흥식은 말 그대로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게 됩니다.




5. 시대에 뒤처진 매판자본가의 몰락


 1961년 5·16 쿠데타가 발생하자 박흥식은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고, 거액의 정치자금을 헌납한 후 풀려났습니다. 권력자가 바뀌어도 그놈의 매판자본가 기질은 어디 가질 않아서, 화신그룹 주도의 신도시 개발을 추진하거나(이미 1930년대에 박흥식은 현재의 불광동 일대에 신도시 개발을 추진한 바 있음) 정부의 협조로 거대한 섬유공장을 짓는 등 권력을 등에 업고 유통업 중심의 사업을 다각화하려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박흥식의 경영은 먹히지 않게 됩니다. 새로운 권력자들이 박흥식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선 박정희는 박흥식의 1930년대 신도시 개발계획을 접한 후 한강 남쪽에 대규모 택지개발을 계획하도록 지시했지만, 정작 박흥식이 신나게 계획안을 수립하자 이런저런 이유로 개발 사업 자체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ㅡㅡ;


[흥한화섬 도농공장 기공식. 박정희가 직접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섬유공업에 뛰어들어 산업자본으로 변신을 시도한 박흥식의 도전 또한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박흥식은 흥한화섬을 설립하고 1966년 양주군 도농리(現 남양주시 도농동)에 비스코스 인견사 공장을 건립하였습니다. 이 때 주특기 정경유착을 활용하여 은행에서 대규모 자금을 융통할 생각이었지만, 이것이 특혜 논란에 휩싸이며 정부도 은행도 박흥식을 외면해버리자 그는 사옥까지 팔아가며 무리하게 돈을 끌어모아 공장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실적부진이 계속되자 박흥식은 견디지 못하고 불과 2년여만에 공장을 산업은행에 넘기고 말았습니다(그리고 그 공장은 1980년대 환경재해와 산업재해의 상징 원진레이온이 됩니다). 흥한화섬이 망할 당시 68세의 박흥식은 "나는 아직도 현역이다"라며 큰소리를 쳤다지만, 현실은......


 1970년에는 전기전자산업 진출을 목표로 일본의 소니(그 SONY)와 합작으로 '화신소니'를 창업하였지만, 이후 오일쇼크를 맞으며 경영부진에 빠졌고 이를 본 소니가 자본을 빼버리면서 망했습니다. 이렇게 산업계 진출이 번번이 실패하는 와중에 그룹의 본가인 화신백화점은 차남 박병찬이 맡았지만 거하게 말아먹고 해외도피까지 하는 등 ㅡㅡ;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이 되었고, 1980년 화신그룹은 공중분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해방 후 화신그룹의 몰락에는 박흥식의 경영철학이 큰 몫을 차지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유통업으로 사업을 이룬 박흥식은 모든 사업에서 현금박치기 원칙을 고집했고, 이는 유통업 중심의 경영에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산업자본에는 전혀 맞지 않는 스타일이었습니다(당연하게도 공장을 세우려면 대규모의 초기투자가 필수적이라, 금융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음). 더구나 인플레이션이 심한 1950~70년대에는 현금은 가만 쥐고 있을수록 가치가 줄어들게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박흥식은 경영 원칙을 바꾸지 못했않았고, 이는 1960년대 이후 산업자본으로의 진출 시도가 잇따라 파탄나면서 그룹 전체를 무너뜨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룹이 공중분해된 이후 박흥식은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광신학원(광신중고등학교 재단)을 장남 박병석씨에게 물려주고 경영에서 완전히 은퇴하였습니다. 은퇴 후 박흥식은 일체의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말년을 보냈으며, 자신이 살던 저택을 팔아치운 후 전셋집을 전전하며 조용히 살다가 1994년 94세로 사망하였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는 파킨슨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가회동에 있었던 박흥식 자택. 그는 1931년부터 57년간 이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사업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지금도 광신학원 재단은 박흥식 가문의 소유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는 수년 전 박흥식의 동상을 학교 내에 건립하려다 각계의 비판과 반발을 맞고 철회한 바 있습니다.




6. 정리 : 그의 그림자는 아직까지도 드리운다


 박흥식은 일제강점기(즉, 20세기 초) 한국 최고의 기업가였습니다. 분명 그는 작은 상점에서 시작하여 전국을 아우르는 거대한 유통재벌을, 그것도 30대의 나이에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일본에서 건너온 거대 유통자본과의 경쟁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성과였으니, 박흥식이 당대 최고의 수완을 가진 경영자였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드리우는 분명한 그림자는, 그의 성장이 상당부분 정치권력과의 유착을 통하여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서울에서의 사업 초기부터 박흥식은 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각종 사업에서 특혜를 받았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특혜의 대가로 박흥식은 일본의 전쟁 수행에 (자발적이든 아니든) 협조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그것까지도 자신의 사업에 이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박흥식은 자신의 친일부역행위가 절대 자발적인 게 아니었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친일파는 아니었다고 최후의 순간까지 항변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설령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한들 그의 사업 과정을 들여다보면 '적어도 자업자득'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정작 독립운동가였던 그의 형과 아버지의 일생과 대조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쓴웃음을 안겨줍니다.


 박흥식이 처음으로 선보인 정경유착이라는 그림자는, 그의 시대가 끝난 이후 그의 수많은 후진들에 의해 만개하게 됩니다. 해방 직후 적산기업 불하를 시작으로 미군정, 자유당, 군부 등 권력자들과 결탁한 기업가들은 한국경제의 개미지옥에서 승승장구하였고, 이들은 삼성, 현대, 대우 등 세계적 규모의 대재벌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권력의 부정부패를 금전적으로 지원하며 각종 특혜를 얻었고, 나아가서는 권력 그 자체를 돈으로 좌우할 수도 있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웃기게도 그 정경유착의 원조 박흥식은 정작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아마도 이른 나이에 출세한 자들의 일반적 결함 - 자신의 성공 공식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결국 그는 정경유착이라는 그림자, 그리고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자의 말로......라는 두 가지를 남기고 역사에서 퇴장하였던 것입니다.


 화신그룹 해체 후 화신백화점 건물은 몇몇 소유자의 손을 거쳐 한보그룹으로 넘어갔고, 종로 일대의 도로확장 계획에 백화점 부지 상당부분이 포함되자 한보그룹은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옛 백화점의 모양을 살린 18층짜리 고층 건물을 새로 짓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철거가 시작된 이후 소유권이 삼성생명(당시 동방생명)으로 넘어갔고, 골조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던 건물은 지상 33층의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설계가 변경되어 완공, 현재의 종로타워가 되었습니다.


[화신백화점 자리에 세워진 종로타워]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오리위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2&levelId=tg_004_1950&ganada=&pageUnit=10

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67900

http://blog.ohmynews.com/jeongwh59/291437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30706463389581




[2018. 5. 23. 수정]


 우리는 흔히 일제강점기 일본에 부역한 자들을 '친일파'라는 한 단어로 묶어버리지만, 실제로 친일파의 범주에 들어가는 수많은 인물들은 '일본에 부역하였다'는 공통점을 빼면 친일행위의 배경이나 사고방식, 전후의 행동과 결과에 제각기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의 친일행위를 그 자체로 역사의 심판대에 올리되, 친일파들 개개인의 삶을 분석하는 것 또한 병행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많은 친일행위자 중 몇 명을 선정, 그들의 인생과 사상을 간단히 짚어보며 친일행위의 배경을 논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인물은 윤치호(1864-1945)입니다. 천재적 재능을 가졌고 그 누구보다 현실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안목 또한 가졌지만, 현실의 벽 앞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 친일파로 전락하고 만 윤치호의 일생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 복잡한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양면적 삶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윤치호]




1. 희대의 어학천재 윤치호


[ㅎㄷㄷ한 해평 윤씨 가계도]


 윤치호의 출신인 해평 윤씨('해평'은 경북 구미시의 지명) 가문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 급성장한 신흥 명문가였습니다. 임진왜란기 인물인 윤두수(1533-1601)의 자손 중, 조선 말기부터 역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만 따져도 윤웅렬, 윤영렬, 윤치호, 윤치왕, 윤치소, 윤치성, 윤치영, 윤일선, 윤보선, 순정효황후 윤씨 등등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많지요.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조선일보 방상훈 대표의 처가도 이쪽이며(윤치호의 증손녀와 결혼), 아나운서 윤인구씨도 이 가문 출신입니다(윤치영의 손자).


 불과 3대 남짓만에 격동기 역사적 인물들이 거의 두 자릿수 단위로 쏟아져나왔다는 건 결코 범상한 일은 아닙니다. 해평 윤씨 가문의 이 수많은 인재들은 정치, 군사, 학술, 의료, 경제계 등등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였고, 흥미롭게도 친일파와 항일운동가, 소극적 부역거부자가 뒤얽혀 있습니다(이를테면, 윤치소는 거부(巨富)이자 친일파였지만 그의 장남 윤보선은 항일운동가).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1840-1911)은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유홍기(1831-?)에게 가르침을 받은 개화파 인물로, 별기군 책임자를 맡는 등 주로 무관(군인) 쪽에서 활동한 관료입니다. 김옥균 등의 동료였으나 갑신정변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아 정치적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고, 이후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대한제국 막판에 친일파로 돌아서 일본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윤웅렬은 뒷배경이 없는 것 치고는 거의 기적적인 출세를 한 인물이지만, 서얼 출신에 무관이라 일평생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장남 윤치호의 재능을 발견한 이후에는 그의 교육에 많은 신경을 썼고(윤치호는 서자였는데, 윤웅렬은 윤치호를 적자(嫡子)로 만들어주기 위해 나중에 그의 생모와 정식으로 결혼하기도 하였음), 온건개화파 정치인 어윤중(1848-1896) 밑으로 보내 교육을 받게 하였습니다(어윤중이 정치적 거물이었으니, 인맥을 만들어주려 한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1907년경 촬영한 윤웅렬 가족사진. 앞의 꼬꼬마들은 윤치호의 이복동생으로, 윤웅렬이 뒤늦게 재혼하여 낳은 자녀들]


 윤치호는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유학하게 되었는데, 본래 서자였던 그는 기술교육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아버지 윤웅렬이 백방으로 손을 써 도진샤(同人社)에 입학하여 인문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1882년에는 아버지가 임오군란을 피해 잠시 일본에 망명하여(그가 별기군 책임자였기 때문) 윤치호와 함께 머무르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에서 근대 교육을 받으면서, 윤치호는 기존 조선의 전통이나 성리학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서양의 과학기술이나 근대사상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조선과 이를 받아들여 근대화된 일본을 비교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국까의 기질이 여기서부터 한편 유학기간 중 윤치호는 김옥균의 조언으로 외국어 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그가 어학천재임이 이 때 드러났는데, 영어를 고작 4개월간 배우고는 대단한 고급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부럽다


 윤치호는 1883년 4월 조선으로 돌아와 미국 공사 루시우스 푸트(1826-1913)의 통역관으로 일하였고, 4개월 배웠다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영어 능력을 더욱 갈고닦아 진정한 영어마스터의 반열에 오릅니다. 고급 라틴어 계열 어휘라든지, 다른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한 미묘한 뉘앙스까지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군요. ㅡㅡ;




2. 정치적 도피유학에 오르다


 잘나가던 시절도 잠시, 1884년 갑신정변의 폭풍은 그의 가문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윤웅렬과 윤치호는 모두 급진개화파 인사들과 친한 사이였지만, 정작 정변 참여는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일단 둘 모두 갑신정변의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정변 계획을 알고서도 입을 닫는 등 어느 쪽이라고 보기 애매한 포지션을 취하게 됩니다. ㅡㅡ; 어쨌든 양쪽에서 줄타기를 절묘하게 한 덕에, 윤웅렬 부자는 개화파이면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윤치호가 급진개화파와 친한 사이라는(실제로도 내심으로는 정변 성공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고) 게 걸릴 수밖에 없었고, 윤치호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잠시 몸을 숨겼다가 고종의 허락을 받아 도피유학길에 올랐습니다(실제로 고종은 윤치호의 신변에 몇 차례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를 상당히 아꼈던 듯). 윤치호는 미국 유학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단 중국 상하이의 중서서원(中西書院, 대만 둥우대학의 전신)에 입학하였습니다.


[상하이 중서서원 건물의 현재 모습. 학교 자체는 둥우대학(東吳大學)으로 개명한 후 국부천대 때 대만으로 이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상하이가 조선과 가깝다 보니 윤치호는 유학지에서도 보수파 자객들의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유학이고 뭐고 정상적 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까지 떨어지자 울분에 잠겨 술과 성(性)을 탐닉하는 방탕한 생활을 일삼게 됩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를 죽이러 간 암살자들은 윤치호가 반 폐인이 된 것을 보고 별로 위협이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여 암살을 포기하고 그대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ㅡㅡ;


 방황하던 윤치호는 종교에 귀의하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의 설득에 감화된 그는 곧 기독교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자신의 생활을 조금씩 고쳐가며 학업과 아르바이트에 매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비참한 상태(특히 청인들의 불결한 위생관념)에 진절머리를 내고, 청과 다를 바 없던 조선을 하루빨리 근대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게 됩니다.


[에모리 대학 유학시절의 윤치호. 우측은 <윤치호 일기> 자필본]


 중서서원에서 학업에 매진하던 윤치호는 1887년 정식으로 기독교 세례를 받은 후 다음 해 미국 유학에 올랐습니다(중간에 일본을 경유하면서 김옥균, 박영효와 만났는데, 윤치호는 김옥균이 사실상 정치적 폐인이 되어 여자관계에만 열중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고 합니다. 잠깐만 당신은 상하이에서 어땠는데?). 그는 밴더빌트 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영어와 신학 등을 배웠고, 졸업 후에는 다시 조지아 주의 옥스퍼드 대학교와 에모리 대학교로 옮겨 공부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윤치호는 기독교 신앙을 깊이 다지는 동시에, 그의 사상 체계에 큰 영향을 주는 두 가지 체험(하나는 미국의 발전한 정치와 사회, 다른 하나는 극심한 인종차별)을 하게 됩니다. 윤치호는 합리성과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미국 사회를 조선이 가야 할 이상향으로 여기면서도, 동시에 아시아인을 학대하는 미국인(나아가서는 백인)을 증오하며 아시아 중심의 인종주의에 경도되어갔습니다. 자신을 돕는 선교사들까지 은연중 자신을 차별하는 것을 보며, 그는 많은 상처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윤치호와 마애방, 그들의 자녀들. 1902년 촬영]


 모멸감을 견디며 에모리 대학교까지 졸업한 이후, 윤치호는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중서서원의 교수로 활동하였습니다. 이 무렵 그는 상하이로 건너온 김옥균을 다시 만났는데, 김옥균을 돕는다는 홍종우에 대하여 "스파이일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충고합니다. 그 충고를 대수롭지 않게 넘긴 김옥균이 어찌 되었는지는 잘 알려진 바와 같습니다. ㅡㅡ; 상하이에 체류하는 동안 윤치호는 중국인 마애방(馬愛芳, 1871-1905)과 두 번째 결혼을 하였습니다(첫 번째 부인과는 1885년 이혼).




3. 독립협회에서 경술국치까지


 1895년 초 윤치호는 조선으로 돌아왔고, 돌아오자마자 집안 전체에 기독교를 전도하고 가문 소속 노비를 전부 해방시켰습니다. 이후 그는 정부 관료로 일하며 미국 남감리교의 한국 선교를 추진하기도 하였는데, 그 해 10월에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12월에 춘생문 사건(일본의 위협을 피해 고종을 궁 밖으로 피신시키려다 실패한 사건)에 간접 연루되어 미국 공사관에 피신하기도 했습니다(아버지 윤웅렬이 가담했기 때문인데, 윤웅렬은 탈출에 성공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윤치호는 막 미국에서 돌아온 필립 제이슨(서재필)을 만나 조선의 정세를 전하고, 그가 추진한 신문(독립신문) 발간 사업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다만 윤치호는 왕년의 개화파 동지 서재필이 미국인 필립 제이슨으로 변모하여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깡그리 지워버린 것에는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필립 제이슨과 함께 일하던 윤치호는 고종의 명을 받고 민영환의 외교 순방(러시아 황제 즉위식 참석 등)에 수행원으로 동행하였습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절단. 앞줄 두 번째가 윤치호, 세 번째가 민영환]


 윤치호는 러시아와 유럽 각국, 베트남 등을 거쳐 1897년 귀국하였고, 직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습니다. 필립 제이슨, 개화사상가, 정부 관료들이 함께 모여 창립한 독립협회는 이 해 내부 의견충돌로 정부 관료층이 대부분 탈퇴(이들은 대체로 친러파였는데, 독립협회가 반러 성향을 보였기 때문)했고, 이후 잠시간 필립 제이슨이 회장직을 맡았다가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는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등의 개화사상가들이 운영을 주도하게 됩니다.


 그가 한창 활동하던 때 독립협회는 절정기에 올라 있었습니다.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 등을 잇따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여기서 결의한 내용은 정부 정책에도 상당부분 반영될 수 있었습니다. 만민공동회에서 결의한 상소에 따라 '중추원'이 초기적인 의회 형태로 개편되고, 윤치호는 몇몇 정부 관직을 거쳐 중추원 의원에 선임되었습니다.


[경운궁 대안문(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하지만 이 과정에서 보수파 관료들과의 대립이 갈수록 심해졌고, 대한제국 수립 이후 전제군주제를 지향하던 고종은 민권운동을 이끌던 독립협회를 탐탁지 않아 했습니다. 결국 '황국협회'를 사주한 보수파의 폭력, 그리고 이어지는 정부의 탄압으로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강제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윤치호는 나름 '민권운동'을 하는 자신들을 (정부의 프로파간다에 따라) 역적으로 매도하며 비난하는 다수 민중의 모습을 보며, 민중을 계몽하여 조선(대한제국)을 합리적인 근대 국가로 만들겠다는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후 윤치호의 사상은 민중을 계몽보다는 '개조'의 대상으로 간주하며, "스스로 근대화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어 강제로라도 근대화를 하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윤치호는 정부 관료로 평범하게 활동하였는데 주로 지방 행정직을 전전하였습니다. 강대국의 압박이 계속 심해지는 시국에 윤치호는 미국의 역할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지만, 미국 역시 한반도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방관하기만 했습니다. 을사조약이 체결하자 윤치호는 거리로 뛰쳐나가 체결에 서명한 관료들을 성토하였으나 당연히 소용 없었습니다. 이 무렵 그는 아내 마애방이 출산 중 사망하는 개인적 불행까지 겹치며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1900년대 후반에는 관료 활동과 병행하여 민족 계몽운동 쪽에서만 간간이 모습을 비추었습니다. 대한자강회라든지, 신민회라든지 하는 단체들에서 활동했고(그나마 신민회의 경우 실질적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이름만 걸어놓은 것에 가깝다고도 합니다), 이와 동시에 몇몇 학교에서 교육자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각지에서 벌어진 의병운동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신돌석 등의 의병장이 한국인의 밀고로 죽거나 체포된 것을 알고 나서는 이 민족은 답이 없다로 일관하게 됩니다. ㅡㅡ;




4. 일제강점기 초기의 행적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윤치호는 자신에게 주어진 귀족 작위를 거부하고 낙향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시 귀족 작위를 받은 아버지 윤웅렬이 1911년 사망하자, 아버지의 작위는 또 별 말 없이 물려받았습니다. ㅡㅡ; 하지만 얼마 뒤 105인 사건이 터지자, (이름만 빌려줬든 어쨌든) 신민회 주요 인사 중 하나였던 윤치호는 도리없이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함께 징역살이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귀족 작위는 박탈됩니다.


[105인 사건 때, 압송되는 관련 인사들]


 처음에는 일본의 전향 요구를 강경하게 거부하던 그였지만, 1915년 결국 친일 전향을 선언하고 석방되었습니다. 윤치호의 이러한 심경 변화에 대하여는 이런저런 의견이 있는데, 난생 처음 겪는 옥살이를 견디지 못했다는 설, 애초에 일본을 근대화의 모델로 생각했던 만큼 계속 일본에 저항하기는 심정적으로 어려웠으리라는 설 등이 있습니다. 출옥 후 윤치호는 적극적 친일행위를 하진 않았지만, 독립운동에서도 사실상 손을 떼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여 피지배민족의 독립을 지지하였(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당연히 흥분에 휩싸인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에게, 윤치호는 윌슨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저건 승전국의 식민지를 위한 발언이 아니다"라며 명확히 선을 그었습니다. 이것에 영향을 받아 발생한 3·1운동 역시 그는 참여나 협력을 거부하고, 오히려 "청년들을 앞세워 사지로 밀어넣었다"며 민족대표들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래도 3·1운동 때 수많은 사람들(특히 청년들)이 참여한 데 나름대로 큰 인상을 받기는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도 그는 여기에 참여는 거부하지만, 그가 입수한 정보를 일본에 발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 언론에 "조선이 자치와 독립을 얻고 싶으면 일본에게 잘 보여서 호의를 사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등, 도대체 뭐가 뭔지 알기 어려운 갈팡질팡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3·1운동 당시 사진]


 이는 아마도, 그의 사상체계 자체가 굉장히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민족에 대한 희망(의 잔재), 당시의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적 현실주의, 한때 자신이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일본에 대한 동경, 그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반감과 압도적인 힘에 대한 굴종 등, 상반되는 여러 생각들이 애매하게 뒤엉켜 있던 윤치호의 포지션은 독립운동가로도, 적극적 친일파로도 보기 어려운 애매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윤치호가 천착한 것은 실력양성과 그에 이어지는 '자치론'이었습니다. 윤치호는 교육과 사회운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지만,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대하여는 '가망없는 짓'으로 간주하고 회의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1920~30년대 걸쳐 아버지와 가문을 통해 받은 많은 재산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회운동과 교육활동을 금전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기간동안 꾸준히 일본 당국의 회유를 받기도 했으나, 윤치호는 독립운동은 하지 않을지언정 일본과의 적극적인 협력 역시 거부합니다. 여담으로 윤치호는 본래 여성 교육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는데, 셋째 아내(백매려, 1890-1943)와 딸들이 자신에게 비판적 언사를 일삼자 여성교육에 대한 회의론자로 돌아섰다고. ㅡㅡ;




5. 마침내 정신줄을 놓은 말년의 윤치호


 1938년 윤치호가 총독부 경무국에 소환되어 공갈 협박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전부 감시의 대상이 되어왔다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집니다. 아니 그렇게 똑똑한 양반이 그런 거 하나 눈치를 못 챘나? 한편 수양동우회 ·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많은 활동가들이 잡혀가 고초를 겪게 되자, 윤치호는 이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본 당국에 협력하는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사실 사촌 윤치영(1898-1996)까지 잡혀간데다 자신도 소환되어 조사를 받는 판국이었으니, 자신과 친구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윤치호는 이후 일본의 지배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적극 친일의 세계로 조금씩 빠져들었습니다. ㅡㅡ; 1940년 창씨개명 때도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으나, 결국 문중회의를 열고 대다수 의견에 따라 창씨개명을 하기로 결정합니다(이 때 윤보선 혼자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수양동우회는 1926년 결성되었고, 안창호와 이광수 등이 운영을 주도하였습니다. 1937~38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해체당한 이후, 일본의 탄압과 회유에 다수 회원이 친일 쪽으로 전향하게 됩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을 계기로 윤치호는 완전히 친일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전쟁 발발 소식이 전해지자 윤치호는 처음에는 두 가지 시나리오(일본의 세계정복, 혹은 미국의 승리)를 놓고 갈등하였고, 미국이 승리해야 조선이 독립할 수 있으리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껏 그렇게 잘 맞던 그의 촉이 마지막 한 순간에 어긋났으니, 윤치호는 미국의 승리보다 일본의 승리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최종적으로 정신줄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ㅡㅡ;


 이 때 윤치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신줄을 놓은 데 대하여, 혹자는 그가 유학시절 미국에서 겪은 인종차별과 따돌림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상술했듯 유학 시절의 상처 때문에 윤치호는 서양 세계를 '경외'의 대상이자 '증오'의 대상으로 인식했고, 이런 시각 때문에 그 서양과 일본의 싸움을 냉정한 시각으로 볼 수 없었으리라는 것. 아무튼 윤치호가 적극적 친일파로 완전히 돌아선 것이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1943년 11월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윤치호의 학도병 참가 독려 기고문]


 이후 윤치호는 각종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렸고, 중추원(이 때의 중추원은 총독부의 자문기관 겸 명예직으로, 고위 친일파에게 주어지는 자리) 참의직과 일본 제국의회 의원직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1945년 4월에는 조선인에 대한 참정권 확대와 처우개선(?)을 감사하는 사절단의 대표로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그는 이미 그 시점에서 일본이 쫄딱 망해가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있었을까요?


 그가 어떻게 생각했든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고, 일제강점기 막판 수괴급 친일파였던 그는 당연하게도 전민족의 A급 반역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윤치호는 사람들의 거센 비판에 맞서 자신을 변명하였고, 속속 귀국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너희들 때문에 해방이 된 줄 아느냐?"라며 독설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군정으로부터 별다른 탄압을 받진 않았는데, 미군정의 태도(한국을 '점령지'로 간주한 것)에는 또 비판적 입장이었습니다.


[말년의 윤치호]


 물론 그가 아무리 "친일파들을 사면해야 한다"고 떠든다 한들, 30년 넘게 쌓인 사람들의 분노를 무마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친일파의 상징이 되었고, 개성의 자택이 괴한에게 공격당하기도 했습니다. 여론의 압박과 해방 후 사회적 혼란 속에서, 1945년 11월 말 윤치호는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쓰러졌고 며칠 후 뇌일혈이 겹쳐 세상을 떠났습니다(향년 81세). 일각에서는 자살설도 있긴 한데 신빙성은 높지 않습니다.


 그의 유언은 "모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는 삼가라"였다고 합니다. ㅡㅡ;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요? 자기 자신에 대한 셀프디스? 아니면 고도의 자기변명?




6. 정리 : 그의 복잡한 삶을 도대체 어떻게 볼 것인가?


 분명 윤치호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천재이자 지식인 중 하나입니다. 그는 4개월만에 영어를 마스터한 어학천재였으며, 대다수 독립운동 세력의 낭만적 현실 인식을 준엄하게 꾸짖을 수 있는 날카로운 감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십 년간 교육과 사회운동에 참여하여 민족 계몽에 투신한 활동가이기도 했고, 자신의 명망과 지위, 재산을 바탕으로 안창호, 이상재 등 많은 활동가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지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지성과 활동력이 결국 '자포자기'로 흘러버리곤 했다는 것이 윤치호의 본질적 한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재능과 명성을 가지고 세상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지만, 세상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결정적 순간에는 항상 손을 놓아버리곤 했던 것입니다. 갑신정변, 독립협회, 3·1운동, 이후의 독립운동을 통틀어 윤치호는 그것들의 실체를 명확히 통찰하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대안은 제대로 내놓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경험과 상처를 뛰어넘지 못하는 한계 또한 보였습니다. 윤치호가 미국 유학 시절 당한 온갖 차별과 폭력은 평생동안 상처가 되어 그의 사상에 그림자를 남겼고, 그는 자신이 겪은 인종주의에 대항하여 인생 막판에 '반대 방향의 인종주의'를 선택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윤치호의 삶은 그와 동시대를 지낸 개화기 지식인 일반을 상징합니다. 그들의 일생을 살펴보면 끝까지 일본에 저항한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일본에 들러붙은 사람도 있으며, 항일에서 나중에 친일로 돌아선 사람, 친일파에서 항일로 돌아선 사람 등등 다양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사상과 삶의 여정은 뭐라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결국, 당시 조선-대한제국의 상황이 그랬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근대화는 해야 할텐데, 정작 내부에서 그럴 동력은 없고, 관료들은 국가의 미래에 별 비전이 없고, 왕실은 교통정리를 할 능력과 의지가 없고, 시간은 없는데 외부의 압박은 갈수록 심해지고, 민중은 근대화 자체에 비협조적이었던 게 당시 한반도의 정세였습니다. 먼저 근대화된 지식인들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어떻게든 합리화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들 중 많은 수는 결국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친일파가 되거나, 은둔형 외톨이가 되거나, 소수는 아예 바다 저 멀리 떠나버리기도 했지요. 분명한 건, 그들은 분명 이 사회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 가능성을 사회를 위해 제대로 활용한 경우는 결코 많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윤치호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는 어학천재였지만 정작 그 재능을 한국의 언어를 위해서 거의 쓰지 않았고(당시 한국어 어휘가 시원찮다고, 국문으로 쓰던 일기를 영문으로 바꿔버렸을 정도), 세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가졌으면서도 이를 단지 자신의 정신승리와 남들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 넣다시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그들의 지식이란, 이 세상을 위해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요?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한국사료총서(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a) 中 <국역 윤치호 일기>




[2018. 5. 23. 수정]



Sophie-Carmen Eckhardt-Gramatté (1898(1899)-1974)

Symphony No.1 in C E.104



 - 이 비범한 ㅡㅡ; 이름을 가진 인물은 러시아계 캐나다인으로, 작곡가, 피아니스트,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였습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으며(출생연도가 1898년과 1899년으로 각기 다르게 적혀 있는데, 그레고리력(세계 표준)과 율리우스력(제정 러시아 사용)의 차이로 보입니다), 초명은 Sofia (Sonia) Fridman-Kochevskaya입니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8세에 파리 콘서바토리에 유학하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작곡을 트리플복수전공하게 됩니다.


 - 11세에는 파리, 제네바, 베를린을 순회하며 첫 번째 연주회를 열었는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번갈아가며 연주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음악가로 활발히 활동하던 그는 1920년 화가 발터 그라마테(1897-1929)와 결혼하였고, 이후에도 1925년 에드윈 피셔(1886-1960)와 독일에서 연주회를 여는 등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1929년 그는 남편을 결핵으로 잃고 말았습니다.


 - 이후 그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자신의 첫 번째 피아노/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하였고, 1934년에는 저널리스트 겸 예술사학자인 페르디난트 에크하르트(1902-1995)와 재혼하였습니다. 1936~39년 사이에는 베를린에서 막스 트라프(1887-1971)에게 작곡을 배웠고, 이후 남편과 함께 비엔나로 이주하여 작곡가로 활동하였습니다(제2차 세계대전도 겪었을 텐데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찾기 어렵네요).


 - 1953년에는 다시 아메리카로 이주, 캐나다의 위니펙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작곡 활동과 함께 음악 교육자로 활동하며 몇몇 학생을 지도하였습니다. 1974년 트럼펫 협주곡을 작업하던 도중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교향곡은 2개가 있으며, 1번 교향곡은 1939년에 작곡하였습니다.



7. 베트남 전쟁 : 끝없는 수렁에 빠지다


 - 베트남 개입 확대에 반대하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피살당하고, 얼떨결에 대통령에 취임한 린든 존슨(민주당)은 베트남전 확전을 결정하고, 1964년 통킹 만 사건(하노이 앞바다의 통킹 만에서 미국 함선이 공격당한 사건으로, 현재는 이 사건 자체가 조작 혹은 왜곡일 것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빌미로 베트남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 우리가 알고 있는 베트남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공군기지 방어를 위해 상륙한 미국 해병대]


 - 미국은 처음에는 남베트남군까지 포함한 압도적 전력차이를 가지고 단기간에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고, 북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이루어지는 등 처음에는 미국의 계획대로 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곧 미국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특히 전쟁을 끝없는 수렁으로 만들었던 것은 바로 남베트남 내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는 베트콩이었습니다.


 - 베트콩은 무성한 정글과 여기저기 파놓은 땅굴 등, 지리적 이점을 총동원하여 미군(과 기타 동맹군)을 괴롭혔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남베트남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고, 북베트남에서 인적, 물적 지원도 받고 있었던지라 이들을 상대하는 미군과 남베트남군, 동맹군(이하 '미군'으로 통칭)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습니다. 미군은 고엽제를 대량 살포하여 정글을 초토화하고, 농촌 마을을 폭하는 등 무리수까지 두었지만 전황은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유명한 사진 <소녀의 절규>. 사진 가운데의 판티킴푹(1963-)의 마을은 미국 공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불탔으며, 판티킴푹은 이후 여러 차례의 대수술로 생존한 후 현재는 


 - 가장 큰 문제는 '명분'이었습니다. 애초에 미국과 남베트남은 제네바 합의에서 약속한 '2년 후 총선거'를 거부함으로써, 명분에 있어서 북베트남에 크게 밀리는 상태였습니다. 거기에 미국이 극도의 부정부패에 시달리던 남베트남 정부를 도와 전쟁에 개입하고, 남베트남 민중과도 적대하게 되면서 베트남의 민심은 갈수록 베트콩과 북베트남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던 것.


 - 부족한 명분은 미군의 전쟁 수행에 큰 제약을 가했습니다. 일단 육군은 소수 특수부대를 제외하면 북베트남으로 진격할 수 없었고(소련과 중국의 눈치를 봐야 했던 것), 북베트남이 베트콩을 지원하기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 정글에 만든 '호치민 루트' 또한 제대로 견제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은 정치공작을 통하여 호치민 루트를 묵인하는 캄보디아 왕정을 무너뜨렸지만, 정작 혼란을 틈타 공산주의 반군(크메르 루주)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일이 더 꼬여버렸습니다.


[크메르 루주는 1975년 캄보디아 전역을 장악한 후 캄보디아를 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 이 때 남베트남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쿠데타가 횡행한 이야기는 앞에서 했고, 대규모 징병을 통해 겉으로는 100만 대군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그 속은 시커멓게 썩어 있었습니다. 미국이 지원한 무기들을 남베트남의 장교들은 뒤에서 몰래 팔아먹었고, 나중에는 이러한 무기를 베트콩이 사들였기 때문에 베트콩과 남베트남군이 사이좋게(?) 미국 무기를 들고 서로 싸우는 촌극까지 벌어졌습니다. ㅡㅡ;




8. 미국의 GG선언, 모래성처럼 무너진 남베트남


 - 더 무너질 것조차 없던 남베트남군은 그렇다 치고, 명분 없는 전쟁이 계속되면서 미군 역시 속에서부터 썩어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탈영이나 군무이탈 같은 문제는 일도 아니었고, 곳곳에서 병사가 상관을 공격(하극상)하는 사건이 빈발하였습니다. 오죽하면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프래깅(본 의미는 수류탄을 터뜨려 사고사로 위장한 상관 살해. 흔히 상관 살해를 통칭하는 말로 쓰임)'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


 - 그래도 미국은 대외적(특히 미국 내부적)으로는 자신들이 곧 승리하고 전쟁이 끝날 것이라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선전을 무력화하고, 결국 전쟁 전체의 향방을 결정짓는 사태가 터지니 바로 1968년 초의 '테트(설날) 공세'였습니다. 본래 베트남도 나름 중국문화권이기 때문에 설날을 명절로 치르고, 전쟁이 계속되는 중에도 설날(베트남어로 '테트') 전후에는 (남베트남군 한정으로) 암묵적 휴전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테트 공세 때, 공격을 개시하는 베트콩 부대]


 -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테트 시기의 풀어진 분위기를 역이용하여, 남베트남 전역의 주요 도시에 베트콩 부대를 침투시켜 대공세를 가하기로 계획합니다. 1968년 1월 30일 새벽, 명절 폭죽놀이를 신호로 베트콩 침투부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남베트남은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고, 길게는 일주일 이상 치열한 전투가 계속됩니다. 하지만 원래 예정된 북베트남군의 지원이 실현되지 않았고, 결국 베트콩은 거의 모든 도시에서 섬멸당하고 말았습니다.


 - 이 공세를 통하여 남베트남의 베트콩 세력이 사실상 일망타진되었으니, 전술적으로는 북베트남의 완패였습니다. 하지만 구정 공세는 북베트남이 건재함을 세계, 특히 미국인들에게 각인시켰고, 참혹한 전투가 TV 등을 통하여 그대로 미국인들에게 전해지면서 미국 내 반전여론이 대폭발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한 베트콩 부대원이 남베트남군 장교에게 즉결처형당하는 사진이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반전여론에 더욱 불을 지폈습니다.


[문제의 그 사진. 왼쪽은 사이공 경찰서장 응우옌응옥루안(1930-1998), 오른쪽은 베트콩 암살부대 소대장 응우옌반럼]


 - 결국 베트남 전쟁 확전을 주도한 존슨은 1968년 대통령 선거를 낙선도 아니고 불출마(첫 번째 후보 경선에서 탈탈 털리고 GG)하게 되었고, 본선에서도 '베트남 개입 중단'을 내건 리처드 닉슨(공화당)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닉슨은 1969년부터 베트남 파병군의 단계적 철군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이후의 전쟁은 말 그대로 아무 의미 없는 '버티기'에 불과했고, 1973년 미국은 북베트남과 파리평화협정을 체결, 휴전을 약속하고 완전 철군하였습니다(대한민국 국군도 이 때 함께 철군).


 - 이후의 남베트남 상황은 안 봐도 비디오...... 북베트남군은 미군이 사라지자마자 휴전 약속에 "ㅗ"를 날리고 총공세를 시작, 남베트남군은 미국에게서 무기 지원은 받았지만 탄약 등 물자 지원을 받지 못하는 등 ㅡㅡ; 지리멸렬을 거듭하였습니다. 응우옌반티에우는 전황이 결정적으로 악화되자 미국을 맹비난하면서 야반도주, 이 와중에도 쿠데타는 계속되었고, 최후의 순간에 다시 대통령직에 오른 즈엉반민은 북베트남군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결국 남베트남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사이공 대통령궁으로 밀고 들어오는 북베트남군 전차]




9. 결론 : 남베트남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 남베트남의 패망 자체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한국 역시 분단 상태이기 때문이겠죠. 오랫동안 한국 정부에서는, 남베트남의 패망을 두고 "전국민이 일치단결하고 반공정신으로 무장하여 공산주의와 싸우지 않으면 남베트남처럼 패망한다"라고 프로파간다를 하였고, 이는 독재정권 시기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훌륭한(?) 명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 하지만 블로거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남베트남이 패망한 것은 남베트남 국민의 잘못입니까, 아니면 남베트남 권력자들의 잘못입니까? 남베트남의 다수 민중이 베트콩 게릴라를 지지했던 것은 남베트남 정부가 너무나도 썩었고, 국민의 기본권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국이 전쟁으로 황폐화되는 때에 권력층은 내부에서 권력투쟁에만 몰두했고, 결국 미국까지 등에 업고도 사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블로거는 농지개혁법이야말로 이승만 최대의 업적이라 감히 단언합니다.]


 - 남베트남의 사례는 오히려 '남한은 왜 북한에 패배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좋은 반례이기도 합니다. 남한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농지개혁을 비교적 성공적(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토지를 농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한 것' 자체가 충분히 성공)으로 수행하였고, 새로 토지를 갖게 된 대다수 농민들은 남한 정부에 충성을 다하여 북한과 싸웠던 것. 국민의 '일치단결'이 중요하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 열쇠는 오히려 권력 스스로가 쥐고 있는 셈입니다.


 - 블로거는 남베트남 패망의 교훈으로 한 가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민주적이지도 않고 국민의 기본권을 돌보지도 않는,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은 반드시 패망합니다. 일치단결을 핑계로 국민을 탄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이것을 경청하는 민주적인 권력이야말로 건강하게 영속할 수 있다는 것을 남베트남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travel.tourism.vn:808/main/publish/view.jsp?menuID=002001002017&type=P (베트남 독립운동)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nec1963&logNo=220521897627 (응오딘지엠)

http://gesomoon.com/Ver2/board/view.php?tableName=comm_discuss&bIdx=408793 (틱광둑 소신공양과 쩐레수언)

http://ppss.kr/archives/22141 (베트남 전쟁 관련)


4. 건국해놓고 보니 개판


 - 응오딘지엠이 성공적으로 권좌에 오른 것처럼 보이지만, 남베트남의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계속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휘둘려 정권이 바뀌었다보니, 내부적으로 수많은 정치적 파벌(작게는 학연, 지연으로부터 크게는 왕당파도 있는 등등)이 전혀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습니다. 일단 응오딘지엠은 이러한 혼란상에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친족과 측근세력을 정부 요직에 대거 앉혔습니다.


 - 그런데 이래놓고 보니 새로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단 응오딘지엠 자신이 가톨릭 신자였고, 새로 등용한 친척이나 측근들도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던 겁니다(당시 베트남의 기득권인 지주 계층은 프랑스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가 많았음). 이건 그냥 봐도 문제인데, 하필 베트남이 불교문화권에 속해 있다는 게 문제를 더 키워버렸습니다. 당시 남베트남의 불교 신자는 전국민의 90%를 넘었습니다.


[호치민(사이공) 노트르담 성당]


 - 이렇게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 독재와 부정부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일단 민중이 원하던 토지개혁은 지주들의 반대 속에 흐지부지되었고, 이승만이 이거 하나는 정말 잘 한 겁니다...... 나름 미국의 지원이 상당히 많았지만 이것이 대다수의 민중에게 제대로 분배될 턱이 없었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대다수인 남베트남 정부는 가톨릭 교회에 막대한 토지와 이권을 넘겨주었습니다.


[도강 중인 베트콩 부대]


 - 이러한 상황에서 남베트남 내의 베트민 지지세력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일명 베트콩)을 형성하여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고, 이들은 착취와 부정부패에 지칠 대로 지친 다수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남베트남 정부를 끊임 없이 괴롭혔습니다. 이런 썩은 국가의 군대도 제정신이 박혀있을 리 없어서, 남베트남군은 무려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음에도 반정부 게릴라 하나 제대로 상대 못해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5. 틱광둑의 소신공양과 쩐레수언의 패드립


 - 이런 지옥도가 몇 년 이상 흐르면서, 응오딘지엠 정부는 국내 각계 각층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게 됩니다. 특히 가톨릭 성향 정부 하에서 불교기(旗) 게양조차 금지당할 정도의 탄압과 차별을 당해온 불교계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으며, 당연히 정부는 수십 명의 사망자까지 내며 강경진압을 일삼았습니다.


**틱광둑의 소신공양 장면(칼라를 첨가한 흑백사진). 잔인한 장면일 수 있으므로 링크로 대체**


 - 이러한 상황에서, 남베트남의 저명한 고승 틱광둑(1897-1963)이 소신공양(분신)을 감행하며 남베트남의 참상이 전세계로 퍼지게 됩니다. 1963년 6월 11일, 승려들의 침묵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틱광둑은 다른 승려들의 협조로 온몸에 기름을 뿌리고 분신하였습니다. 이는 사진과 영상을 통하여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세계인은 '반공의 선봉장'이 아니라 '독재와 부패의 지옥'을 목도하였습니다.


[쩐레수언]


 - 물론 응오딘지엠 정부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으며, 특히 응오딘지엠의 제수(동생 응오딘뉴의 아내. 통칭 '마담 뉴')이며 부정부패의 중심 인물 중 하나인 쩐레수언(1924-2011)이 타오르는 분노에 기름을 붓고 말았습니다. 이전에도 과격한 언행으로 악명이 높았던 쩐레수언은, 틱광둑의 소신공양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역사에 남을 패드립을 시전하였습니다.



 "What had the buddhist leaders done comparatively? The only thing they have done: They have barbecued one of their monks."

 ("불교 지도자들이 한 게 대체 뭐가 있나요? 그들이 한 거라곤 승려 한 명을 바베큐로 만든 것 뿐인데.") 실제로 한 말





 - 이 발언은 남베트남 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분노를 당연히 샀고, 어떻게든 응오딘지엠을 밀어주려 했던 미국은 마지막 인내심마저 접고 응오딘지엠을 포기하기로 결정합니다.




6. 대 쿠데타 시대가 열리다


 - 몇 달 지나지 않은 1963년 11월, 남베트남군의 즈엉반민(1916-2001) 장군은 미국의 묵인 하에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미국으로 망명시킬 계획이었지만, 정작 응오딘지엠 본인은 망명을 거부하고 대통령궁에서 동생 응오딘뉴와 함께 처형당했습니다(정작 패드립의 주인공 쩐레수언은 유유히 미국으로 도망).


 - 이것으로 남베트남의 혼란이 종식......될 리가 있나. 이때부터 남베트남은 허구헌날 벌어지는 쿠데타로 더욱 난장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쿠데타의 주역 즈엉반민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동료 응우옌칸(1927-2013)의 쿠데타로 쫓겨났고, 이후 집단지도체제가 되었다가, 응우옌반티에우(1923-2001)가 그나마 좀 오래 집권했다가, 베트남 전쟁 막판에 다시 쿠데타로 쫓겨나고...... 웃기게도 이 혼란상의 마지막을 장식한 인물은 첫 쿠데타를 일으킨 즈엉반민이었습니다. ㅡㅡ;


[그나마 오랫동안 권력을 지킨 응우옌반티에우]


 - 이렇게 쿠데타가 빈발하던 시기가 바로 베트남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였다는 게 이 상황의 막장성을 더합니다. 미국은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 전쟁을 시작하였고, 남베트남군에도 많은 지원을 퍼주었습니다. 당연히 전쟁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라고 준 거였는데, 남베트남군은 전쟁은 뒷전이고 자기들끼리 쿠데타를 일으키기 바빴으니 제대로 전쟁 수행이 될 턱이 없었습니다. ㅡㅡ;


 - 그나마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대부분 응우옌반티에우 집권기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응우옌반티에우 역시 별로 유능한 인물은 되지 못했고, 지속되는 부정부패와 남베트남군의 거듭된 삽질을 어떻게 개선하지는 못했습니다. 전쟁 막판에 대만으로 도망치면서 그는 미국이 자신들을 배신했다며 맹렬하게 비난했지만, 글쎄요 그들이 딱히 누굴 욕할 처지가...... (계속)



1. 배경 : 식민지 베트남과 독립운동

 - 베트남은 1857년부터 정확히 30년에 걸쳐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이후 기존 왕조(응우옌(阮) 왕조)는 '존속'은 할 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가 전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한 방에 날아간 이후, 사실상 관리 불능 상태가 된 인도차이나 반도를 낼름 집어먹은 건 다름아닌 일본 제국.

[사이공에 입성하는 일본군]


 - 일본은 처음에는 군대 주둔과 관련 시설 이용권 확보에서 시작하여 1945년 3월에는 프랑스 총독부를 완전 몰아내고, 응우옌 왕조의 '명목상' 황제인 응우옌푹티엔(바오다이保大, 1913-1997)을 역시 '명목상' 황제로 앉혀 베트남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만주국 동남아시아판 짧은 기간 동안 일본은 대규모 식량 수탈을 자행했고, 여기에 연합군 공격으로 인한 교통난까지 겹쳐 1945년 초에는 200만여 명이 굶어죽는 대기근까지 발생했습니다.

 - 당연히 프랑스 식민 시기에도, 일본 식민 시기에도 독립운동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기존의 식민제국 프랑스가 일본에게 굴복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독립운동은 사기탱천하였고 최종적으로는 호찌민(1890-1969) 이 주도하는 베트남독립동맹회(베트민(월맹))가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일본과 프랑스의 틈바구니에서 세력을 확장한 베트은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 무섭게 전국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 하지만 해방도 잠시, 중국(중화민국)군과 프랑스군(프랑스군 진주 이전에는 영국군)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목으로 베트남에 들어왔습니다. 일단 베트민, 중국, 프랑스는 1946년 초 베트남 독립 문제에 관해 합의를 보았으나, 여기에 대한 의견차이로 베트민과 프랑스 사이에 충돌이 재개되면서 베트남은 본격적으로 전화(戰火)에 휩싸이게 됩니다(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2.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 당연하게도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프랑스가 압도적이었는데, 여기에 대항하여 베트민은 철저히 게릴라전으로 일관하며 농촌과 지방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프랑스는 베트민에 의해 쫓겨나 외국으로 도망친 바오다이를 다시 불러와, 남부 최대도시 사이공을 중심으로 한 괴뢰정부를 만들었습니다. 

 - 그런데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반공세력의 맹주로 떠오른 미국이 베트남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도 사회주의 세력의 손에 떨어진 마당에, 사회주의 성향의 베트민이 베트남을 장악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 이에 사회주의권의 소련-중국은 베트민을 지원하여, 전쟁은 점차 국제전으로 확대되어가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으면서도 프랑스군은 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습니다. 1953년 들어 베트민은 몇몇 대도시를 제외한 북부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고, 국경을 넘어 라오스로 진격할 태세였습니다. 이에 프랑스군은 라오스로 가는 길목에 있는 디엔비엔푸에 대규모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거점을 건설하고, 이곳에서 베트민군과 싸우기로 결정합니다. 디엔비엔푸는 험준한 산악지대 가운데 분지 지형이었기 때문에, 베트민군이 들어올 길이 제한되었습니다(라고 프랑스군은 생각했습니다).

[디엔비엔푸의 대략적 위치]


 - 이는 육상보급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데다 산악지대를 베트민군이 확보하면 프랑스군이 그대로 포위되는 위험한 전략이었지만, 주변 지형이 워낙 험준하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응우옌잡(1911-2013)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군은 대포 등의 중화기를 부품 단위로 분해, 인력과 자전거 등을 이용하여 산 위까지 실어날라 다시 조립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근성을 선보였습니다. 프랑스군이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그들은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 산 위에서의 포격에 물자수송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하필 그 산은 정글이 우거진 곳이기까지 해서 공습으로 베트민군을 쫓아내기도 어려웠습니다. 결국 비행장까지 점령당하자 프랑스군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1만 6천 명 중 1만 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항복했습니다. 베트민군은 포로를 상당히 가혹하게 대우해서, 최종적으로 풀려난 프랑스군 포로는 3천여 명에 불과했다는군요(다만 베트민에서는 프랑스군의 베트남인 학살을 들먹이며 코웃음을 쳤다고 합니다).

[디엔비엔푸에 입성하는 보응우옌잡]


 - 결국 북부는 완전히 베트민의 손에 들어왔고, 프랑스군은 GG를 치고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1954년 제네바 합의(한국전쟁 정전 문제가 논의된 그 회의)에서 프랑스군 완전 철수, 2년간 한시적 정전선 설정 이후 1956년 총선거로 통일정부 수립 등의 내용이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으로 해피엔딩......이면 좋았겠지요? 하지만 프랑스가 사라진 무대에, 이제 미국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3. 남북분단과 베트남 공화국 건립

 - 일단 2년 후 총선거가 실시되면 베트민이 정권을 잡을 것은 거의 확실했고, 이는 공산주의 확산을 막으려는 미국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나리오였습니다. 정전선으로 결정된 북위 17도 이남에는 일단 바오다이 황제의 베트남국이 (미국의 후원 하에) 다시 들어섰고, 베트남국과 미국은 합의 내용 중 '총선거 실시'를 거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응오딘지엠]


 - 다만 바오다이는 사실상 바지황제(?)였고, 미국이 밀어준 실세는 총리에 임명된 응오딘지엠(고딘디엠, 1901-1963)이었습니다. 응오딘지엠은 이전에도 바오다이 정부의 각료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항일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일본 패전 이후 혼란한 상황에서 미국 등지로 망명하기도 했습니다. 총리 응오딘지엠은 1년 후인 1955년, 국민투표를 주도하여 바오다이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베트남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한 후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 자세히 보면 뭔가 냄새가 나지요? 실제로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적극 밀어주었고, 그의 '선거 쿠데타'와 대통령 취임에도 미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배어 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국민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는 바오다이 정부가 자신들의 목적(동남아시아 공산화 저지)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였고, 우익 성향 인사이면서 그나마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을 커리어를 많이 쌓은(항일운동 등) 응오딘지엠에게 권좌를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국민투표에 참여하는 응오딘지엠]


 - 여기까지는 미국의 의도대로, 나름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베트남 공화국(이하 남베트남)이 수립되었습니다. 당연히 새로운 공화국 또한 남북 총선거를 거부하였고(아무리 그래도 총선거를 하면 남쪽이 이기기 어려우므로), 베트남의 남북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이 미처 계산하지 못한 문제가 두 가지 있었으니, 하나는 남베트남의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부패였고 다른 하나는 응오딘지엠의 '종교'였습니다. (계속)




 면적 

 21㎢

 인구

 10,084명 (2015년 추산)

 1인당 GDP(PPP)

 $2,500 (2006년 추산)



 - '나우루'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 태평양 한가운데, 적도 바로 아래 위치한 작은 섬나라죠. 그 작은 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데, 넓이는 서울 면적의 1/30이고 인구는 한국의 웬만한 읍 하나보다도 적습니다. 나우루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작은 국가이며, 특히 공화국 중에서는 가장 작은 나라로 꼽힙니다(나우루보다 작은 바티칸이나 모나코는 '공화국'이 아니므로). 어찌나 작은지 명시된 수도(首都) 자체가 없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 위치나 크기 등에 비하여, 나우루는 언론이나 인터넷 등을 통하여 일반인에게도 어느 정도는 그 정체가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관광이라든지 국제정치라든지 하는 것과는 별 관련이 없고, '자원으로 흥하고 자원의 고갈과 함께 쫄딱 망한'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원 고갈 이후 인류(혹은 중동의 석유 부국들)의 미래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나라입니다.




1. 시작 : 바다새의 배설물로 만들어진 작은 섬


 - 이곳은 그야말로 태평양에 점점이 흩어진 수많은 섬들 중 작은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섬에는 뭔가 특별한 게 하나 있었으니, 태평양에 서식하는 알바트로스 등의 바다새들이 오랜 기간 이 섬을 오가며 화장실(?)로 썼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이 섬에는 수천 수만 수억(?)년간 바다새의 배설물이 쌓이게 되었는데, 이 배설물은 오랜 시간동안 굳어 인(P) 성분이 많이 함유된 인광석으로 변모하였습니다.


 - 바다새가 만든 인광석만 잔뜩 쌓인 이 섬에는 태평양을 누비던 원주민(폴리네시아, 미크로네시아)들이 언제부턴가 들어와 정착하였습니다. 원주민들이 물고기를 잡으며 살던 작은 마을에 서양 세력이 들어온 것은 19세기. 나우루 섬은 독일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곳을 찾은 유럽인들은 섬 전체에 지천으로 널린 인광석에 주목하게 됩니다. 인광석은 비료, 폭약, 의약품 등 다양한 분야의 산업에 쓰이는 중요 자원이었거든요.


 - 자원의 보고로 밝혀진 이 섬은 이후 본의아니게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독일의 손을 떠나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초에는 독일 폭격기가 이 섬 일대를 폭격하여 연합군의 시설을 파괴한 일이 있었으며, 얼마 뒤 일본이 이 섬을 점령하여 1945년 항복할 때까지 지배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은 외부의 전염병이나 강제이주 조치를 겪어야 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섬에 귀환한 원주민은 70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폭격을 당하는 나우루 섬]


 - 이후에는 오스트레일리아가 국제연합을 대표하여 신탁통치를 하였으며, 1960년대 정부를 구성한 이후 1968년 완전히 독립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우루의 신화가 시작됩니다.




2. 리즈시절 : 세계 제일의 부자 나라


 - 독립 직전인 1967년, 나우루 주민들은 영국으로부터 인광석 개발권을 완전히 넘겨받았습니다. 독립 이후 나우루는 국가 차원에서 인광석 개발에 나서 엄청난 이익을 쓸어모았으며, 주민들은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배불리 먹고 살 만큼 막대한 부를 얻게 됩니다. 1980년대 초 미국의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갓 넘을 때, 나우루의 1인당 GDP는 2만~3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1980년대 초입니다.


[저게 다 돈입니다 돈!]


 - 인구도 1만 명 남짓으로 많지 않으니 나우루 정부는 인광석 관련 수익을 아예 전국민에게 골고루 분배했고, 신석기시대 나우루 주민은 그야말로 허공에 태워도 남아돌 만큼 많은 부를 얻었습니다. 웃기게도 정작 나우루 주민은 인광석 채굴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고, 단지 외국인들이 인광석을 채굴하는 대가로 지불한 로얄티만으로 이런 상황이 가능했던 것.


 - 사실 아무도 일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필요한 물건은 외국에서 사 오고, 필요한 노동력은 외국인을 불러와서 시키고(심지어 공무원이 외국인이었을 정도!), 술 한 잔 마시러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녀도 돈이 남아돌 정도였습니다. 세금은 당연히 없고(애초에 그 돈을 누가 줬는데요), 주택, 교육, 병원 또한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지요. 현실 유토피아 심하게는 화장실에서 1달러짜리 지폐로 뒤를 닦을 정도였다는군요.


[물론 돈으로 담뱃불을 붙이는 이 분은 나우루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 다만 당시에도 (주로 외국인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나우루의 행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자원은 영원한 게 아니니까요. 나름 나우루 정부에서도 이 돈을 가지고 여기저기 투자도 하고, 돈놀이도 하곤 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성공한 게 없었습니다. 그래도 당장의 영광이 너무 컸기 때문에 나우루의 그 누구도 걱정을 하지 않았고, 정부에서는 "자원이 떨어지면 그 때 가서 생각해보면 되겠지" 정도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그리고......




3. 몰락의 시작 : 인광석이 바닥났다!


 - 우려했던 상황이 1990년대 이후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80% 이상이 채굴된 나우루의 인광석 생산량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정부는 더 이상 인광석 개발로 돈을 벌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정부는 부랴부랴 해외에 투자한 자산을 매각하거나 이를 담보로 돈을 빌려 당장 급한 불을 끄고, 어항을 확장하여 주민들이 새로운 직업을 갖게 하려고 했지만 참담하게 실패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나우루 주민들은 '일을 해서 돈을 번다'는 기본적인 노동 개념조차 잊어버린 겁니다!


 -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온갖 문제가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일하는 방법 자체를 잊어버려서, 빨래나 설거지 등 기본적인 가사조차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움직이거나 하질 않는데다 식품이라곤 죄다 외국산 가공식품 투성이였으니, 90% 이상의 주민이 비만 상태로 온갖 질병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바론 디바베시 와카(1959-) 現 대통령. 대부분의 주민이 이런 상태]


 - 다급해진 나우루 정부는 전략을 바꾸어, 세계의 검은 돈(부정축재라든지, 범죄조직이라든지......)을 끌어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조세피난처와 돈세탁 천국으로 변모한 나우루는 세계의 욕을 처먹으면서도 그럭저럭 경제수준은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정부는 영국에서 상연된 어느 뮤지컬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하고, 런던에서 열린 초연에는 정부 각료들이 비행기를 타고 다녀왔으며, 투자한 돈은 쫄딱 날려먹는 등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습니다.


 - 결국 국제사회의 금융 제재를 먹으면서 이 전략도 끝장났고, 나우루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4. 나우루의 현재 : 자원에만 의존한 사회의 최후


 - 이후 나우루는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지원금을 받는 대가로, 오스트레일리아로 흘러들어온 난민들을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우루가 이들을 제대로 먹여살릴 여력이 있는 곳도 아니고, 사실상 난민들을 수용소에 가둬놓다시피하는 수준이라 난민들의 거센 불만을 불러왔습니다. 그래서 2003년 이후 지금까지 나우루는 잊을 만하면 수용된 난민들의 폭동으로 나라 전체가 난장판이 되는 일을 겪고 있습니다. 대통령 청사가 불탄 적도 있다는군요.


[나우루 섬을 촬영한 항공사진]


 -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인광석 개발이 지속되면서 사실상 인광석 더미나 다름없었던 나우루 섬의 높이는 계속 낮아졌고, 개발이 거의 끝나가는 현 시점에는 해수면과 거의 높이 차이가 없을 만큼 섬의 고도가 낮아져 있습니다. 여기에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의 높이가 높아져버리니, 나우루는 장기적으로 바다 밑에 통째로 잠겨버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 현재의 나우루는 사실상 국제 사회의 원조로 연명하고, 그 대가로 난민을 수용하거나 국제연합에 한 표를 던져주는 신세입니다. 소수의 공무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민은 실업 상태이고, 그나마도 대부분이 비만과 성인병에 시달리며(당뇨병 환자가 전체의 40%) 제대로 일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 나라 주민의 평균 수명은 에이즈나 다른 전염병의 요소가 거의 없는 환경임에도, 58세(남자)/65세(여자)로 상당히 낮은 수준입니다.


 - 나우루의 번영과 몰락은 인류 문명 전체에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자원을 빨아먹으며 번영을 누리는 현재의 인류 문명이, 바로 그 자원이 고갈될 때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우루의 역사는, 현재의 번영에 도취되어 미래의 환경 변화를 대비하지 않을 때 인류는 결국 몰락하게 될 것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http://www.nauru.or.kr/

http://skccblog.tistory.com/1070

http://clankorea.com/index.php?document_srl=16368&listStyle=webzine&mid=mission_south_pacific

경향신문 "[지구의 밥상] (1) 태평양의 '콜라 식민지'"

연합뉴스 "태평양 나우루의 호주 난민수용소, 폭동에 초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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