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7. ~ 2016. 11. 23.

Full Orchestra


# 2 Flutes, 2 Oboes, 2 Clarinets, Bass Clarinet, 2 Bassoons

# 4 Horns, 3 Trumpets, 3 Trombones, Tuba

# Timpani, Triangle, Cymbals, Tamtam, Chimes

# String 5 Parts



[부연설명] 곡을 들으면 학교에 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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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의 황족들은 나라의 멸망에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개중에는 적극적인 친일분자가 되어 자신들의 나라를 팔아먹는 데 참여한 이들도 있고, 소극적이나마 일본의 침략에 저항한 이들도 있지요. 하지만 대체로 이들 대부분이 적극적으로 일본에 맞서지 않았으며, 대한제국 멸망에 적어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은 친일분자로 활약한 대한제국의 황족, 영선군 이준용입니다.


[그림으로만 봐도 위엄돋는 그의 풍채]




1. 영선군, 왕의 조카가 된 남자


 이준용은 1870년 흥친왕 이재면(1845-1912)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재면은 흥선대원군의 장남으로서 고종(이재황)의 친형입니다. 즉 이준용은 고종의 친조카가 되는 셈으로, 흥선대원군에게는 적장손이기도 합니다. 친동생 이문용(1882-1901)이 19세에 요절하였기 때문에 그는 사실상 이재면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출생 후 영선군(永宣君)이라는 호칭을 받았으며, 어린 시절에는 흥선대원군의 식객이자 측근인 허욱(1827-1883)을 가정교사로 삼아 글을 배웠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상당히 명석하고 뛰어난 자질을 보여 흥선대원군이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특히 그의 아버지 이재면이 그리 강단있는 위인이 아니었던 데 비해, 이준용은 상당히 영리하면서도 진중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이재면보다도 장손 이준용을 더욱 총애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의 곁에 있으면서 이준용은 냉혹한 현실정치의 생리에 일찍부터 눈뜰 수 있었는데, 이 시기 고종과 민씨 세력에 의해 권력을 상실한 흥선대원군은 싹수가 보이는 이준용을 고종의 대안으로 점찍게 됩니다. 그러한 주변 환경 속에서 자란 이준용은 1880년 관례(冠禮)를 치르고 정식으로 성인이 되었으며, 같은 해 남양 홍씨와 혼인하였습니다.


 그는 1880년대 초 음서를 통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884년 말에는 세자익위사(세자의 호위를 담당) 세마(洗馬, 정9품)에 올랐는데 이는 갑신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급진개화파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급진개화파는 흥선대원군에게 비교적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적장손인 이준용을 적극 기용하였던 것입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이후 이준용 역시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정변의 직접 참여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히 신변의 위협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음서로 등용되었기 때문에 하급 관직을 전전하던 그는, 1886년 과거시험에 정식으로 급제한 이후 비로소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홍문관 정자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이준용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 이듬해(1887년)에는 이미 정3품 당하관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그는 반(反) 고종 세력의 구심점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는 흥선대원군과 고종 및 명성황후가 정치적으로 대립한 데서 비롯합니다. 1873년 최익현의 상소 등을 계기로 섭정에서 물러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친(親) 고종 세력과 적대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왕을 갈아치울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영선군 이준용이었습니다. 확실히 자기 편이기도 하고, 인물이 영특하여 아내의 조종을 받거나 할 것 같진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고종의 장남이자 궁인 이씨의 소생인 완화군(1868-1880)을 밀어주려고 하였지만, 그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바람에 대타로 이준용을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흥선대원군과 그 세력에게 '대안'으로 떠오른 이준용의 삶은 1880년대 중반부터 격랑 속에 휘말려들기 시작했습니다.



2. 나도 왕 한 번 해 보고 싶었다


 1886년, 당시 청에서 파견되어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던 위안스카이(1859-1916)의 조종으로 첫 번째 쿠데타 시도가 벌어집니다. 위안스카이는 친러정책을 강화하던 고종과 명성황후에 맞서, 고종을 쫓아내고 이준용을 왕으로 앉힌 후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삼아 자신들이 조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청에 납치된 흥선대원군을 귀국시켰습니다. 이준용 자신도 만만찮은 야심가라 쿠데타 계획에 호응하려 했지만, 정작 청 본국에서 이를 반대하여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음모를 알아낸 고종과 명성황후에 의하여, 오히려 이준용 본인의 처지가 난처해지는 역효과만 낳고 말았습니다. 1887년부터 이준용은 3년간 모친상을 치르면서 다양한 세력의 인물들과 교류하였으며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준용을 경계하고 항상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았습니다. 상을 마친 이후 그는 성균관, 규장각, 승정원 등의 요직을 거쳐 1892년에는 이조참의로 승진하였으며, 정계의 주요 인물이 되면서 점차 그를 지지하는 친위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운현궁]


 이렇게 되자 이준용은 본격적으로 고종-명성황후의 주된 정적이 되었습니다. 1892년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에서 폭발물이 터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같은 시기 이재면-이준용 부자의 집에도 폭탄이 설치되었지만 사전에 발견되어 피해는 없었습니다(이 사건에 대하여 황현은 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한 바 있습니다). 이외에도 이준용은 끊임없는 암살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한번은 길에서 자객을 만났지만 간신히 따돌려 목숨을 구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이준용 쪽에서도 가만 있을 수 없지요. 갑오개혁 당시 이준용과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폐출을 몰래 추진하였지만 일본 측의 반대로 실패하였고, 일본 주도의 개혁에 반발하는 유학자들이나 동학농민군과 내통하여 고종을 몰아내고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할 계획도 세웠지만 역시 계획이 탄로나면서 실패합니다. 이 시기 이준용은 대원군파와 척을 진 개화파 인사들을 암살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지만, 얼마 뒤에는 이들을 포섭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유길준 등을 대원군파로 끌어들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인하여 이준용은 생명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1895년 초 이준용은 개화파 인사 김학우(1862-1894)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습니다. 명성황후와 개화파 세력은 (차마 흥선대원군을 족칠 수는 없으니) 이준용을 처형하려 했지만, 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심한 고문이 자행되는 등의 사실이 알려지며 동정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준용은 유배형에 처해지며 목숨만은 건지게 됩니다.


 얼마 뒤 이준용은 사면되어 서울로 돌아왔고, 다시 투옥당했지만 때마침 을미사변이 발생하면서 일본 측의 도움으로 다시 풀려났습니다. 석방과 동시에 그는 다시 중앙 정계로 돌아왔고 얼마 뒤에는 일본 공사로 임명되어 1897년까지 일본에서 활동하였는데, 대체로 이 무렵부터 그가 친일 성향을 띠게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3. 좌절된 야망과 말년


 그런데 다음해 아관파천으로 조선 내 친일파가 몰락하면서, 이준용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길로 망명자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1897년 그는 일본을 떠나 유럽 각지를 유람하고 1899년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에 본국에서는 안경수(1853-1900) 등이 다시 그를 옹립하려는 쿠데타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준용의 귀국은 더욱 요원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준용 자신도 조용히 망명생활을 한 것은 아니고, 엄귀비의 황후 책봉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는 등 지속적으로 조선(대한제국) 정치에 관여하려 하였습니다. 당연히 더욱 열받은 고종은 일본에까지 자객을 보내어 이준용을 제거하려 시도하지만, 의외로 이준용 자신의 무력(武力)이 출중했기 때문에 암살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ㅡㅡ;


[영친왕과 엄귀비. 고종은 정적인 이준용과 의친왕을 배제하기 위해, 엄귀비 소생인 영친왕을 태자로 책봉하였습니다]


 1904년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때 고종은 그의 강제송환을 요구했고, 이토는 그 대신에 주요 망명 인사들을 변방으로 유배시킬 것을 약속하였지만 이를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준용은 이토의 도움을 받아 다시 대한제국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했던 모양이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준용은 여전히 고종을 몰아내고 황제 자리에 오를 생각을 품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일본의 힘을 빌리려 했지만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며 그의 꿈은 사실상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의미를 알고 있었던 그는 조약 체결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지만 일개 망명객에 불과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결국 왕 한 번 해보려는 이준용의 야망은 자신이 협력하던 일본에 의해 좌절당한 것입니다(그는 이후로도 1909년 무렵까지 이런저런 시도를 계속하였지만 모두 실패합니다).


 결국 이준용은 정치적 야망을 포기하고 친일파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1909년부터 그는 친일단체 신궁봉경회 총재로 재직했는데, 이곳은 단군신화를 일본 아마테라스 신화에 종속시키는 역사왜곡을 추진한 단체였습니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이준용은 왕족+친일파로서 훈1등 욱일장을 수여받고, 아버지(83만 엔 수령)와는 별도로 거액(16만 8천 엔)의 은사금을 받았습니다.


 병합 때 이희 공(公)으로 봉해진 이재면이 1912년 사망하자 이준용은 이름을 이준(李埈)으로 바꾸고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이 때 아버지의 빈소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 다른 종친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기도 했는데, 실제로 이준용은 자신이 살해 위협에 시달리고 체포되어 고문당할 때 도움을 주지 않은 가족과 친척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 이준용의 나이는 고작 40대였지만 젊어서부터 갖은 고난과 비만을 겪은지라 그의 건강은 상당히 나빴고, 이후로는 신장병과 심장질환 등에 시달리며 병석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만년에 낳은 딸 이진완(1916-1997) 외에 아들이 없었던 이준용은 1917년 의친왕 이강(1877-1955)의 차남 이우(1912-1945)를 양자로 들였고, 같은 해 사망하였습니다. 양자 이우는 왕족으로서 일본군 고위 장교가 되었으며, 나름 반일 성향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만 1945년 히로시마에서 원폭에 휘말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우의 아들 중 이청(1936-)이 현재까지 생존해 있습니다.




4. 정리 : 대한제국 황족의 운명


 한일병합과 함께 대한제국 황족은 '멸망한 나라의 왕족' 신세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기존 대한제국 황실 자체를 아예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이왕가(李王家)'라는 이름으로 격하하고, 일본 황실에 다음가는 지위인 '왕공족'으로 대우하였습니다. 물론 더 이상 나라가 존재하지 않으니 이러한 대접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대한제국 멸망 이후 구(舊) 황족들은 복잡한(하지만 대체로 행복하지 못한) 운명을 겪게 됩니다. 고종과 순종은 궁궐에서 반쯤 갇혀 살다 죽었고(고종은 독살당했다는 설이 있지요), 이재면-이준용 부자처럼 일본에 적극 협력한 부류도 있었지만 이들 역시 병합 이후에는 거액의 은사금과 작위 외에 일본에게서 딱히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고종의 자식들인 영친왕 이은(1897-1970)이나 덕혜옹주(1912-1989)의 경우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야 했습니다.


[덕혜옹주]


  분명한 사실은 이들 황족 중에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의친왕 이강과 그의 아들(그리고 이준용의 양자)인 이우 등 몇몇이 반일 성향을 보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의친왕은 중국으로 망명하려다가 실패한 이후 사실상 독립운동과 멀어졌고, 이우는 사실상 볼모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장교 생활을 하다가 히로시마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들이 일본 당국의 감시 하에 있는 처지였다는 것은 감안해야겠지만, 그렇더라도 대한제국의 운명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던 황족들이 나라의 멸망을 적극적으로 막지도 못했을 뿐더러 이후 딱히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좋게 보일 턱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고종과 순종 복위(복벽운동)을 추진하는 항일세력이 있었지만, 1919년 3·1운동을 분기점으로 사실상 모든 독립운동은 '민주공화정'으로 대동단결하게 됩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그나마 그들의 지위를 유지해주던 일본의 실드마저 사라지자, 이들은 더 이상 왕족으로서 살아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해방된 한국의 대통령이 된 인물은 수십 대를 거슬러올라가야 핏줄이 이어지는 전주 이씨 이승만이었고, 미국 체류시절 자신을 '프린스 리'로 소개할 만큼 자기 핏줄을 의식했던 이승만은 구 황족에 대한 예우를 대부분 박탈하고 영친왕의 귀국을 가로막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왕이거든


[황족 X까! 이젠 내가 짱이라고!]


 당연하게도 이때까지 살아남은 황족들의 운명은 결코 순탄치 못했습니다. 영친왕은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에 거주하다가 뇌일혈로 쓰러졌고, 박정희가 집권한 이후에야 병든 몸으로 귀국할 수 있었으며, 덕혜옹주는 어린 시절 강제로 가족과 떨어져 일본에 간 이래 지속적으로 정신질환에 시달리며 이혼까지 겪는 등 불행한 일생을 보내고 역시 한참 뒤에야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나마 한국에 남아 있었던 의친왕은 노년에 한국전쟁을 겪었고, 이 시기 영양실조와 홧병에 시달리다 사망하였습니다.


 대한제국 황족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대한제국 멸망과 한일병합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음은 사실입니다. 일단 이들이 세계사의 격변기를 헤쳐나가기에 충분히 유능하지 못했던 점, 외세의 침략에 기껏해야 소극적 저항으로 일관하며 더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던 점, 그리고 이준용의 경우처럼 아예 대놓고 친일행위를 일삼은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한제국 황족에 대한 이후 한국인들은 준엄한 평가를 내렸고, 이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영영 되찾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2018. 9. 25. 수정]



롤러코스터 타이쿤 : 어트랙션 팩 - (9) Gentle Glen


 "지역 주민들은 격렬하지 않고 편안한 놀이기구를 선호하므로 이 공원을 그들의 취향에 맞게 확장하는 것이 여러분의 임무입니다."

 목표 : 관람객 1200명 (3년) / 놀이공원 등급 600

 제한 : 모든 관람객이 격렬도 낮은(4 이하) 놀이기구 선호



 - 시나리오 설명에 있듯이 이번 공원의 관람객들은 모두 격렬도가 낮은 놀이기구만 탑니다. 애초에 격렬도가 지나치게 높게 나올 수 있는 놀이기구는 대부분 이번 시나리오에는 등장하지 않으니 마음 편하게 가지면 됩니다.



 - 보시다시피 모든 관람객의 격렬도 선호는 '4 이하'입니다. 다만 칼같이 4 이하인 것만 타는 건 아닌 듯하고, 대체로 격렬도 6 정도까지는 크게 불평 않고 탑니다.



 - 기본으로 깔려 있는 스틸 미니 코스터도 격렬도가 5 후반대이지만 사람들이 잘만 타죠. 다만 다른 시나리오보다 사람들이 살짝 덜 탄다는 느낌은 있습니다.



 - 일단 입구 근처부터 차근차근 놀이기구를 깔아봅니다. 격렬도 가지고 크게 겁먹을 필요는 없는 게, 격렬도가 6을 넘어가는 놀이기구는 롤러코스터를 빼면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 롤러코스터도 순 이런 것 위주로 나오니까 차라리 마음이 편해집니다. 다들 아예 빡세게 짓지 않는 이상 격렬도가 아주 높지는 않은 것들입니다.



 - 필수 상점이 다 있는 게 아니라서 먼저 상점 연구부터 해야 하는데, 뭔 쓸데없는 것들만 잔뜩 나오다가 한참 후에야 필요한 게 나옵니다. ㅡㅡ;



 - 관람객이 격렬한 걸 싫어한다고 롤러코스터를 짓지 않을 수는 없지요. 언덕 위주의 지형이니 언덕을 적극 활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일단 싱글 레일 코스터와



 - 측면 마찰 코스터를 짓습니다. 저 아름다운 격렬도 수치가 보이시나요?



 - 애초에 격렬도 높은 놀이기구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격렬한 놀이기구는 딱 저 세 개가 나오고 연구가 끝납니다. ㅡㅡ;



 - 멍때리고 있다가 원더랜드 테마가 연구되었으니, 카트 트랙을 짓는 김에 데코레이션을 좀 해 봅니다. 딱 괜찮은 사이즈가 나왔습니다.



 - 공원 주변이 다 물바다라서 Nice Boat.를 운영하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버지니아 릴은 트랙의 특성상 격렬도가 높게 만들 수 있지만, 이번 시나리오에서 그랬다간 사람들이 아무도 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역시 적절한 격렬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 확장팩부터 입출구의 모양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동안이야 별로 신경쓰지 않았지만, 이번엔 시험삼아 서커스 텐트의 입출구를 텐트 모양으로 바꿉니다. 그럴듯해 보이는군요.



 - 도로는 좀 촘촘하다 싶을 만큼 많이 건설하는 게 좋습니다.



 - 뻥!! 랙과 충돌은 소인승 코스터의 숙명일지도? 지금은 왼쪽 아래의 차가 멈춰버리는 바람에 이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 원더랜드 테마를 아주 잘 써먹고 있습니다. 미니 골프도 이렇게 테마와 함께 꾸며주면 좋습니다.



 - 관람객 수는 순조롭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번 시나리오에서는 마케팅을 전혀 하지 않고 클리어해보려고 합니다.



 - 스틸 코스터도 개발이 되는데, Shuttle Loop 유형의 짧은 트랙은 격렬도가 6 이하로 나오기 때문에 이번 시나리오에서 써먹을 수 있습니다. 언덕 기슭의 빈 공간에 우겨넣어 보았습니다.



 - 관람객 수는 시나리오 목표치를 넘어갔습니다. 여유 있을 것 같습니다.



 - 보트 대여 놀이기구의 고질적인 문제는 바로 이겁니다. 트랙을 따로 깔고 정해진 길로만 가게 하지 않으면 꼭 정거장 입구를 못 찾아서 헤매는 바보들이 나오죠.



 - 아놔 이건 또;;



 - 할 일이 없어서 이번에는 섬 주변을 순환하는 모노레일도 설치합니다. '운송용' 놀이기구이긴 한데 정작 관람객들은 장소 이동을 위해서 이런 놀이기구를 타지는 않습니다. 그냥 다른 놀이기구와 마찬가지일 뿐이죠.



 - 사람이 몰려 복잡할 때는 광대를 여기저기 풀어 주면 관람객의 불만이 감소합니다.



 - 마지막으로 고문기구(?)를 설치해 주고 나면



 -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 클리어!



롤러코스터 타이쿤 : 어트랙션 팩 - (8) Future World


 "이 미래 지향적인 공원에는 외부 지형에 새로운 놀이기구를 건설할 많은 공간이 있다."

 목표 : 관람객 1500명 (3년) / 놀이공원 등급 600



 - 이번 시나리오의 무대는 외계스러운 컨셉의 공원입니다. 다만 배경만 외계스러울 뿐 나머지는 별로 외계스럽지는 않습니다. 공원이 넓고 평지도 많아서 플레이하기 용이합니다.



 - 버티컬 코스터와 서스펜드 모노레일이 기본으로 깔려 있습니다.



 - 일단 이곳에 점잖은 놀이기구를 모아놓습니다. 이 공원은 특이하게 입구가 공원 한가운데쯤에 있지요.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입구까지 오는 길은 지하에 있습니다.



 - 공원이 넓은 평지니까 이번엔 그걸 한 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바로 하프라인 코스터! 트랙이 비싼 주제에 흥미도가 더럽게 안 나온다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어서 정말 인기가 없지요. 현실에 존재하는 하프라인 코스터를 보면 나름 재미는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일본에 있는 하프라인 코스터 탑승 영상]



 - 전망대와 관람차는 주변에 뭔가 볼 게 많아야 흥미도가 오릅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을 땐 이 정도였던 전망대가



 - 조경을 추가해주자 이렇게 쓸만한 녀석으로 바뀌었습니다.



 - 하프라인 코스터 근처로는 격렬한 놀이기구들을 건설합니다. 작지만 나름 쉼터도 있습니다.



 - 소소한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길을 잃는 건 공원이 넓어서 그렇고, 놀이기구 수리가 늦어진 건 실수로 정비기사의 활동 범위를 잘못 설정해서 그렇습니다.



 - 도로를 여기저기 깔아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버티컬 코스터가 애매하게 진로를 가로막고 있어서 지하도를 설치.



 - 뭔가 애매한 언덕은 이렇게 롤러코스터용 터널로 활용하면 좋습니다. 요새는 스틸 미니 코스터는 역방향 경사 모드로만 건설하게 되는 것 같네요. 옆에는 UFO처럼 생긴 비행접시(범퍼카 비슷한 것)도 있습니다.



 - 공원이 넓으니 쉼터는 이곳저곳에 건설합니다.



 - 이번엔 우든 역회전 코스터를 설치해 보겠습니다. 측면 마찰 코스터와 비슷한데, 열차의 방향을 뒤집는 특수 트랙이 있습니다.



 - 건설 결과. 아래쪽과 가운데쯤에 트랙이 살짝 겹쳐져 있는 부분에서 열차가 반대로 돌아갑니다. 저걸 짝수개를 설치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올 것이고, 홀수개로 설치하면 뒤집힌 채로 정거장에 들어가게 될까요? 실험해보진 않았는데요.



 - 어 잠깐만;; 그러고보니 우든 역회전 코스터는 측면 마찰 코스터 기반이기 때문에, 트랙을 주의해서 짓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열차가 하늘을 날아다니게 됩니다.



 - 그래서 이리저리 트랙을 뜯어고쳐야 합니다.



 - 스틸 트위스터 코스터 등장. 그동안 이게 등장하는 시나리오에선 항상 기본으로 건설되어 있어서, 직접 이걸 건설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 그러니 하나 지어보죠. 수많은 특수트랙을 활용하여 아주 웅장한 트랙을 만들 수 있습니다.



 - 여기는 쉼터 겸 런치드 프리폴 출입구입니다. 런치드 프리폴을 저렇게 만들면 흥미도가 올라간다는 건 다 아시죠?



 - 이번에는 날으는 코스터를 지어줍니다. 역시 여러 재미있는 요소가 많아서 블로거가 좋아합니다.



 - 최고의 코스터!



 - 스틸 트위스터 코스터 옆에는 콕스크류 코스터를 아담하게 짓습니다. 보면 아시겠지만 발진 모드입니다.



 - 이건 장난삼아 만들어 본 것......인데 생각보다 꽤 유용하네요. 저 위엄 넘치는 탑승시간이 보이시나요?



 - 카트 트랙도 짧게 만들어 봅니다.



 - 그리고 거의 마지막으로 등장한 입체 영화관까지 한쪽에 건설해 주면



 - 어느새 클리어할 시간이 됩니다. 공원이 넓으니 아직도 빈 틈이 많이 보입니다.



 - 어쨌든 우리는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롤러코스터 타이쿤 : 어트랙션 팩 - (7) Fun Fortress


 "이 성을 여러분의 테마 파크로 개발할 수 있다."

 목표 : 관람객 1300명 (3년) / 놀이공원 등급 600



 - 공원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특이한 형태의 시나리오. 이 공원은 오픈을 하기 전에 필히 해 주어야 할 게 하나 있는데 바로......



 - 성벽으로 연결된 복잡한 길들을 끊고 정리해줘야 합니다. 이걸 그대로 놓아뒀다간 관람객이 온통 성벽으로 올라가 헤매다니며 "길을 잃었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거든요.



 - 필요한 조치를 취해주고, 언제나처럼 입구 쪽부터 개발합니다. 개발된 게 아무것도 없는 공원이라 마음껏 꾸며주면 됩니다. 놀이기구들의 틈새를 따라 ATM 코스터도 하나 깔아줍니다.



 - 도로를 정리한 내성(內城)은 어떻게 써먹을까 고민 끝에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클래식 카를 타고 즐기는 카 라이드 코스입니다.



 - 그리고 메인 코스터는 역시 그게 좋겠습니다. 우든 트위스터 코스터를 건설하고, 주변 조경만 좀 신경써주면 흥미도 7은 쉽게 넘을 것 같습니다.



 - 내성 옆의 틈새공간은 요렇게 활용해줍니다. 저 위에 내부와 통한 출입구가 보이시나요?



 - 이쪽에는 입체 영화관을 하나 건설한 후에



 - 남은 공간에 우든 마우스 코스터 건설. 이번 시나리오는 성 컨셉이라 우든 계열 코스터들이 뭔가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 내성과 입구 쪽 사이에 공간이 남아서, 버지니아 릴을 만들었습니다. 언덕을 이용하면 트랙을 좀 더 높이까지 올릴 수 있지요.



 - 고 카트가 개발되어 이쪽 언덕에 건설하는데...... 어라?? 고 카트의 경우 경주 모드로 돌리면 터널이 오히려 흥미도를 떨어뜨립니다. 지금처럼 트랙이 지나치게 지하에 많이 있게 되면 이런 참사가 벌어지죠. 그래서



 - 트랙 일부를 밖으로 빼 주어야 정상적인 수치가 나옵니다.



 - 반대쪽에도 놀이기구를 짓습니다. 이쪽에는 소프트하게 즐길 수 있는 놀이기구들로 준비하였습니다.



 - 지형이 약간 복잡하니 여기저기 길을 이어줍니다.



 - 가운데 부분에도 도로를 깔고 놀이기구를 짓습니다. 역시 가운데+언덕이면 전망대를 설치하는 게 가장 어울리겠군요. 관람객이 적은 건 아닌데 이상하게 사진을 찍을 때마다 한가해 보입니다. ㅡㅡ;



 - 이쪽의 땅을 메워서 미니 골프 코스를 건설.



 - 이번엔 날으는(나는) 코스터를 지어볼까요? 이 트랙의 가장 독특한 점이라면, 트랙을 똑바른 방향/뒤집힌 방향 모두 건설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다만 메인은 똑바른 방향이고, 뒤집힌 상태에서는 몇 가지 특수 트랙을 설치할 수 없음).



 - 결과물은 이렇습니다. 역시 특성을 살려서 트랙을 뒤집었다가 다시 원상복귀했다가 하는 식으로 돌리는 게 흥미도 상승에 좋습니다.



 - 관람객 수가 약간 빠듯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광고를 때렸고, 그 결과



 - 클리어 기준 관람객 수를 가볍게 뛰어넘었습니다.



 - 클리어 전



 - ㅋ



 일제강점기 한반도를 지배한 일본의 밑에는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 식민지배를 도운 다수의 한국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자신들의 주인인 일본인보다 더 악랄하게 한국인들을 탄압하기도 했습니다. 슬프게도 이들에 대한 단죄가 해방 후에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지배에 부역한 자들은 대부분 해방 후에도 자신들의 노하우를 팔아먹어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들 중 '고문귀'로 악명을 떨친 친일경찰 하판락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말년의 하판락]




1. 왕년의 항일학생, 친일경찰로 변신하다


 하판락은 1912년 경남 진주군 명석면에서 지역 유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진주제일보통학교(現 진주초등학교)와 진주고등보통학교(現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 시절에는 반일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진주고보 졸업 직전인 1930년 초에는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진주에서 발생한 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구류 처분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하판락의 이름이 수록된 진주 학생항일운동 관련 기사]


 1930년 진주고보를 졸업한 하판락은 하급 공무원으로 일하던 중 순사 시험에 응시하여 1934년 합격하였습니다. 사천경찰서에서 처음 근무를 시작한 그는 1937년에는 부산으로 옮겨 순사로 계속 근무하다가 1939년에는 경상남도 고등경찰과로 자리를 옮기고, 이후 경부 시험에 합격하여 순사부장, 경부보로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하다가 해방을 맞게 됩니다.


 당시 그가 조선인으로 상당히 빠른 승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맡은 주업무가 '항일운동가 색출'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가 재직한 '고등과(고등경찰)'는 반체제인사 탄압을 전문적으로 수행한 제국주의 일본의 경찰조직으로, 당시 한반도에서 반체제인사란 바로 항일운동가를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하판락은 항일운동가 탄압에 고등경찰의 일원으로서 앞장서고, 그 공(?)으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판락이 단순히 항일운동가를 탄압한 사실만으로 악명을 얻은 건 아닙니다. 그가 악명을 하늘높이 떨치게 된 것은 그가 항일운동가를 탄압하는 방식이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체포된 항일분자에 대해 비인간적 고문을 자행하였고, 많은 사람이 그의 손에 살해당하거나 평생 고치지 못할 장애를 얻었습니다. 이 악행을 바탕으로 하판락은 '고문귀'라는 으시시한 별명을 얻기에 이릅니다.




2. '고문귀'의 활약상


 그가 악명을 떨치게 되는 것은 1930년대 말 수십 명의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탄압하면서부터입니다. 당시 진주 배돈의원 원장으로 그에게 고문을 당한 김준기의 증언에 따르면, 하판락은 극히 잔혹한 고문을 자행하였으며 (자신도 조선인인 주제에) 피고문자에게 '조센징' 운운하며 욕설을 일삼아 '내가 동족에게 이런 짓까지 당해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저명한 개신교 목사를 밀정으로 포섭한 후, 그를 통하여 항일적인 신자들을 색출해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항일운동가 탄압의 앞잡이로 활동하던 그가 '고문귀'라는 악명을 얻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43년 이른바 '친우회 전단사건' 수사였습니다. 하판락은 당시 친우회 활동가로 검거된 여경수, 이미경, 이광우 등 8명을 수사하면서 극심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 고문의 결과 3명이 순국하고, 생존한 5명도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이후 수 년간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해방 후에도 평생 장애를 안고 고생해야 했습니다.


[당시 일본 경찰의 고문 방식 중 하나. 상자 안에 수많은 못이 박혀 피고문자를 찌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그에게 고문을 당했고 남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간 이광우(1925-2007)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고문당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과 '동지가 고문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화로에 달군 쇠젓가락으로 몸을 지지는 고문, 물 고문, 전기 고문 등 갖은 고문이 피고문자에게 가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판락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것이 바로 '착혈 고문'입니다.


 역시 이광우의 증언에 따르면, 하판락은 그와 함께 체포된 이미경을 고문하면서 원하는 자백이 나오지 않을 경우 그의 혈관에 주사기를 꽂고 한가득 피를 뽑은 다음, 그의 신체에 그 피를 뿌리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고도 자백이 나오지 않으면 다시 주사기로 피를 뽑아서...... 고문귀가 아니라 흡혈귀였네 이러한 고문의 결과 이미경은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여러 명의 항일운동가를 살해하거나 폐인으로 만든 대가로 하판락은 해방되는 순간까지 출세를 거듭하였습니다. 창씨개명 당시 그는 자신의 이름을 가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로 바꾸었는데 이게 조선인 티가 나는 이름이라(한자를 보면 '하판락'을 그냥 일본식으로 살짝 바꾼 것) 다시 가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로 바꾸었습니다(당시 창씨개명을 두 차례나 한 드문 사례라고 합니다). 이후로도 해방 한 달 전에는 자기 친구의 형을 체포하여 고문하는 등, 철저히 일본의 개로서 살다가 해방을 맞이합니다.




3. 해방 후 : 잘 먹고 잘 살며, 최후까지 살아남다


  해방이 되었으니 그간의 악행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겠으나, 한반도 남부에 상륙한 미군의 행정편의주의로 인하여 하판락을 포함한 친일경찰들은 그대로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판락은 미군정 하에서 경남 제7경찰청 회계실 주임으로 근무하였고, 일본인의 재산(적산) 처리에 관여하며 상당량을 인마이포켓ㅡㅡ;하여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습니다.


 그렇게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하던 하판락은 반민특위 활동이 시작된 1949년 초 그에게 고문사당한 여경수의 모친이 그를 반민특위에 고발하면서 긴급체포되었습니다. 그의 악행은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졌던 터라, 부산에서 체포된 그를 서울로 압송하려 하자 많은 부산시민이 "저 자는 우리가 여기서 당장 죽여버리겠다"며 압송을 반대하기까지 했을 정도로 그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서울로 압송되어 강도높은 조사를 받았지만, 그는 당연히 자신의 고문 사실을 부인하였습니다.


[반민특위에 체포된 하판락(왼쪽)]


 하지만 결국 반민특위는 와해되고 기소되었던 반민족분자들도 모두 무혐의 혹은 무죄판결로 풀려났습니다. 당연히 하판락도 석방되었는데, 이후 고향인 진주 명석면에 바로 돌아가지 않고 그동안 모은 재산을 바탕으로 부산 쪽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1956년, 지방의원 선거에 진양군(現 진주시) 제2선거구 후보로 출마하여 자기 가문의 전폭적 지원까지 등에 업고 유세를 펼쳤지만 당연히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부산시의원 선거에도 출마했지만 역시 낙선한 하판락은 정계 진출을 포기하고 사업가로 변신, 신용금고 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운영하며 남은 평생을 떵떵거리며 잘 살았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하판락은 고향인 명석면사무소 신축에 자금을 지원하거나, 노인 복지 사업에 거액을 기부하는 등 사회사업가 행세를 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을 가지고 부산광역시에서는 하판락에게 어버이날 표창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ㅡㅡ;


 그렇게 잊혀가던 그의 악행은 그에게 고문을 당한 이광우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훈장을 받으면서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광우의 훈장 서훈을 전후하여 그를 고문한 자의 이야기도 당연히 함께 언급되었고, 그를 고문한 하판락은 그 죄상이 세간에 다시금 알려지며 여론의 공분을 사게 됩니다. 이에 그는 2000년 대한매일(現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경찰 간부 활동을 후회하며, 피해를 본 이들에게 사과한다"라고 같잖은 사과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판락 사망 당시 MBC 뉴스데스크]


 하판락은 2002년 국회 민족정기의원모임에서 친일파 708명을 선정했을 때 유일하게 생존자로 이름을 올렸으며, 그 이듬해 천수를 모두 누리고 91세로 뒈졌습니다죽었습니다. 같은 해 말 그의 고향 명석면에서 <명석면사(史)>를 발간할 때 저자 김경현씨가 하판락의 악행을 수록하려 했지만 하씨 문중의 큰 반발을 사는 일이 있었습니다. 김경현씨는 결국 직접 수록은 포기하고 편집후기에 "반민특위 관련자에 대하여는 면사편찬위 결의로 삭제함"이라는 멘트를 넣어 간접적으로 하판락의 악행을 명시하였다고 하는군요.




4. 정리 : 하수인들을 앞세우는 지배자의 전략


 흔히 친일경찰의 상징으로 노덕술이 유명하며 그 외에 하판락 정도가 알려진 수준이지만,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일본 치하의 경찰로 근무한 조선인은 제법 많은 수가 있었으며 그들 중 다수는 항일운동 탄압에 앞장서 참여하였습니다. 그들의 활약상은 때로는 일본인 경찰보다도 훨씬 악랄한 것이었고, 그들은 당연히 민족반역자로서 모두에게 공포와 분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웃기는 사실은 그 친일경찰들 자신도 지배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조센징'의 일부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자신들의 한반도 지배를 돕는 '도구'로써 친일부역자들을 이용했지만, 저들을 자신들의 일원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지배자가 피지배자의 일부를 자신들의 수족으로 포섭하여 방패막이로 쓰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행태입니다.


 그렇게 하면 무슨 이점이 있을까요? 일단, 지배자를 향할 피지배자의 분노가 당장 자기 눈앞에 있는 앞잡이들에게 집중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잡이로 선택된 자들은 대부분 양심보다 출세를 앞세우는 기회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들의 주인에게 철저히 충성하여 자리를 보전하고 출세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언제 주인에게 내쳐질지 모르는 처지에 있는 이들은 주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슨 짓이건 서슴지 않게 됩니다.


[역시 일본의 하수인으로 활약한, 어떤 인물에 관한 당시 신문기사]


 그러니까 피지배자의 일부를 앞잡이로 활용하는 전략은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효율성 최고의 전략인 셈입니다. 물론 그 앞잡이가 된 자들을 옹호하거나 동정할 이유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저들은 자발적으로 지배자의 앞잡이가 되었고, 자신들의 의지로 괴물이 된 거니까요.


 이렇게 일본의 하수인으로 일한 많은 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 한 일이다"라며 스스로를 변호하였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당시에 굶주려가면서까지 일본에 저항하거나 적어도 협력을 거부한 수많은 인물들이 있었고, 심지어 하판락같은 경우 지역 유지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먹고 사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결국 자신의 출세를 위해 동족을 탄압하고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해방 후 이런 자들이 단죄받지 않고 평생을 잘 살다 죽은 것이야말로, 현대 대한민국의 국민의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주범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민족반역자와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배부르며 정의감을 가지고 저항한 이들이 대대로 고생하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과연 누가 '정의로운 삶'을 살아갈 엄두를 낼 수 있을까요?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819950&cid=55772&categoryId=55836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39476 (오마이뉴스 기사)

http://www.bjynews.com/default/all_news_body.php?idx=4519&... (바른지역언론연대)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159. 민족반역자 하판락 특집

http://m.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60 (<명석면사> 관련 기사)




[2018. 9. 25. 수정]



 역사를 조금이라도 접해 본 한국인치고 이완용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완용은 한국인에게 '매국노'의 상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일본 침략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것 외에, 이완용의 일생 전반에 대하여는 생각보다 조명이 잘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역사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참고가 되자면, 이완용이라는 한 사람의 일생과 행동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완용의 일생을 간략하게 짚어보기로 합니다.


[일단 침 한 번 뱉고 시작할까요?]




1. 입양 로또를 맞은 신동


 이완용은 1858년 6월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現 성남시 분당구)에서 출생하였습니다(역사학자 이병도는 전북 익산 출신설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그렇다더라' 수준이라 신빙성은 별로 없습니다). 본관은 우봉 이씨로, 고려시대 이래의 명문가이긴 하지만 이완용의 직계는 8대조 이래로 과거 급제자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몰락한 집안(잔반)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석준(초명 이호석) 역시 간신히 선비 행세나 하며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집안이 가난한 것과는 별개로 이완용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주변에 이름이 높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10세 때 우봉 이씨 가문의 유력자인 이호준(1821-1901)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호준에게는 서자(이윤용)만 있었기 때문에, 이완용은 이호준 집안의 적자(嫡子)로서 입적된 것입니다(요즘 시각으로야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그랬으니 그러려니 합시다). 이호준과 이석준은 본관만 같지 촌수가 32촌으로 남남이나 마찬가지라 하필 그가 양자로 선택된 것은 의외인데, 아마도 이완용의 재능이 그만큼 많이 알려져 있었던 게 아닌가 추정됩니다.


 당시 이호준은 판중추부사를 역임 중이었으며, 자신의 딸은 풍양 조씨의 중심인물 조성하(1845-1881)와, 서자 이윤용은 흥선대원군의 서녀와 각각 혼인시키는 등 조선 정계의 중심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몰락 양반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완용이, 최고 귀족 가문의 (호적상) 적장자가 된 것입니다. 당연히 이완용의 삶은 이 때를 기점으로 크게 변화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완용을 입양한 이호준 역시 본래 다른 집안에서 입양되어 온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양아버지가 조선 정계의 거물이었던지라 이완용은 한양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으며 소위 '경화거족'이라 불리는 명문가의 자제들과도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입양된 처지에 이복형제도 있었던지라 이완용은 처음에는 말수가 매우 적은 소심한 성격이었는데, 이호준이 양아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을 표현해 보라"고 주문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완용은 13세 때 집안의 뜻에 따라 혼인을 하였고,이후 본격적으로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당대의 대학자들에게 유교 경서를 배웠습니다.


 1882년 이완용은 증광시(增廣試)에 전체 28위로 급제하였고, 처음 임명된 관직은 주서(정7품)였습니다. 사실 과거시험에서 28위라면 급제 순위 중 병과(丙科-3등급)였고 그 중에서도 상당히 후순위였는데, 양아버지 이호준이 권력을 쥐고 있던 민씨 척족들과 손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높은 관직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ㅡㅡ; 시작부터 낙하산이라니 




2. '기계같은 자'의 출세 : 능력은 있으나, 양심은 없다


 과거 급제 이후 이완용은 엘리트코스를 차근차근 밟아나갔습니다. 그는 규장각 대교를 거쳐 외직(지방직)인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수군과 관련된 직위)로 발령됐는데, '해방영' 자체가 민씨 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편제였기 때문에 이 자리는 민씨 정권과 관련된 인물이 임명되는 자리였습니다. 이완용이 이런 자리에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의 아버지 이호준이 민씨 세력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입니다.


 이완용이 관직 생활을 시작한 1880년대 초반 조선은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애초에 그가 급제한 증광시 자체가 임오군란을 진압한 기념으로 개최된 것이었습니다. ㅡㅡ; 급진개화파니 온건개화파니 수구파니 하는 여러 정치세력들이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에 중앙 관료가 된 그는 젊은 엘리트면서도 근대니 개화니 하는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화파 관료들과도 딱히 행동을 함께하지 않았고, 때마침 외직에 나가 있었기도 하여 1884년 갑신정변의 폭풍에 아무 피해도 입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육영공원의 영어수업 장면]


 1886년 이완용은 다시 중앙정치로 복귀하였고, 동시에 정부에서 설립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하여 영어와 과학 등을 배웠습니다. 이완용이 서양 문물을 제대로 접한 건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왕년의 신동 이완용은 육영공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헌부 장령 등을 거쳐 1887년에는 세자시강원 보덕(정3품, 세자의 교육 책임자)으로 초고속 승진을 하였는데 이는 조선 역사에 손꼽힐 만큼 빠른 속도였습니다.


 이 무렵 조선에서 활동하던 호러스 뉴턴 알렌(1858-1932, 광혜원 설립자, 주한미국공사 역임)이 이완용을 두고 '기계같은 자'라는 평가를 내린 것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가 기계처럼 철저하게 업무를 해결하는 유능한 인물임과 동시에, 양심과 줏대가 없는 인간이라는 양면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실제로 이완용은 젊어서부터 대단히 권력욕이 강했다고 하며, 아버지 이호준과 함께 그가 정치적 격변을 회피하는 모습이라든지, 이후 생애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정치적 변신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기 보신(保身)과 출세에 치중한 삶을 살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옛 주미 조선공사관 건물]


 1887년 이완용은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임명되어, 주미공사 박정양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으며 이듬해 초 박정양이 공사에서 해임될 때 함께 해임되어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조선이 청나라와 약속한 외교적 관례를 박정양이 위반했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이후 이완용은 동부승지, 이조참의 등 요직을 거쳐 1888년 말 다시 참찬관으로 미국에 파견되었고, 얼마 뒤 주미대리공사로 승진하여 2년간 근무하였습니다.




3.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이완용의 화려한 변신


 영어교육을 통해 서양 문물을 처음 접하였으며, 미국에 외교관으로 오래 근무했다보니 이완용은 처음에는 친미파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미국은 '조선을 침략할 위험이 적고, 부강한 국가이니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나라로 인식되었고, 조선 정부는 그래서 미국과의 관계에 대단한 공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미국에 파견된 이완용은, 미국 현지의 발전된 모습을 보며 친미파 관료로 성장하게 됩니다.


 1890년 귀국한 이완용은 성균관대사성, 전환국총판, 외무협판을 거쳐 학부대신으로 임명되는 등 순탄한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당하고, 일본이 자신도 살해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음식도 선교사들이 가져다 준 통조림만 먹었을 만큼 고종이 궁지에 몰리게 되자 친미파 · 친러파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이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다 실패로 끝나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일명 '춘생문 사건'입니다.

[춘생문으로 추정되는 곳. 이후 문은 철거되었고 現 청와대 춘추관 부지 내에 터만 남아 있습니다]


 이완용 역시 춘생문 사건에 직접 관여하였지만, 을미사변 이후 미국 공사관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이완용 등의 관료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음해(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키려 시도하였고, 이번에는 성공하였습니다(아관파천). 이를 계기로 이완용은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갈아탔고, 아관파천의 주동자 중 하나였던 만큼 친일파를 숙청하고 새로 구성된 친러파 내각에서 중심 인물이 됩니다.


 새 내각에서 이완용은 외부대신, 학부대신, 농상공부대신(서리)을 겸직하며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독립협회가 출범하자 이완용은 정부 관료의 대표격으로 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초대 부회장과 2대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독립협회는 본래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사업을 위하여 출범한 단체였는데, 실제로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세우자 이완용은 독립문의 한자 현판 글씨를 직접 쓰는 등 건립 사업에 직접 참여하였습니다.


[이완용이 쓴 독립문 한자 현판. 이완용은 실제로 당대 최고 명필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독립문이 건설되고 고종이 환궁한 이후 터졌습니다.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독립협회는 점차 반(反)러시아 성향을 강하게 띠었고, 친러파 중심으로 이루어진 정부와 대립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친러파 관료이면서 독립협회 중심 인물'이었던 이완용은 양쪽 사이에 끼어 난처한 처지가 되고 말았는데, 결국 정부와 독립협회의 갈등이 폭발하자 그는 전라북도 관찰사로 좌천된 직후 이마저도 파직당할 위기를 간신히 넘겼고, 동시에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당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때 독립협회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이후 벌어진 독립협회 대탄압에서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보신甲! 그래도 그가 독립협회 초기에 중심 인물이었다는 점 때문에 한동안 그는 지방직을 전전하며 인생 최대의 위기ㅡㅡ;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는 1901년 양부 이호준이 급사한 이후 고종이 그의 뒤를 잇기 위해 이완용을 복권시키면서 비로소 중앙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나마 당시 임명된 관직은 궁내부 특진관이라는 한직(閑職)이었습니다.




4. 마지막 변신 : 을사오적의 수괴가 되다


 이완용은 1904년 양부의 3년상을 끝낸 이후 1905년에는 학부대신으로 취임하여 예전의 권세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러일전쟁이 한창인 때였는데, 이 전쟁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일본의 우세로 흘러가자 다급해진 대한제국은 왕년의 친미파 이완용을 미국으로 파견하여 마지막으로 미국의 도움을 받아보려 시도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하여 필리핀 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일본이 한반도를 잡아먹는 것을 용인한 상태였고, 당연히 이완용은 별 소득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시국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완용은 인생 최대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그의 선택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이라면 침략자에게 들러붙어 부귀영화를 누리자' 였습니다. 지금껏 출세와 보신에 힘쓰며 친미파와 친러파로 철새마냥 떠돌았던 이완용은,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분기점으로 완전히 친일파로 갈아타게 됩니다.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로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주도권을 확보하자,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제국에 파견하여 고종에게 새로운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습니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강탈 양도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고종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는데, 정작 이에 대한 결정권은 대신들에게 떠넘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이토는 결정권을 가지게 된 대신들을 회유 및 협박하기 시작했고, 이중에는 학부대신 이완용도 있었습니다.


[을사조약 체결을 풍자한 만평]


 이미 일본의 침략을 수용하기로 결심한 이완용은 처음부터 이토에게 협조적으로 나섰고, 이토는 이완용을 전면에 내세워 회의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11월 17일 이토는 조약 체결과 관련한 어전회의를 강제로 열었는데, 처음에는 참석한 8명의 대신 중 다수가 조약 체결에 부정적이었습니다(내부대신 이지용, 학부대신 이완용만 찬성파). 회의장의 분위기가 점점 살벌해지는 가운데 이완용은 자신을 만고의 매국노로 만드는 발언을 하여 대신들을 설득했습니다.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언제까지나 반대만 할 수는 없다. 외교권 양도 문제는 훗날 대한제국의 역량이 충실해지면 자연스레 반환될 것이며, 조약의 내용에 황실의 안전과 존엄 유지를 보장하는 내용을 추가하면 충분하다."


 결국 이토의 협박과 이완용의 설득에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찬성파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토는 8명 중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을 제외한5명의 동의를 얻어내자 "이것으로 안건은 가결되었다"라고 선언하고 회의를 끝냈습니다.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5명이 그 유명한 '을사오적'입니다(반대자 중에서 이하영은 얼마 뒤 조약 찬성파로 입장을 바꾸었지만 일단 을사오적에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을사오적의 쌍판때기 얼굴. 왼쪽부터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같은 날 궁내부대신 이재극이 궁궐 내에서 고종을 협박하는 가운데 '외교권 양도'와 '통감부 설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조약(을사조약)이 대한제국 외부대신과 일본 공사 사이에 체결되었습니다. 고종은 조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하고 이를 인정하지도 않았지만 정작 을사오적에게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등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였습니다. 이후 고종은 미국에 기대고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는 등 어떻게든 다른 강대국의 호의를 얻어 독립을 지켜보고자 했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이 노력들을 모두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요.




5. 나라판 값으로 얻은 부귀영화


 조약 체결의 일등공신이 이완용이었던만큼 이후 이완용의 출세길은 따놓은 당상이었습니다. 이완용은 의정대신, 의정부 참정대신을 거쳐 1907년 6월에는 일본에 의하여 구성된 내각의 총리대신 겸 궁내부대신(서리)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래도 눈치는 좀 보였는지 이완용은 처음에는 총리대신 취임을 거부하려 하였지만, 이토 통감의 권유를 받고 결국 취임을 수락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헤이그 밀사 사건이 발생하자 이완용은 이를 빌미로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하였고, 얼마 뒤 체결된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에서도 찬성표를 던졌습니다(정미칠적). 1909년에는 독단적으로 일본과 사법권 양도 협약을 체결하였고(기유각서), 다음해(1910년)에는 어전회의를 열어 한일 양국의 병합을 결정하고 한일 병합조약(경술국치)에 총리대신 자격으로 직접 서명하였습니다(경술국적). 그랜드슬램 달성!!


 경술국치 당시 이완용은 조약 내용에 아예 '공로가 있는 한국인에 대한 작위와 은금(恩金) 수여'를 조항으로 넣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 백작 작위를 받음과 동시에 15만 엔(원)이나 되는 거액의 은사금도 받았습니다(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30억~150억원 정도). 다만 그보다 많은 은사금을 받은 자들도 있었는데 바로 대한제국 황족들이었습니다(의친왕과 이재면(고종의 형)의 경우 83만 엔을 수령하였습니다).


 을사조약부터 경술국치까지, 나라가 망하는 모든 과정을 주도한 이완용이었으니 당연히 전국민의 철천지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07년 그가 의병장 허위(1855-1908)의 사형을 주장하자 옛 황국협회 관계자들(허위가 황국협회 간부 출신이었기 때문)과 분노한 주민들이 그의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이는 그나마 큰 피해 없이 수습했지만 얼마 되지도 않아 이완용이 고종 폐위를 주도하자 이번에는 항일단체(동우회) 회원들이 그의 집에 몰려들어 다시 불을 질렀습니다. 이번에는 집이 완전 잿더미가 되어 이완용은 이복동생 이윤용의 집에 한동안 피신해 있어야 했다고.


[이후 이완용은 1913년 옥인동에 서양식 저택을 짓고 남은 평생을 살았습니다]


 또한 이완용은 친일 관료들을 목표로 한 모든 암살단의 제1호 표적이기도 했습니다.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당시 식민지였던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엄청난 규모의 인종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유명)의 추도식에 참석한 이완용은 성당 앞에서 인력거에 탑승하던 중 암살단의 일원이었던 이재명(1887-1910)의 습격을 받고 왼쪽 폐에 관통상을 입었습니다. 그나마 죽지 않은 것은 인력거꾼 박원문(1865-1909)이 이재명을 제지하다가 칼에 찔려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중상을 입은 이완용은 일본인 외과의사들의 손에 맡겨져 치료를 받고,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다만 관통당한 폐가 온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이완용은 이후 남은 평생을 후유증인 천식과 폐렴에 시달리며 보내야 했습니다. 그나마 쌤통 체포된 이재명은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순국하였습니다.


[말년의 이완용]


 일제강점기 이완용은 친일 귀족의 대표 노릇을 하며, 건강 문제를 빼면 순탄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어 식민사관 정립에 기여하기도 하고, 3·1운동 당시에는 독립운동을 비난하며 매일신보에 기고문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내용으로 알려져 최근에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받은 은사금을 잘 굴려먹었는지 그는 말년에는 1370만 평(!!!)의 토지를 소유한 거부(巨富)가 되었고, 차남 이항구(1881-1945) 역시 일본에서 귀족 작위를 받으며 승승장구했습니다.




6. 죽음과 그 이후


 이재명 의사의 습격 이후 악화된 이완용의 폐병은 결국 회복되지 않았고, 그는 1926년 총독부 신년 행사에 참석했다가 건강이 급속히 나빠진 이후 2월 11일 69세를 일기로 뒈졌습니다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동아일보는 2월 13일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유명한 비판 기사를 실었는데 당연히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삭제당하였지만 다행히 현재까지도 그 원문이 남아 있습니다.


[검열삭제 이전 동아일보의 해당 기사]


 이완용의 무덤은 생전의 그와는 딱히 관계가 별로 없던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의 산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당시부터 그의 무덤에 대한 훼손 시도가 끊이지 않아 당국에서 순사를 보내어 따로 지켜야 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묘를 지켜 줄 공권력이 사라진 해방 이후 이완용의 묘는 온전할 날이 없었고, 견디다 못한 그의 후손들은 1979년 증손자 이석형의 주도로 그의 묘를 아예 없애고 유골은 발굴하여 화장(火葬)해버렸습니다.


[파헤쳐진 이완용 무덤]


 그의 후손들의 삶은 별로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연좌제의 타당성은 차치하고, 조상이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그것도 매국노의 수괴)인 마당에 후손들이 이 땅에서 얼굴 들고 살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완용의 장남(이승구, 1880-1909)은 요절하였는데, 이완용이 자신의 아내(즉 이완용에게는 며느리)와 간통을 하여 부끄러움에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완용의 작위를 물려받은 차남 이항구는 해방 전에 사망하였으며 이항구의 아들 중 이병길은 한국전쟁 중 실종, 이병주는 일본에 귀화하였습니다.


 이완용이 가졌던 재산(특히 토지)가 워낙 방대했다보니, 해방 후 흩어진 그의 재산을 되찾으려는 후손들의 시도가 꾸준히 있었습니다. 증손자 이윤형은 캐나다로 이민갔다가 돌아와 1992년 서울대학교를 상대로 토지 반환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고, 1998년에는 서울 북아현동 일대 토지의 반환 소송에서 승소하여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습니다. 이윤형은 돌려받은 땅을 곧바로 처분하여 수십억 원을 벌었고, 이 돈을 그대로 들고 도로 캐나다로 튀어버렸다는군요. ㅡㅡ;


 그의 악명 덕에 오래도록 애먼 피해자들도 속출했습니다. 역사학자 이병도(1896-1989)는 이완용과 같은 우봉 이씨 출신이라 이완용의 친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는데, 실제로는 촌수로 따져 30촌을 넘는 남남이나 마찬가지인 관계였습니다. 여기에는 이병도 본인이 친일부역자였고, 이완용의 관짝을 구하여 불태웠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언행들이 겹쳐 있기도 합니다.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1910-1987)은 이완용의 아들 중 한 명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지금도 간간이 욕을 먹는데, 여긴 아예 본관부터가 다릅니다(경주 이씨).


 반대로 이완용의 덕(?)을 본 경우도 있으니, 붕당 대립에 휘말려 역적이 되었던 조선시대의 많은 인물들(남인, 북인, 소론 등)이 1908년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습니다. 이는 순종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개중에는 진짜 역적이나 간신들도 있고 고종 암살 시도에 참여한 인물도 있다보니 크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 일종의 소소한 과거사 정리를 한 것 정도로 보입니다.




7. 정리 : '똑똑한 기회주의자'는 세상을 어떻게 말아먹는가


 일생 전반에 걸쳐 여러 차례 변신을 거듭한 이완용, 그의 변신을 살펴보면 그가 철저히 '강자'에게 빌붙는 노선을 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을사조약 체결 이전까지 그는 대부분 고종이 협력하려는 열강 국가에 붙는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고종이 미국에 협조적일 때는 친미파, 고종이 러시아와 손을 잡을 때는 친러파가 되었던 것입니다. 왕(황제)과 노선을 함께하는 이러한 처세가 출세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고종이 기댈 곳이 없어져버린 시점에, 이완용은 고종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침략자 일본에 앞장서 협력함으로써 자신의 부귀영화를 확보하게 됩니다. 이는 이완용의 화려한 변신이 어디까지나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한 것이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고 고종의 뒤통수를 친 대가로 얻어낸 것은 '황실의 존재만은 남겨준다' 하나뿐이었습니다.


 이완용은 분명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신동이었고, 젊은 나이에 능력을 인정받아 출세하였으며, 정세의 변화를 재빨리 읽어낼 줄 아는 식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완용은 이 능력을 사회를 위해서보다 철저히 자신의 보신과 출세를 위해서만 활용했고, 이러한 처세 속에서 그의 능력은 대한제국이라는 한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기는 커녕 사회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완용의 일생을 통하여 우리는, 개인의 능력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어느 방향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양심이 결여된 자에게 지나치게 큰 능력과 권한이 주어졌을 경우, 그것이 오히려 사회를 해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정부 고위층의 거대한 스캔들로 국가 전체가 뒤집어진 근래의 사태를 생각하며, 우리는 다시 이완용의 일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고 수준의 교육을 이수하고 정당 지도부와 정부 고위 관료로 출세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한과 책무를 일개 사이비 종교인의 딸에게 넙죽 바쳐버린 참상을 보면, 저들의 재능은 도대체 사회와 역사, 심지어 그들 개인을 위해서라도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싶습니다. 이들을 통하여 역사는 '양심 없는 능력자'들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는 건 아닐까요?


[블로거는 이분들을 감히 '이완용의 후예들'이라 칭하겠습니다]




참고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523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books.google.co.kr/books?id=PmMzC... (<인물로 읽는 라이벌 한국사> 발췌)

http://www.hansung.ac.kr/web/hhistory/44?... (<춘생문 사건의 발생 배경과 영향에 대한 재고>, 김성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29/2009082900337.html

나무위키, 한글 위키백과




[2018. 7. 13. 수정]



[1908년 시카고 컵스 우승 기념 사진]



1. 대한제국이 멸망하였다가(1910) 해방되고(1945)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1948)


2. 박정희(1917-1979), 김일성(1912-1994), 김정일(1941-2011)이 태어나고 죽음


3. 제1차(1914-1918), 제2차(1937/1939-1945) 세계대전 발발


4. 소련이 건국하였다가 해체(1917-1991)


5. 유고슬라비아가 건국하였다가 해체(1918-2006)


6.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핀란드, 아일랜드가 독립


7. 아프리카의 독립국 2개 → 54개


8. 중국 대륙의 국가가 청 → 중화민국(1912) → 중화인민공화국(1949)으로 교체


9. 미국 대통령 19명(시어도어 루스벨트 ~ 버락 오바마)


10. 일본 총리대신 58명(가쓰라 다로 ~ 아베 신조)


11.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러시아,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군주제가 폐지


12. 스페인의 군주제가 폐지되었다가 부활


13. 푸미폰 아둔야뎃(1927-2016) 타이 국왕이 태어나고 죽음


14. 오스만 제국 멸망(1922)


15.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채굴 시작(1938)


16. 베이브 루스가 데뷔하고 은퇴(1914-1935)


17. 뉴욕 양키스가 27회 월드시리즈 우승


18. 흑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재입성(재키 로빈슨, 1947)


19. 미국, 여성에 투표권 부여(1920)


20. 명왕성이 발견되고(1930) 행성 목록에서 제외(2006)


21. 핼리 혜성이 2번 찾아옴(1910, 1986)


22. 최초의 전자식 컴퓨터 발명(콜로서스, 1943)


23. 인류가 우주에 인공물을 쏘아보내고(스푸트니크 1호, 1957) 인간을 달까지 보냄(아폴로 11호, 1969)



[그리고 2016년, 그들은 108년만에 다시 우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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