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 국가 <리비아, 리비아, 리비아>


카다피 집권기 국가 <알라후 아크바르>


작곡 : 무함마드 압델 와하브 (1902-1991)
작사 : 알 바시르 알 아레비

제정 : 1951년(1969년 폐지) / 2011년


 - <리비아, 리비아, 리비아>는 리비아가 독립한 1951년에 리비아 국가로 제정되었습니다. 작사는 튀니지 출신 시인 알 아시르 알 아레비가, 작곡은 이집트 출신 가수 겸 작곡가인 무함마드 압델 와하브(튀니지와 아랍에미리트 국가도 이 사람이 작곡)이 맡았습니다. 이 노래의 운명은 상당히 기구한데, 처음 왕정 리비아의 국가였던 이 노래는 1969년 무아마르 알 카다피(1942-2011)의 쿠데타 이후 폐지되었습니다.


 - 카다피 집권기에는 <알라후 아크바르>가 국가로 사용되었는데, 이 노래는 본래 이집트군의 군가로 쓰이던 것을 카다피가 국가로 채용한 것입니다. 2011년 反카다피 시위가 혁명으로 발전하며 <리비아, 리비아, 리비아>는 옛 리비아 국기와 함께 혁명세력의 상징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카다피의 죽음으로 정권이 교체된 이후 리비아 국가로 다시 제정되어 현재에 이릅니다.



### 가사 ###


후렴
يا بلادي بجهادي وجلادي
ادفعي كيد الأعادي
واسلمي
اسلمي طول المدي إننا نحن الفدا

ليبيا ليبيا ليبيا

[나의 조국, 나의 조국
나의 완강한 투쟁에
나의 꾸준한 노력에
차례로 적과 역경을 모두 무너뜨리고
해방이 된 것은, 우리들이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리비아, 리비아, 리비아]


1절
يا بلادي أنت ميراث الجدود
لارعى الله يداً تمتد لك
فاسلمي، إنا -على الدهر- جنود
لا نبالي إن سلمت من هلك
وخذي منا وثيقات العهود
إننا يا ليبيا لن نخذلك
لن نعود للقيود قد تحررنا وحررنا الوطن
ليبيا ليبيا ليبيا

[나의 조국이여, 그대는 할아버지의 유산이었다
신이 모든 손을 던지고 너를 해쳤다고 하지만
군대는 언제든지 너를 이기려 한다
우리는 오래 살기 위해 누군가가 죽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는 진지한 서약을 받았다
그대는 우리(오 리비아여)를 위해 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인질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유로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조국은 자유로울 것이다
리비아, 리비아, 리비아]


2절
جرّد الأجداد عزماً مرهفاً
يوم ناداهم منادٍ للكفاح
ثم ساروا يحملون المصحفا
باليد الأولى، وبالأخرى سلاح
فإذا في الكون دين وصفا
وإذا العالم خير وصلاح
فالخلود للجدود إنهم قد شرفوا هذا الوطن
ليبيا ليبيا ليبيا

[그들이 발버둥칠 때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그들의 칼을 갖고 오셨다
손으로 신성한 꾸란을 들라
그렇지 않으면 칼을 그들에게 빼앗긴다
그들은 자신의 땅을 넓히기 위해 전쟁을 벌이지만
온 세상은 평화롭고 번창할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성실을 지을 때, 그들은 영원하리라
리비아, 리비아, 리비아]


3절
حيّ إدريس سليل الفاتحين
إنه في ليبيا رمز الجهاد
حمل الراية فينا باليمين
وتبعناه لتحرير البلاد
فانثنى بالملك والفتح المبين
وركزنا فوق هامات النجاد
رايةً حرّةً ظللت بالعز أرجاء الوطن
ليبيا ليبيا ليبيا

[정복자의 후손 이드리스를 찬양하랴
그는 발버둥치는 제하드의 그림이었다
그는 우리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네
우리는 우리 땅의 자유를 위해 그를 따랐도다
그는 왕위의 영광을 만들었다
리비아의 하늘, 자유로운 깃발
번영하는 조국을 뛰어넘으리
리비아, 리비아, 리비아]


4절
يا ابن ليبيا، يا ابن آساد الشرى
إننا للمجد والمجد والمجدُ لنا
مذ سرونا حمد القوم السرى
بارك الله لنا استقلالنا
فابتغوا العلياء شأواً في الورى
واستعدوا للوغى أشبالنا
للغلاب يا شباب إنما الدنيا كفاح للوطن
ليبيا ليبيا ليبيا

[리비아의 아들, 사자의 아들인 이드리스는
우리의 영광이요 영광은 당신의 것이로다
우리가 스스로를 발버둥칠 때, 모든 백성들이 발버둥쳤다
하느님이 우리의 독립을 도와주셨을 때

가장 높은 곳을 찾았도다
젊은이들이여, 발버둥 칠 준비를 하라
삶은 우리 조국의 영광을 위한 전쟁이다
리비아, 리비아, 리비아]


(자료 출처 : 위키백과 "리비아의 국가")




現 버전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기 버전

작곡 : 술레이만 유다코프 (1916-1990)

작사 : 굴나자르 켈디 (1945-, 현 버전) / 아불카심 라후티 (1887-1957, 타지크 SSR 버전)

제정 : 1946년 (타지크 SSR 버전) / 1991년 (현 버전)


 - 이 곡은 처음에는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로, 당시 소련의 일원인 타지크 SSR의 국가로 제정되었습니다. 첫 작사자인 아불카심 라후티는 이란 출신의 작가로, 불가리아, 터키, 나히체반(아제르바이잔 소속 자치공화국)등을 거치며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혁명활동에 몸담았습니다. 이후 소련으로 이주하였고, 타지크 지역에 정착하여 작가로서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작곡자는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 유대인 출신으로 라인홀트 글리에르(1875-1956)를 사사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많은 작품 활동을 하였습니다.


 - 소련 붕괴와 함께 타지키스탄이 독립하면서, 곡은 그대로 놔둔 채 가사만을 바꾼 <수루디 밀리('국가(國歌)')>가 새롭게 제정되었습니다. 타지키스탄 출신의 시인 굴나자르 켈디가 작사를 맡았습니다.



### 가사 (現 버전) ###


1절
Диёри арҷманди мо - !
Ба бахти мо сари азизи ту баланд бод - !
Саодати ту, давлати ту бегазанд бод - !
Зи дурии замонахо расидаем - ,
Ба зери парчами ту саф кашидаем, кашидаем - !
(후렴)Зинда бош, эй Ватан, Тоҷикистони озоди ман - !
[사랑하는 우리 조국!
조국의 긍지는 가장 자랑스런 명예이다!
조국의 행복과 발전이 영원하기를!
우리의 소원은 예부터 독립이었다,
조국의 깃발을 휘날리자!
(후렴) 영원하고 자유로운 우리 조국, 타지키스탄!]

2절
Барои нангу номи мо - !
Ту аз умеди рафтагони мо нишонаӣ - !
Ту баҳри ворисон ҷахони ҷовидонаӣ - !
Хазон намерасад ба навбаҳори ту - ,
Ки мазраи вафо бувад канори ту, канори ту - !
[우리의 조국, 우리의 희망!
우리의 명예와 존엄성은 영원하리라!
우리는 조국 안에 있는 국민이다!
희망은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
우리는 조국을 위해 충성한다!]

3절
Ту модаре ягонаӣ - !
Бақои ту бувад бақои хонадони мо - !
Мароми ту бувад мароми ҷисму ҷони мо - !
Зи ту саодати абад насиби мост - ,
Ту ҳастиву ҳама ҷаҳон ҳабиби мост, ҳабиби мост - !

[조국은 우리의 스승이라네!
조국의 미래가 곧 우리 미래이다!
조국의 의미는 곧 우리의 의미이다!
조국의 행복은 우리의 행복이다,
우리는 조국을 존경한다!]


(가사 출처 : 위키백과 "타지키스탄의 국가")



### 가사 (타지크 SSR 버전) ###


1절
Чу дасти рус мадад намуд,
бародарии халқи совет устувор шуд,
ситораи ҳаёти мо шарорабор шуд.
Гузаштаҳои пурифти хори мо
ба ҷилва омаданду дар диёри мо, диёри мо
Мустақил давлати тоҷикон барқарор шуд.

[러시아의 손으로 온 세기를 거쳐
소련 인민들이 탄생했도다!
힘센 가족이 새로운 운명의 빛을 발했도다
우리는 전통의 용기로 빛을 발했도다
우리 위에는 천둥이 지구를 괴롭히지만
타지키스탄의 타지크 인민들은 국가를 불렀도다]


2절
Ба ҳоли таб даруни шаб
Садои раъди давлати Ленин фаро расид
Зи барқи байрақаш сиёҳии ситам парид
Саодати ҷовидон дар ин замин
Зи партия ба мо расид, ба партия сад офарин
Марду озода моро чунин ӯ бипарварид.

[우리는 납치되었고 어둠에 굴복했다
그러나 레닌의 목소리가 천둥을 폭파시켰도다
붉은 깃발에 낙뢰가 쳤는데 어둠이 망가졌다
신성한 날이여, 자유로운 노동자여, 강철 곰같은 힘은
위대한 지도자이자 기본인 스탈린이었도다
아버지로서 그는 격렬한 전투에서 노동으로 우리를 키웠다]


3절
Шиори мо диҳад садо:
Баробарӣ, бародарӣ миёни халқи мо.
Зи хонадони мо касе намешавад ҷудо,
Ягонагиро ба худ сипар кунем
Ба сӯи фатҳи коммунизм сафар кунем, сафар кунем,
Зинда бод мулки мо, халқи мо, Иттиҳоди мо.

[그대의 용감한 아들은 우리와 다를 바 없겠지만
불명예스런 적을 물리칠 것이다
평생 소련 인민에 대한 신뢰를 믿는다
일치는 우리 전투의 기초가 되었도다
우리는 원수의 모든 요새를 정복할 것이다
조국에서 세기를 살며 세기를 살며 단결하랴!]


(가사 출처 : 위키백과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가")




작곡 : 오스만 제키 윈괴르 (1880-1958)

작사 : 메흐메트 아키프 메르소이 (1873-1936)

제정 : 1921년


 - <독립 행진곡>은 터키 공화국(과 사실상 터키의 괴뢰국가인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의 국가로,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인 1921년 터키 공화국 국민회의에서 국가로 제정되었습니다. 당시는 현대의 터키를 만든 '터키 독립전쟁(1919-1923)이 한창이었던 시기로, 이 노래는 각지에서 결사항전을 거듭하는 터키 국민회의 군대와 민병대의 사기를 고취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1930년 현재의 형태로 다듬어져 오늘에 이릅니다. 메르소이가 쓴 시는 본래 10절까지 있으나, 현재 국가로 부를 때는 1절과 2절만 사용합니다.



### 가사 ###


1절
Korkma, sönmez bu şafaklarda yüzen al sancak;
Sönmeden yurdumun üstünde tüten en son ocak.
O benim milletimin yıldızıdır parlayacak;
O benimdir, o benim milletimindir ancak.

[두려워 말라, 붉은 깃발이 새벽 속에서 파도를 이루면,
우리 집의 마지막 남은 불이 꺼지기 전까지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저것은 영원히 빛나는 나의 국가의 별이다.
저것은 나의 것, 영웅적인 국가이다.]


2절
Çatma, kurban olayım çehreni ey nazlı hilal!
Kahraman ırkıma bir gül! ne bu şiddet bu celal?
Sana olmaz dökülen kanlarımız sonra helal,
Hakkıdır, Hakk'a tapan, milletimin istiklal!

[수줍은 초승달이여, 나의 희생에 불쾌하지 말라.
영웅적인 나의 무리에 한 송이의 장미를 바치니, 어찌 화를 내고 격노하는가?
그대를 위해, 우리는 피를 흘릴 옳은 행위를 할 것이다.
자유를 위해, 독립은 하느님을 믿는 나의 국가의 올바른 정의다.]


(가사 출처 : 위키백과 "독립 행진곡")



대항해시대 2 : 카탈리나 에란초 - (1) 복수는 나의 것


 - 이제 카탈리나의 스토리로 들어가봅니다. 역시 전투 중심 캐릭터. 18세에 장교(중위)라니 이 동네 사람들은 이래저래 조숙하군요(?). 블로거는 23세 때 상병이었는데



  - 시작은 세빌리아. 언제나처럼 항구 앞에서 시작하는데, 항구에 들어가면 친구 사누드가 에제키엘 사령관의 호출을 전달합니다.



 - 에제키엘의 집무실은 궁궐 앞에서 오른쪽으로 한참 들어가면 있습니다. 들어가면 에제키엘이 카탈리나의 오빠와 애인의 소식을 전합니다. 둘 다 스페인 해군 소속인데, 폭풍으로 함대는 전멸했고 오빠와 애인은 행방불명(아마도 사망)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입니다.



 - 멘붕하여 집무실을 나오는 카탈리나. 이 때 한 번 더 집무실에 들어가면 에제키엘이 오빠의 유품이라면서 무기(사브르)를 줍니다. C급이라 크게 좋을 건 없지만, 무기 없이 시작하는 카탈리나인 만큼 받아두는 게 좋겠지요. 그렇게 칼을 받고 술집으로 가서 실의에 잠긴 채 술을 퍼마시다가, 카탈리나는 실종된 함대가 사실 포르투갈 페레로 가문의 사설함대에게 격침당했다는 뜬소문을 듣게 됩니다.



 - 즉시 분기탱천하여 사령관 집무실로 뛰어가는 카탈리나. 페레로 함대를 처단하도록 허가해달라는 카탈리나의 요구에 에제키엘은 당연히 "ㅗ"를 날립니다. 카탈리나의 요구는 곧 스페인-포르투갈의 전면전을 의미하니까요. 낙담한 카탈리나는 사누드와 함께 술집에 처박혀 군인을 관두겠다느니 하는 힘없는 소리나 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옆에서 술마시던 어떤 사람이 도발을 날립니다.



 - 그리고 저 말에 발끈한 카탈리나는 무언가 결심한 듯 사누드를 데리고 항구로 나갑니다. 그리고 사누드가 지휘하는 금 수송선 앞에서 카탈리나는 사누드를 협박같지 않은 부탁같지 않은 협박하면서 배를 달라고 합니다. 이에 사누드는 자기 배의 지휘권을 카탈리나에게 넘겨주고, 자신도 일당이 되겠다고 선언합니다. 반란군의 졸개라면 징역 정도에서 끝날 수 있지 않겠냐며.



 - 이렇게 카탈리나는 복수심에 불타 조국에 반기를 들게 됩니다. 배를 몰고 세빌리아를 나서는 순간 카탈리나의 국적은 해적으로 바뀌며, 스페인과의 적대치가 단숨에 100이 됩니다. 일단 빨리 근처 항구로 가서 있는 금을 팔아치우고(나름 금 수송선이라면서 금이 달랑 10개밖에 없습니다), 바로 해적질을 시작해도 되지만(카탈리나의 능력치도 괜찮고 배도 괜찮고, C급 무기 정도면 꼬꼬마 상선대 정도는 상대가 가능) 블로거는 편의상 돈을 벌어서 더 좋은 무기와 방어구를 장착한 후 해적질을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 준비가 끝나면 해적질을 시작합시다. 일단 만만한 스페인 상선대 하나 잡아서 털어봅니다.



 - 전투를 이기고 아무 항구나 들어가면, 사누드는 에제키엘이 정식으로 카탈리나 체포령을 발동했다고 알려줍니다.



 - 당연히 카탈리나는 자수 따위 없다며 전의를 다집니다. 나가면 전투를 치러야 하니 충분히 준비를 마치고, 항구를 나서면 스페인 전함대들이 무더기로 카탈리나를 쫓아오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대략 세빌리아 쪽에서 출발해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 중 아무 함대에나 닿으면 전투 시작.



 - 그리고 여기서 승리하면 또 다른 함대들이 다가오는데, 에제키엘 쪽에서 직접 나선 모양입니다. 스페인 함대에서는 "지금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주마"를 시전하지만, 가족과 애인의 복수를 해야 하는 카탈리나는 일단 눈앞의 위기를 피하기로 합니다. 바로 전투가 이어지지는 않고, 몰려온 함대 중 다른 함대와 접촉하면 두 번째 전투가 시작. 그리고 여기서도 이기면 이제는 카탈리나의 함대가 완전 포위되었다고 사누드가 알립니다. 이제 죽을 각오를 하는 둘의 눈 앞에서, 갑자기 스페인 함대가 혼란에 빠지더니 후퇴해 버립니다.



 - 스페인 함대가 후퇴한 직후, 나무토막을 붙잡고 떠내려오는 한 사람을 끌어올리고 보니 이 사람이 스페인 함대의 뒤통수를 쳐 카탈리나를 구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세빌리아에서 카탈리나를 부추긴 바로 그 사람. 이런 녀석과 가까이 하면 안 되는데 알고보니 카탈리나 애인의 친구여서 카탈리나를 돕기로 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안드레아 기지가 동료로 추가됩니다.



@ 의외로 카탈리나 에란초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이 있는데, 스페인 출신의 카타리나 데 에라우소(1592-1650)입니다. 그는 본래 수도원의 수녀로 자랐으나 가혹한 수행에 반발하여 수도원을 탈출, 남장을 하고 해군 군인으로 복무하였습니다.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는데 워낙 다혈질적인 성격에 많은 결투를 치러 잦은 마찰을 일으켰고, 한 번은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친오빠와 결투를 하였고 이에 충격을 받아 탈영을 감행했다가 나중에 구명되기도 하였습니다.


@ 나중에 전투 중 중상을 입고 죽음의 문턱에서 사제에게 진짜 성별을 고백하였는데, 어쩌다 몸이 회복되면서 그가 남장여자임이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교황이 직접 카타리나의 남장을 허가할 정도로 많은 명성을 쌓았고, 이후로도 많은 활약을 하다가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생을 마쳤다고 하는군요. 대항해시대2 카탈리나 에란초는 그에게서 이름과 여성 군인이라는 기본 배경을 따왔지만, 실존인물과 달리 남장을 하지 않았고 스페인 함대를 완전히 떠나 해적이 된다는 설정으로 바꾸었습니다.


[카타리나 데 에라우소]




[캡처 : https://tw.election2016.yahoo.com/index.html ]


1. 결과 : 모두의 예상대로


 - 이변은 없었습니다. 선거전 내내 압도적 1위를 지킨 차이잉원은 선거 결과에서도 과반 득표로 여유있게 당선되었습니다. 국민당의 전통적인 텃밭인 동부(화롄, 타이둥)와 접경지역(진먼, 롄장)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차이잉원이 1위를 차지함으로써, 여론이 중국국민당에서 완전히 등을 돌렸음을 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 쑹추위는 결국 완주했고, 두자릿수 % 득표에 성공하며 나름대로 선전하였지만 후보 입장에서는 많이 아쉬운 결과일 것으로 보입니다. 한때 여론조사 2위로 올라설 정도로 바람을 일으켰고, 막판에도 반등에 성공하며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주리룬과도 거의 트리플스코어에 가까운 차이로 3위에 그쳤습니다. 특히 쑹추위의 친민당은 입법의원 선거에서도 비례대표 3석만을 차지하며, 창당 1년 남짓의 시대역량에조차 밀리는 성적표를 받았으니 이래저래 속이 쓰릴 듯하네요.


 - 선거전이 시종 차이잉원 우세로 흘러가긴 했지만, 크고작은 변수는 있었습니다. 차이잉원은 12월 27일 개최된 1차 TV토론에서 양안관계 문제에 대하여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고(이는 예전부터 지적된 문제), 직후의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을 일거에 6%나 날려먹었습니다. 차이잉원이 깎아먹은 점수는 고스란히 쑹추위에게 옮겨갔고, 쑹추위는 "경제성장률이 한국보다 1.5% 더 나오도록 하겠다"는 구체적인 경제공약을 앞세워 747과 비슷해 보이지만 넘어가기로 주리룬을 1% 이내로 추격하였습니다. [1차 TV토론 요약]


 - 그래서 이번에는 일각에서 쑹추위로의 후보단일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지만, 막판까지 반등을 유지하기엔 힘에 부쳤는지 선거 결과는 애초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나왔습니다. 여러 변수에도 1, 2후보에게 대부분의 표가 몰린 것은, 양당제가 고착화되고 있는 타이완 정치의 현재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선거가 다가오면서 (언제나 그렇듯) 양안간 긴장이 고조되었는데, 이번 선거에서는 중국 인민해방군 왕훙광(1949-) 퇴역 중장이 "하나의 중국 원칙으로 타이완을 해방할 때가 왔다"며 타이완을 침공할 것을 주장하여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중국 정부가 '양안 평화와 안정의 지속'을 천명한 것과 상반되는데, 양안 긴장을 고조시켜 선거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한국 선거에서 남북관계가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봅시다).



2. 직전 변수 : 쯔위 청천백일만지홍기 사건


 - 트와이스의 멤버 쯔위(쯔위는 타이완 출신)가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청천백일만지홍기(타이완 국기)를 들었던, 따지고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이 사건은 양안관계라는 근본적 문제에 타이완 총통선거라는 타이밍, 소속사인 JYP의 아쉬운 대처가 겹치며 그야말로 핵폭탄급 이슈로 번지고 말았습니다.


[마리텔에 출연한 트와이스의 멤버들은 태극기와 자기 나라의 국기를 하나씩 들고 있었음. 쯔위는 타이완, 나머지 세 명은 일본]


- 처음 문제를 터뜨린 건 타이완의 한 언론으로, "쯔위는 애국자다"라는 취지의 보도였으니 대략 선거 시즌에나 나올법한 '쓰잘데없는 일 침소봉대'하는 수준의 보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이런 건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요). 쯔위는 데뷔 당시부터 타이완 쪽에서도 큰 관심을 받아왔고, 애국심이 특히 강조되곤 하는 선거 시즌이다보니 '국기'를 드는 별 소소한 행위 하나가 언론의 주목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 그런데 여기에 유명 가수 황안(1962-)이 쯔위를 마구 까대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합니다. 알아주는 친중국 인사로 심지어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 이중국적 상태로 알려진(물론 여기도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별 의미는 없음) 황안은, 쯔위의 행동을 강하게 비난하며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라"는 개소리 공개 요구를 날렸습니다.


 - 그런데 정작 황안은 한창 연예계에서 활동하던 시절 공개석상에서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들었던 것이 타이완 네티즌에 의해 밝혀지며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본인은 단순히 예능 프로그램에서 하나의 도구로써 들었던 것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쯔위의 행동은 도대체 뭐가 다르냐는 것. 이 웃기지도 않은 논란은 이렇게 하나의 해프닝으로 종결되나 싶었지만......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들고 있는 황안]


 - JYP와 트와이스의 공식 SNS에 중국어 악플이 달리기 시작하더니, 중국 지역방송인 안후이TV에서 춘절 특집방송의 트와이스 출연 계획을 난데없이 취소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내에서 JYP 거부운동까지 벌어지고 방송에서도 잇따라 퇴출 움직임을 보이자(블로거는 여기에 의도적 여론조작이 있음을 강하게 의심하나, 분명한 근거가 있지는 않으므로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JYP는 쯔위가 직접 출연한 동영상 형태로 "쯔위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한다"며 백기투항하고 말았습니다.


 - 이것으로 논란은 종결......되었다면 차라리 다행일텐데, 이것이 양안간 정치문제로 비화한 이상 이렇게 끝날 턱이 없습니다. 이제는 타이완 쪽에서 가만 있을 수가 없지요. 이 사태가 선거 '직전'이었기 때문에 총통선거 후보자들은 저마다 "쯔위를 지지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날렸고, 졸지에 쯔위는 양안갈등을 상징하는 존재로 떠올라 버렸습니다.


 - 이 사태에서는 JYP의 대처 또한 성급하고 미숙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아마도 중국에서의 난데없는 여론 악화를 보고 당황했을 JYP는 성급하게 중국 여론에 백기투항하는 길을 택했고, 이 타이밍이 하필 타이완 총통선거와 완벽히 겹치는 바람에 오히려 논란을 더 키웠다는 게 블로거의 평가입니다. 양안간 정세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있었다면 한결 세련된 대처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어쨌거나, 졸지에 중국-타이완-JYP 모두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쯔위는 도대체 무슨 죄입니까.


 - 이 논란은 결과적으로 선거에서 타이완 독립론자(즉 차이잉원과 민주진보당, 시대역량 등)에게 힘을 실어주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다만 이번 선거전 자체가 처음부터 민주진보당의 압도적 우세로 흘러갔기 때문에, 선거 직전의 이 사건은 민주진보당의 승리를 더 굳혀주는 것 외에 '결과' 자체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 여담으로 황안은 쯔위의 항복선언 이후 기고만장하여 날뛰다가 1월 16일 자신의 웨이보 계정을 차단당했다고 합니다. ㅡㅡ;



3. 가능성 있는 대안, 시대역량


 - 총통선거와 동시에 치러진 입법의원(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진보당의 압승 외에 '시대역량'의 선전이 돋보였습니다. 지난 2014년 입법원 점거농성(해바라기 운동) 주도세력을 중심으로 2015년 1월 결성된 시대역량은, 이번 선거에서 지역구 3석(타이베이 제5선거구, 신베이 제12선거구, 타이중 제3선거구), 비례대표 2석(득표율 6.11%) 당선으로 총 5석을 획득, 단숨에 제3당으로 올라섰습니다.


[주요 정당의 비례대표 득표율. 위로부터 민주진보당-중국국민당-친민당-시대역량-신당-녹색사회민주당연맹-대만단결연맹]


 - 타이완 입법의원 선거에서 5석이란 결코 적은 자릿수가 아닌데, 타이완 입법의원은 2008년 재적 수를 절반으로 줄여 총 113명밖에 되지 않고, 그 중에서도 지역구는 단 73석 뿐입니다. 창당 1년을 맞은 신생정당, 그것도 기존 정치세력과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없는 정당이 지역구 73석 중 3석을 획득한 것은 상당한 성과이며, 비례대표 득표율이 생각보다 적게 나왔음에도 시대역량 측에서는 이 선거를 사실상 승리로 평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 비례대표 선거에서는 비교적 아쉬운 모습을 보였는데, 한때 시대역량의 비례대표 후보 6명이 모두 당선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돌풍을 일으켰으나 실제 선거에서는 쑹추위의 친민당에 간발의 차이로 밀려나며 2석만을 확보하였습니다. 물론 쑹추위 버프에 정당 역사 자체도 제법 되는 친민당과 비슷한 득표를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대역량은 비례대표 쪽에서도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여러모로 한국과 오버랩되는 타이완 정치지형에서 시대역량은 한국의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운동세력을 중심으로 결성되었고, 진보적인 청년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급성장하였으며, 양당제 구도를 깨뜨릴 제3세력의 강력한 후보로 급부상하였다는 것 등. 과연 이들이 더욱 전진하여 타이완 정치지형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낼지, 한국의 제3세력처럼 지리멸렬할지는 앞으로 두고보아야 할 것입니다.



1. 배경 : 전쟁의 장기화


 - 1937년 말 일본군의 대규모 상륙전으로 상하이가 함락되고 난징이 위기에 처하자, 장제스의 중국 국민정부는 긴급 회의를 열고 행정부는 충칭으로, 군사위원회와 군사령부는 우한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도 나름 '수도'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난징에는 탕셩즈가 남아 방어작전을 총괄하였지만 그는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막판에 우한으로 도망쳐오고 말았습니다(더 자세한 이야기는 앞의 글 참조)


 - 우한(우창, 한양, 한커우 시가 1927년 통합)은 양쯔강 중하류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이자 군수산업의 중심지로,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중국 정부는 수도를 충칭으로 옮기면서도 군사 부문은 우한에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일본은 중국이 결코 만만하지 않으며 3개월이면 충분하다던 호언장담이 잘못임을 뼈저리게 깨달았고, 최대 요충지인 우한을 점령하면 중국에게 결정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한커우 지역을 향하여 진격하는 일본군 전차부대]


 - 결국 1938년 4월 1일부로 일본은 본국과 식민지에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대규모 병력을 추가 편성하여 전선으로 보냈습니다. 일본군은 40만 가까운 대병력을 우한 공략에 투입했고, 히로히토 덴노는 독가스의 사용을 허가하였습니다. 이런데도 히로히토가 전범이 아니라고? 결국 버티지 못한 중국군은 10월 17일 군사위원회를 충칭으로 철수했고, 10월 27일 우한의 세 지역은 모두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습니다(특이하게도 여기서는 일본군 특유의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고).


 - 하지만 이 과정에서 중국군 주력을 섬멸하는 데 실패하면서 일본군의 계획은 또다시 어긋났습니다. 1938년 11월 장제스는 전쟁의 첫 단계가 끝났음을 선언하고, 징병령을 발동하고 각지 군벌들의 충성을 확인하는 등 장기항전 태세를 확고히 다졌습니다. 중국은 일본의 예상보다 훨씬 굳건하게 버티었고, 이 시점에서 일본은 완전히 수렁에 빠진 신세가 되었습니다.



2. 일본군의 무차별 폭격


 - 이미 전쟁을 중지하기에도 너무 멀리 가버린 일본은, 중국군과 중국 민중에게 최대한 많은 피해를 먹여 전반적인 사기를 꺾고자 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중국 임시수도인 충칭에 화력을 집중하였는데, 우한이 점령되기도 한참 전인 1938년 2월부터 이미 일본군 폭격기는 충칭을 공격하고 있었지만 1939년 초까지 약 1년간은 별로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 충칭은 1년 내내 안개가 심하고, 특히 겨울에는 구름이 끼는 날이 많아 폭격기의 공격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1939년 봄 들어 구름과 안개가 걷히면서 충칭 시가지는 폭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습니다. 1939년 5월 3~4일에 걸쳐 일본군이 충칭에 대규모 폭격을 가했는데, 하필 이 날 월식이 있었고 많은 시민들이 더위를 식힐 겸 월식을 구경하러 밖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일본군의 폭탄을 몸으로 받아냈고, 사망자만 수천 명에 달하는 대참사가 발생하였습니다.


 - 충칭은 그 당시 이미 대도시이긴 했지만, 다른 대도시에 비해서는 비교적 낙후된 곳이었기 때문에 방어태세 역시 부실했습니다. 사람들은 폭격을 피하여 열악한 환경의 방공호로 대피했고 일부 시민은 난징에서처럼 외국 공사관으로 몰려들었는데, 영국 대사관은 무차별 폭격에 함께 휘말렸고 독일 대사관은 피난민에게 문조차 열어주지 않아 수백 명이 몰려드는 인파에 깔려 압사하거나 폭격에 휘말려 타죽었습니다.


[일본군의 소이탄 폭격으로 불바다가 된 충칭 시가지]


 - 일본군의 폭격은 대부분 민간시설과 민간인 거주구역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는 민간인들의 공포를 극대화하고, 전쟁 수행 의지를 감소시켜 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일본군 폭격에 포함된 소이탄(인화성 물질을 잔뜩 포함하여, 화재를 일으켜 피해를 주는 형태의 폭탄)은 충칭 시가지 곳곳에 화재를 일으켜 막심한 피해를 주었습니다. 더구나 이 때까지 동아시아 지역의 건물들은 대부분 목재로 지어져 있었으므로......


 - 충칭으로 진격하던 일본군은 창사 일대에서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고, 일본군이 독가스를 살포하는 등 발악에 가까운 몸부림을 쳤음에도(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가스를 대규모로 사용한 건 일본군이 사실상 유일) 결국 창사를 점령하지 못하고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육지에서의 진격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이와 함께 충칭을 향한 일본군 폭격기의 공습은 한층 더 격렬해졌습니다.


 - 1941년 6월 5일에는 충칭 대공습에서 중요하게 기억되는 또 하나의 대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이 날 5시간에 걸쳐 일본군 폭격기 24대가 공격을 벌였는데, 이를 피해 18제대터널(방공호)로 피신한 다수의 민간인은 터널 입구가 폐쇄된 이후 통풍이 되지 않으면서 대부분 산소부족으로 질식사하고 말았습니다(6·5 대터널 참변). 당시 희생자는 1200명, 최대 4000여 명에 달합니다.




3. 그래도 저항은 계속된다


 - 많은 사람들이 폭탄에 맞아죽거나 무너지는 건물에 압사하고, 소이탄 화재에 타죽거나 질식사하였습니다. 이는 권력이나 돈이 있는 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250여 명의 부자들이 충칭 중국은행 지하실에 피신했다가 건물의 붕괴로 모두 압사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의 옷과 소지품은 역시 폭격으로 모든 것을 잃은 생존자들이 가져다가 써야 했을 정도로 사람들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충칭 대공습을 상징하는 사진. 죽은 사람들의 옷은 생존자들이 벗겨 가져갔다.]


 -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활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폭격이 끝난 이후에는 식당들이 '공후반(공습 후 식사)'이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을 재개했으며, 은행도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많은 상점들에서는 폭탄을 투하하는 폭격기가 그려진 계란을 팔았는데, 여기에는 '도쿄 직송 계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 폭격이 시작되면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도시 내의 모든 차량이 징발되었는데, 이 중에는 최고 권력자 장제스의 개인 리무진도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폭격과 누적되는 피해에도 중국 정부와 군은 점차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해갔고, 대공 방어체계와 방공호 확충이 이루어지며 희생자는 점차 감소하였습니다. 이에 힘입어 충칭 시의 인구는 다시 증가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폭격을 피해 방공호에 모여든 충칭 시민]


 - 충칭에 대한 폭격은 1943년 8월 23일까지 약 5년여간 이어졌으며, 이는 단일 지역에 대한 최장기간 공습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기간동안 공식적으로 집계된 사망자 수는 11889명, 시가지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1만여 채의 가옥이 무너지거나 불타 사라졌습니다. 5년간 일본군의 공습은 218차례 이어졌고 연 9513대의 폭격기가 21593발 가량의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4. 폭격 이후


 - 충칭 대공습은 소이탄이 대규모로 사용된 사실상 첫 사례로, 이미 소이탄 자체는 제1차 세계대전기에 개발되어 있었지만 이것이 도시 공격에 특출난 위력을 보인다는 사실이 이 때 증명됩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교훈은 일본의 적국(敵國)도 똑같이 얻었고, 미국은 이 교훈을 바탕으로 1945년 일본의 도쿄를 폭격하여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 난징 대학살 때만 해도 (심지어 자신들의 군함이 공격당했음에도) 일본에 대한 개입을 자제해온 미국은, 1939년 5월의 대폭격 이후 방침을 바꾸어 비행기 부품 수출금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제재에 들어갔습니다. 양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로를 가상적국으로 간주해 왔고, 일본은 미국의 경제제재가 점차 강력해지자 이를 핑계로 1941년 12월 하와이를 급습하며 태평양전쟁의 문을 활짝 열었고, 그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일본의 사죄와 피해배상을 요구하는 피해자 유족의 시위. 충칭 고급인민법원 앞]


 - 당시의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2004년부터 소송단을 꾸려 일본정부에 사죄와 피해배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006년 일본정부를 상대로 첫 소송을 제기하였고, 이후 다른 지역의 폭격 피해자들도 합세하였습니다. 2015년 2월 도쿄지방법원은 "이 사건에서는 국가에 대한 개인의 청구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당연하게도 원고의 소송을 기각하였습니다. 기사보기



1. 배경 : 일본군의 허난성 침입


 - 중일전쟁의 시작점인 베이핑(베이징)-톈진 방어선은 1937년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9월부터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남하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허난성 최북단 안양을 점령하며 허난성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화북 방면 총사령관은 군벌 출신 펑위샹(1882-1948)이었는데, 그가 지휘하는 병력은 40만 명에 달했지만 이들은 사실상 군벌들의 집합체인 오합지졸에 가까웠기 때문에 37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 주력의 공격을 저지할 수 없었습니다.


[허난성의 위치]


 - 한푸쥐(1890-1938), 쑹저위안(1885-1940) 등 휘하 군벌들이 잇따라 도망치는 등 졸전 끝에 산둥성 대부분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장제스는 펑위샹을 해임하고 한푸쥐 등 적전도주와 부정부패를 일삼은 군벌들을 싸그리 체포하여 처형하는 강수를 두어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하였습니다. 한편 황하 북쪽을 대부분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군의 보급선을 단절하기 위해, 간선철도의 교차지점인 정저우(허난성)와 쉬저우(장쑤성)를 다음 목표로 잡았습니다.


 - 일본군은 먼저 쉬저우로 진격하였지만, 쉬저우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타이얼좡(산둥성 최남단)에서 1938년 3~4월에 걸쳐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을 맞고 후퇴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타이얼좡 전투). 흐름을 꺾인 일본군은 이 쪽을 담당한 북지나방면군 사령관을 왕족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1887-1990)로 교체하였고, 그의 지휘하에 일본군은 중국군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 상하이 전투에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장제스는 쉬저우 일대의 병력에 체계적인 철수 명령을 내렸고, 후퇴하는 중국군을 포위섬멸하고자 한 일본군의 작전은 지휘관들이 공적을 놓고 갈등하느라 협조체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일본군은 중국군이 철수한 쉬저우를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1938년 5월 19일).


 - 한편 정저우 방면으로 진격한 일본군 제14사단은 정저우의 길목이자 과거 북송의 수도이기도 한 카이펑을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중국군에 포위당했고, 인근 제16사단의 지원을 받고서야 간신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제14, 제16사단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카이펑을 다시 공격, 6월 6일 카이펑을 함락시켰습니다. 카이펑을 넘어 정저우로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막아내기 위해, 장제스는 인근의 황하 제방을 무너뜨려 수공(水攻)을 벌이기로 결정합니다.



2. 대재앙으로 번진 수공


 - 국민혁명군 제53군 1단은 정저우 인근 화위안커우(花園口)의 황하 제방을 파괴하는 작업을 벌여, 6월 9일 제방 일부를 터뜨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황하는 천정천(주변 땅보다 강바닥이 더 높은 곳에 있는 하천)이기 때문에, 뚫린 제방을 넘어선 강물은 걷잡을 수 없이 주변 평야지대로 쏟아집니다. 황하의 물살은 정저우에서 카이펑에 이르는 지역을 침수시켰고, 이 곳에 있던 일본군 제14, 제16사단은 차오르는 홍수에 그대로 휩쓸렸습니다.


[홍수에 휩쓸린 일본군 전차부대]


 - 장제스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은 대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6월 10일 황하 상류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사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불어난 물 때문에 제방 붕괴가 확대되면서, 계산을 훨씬 뛰어넘는 양의 강물이 평야지대로 넘쳐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홍수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허난성 동부는 물론이고 동남쪽의 안후이성, 장쑤성으로 계속 퍼져 나갔습니다. 수천 km에 달하는 평야지대에서 넘치는 물을 막을 장애물은 없었습니다.


 - 중국은 애초에 작전지역인 화위안커우 인근 지역에만 홍수경보를 내리고, 나머지 지역에는 아무 경보도 내리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결국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수많은 주민들이 난데없이 들이닥친 물벼락에 그대로 휩쓸려 죽어갔습니다. 이 홍수로 사망자만 최소 9만, 최대 89만 명이 발생하였으며 이재민은 1250만 명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황하의 흐름은 남쪽으로 바뀌어, 회하와 양쯔강 하구 쪽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1947년 제방 복구와 함께 원상복귀).


 - 하지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허난성은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피해복구는 꿈도 꾸지 못했고, 이는 4년 후 벌어지는 훨씬 더 큰 재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3. 대기근, 지옥도가 열리다


 - 전쟁과 홍수 피해가 누적되어 허난성 일대의 경지면적은 이전의 1/3 가까이로 줄어든 상태였지만, 전쟁과 부정부패, 행정력 미비라는 복합적인 문제가 피해복구를 계속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1942년 봄부터 비가 거의 내리지 않을 정도의 가뭄이 시작되고, 가뜩이나 피폐할대로 피폐한 이 지역에 극심한 기근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 농민들은 봄과 여름 내내 하늘만 쳐다보았지만 비는 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빗방울 대신 가을 하늘을 채운 것은 다름아닌 메뚜기떼. 그나마 남아있던 것들을 메뚜기떼가 죄다 쓸어가면서 허난성은 생지옥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량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산나물과 풀을 뜯어먹기 시작했고, 산나물이 사라지자 나무껍질을 벗겨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마저도 곧 바닥을 드러냅니다.


[나무껍질을 벗기고 있는 가족]


 - 사람들은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닥치는대로 찾기 시작했고, 기러기 똥이 절찬리에 식용으로 쓰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소화가 덜 된 곡식 종자가 있어 그나마 영양을 보충할 수 있었다고). 혹은 땅을 파서 관음토(일종의 백색토)를 파먹기도 했는데, 당장의 허기는 채울 수 있지만 당연히 열량도 없고 소화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흙을 계속 먹는 사람들은 소화기에 장애를 일으키고 나중에는 점점 죽어갔습니다.


 - 이런 참상 속에서 도대체 중국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나름 20세기 중반인데, 중국 정부가 이 지역을 구휼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 만연한 관료주의와 부정부패가 허난성 주민에 대한 지원을 가로막았습니다. 허난성 정부의 관료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책임을 회피하거나 전가하기 바빴고, 상부의 추궁을 피하고자 피해상황을 무시하거나 축소 보고하였습니다.


 - 쉬창(허창) 지역의 경우 5만여 명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하였다고 성 정부에 보고하였는데, 이조차 축소 의혹이 있었음에도 성에서는 "왜 이렇게 많이 보고하였는가"를 이유로 보고서를 반려해 버릴 정도였습니다. 이런 마당에 제대로 된 구휼체계가 돌아갔을 턱이 없습니다. 당시 허난성 일대를 취재한 후 장제스를 만난 저널리스트 테오도르 화이트(1915-1986)가 허난성의 참상을 전했을 때, 장제스는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 그나마 지원되는 부족한 식량마저도, 태반은 부패한 관료들이나 군벌의 손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결국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인육(人肉)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길거리에 널린 시체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살아있는 사람들까지 죽여서 그 고기를 뜯어먹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극도의 굶주림에 피폐해진 위장은 갑자기 들어오는 고기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렇게 인육을 뜯어먹은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급성 소화질환으로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 가뭄은 1943년 초까지 계속되었고, 그 사이 굶어죽은 사람의 수는 최대 300만 명에 달했습니다.



4. 결말 :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트라우마


 - 장제스와 중국 정부는 기근의 실태를 파악하고서도, 중일전쟁의 분위기에 악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철저한 보도통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실제로 정부의 선전 기사 사이에 허난성 재해의 실태를 짧게 보도한 충칭의 지역 신문 <대공보>가 정부의 탄압으로 무기정간을 당한 사례가 있습니다(그리고 화이트는 이 기사를 목격한 후 허난성 취재를 시작했다고).


 - 자신들의 죽음을 외면한 정부와 군부에 대한 허난성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급기야 1944년 중탸오산 전투에서는 허난성의 농민들이 후퇴하는 중국군 5만 명을 습격하여 무장해제시키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당시 군사령관 탕언보(1900-1954)는 이들을 일제 앞잡이 혹은 반역자로 규정했지만, 그렇게까지 된 사연을 돌이켜보면......


 - 이러한 일련의 실정(失政)으로 장제스에 대한 민중의 신뢰는 최악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반사이익을 얻은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중국 공산당이었습니다. 비록 중일전쟁 발발 이후 힘을 합쳤다지만(제2차 국공합작) 실질적인 연계는 거의 되지 않았고, 공산당은 일본과의 전투를 치르면서도 동시에 농민들의 민심을 얻는 대민전략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수탈에 절망한 농민들은 앞다투어 공산당 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이는 훗날 국공내전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 민심을 완전히 잃은 국민당은 신식 무기를 들고도 공산당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제스는 민중을 외면한 대가를 '중국 대륙의 상실'로 뼈저리게 치렀던 것입니다. 부정부패가 결정적인 패인이었다고 판단한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도망친 이후 강력한 부정부패 처벌과 경제개발그리고 극악의 1인독재을 통하여 자신의 과오를 시정하고자 하였지만, 그런다고 잃어버린 대륙이 돌아오지는 않았으니 엎질러진 물.


 - 예전 수천년간 중국의 중심이었던 허난성 일대는, 중일전쟁 당시의 피해를 지금까지도 완전히 복구하지 못한 채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중일전쟁기 덧씌워진 반역자의 이미지, 그리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타 지역으로 이주하여 일하는 허난 출신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편견이 겹쳐 중국 내에서는 허난 출신자들에 대한 심한 지역차별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는 현대 중국의 큰 사회문제 중 하나라고 합니다.



1. 배경 1 : 상하이 전투


 - 1937년 7월 일본군의 한 병사가 똥 싸느라 늦은 것이 발단이 되어 시작된 중일전쟁은, 8월 초까지만 해도 베이핑(베이징)-톈진 등 북동부 지역에 한정하여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호구이며 우리는 3개월 내에 중국 전체를 털어먹을 수 있다'는 이상한 자신감에 빠져있던 일본군 지도부는, 중국의 수도를 직격할 심산으로 난징(당시 중국의 수도) 코 앞 상하이에 대규모로 상륙하였습니다(상하이 전투, 혹은 제2차 상하이 사변).


 - 하지만 중화민국 지도자 장제스는 상하이를 사수하고자 독일식 훈련을 받은 정예부대를 대규모로 상하이에 때려박았습니다. 또한 일본군 2개 사단이 상륙을 시도한 우쑹 해변에는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1878-1966)과 한스 폰 젝트(1866-1936) 등의 조언에 따라 건설한 강력한 방어시설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중국군의 결사항전에 고전을 거듭했고, 중국 대륙을 정복하겠다던 3개월이 되도록 상하이 하나 점령 못하는 촌극을 연출합니다.


[상하이 전투에서 활약한 중국군 방어진지]


 - 결국 일본군은 교착상태를 끝장내고자 파견 병력을 3배(10만)으로 늘렸고, 이에 대항하여 장제스는 화중-화남 지방의 거의 전병력(80만)을 상하이에 집결시키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쓸데없이 많은 병력을 좁은 공간에 쏟아부은 게 오히려 패착이 되어, 중국군은 10만을 훨씬 넘는 사상자를 냈고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장제스는 10월 26일 전 병력을 철수시켰습니다.


 - 중국군은 3개월간 일본군을 저지하고 큰 피해를 강요하는 성과를 올렸지만, 결국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했으며 방어라인은 무너졌고 독일식 정예병력도 절반 이상 날려먹는 등 방어력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상하이와 인접한 난징을 방어하는 것이 어려울 뿐더러 별 의미도 없다고 판단한 중국 정부는 내륙의 충칭으로 피난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 이 때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끝까지 남아 난징을 지키겠다"고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으니, 군사참의원장 탕셩즈(1889-1970)였습니다.



2. 배경 2 : 난징 전투와 적전도주


[탕셩즈]


 - 중국 정부는 11월 15일 충칭으로 피난하였고, 결사항전을 주장한 탕셩즈는 난징지구 사령관이 되어 남았습니다. 당시 난징은 정부와 함께 피난하려는 난징 시민들과,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피해 난징으로 도망쳐온 외부 주민들이 뒤엉켜 온통 아수라장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상하이에서의 고전으로 광기분기탱천한 일본군은 11월 들어 상하이와 난징 주변의 지역들을 공격하여 말 그대로 '싹쓸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나마 방어병력이 있는 난징으로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 11월 19일 쑤저우에서 학살이 발생하여 35만 인구가 5백 명으로 줄어드는 등, 이미 대학살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탕셩즈와 방어군은 일본군의 학살을 피해 몰려든 피난민들까지 지켜야 했지만, 정부가 피난하고 남은 것은 패잔병 수준의 15만 병력과 형편없이 저질인 지휘관들 뿐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탕셩즈는 방어병력을 난징 성(城)에 집중시키고 도시 밖으로 이어진 교량과 선박도 파괴하는 등, 고립을 자초하는 뻘짓을 벌였습니다.


 - 지나친 확전을 경계한 대본영의 명령까지 씹어먹은 일본군은 외곽의 방어라인을 쓸어버린 후 난징을 포위하고 방어군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날렸는데, 탕셩즈는 이에 "ㅗ"로 화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탕셩즈는 덜컥 겁을 먹었는지 장제스에게 전갈을 보내 후퇴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번에는 장제스가 탕셩즈에게 "ㅗ"를 날려버렸습니다. ㅡㅡ;


 - 일본군의 최후통첩 기한인 12월 10일 오전이 지나자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성곽을 방패삼아 싸우는 중국군은 10만 일본군의 공세를 이틀간 잘 막아냈지만, 12일 오후 일본군이 성문 한 곳을 폭파하는 데 성공하고 독가스까지 사용하면서 중국군을 무력화시켜 최후 방어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난입하는 일본군과 방어하는 중국군의 시가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참모들과 함께 양쯔강을 건너 도망쳐 버렸습니다.


 - 사령관이 사라진 중국군은 와르르 무너져내렸고 15만 명 중 2만 명만 난징을 탈출,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일본군에 잡혀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13일 오전 4시 정부청사 함락을 끝으로 난징은 완전히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 그리고 난징 시내에 남겨진 50만 명 이상의 패잔병, 시민과 피난민들에게는, 지금부터가 본격 인세지옥(人世地獄)의 시작이었습니다.



3. 대학살과 '국제안전지대'


[난징에 입성하는 일본군]


 - 그동안 광기와 살기를 풀파워로 충전한 일본군은 약 6주에 걸쳐 난징에서 피의 폭풍을 일으켰습니다(자세한 학살 내용은 다른 곳에도 많고 너무 잔인하니 이곳에는 가급적 올리지 않기로). 강간이나 총살은 기본이고, 사무라이 전통을 이어온 일본군답게(?) 그들은 전도(戰刀)로 민간인과 포로를 마구 베어제꼈는데 심지어 이를 스포츠 혹은 총검술 훈련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학살에 참여한 한 군인의 일기에는 "심심하던 차에 중국인을 죽여 무료함을 달랜다"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 당시 난징의 일본군, 아니 일본 전체가 얼마나 미친 상태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100인 참수 경쟁이었는데, 두 명의 일본군 초급장교가 '누가 더 빨리 중국인의 목을 베는가'를 주제로 시합을 벌였고 언론은 이를 중계하여 신문으로 보도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람 죽이기로 시합을 벌인 놈들도 미친 놈들이거니와, 이를 자랑스럽게 자국 언론에 중계했다는 것으로 당시 일본 사회 전체가 얼마나 미쳐돌아갔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신문기사. "100인 참수 초기록" 무카이 106-105 노다 / 양 소위 거기에 연장전]


 - 물론 당시 난징에는 외국인도 다수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구역에 최대한 많은 중국인을 받아들여 학살의 희생자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 노력의 중심에는 독일 나치 당원이자 지멘스 중국지부에서 근무하던 욘 라베(1882-1950)가 있었는데, 라베는 자신의 나치 당적(나치 독일은 당시 일본의 동맹이었으므로)을 내세워 자기 집과 그 일대 구역에서 중국인들을 보호하였습니다. 비록 효과적인 보호는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수백 명의 중국인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 그를 따라 많은 외국인 선교사와 기업인, 외교관들이 대사관, 학교 등지를 확보하고 많은 중국인들을 수용하였는데 이 구역을 '국제안전지대'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비무장인 외국인들이 일본군의 발광(發狂)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일본군은 수시로 안전지대를 침범하여 강간과 살육을 자행하곤 했습니다. 그래도 난징의 중국인에게는 불완전하나마 국제안전지대만이 살 길이었고, 약 20~30만 명의 중국인이 국제안전지대로 몰려들어 학살을 피했습니다.


 - 그리고 결국 구원받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중국인은, 중국 정부 추산 30만여 명에 달합니다.



4. 뒷이야기


 - 당시 일본군은 중국인 학살에 정신이 팔려 있었는지, 자국민을 싣고 양쯔강을 통해 철수하던 미국과 영국 소속 초계함들을 공격하여 한 척을 침몰시켜 버렸습니다(파나이 호 사건). 충칭으로 도망친 장제스는 이 사건으로 미국과 영국이 발끈하여 일본의 발목을 잡아주기를 기대했지만, 아직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던 두 나라는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들여 발을 빼버리고 말았습니다. ㅡㅡ;


 - 전쟁이 끝난 이후 1946~47년에 걸쳐 '난징 전범재판'이 열렸고, 학살의 중심에 있었던 제6사단의 사단장 타니 히사오(1882-1947), 100인 참수 경쟁의 두 주인공 무카이 도시아키(1912-1948)와 노다 츠요시(1912-1948) 등 다수의 전쟁범죄자들이 처형되었습니다. 무카이와 노다는 "그런 일 없었다"고 발뺌하였지만, 위의 신문기사가 증거로 제출되자 "이건 왜곡이다"라고 발악하면서 죽어갔다고.


 - 도망자 탕셩즈는 우한까지 달아나는 데는 성공했지만 분노한 장제스에 의해 모든 직책과 권력을 빼앗겼고, 종전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습니다. 이후 그는 국공내전 때 공산당으로 전향하여 후난 성 부주석을 역임하는 등 잘나갔으나, 문화대혁명 때 숙청되어 홍위병에게 갖은 고초를 겪었으며 81세로 병사(病死)하였습니다.


 - 욘 라베는 학살 직후 히틀러에게 "학살을 멈출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동맹국을 건드리기 싫었던 히틀러와 나치 정부에게 무시당하고 오히려 비밀경찰에게 감금당하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다만 학살의 증거자료를 보전하는 것은 허가받았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때까지 지멘스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종전 후 나치 당적 때문에 체포당하였습니다. 비록 재판에서 무죄함을 입증받아 석방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재산을 날리고 건강까지 해친 라베에게 중국인들은 성금을 모아 지원을 해 주었다고 하는군요.


 - 종전 후 이 사건에 대한 중국(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모두) 정부에서는 난징 대학살에 대한 피해배상 요구를 실질적으로 포기해 버립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다나카 가쿠에이(1918-1993) 총리에게 마오쩌둥 주석이 "우리가 승전국이니 피해배상 따위는 요구하지 않겠다"는 만행소리를 하는 바람에, 희생자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은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ㅡㅡ; 실제로 당시 난징에서는 격렬한 반대시위가 벌어졌고, 중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는 것으로 답했습니다.


 - 중국 정부가 난징 대학살을 제대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마오쩌둥 사후의 일입니다. 난징 대학살 기념관이 1985년에야 건립되었을 정도. 최근 들어 일본의 우경화와 중국-일본 관계악화 등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난징 대학살을 전면에 내세우는 경향이 있는데, 2014년 1월에는 대학살 사건 관련 기밀문서를 공개하였고 이후 사건 관련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하여 2015년 10월 마침내 등재되기에 이릅니다. 일본은 당연히 길길이 날뛰었지만......


[난징 대학살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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