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급속한 경제개발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여러 차례에 걸쳐 완전히 갈아엎어졌습니다. 이는 전근대적 질서를 해체하고(백정 계층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소멸된 것이 바로 한국전쟁 때로 여겨집니다. 기존의 마을 공동체가 해체되고 백정마을 따위가 사라지면서 누가 백정 출신인지 찾는 게 의미가 없어진 것) 한국을 현대 사회로 이끄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거대 규모의 인구 이동이 이어지면서 엄청난 수의 '이산가족'을 낳게 됩니다.


 - 아직 전통적 가족개념이 온존하던 시절, 역사적 질곡으로 인하여 강제로 떨어져 생사조차 모르게 된 사람들이 마음 속에 큰 한(恨)을 안고 살아가는 건 당연했을 겁니다(아니 이건 가족이 해체되어가는 지금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당시 정부가 파악하고 있었던 이산가족 추정 수는 1050만여 명에 달했습니다. 1983년은 대한민국 인구가 딱 4000만 명을 돌파한 해입니다.


[중1 사회 교과서엔 이런 게 나옵니다. 저 화살표를 학생들은 그렇구나 하고 지나치지만......]


 - 당연하게도, 전쟁 직후부터 흩어진 가족을 찾자는 시도는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30여 년에 걸친 시도는 별로 성과가 없었는데, 이는 전국민이 함께 접할 수 있는 이른바 '대중매체'라는 것 자체가 거의 없었던 시대적 한계 때문이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70년대까지도 TV는 동네에 한두 대쯤 볼까말까한 사치품이었고, 그나마 많이 활용된 신문 역시 한자투성이에 높은 문맹률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라디오 역시 전국민을 모으기에는 부족했던 시절.


 - 이러한 한계가 1980년대 들어 해소되어가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컬러TV 방송의 시작과 함께 TV는 전국민에게 급속도로 보급되었고, 이미 1980년대 중반 들어서는 대부분 가정에 들어섭니다(당시 단칸방을 전전하던 갓난아기 시절 블로거의 집에도 TV만큼은 꼭 있었습니다). 아직 컴퓨터와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이라(인터넷은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았고) 거의 대부분 국민의 주된 매체는 TV였으며, 전국민을 동시에 한 화면에 집중시키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리고......



1. 1983년 6월 30일 : 90분짜리 방송이 270분으로


 - 1983년은 6.25전쟁 휴전 30주년이 되는 해였고, 이 해의 6월 25일에 KBS에서는 아침 프로그램인 <스튜디오 830>(現 <아침마당>의 전신)에 '아직도 내 가족을 못 찾았소'라는 제목의 특별 코너를 방송하였습니다. 이전에도 KBS는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당시 적대관계였던) 소련, 중국 등지를 타겟으로 이산가족 찾기 사업을 조금씩 진행하고 있었는데, 6.25 특집으로 국내의 이산가족에 주목하는 특집방송을 기획했던 것.


 - 이렇게 6월 25일 아침에 나온 특집방송은 생각보다 뜨거운 호응을 얻었고, 이에 자극받은 KBS의 제작진은 아예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황금시간대에 '이산가족 찾기'를 컨텐츠로 하는 별도의 특집방송을 준비하기에 이릅니다(후일담에 따르면 KBS 사장부터가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하는데, 당시 정권과 KBS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런 걸 프로파간다에 써먹을 생각도 다분히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그렇게 새로운 방송이 준비되고, 6월 30일 6.25주간 특별 프로그램(역시 시대가 시대였으니 6.25 특집을 일주일씩이나......)의 하나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특집생방송이 시작됩니다. 방송 시작 시각은 22시 15분, 대략 1시간 30분 정도 방송으로 계획되었고 (반응이 뜨거울 것으로 예상되었으므로) 약 1시간 정도 연장방송에도 대비하고 있었습니다(당시는 12시를 좀 넘으면 방송이 거의 끝나던 시절임을 감안합시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타이틀 화면]


 - 방송 계기가 계기였던만큼 방송 진행자에는 <스튜디오 830>을 진행하던 이지연 아나운서와 유철종씨(본업은 기업교육훈련 전문가로 전문 방송인은 아니었음)를 선정하고, 전국의 KBS 지국을 연결하여 이원중계를 하는, 당시로서는 첨단 기법까지 동원하여 만반의 준비를 마칩니다. 하지만 제작진이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TV방송의 증가한 파급력과 일천만 이산가족의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 처음에는 약 150여 명의 이산가족을 스튜디오에 모아놓고 전화나 이원중계 등의 방식을 통하여 다른 이산가족과의 연결을 시도하며, 최종적으로는 이산가족 찾기 사업을 진행중인 한국적십자사나 치안본부(경찰청) 전자계산소(컴퓨터 데이터를 활용한 찾기 사업을 진행) 등의 사업을 소개하는 구도로 기획되었습니다. 그런데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아니 시작되기도 전에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합니다.


[6월 30일 첫 번째 상봉]


 - 우선 출연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신청자들이 몰려듭니다. 결국 150명으로 계획된 선정자 수는 늘어나고 또 늘어나 방송 당일에는 무려 820명이나 되는 이산가족이 작은 스튜디오를 가득 메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스튜디오에 마련된 10여 대의 전화뿐 아니라 KBS의 모든 전화는 거의 마비 수준으로 폭주하기 시작했고, 얼마 뒤 첫 번째 상봉이 이루어지면서 생방송은 삽시간에 전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됩니다.


 -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연히 방송은 최초 예정된 1시간 30분을 훌쩍 넘기고, 추가적으로 계획된 1시간도 뛰어넘어 거의 새벽 3시 가까이까지 계속됩니다. 몇 시간동안 진행을 계속한데다 다음날 아침 방송도 출연해야 했던 두 진행자는 2시 45분에야 가까스로 방송을 끝냈는데, 꽤 많은 상봉이 이루어졌음에도 아직 출연자 중에서조차 극소수에 불과했던지라 "내일도 특집방송을 이어가겠다"라는 다짐을 하고서야 간신히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 당연하게도 당시 정치적으로 욕을 거하게 먹던 KBS는 이를 이미지 전환의 호재로 생각했고, 다음날인 7월 1일 저녁에도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긴급히 편성하게 됩니다.



2. 1983년 7월 1일~2일 : 생방송을 끝낼 수가 없어


 - 조짐은 이미 전날 밤의 방송에서부터 있었습니다. 스튜디오를 가득 메운 800여 명의 방청객 뿐 아니라, 방청객에 선정되지 못한 사람들과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이산가족들이 방송 시작 직후부터 KBS 본사가 있는 여의도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야간 통행금지가 막 해제되었던 시절이라, 방송 시간은 물론 방송이 끝난 이후에도 밤새도록 이산가족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날이 밝자 KBS 본사 앞은



 -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 이미 1만여 명 이상이 방송국 앞에 운집하였고, KBS가 방송 장소를 더 넓은 공개홀로 옮겼음에도 끝없이 모여드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지자, 당시 비어있던 신관 중앙홀을 추가로 열어놓고 방송국 내에서 이원중계를 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 그렇게 7월 1일 밤에 생방송이 다시 시작되었고, 분위기는 전날을 능가할 정도로 뜨거워서 결국 생방송은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이지연, 유철종 두 사람만으로는 당연히 진행이 불가능했고 손석기(손석희와는 다릅니다 손석희와는), 황인우 아나운서 등 KBS 소속의 아나운서들이 긴급히 투입되어 교대로 방송을 진행하였습니다. 방송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다보니, 유철종씨의 경우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로 방송을 이어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ㅡㅡ;


 - KBS는 이산가족 찾기 방송 외에 거의 모든 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이릅니다. 그러자 KBS는 아예 모든 역량을 이산가족 방송에 집중하기 시작, 다음날인 2일부터는 아예 모든 정규방송을 (중간중간의 뉴스 시간 외에는) 사실상 중단해버리고 여기에 '올인'하기로 결정합니다. 방송국 입장에서야 이만한 특종도 없으니까요.


 - 물론 거의 이틀 밤을 꼬박 새버린 진행자들이 계속 방송을 진행하기는 무리였고, 2일 7시 40분까지 진행된 방송은 약 40~50분 가량을 쉬고(뉴스 등의 다른 프로그램이 나갔다고 합니다) 8시 30분부터 다시 이어집니다. 당시는 요즘처럼 거의 24시간 방송을 하던 때가 아니었고, 낮 시간대의 방송은 주말과 공휴일에만 가능했는데 때마침 1983년 7월 2일이 토요일이었습니다.


 - KBS는 주말 프로그램으로 예정된 편성을 싸그리 갈아엎어버리고, 19시 30분까지 이산가족 방송을 이어나갔습니다. 이 시점부터 방송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는데, 진행의 틀이나 큐시트나 정형화된 멘트(정부가 여기에 주목하면서 반공 프로파간다 성격의 내용들이 중간중간 첨가되기는 했습니다. 뭐 그거야 당시 시대가......) 따위는 거의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 여기서 진행자와 카메라가 상봉 장면을 촬영하고 있노라면 등 뒤에서는 또다른 이산가족이 서로를 확인하고 통곡하는 광경이 이어집니다. 방송은 상봉자들의 절규와 다른 이산가족의 절박한 목소리, 그리고 상봉 때마다 산발적으로 이어지는 방청객의 박수소리가 온통 뒤엉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어떤 출연자는 감정이 북받치다 못해 스튜디오에서 실신하기까지 했는데, 당시 진행자인 김동건(<가요무대> 진행자)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든 채 응급조치를 수행했을 정도.


 - 전날 밤부터 따지면 21시간 이상 계속된 생방송의 시청률은 최대 78%에 달했고, 이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전국민이 함께하는 방송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규방송이 올스톱되었지만 아무도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3. 1983년 7월 3일 ~ 11월 14일 : 454시간의 각본 없는 드라마


 - 이쯤 되면 국가적인 주목을 받게 되지요. 1983년은 문어대가리 29만원 전두환 집권기의 한가운데였고, 국민의 반발을 3S와 프로파간다로 메꾸는 데 혈안이 된 정부는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프로파간다의 무대로 적극 활용할 것을 결정합니다. 이산가족 찾기 사업이 새마을운동(!) 급의 국민적 사업으로 지정되고, 각 행정구역의 민원실을 중심으로 공권력의 전폭적 지원이 시작됩니다.


 - 가족을 찾고자 하는 이산가족들은 더욱 많이 모여들었고, KBS 앞이 가득 들어차자 바로 근처에 있던 여의도비행장광장(現 여의도공원) 일대가 사람과 포스터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인파는 100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던 여의도광장을 가득 메워버렸고, 정부에서는 주변에 '만남의 광장'을 따로 조성, 지역별 섹션과 접수자 명부를 비치하는 등의 조치를 취합니다.


 - 폭주하는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된 KBS에서는 이미 7월 1일부터 접수자를 따로 받지 않았고, 몰려든 사람들은 저마다 종이든 뭐든 총동원하여 찾는 가족의 신상정보를 적어 벽이나 바닥에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KBS 앞과 여의도광장은 가족찾기 포스터로 거의 도배되다시피하게 됩니다. 재미있게도, 엄청난 수의 포스터가 붙었지만 남의 포스터 위에 덧붙인다거나 하는 노매너 플레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군요.


[포스터로 도배된 여의도광장]


 - 이틀간 생방송으로 혼돈의 도가니를 맛본 KBS는 7월 중순 이후 방송을 상시편성으로 돌렸고, 대략 비방송 시간대(평일 낮이라든지 한밤중이라든지)와 주말 종일편성으로 생방송이 이어졌습니다. 이 일이 국외에도 알려지면서 해외 교민 중에도 이산가족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쇄도했고, 교민이 많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경우 직접 방송을 연결하여 이산가족 상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 이제 방송은 한국을 넘어 전 세계가 주목하는 대사건이 되었습니다. NHK, BBC 등 당시 세계 유수의 방송사들이 비중있게 이 사건을 다루었고, 미국 ABC의 경우 미국 교민과의 방송연결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90분짜리 특별방송으로 기획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전국민, 아니 전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11월 14일까지 계속됩니다. 이날까지 중간중간 진행된 생방송의 총 방송 시간은 453시간 45분. '단일 주제 최장시간 생방송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됩니다.



4. 기막히고 코막히는 사연들



 - 당시 방송을 상징하는 장면 1. 남매지간인 두 사람은 가족이 단체로 월남하였는데, 1·4후퇴 당시 영등포역에서 피난을 위해 기차에 타던 과정에서 헤어졌고 32년간 생사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화면이 다른 가족의 상봉장면을 비추는 사이 뒷쪽에서 갑자기 고함소리와 박수가 터지면서 진행자가 놀라며 달려갔는데, 오빠가 "누이요, 누이!" "아버지 엄마 다 살아있어!" 라며 절규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KBS 만세!!"와 아나운서의 "위험해. 위험해"


 - 출연자가 감정이 북받치는 와중에도 상황 설명을 침착하게 했고, KBS 찬양도 있고 여러모로 프로파간다에 좋은 장면이었는지 두 사람의 상봉은 이후 KBS에서 이산가족 상봉 사업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두고두고 활용하게 됩니다. 


[52분 25초부터]


 - 당시 방송을 상징하는 장면 2. 허현철, 허현옥씨는 전쟁중에 각각 고아원과 이발소 양녀로 들어가면서 헤어지게 되었는데, 동생 허현옥씨는 자신의 본명도 모른 채 입양 후 이름으로 살다가 방송을 통하여 오빠를 만나 자신의 본명을 알게 된 것(본명을 몰랐기 때문에 이발소에 입양될 당시 상황으로 서로를 확인했는데, 화면상으로 이미 얼굴을 보는 순간 오빠임을 직감했던 모양).


 - 방송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본국에서는 남매의 상봉을 중간에 자르고(워낙 많은 사람을 소개해야 했기 때문) 다른 곳의 사연 소개를 진행했는데, 제작진이 무슨 약을 빨았는지 ㅡㅡ; 화면을 다시 강제로 돌려놓고 두 남매의 상봉장면에 비장한 BGM과 6.25전쟁 영상을 오버랩하는 반공소스 듬뿍 끼얹은 무리수를 두기도 했습니다. 두 남매 역시 이산가족 찾기의 상징이 되었고, KBS의 30년 특집방송에 출연하기도 하였습니다.


 -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다보니, 방송과 관계없이 광장에서 서로 상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빠르게는 처음 방청 접수를 하러 왔다가 상봉하는 경우도 있었고, 스튜디오에 방청하러 들어와서 서로를 찾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공개홀로 초대되어 사연을 공유하기도 하였습니다.


 - 워낙 이산가족 자체가 많았다보니, 이 때 여의도와 각지 방송국으로 몰려든 사람들 중에는 사회 유명인사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산가족 중 많은 수는 고향이 북한 쪽인 실향민이기도 했는데, 당시 교대 진행자였던 김동건 아나운서나 중간에 모습을 비춘 유창순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경우 그들 자신이 실향민이었기 때문에 이산가족과 시청자들의 깊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5. 감동 아래의 그늘


 - 물론 어떤 사건이든 빛만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분명 사회 전체를 뒤집은 대사건이었고, 수많은 이산가족이 상봉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의도에서, 전국 각지에서 끝내 가족을 찾지 못하고 절망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방송에 소개된 53,536명의 사연 중 실제로 가족을 만난 사람은 10,187명에 달했는데, 분명 엄청난 숫자이지만 나머지 4만 명 이상은 끝내 가족을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


 - 정부는 이산가족 찾기에 대한 전국민의 관심을 십분 활용합니다. 전국민의 관심을 끌고, 더구나 6.25전쟁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던 주제인지라 정부에서 반공 프로파간다에 써먹기 아주 좋았거든요. 일단 7월 중순부터 국가적 지원을 실시하고 행정력을 상당부분 동원한 것도 그렇고, 방송이 본궤도에 오른 뒤로부터는 진행자의 멘트나 BGM, 편집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반공정신 덧씌우기가 자행되었습니다.


 - 정부의 프로파간다는 공교롭게도 방송 기간 중 벌어진 두 사건 때문에 시너지 효과를 극도로 높였으니, 하나는 9월 1일 발생한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그 유명한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였습니다. 둘 다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치를 떨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사건들이었습니다. 남북대결로 찢어진 가족이 다시 만나는 감동의 순간에, 그들을 찢어지게 만든 대결구도가 다시 덧씌워졌다는 게 지금 관점에서 보면 아이러니.


 - 상봉에 성공한 가족들 또한 이후의 스토리가 해피엔딩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수십 년간 떨어져 지내왔고, 그동안 겪은 환경 등의 차이가 극심한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서로 죽었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린 경우도 문제가 되었지요. 결국 30여 년 만에 감격스러운 상봉을 하고서도 서로간에 불화가 생겨 다시 헤어지거나 연까지 끊어버리는 안타까운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임권택 영화 <길소뜸>이 이 문제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6. 후일담과 소소한 뒷이야기들


 - 이산가족 찾기를 중심으로 1983년 벌어진 사건들을 정부는 프로파간다에 적극 활용하였는데, 이것은 의외로 북한 쪽에 대하여도 상당한 효과를 보였던 것 같습니다. 다음해 1984년에는 남한 쪽이 수해를 입자 북한에서 구호물자를 지원하기도 하였고(물론 이건 정황상 북한의 허세에 가깝습니다), 1985년에는 양측 적십자사가 중심이 되어 최초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 사업이 진행됩니다.


 - 방송은 11월 14일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이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찾아 여의도로 모이곤 했습니다. 정부에서는 가족찾기의 편의를 위해 설치한 '만남의 광장'을 다음해 여름까지 1년여 간 계속 운영하였고, KBS에서 라디오를 중심으로 기존에 추진하던 이산가족 관련 사업들도 한층 더 탄력을 받았다고 합니다.


 -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상처이지만 묻혀 있던' 이산가족 문제를 다시 수면 위로 떠올리는 큰 계기가 됩니다. 1985년 최초의 본격적인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있었고, 사회주의권의 중국, 소련 쪽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교민들에 대한 관심도 부쩍 환기되죠. 이러한 분위기는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으로 다시 빛을 보았고, 그 해 8월부터 시작된 정례적인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하여 정점을 찍게 됩니다.


 - 당시 출연자들의 발언은 1980년대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습니다. 당시 출연자들 중에는 "KBS 만세"나 "대한민국 만세"는 기본이요, 심하게는 "전두환 대통령 만세"를 외친다든지 커다란 태극기를 둘러쓰고 나오는 붉은악마? 사례도 있었습니다. 당시에야 그게 자연스러웠겠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면 북한 방송에서 출연자들이 김정일, 김정은 만세를 외치는 것만큼이나 위화감이 드는 장면입니다.


 - 이 사건은 상술했듯이 전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아직 냉전이 진행중이던 시대라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 진영에서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직접 이 사건에 대한 담화를 하며 북한을 비판하기도 했을 만큼, 이산가족 찾기는 냉전이 낳은 비극의 상징처럼 여겨져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던 것입니다.


 - 이 방송은 한 명의 가수를 스타의 반열에 올렸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2년 전에 방송에 데뷔한 무명 가수였던 설운도는, 자신의 작품을 일부 개작한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노래를 방송 중간중간 부르며 단숨에 주목을 끌게 됩니다(<잃어버린 30년>은 발표 후 최단기간에 히트작이 된 노래라는 특이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운도 뿐 아니라 많은 가수들이 (쉬어가는 시간을 두는 차원에서) 생방송 중간중간에 참여하였고, 이 때의 음악들이 특집 앨범으로도 발매됩니다.


 - 2015년 10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관련 자료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기사 정부와 KBS 측에서 꾸준히 등재를 추진하였고, 당시 생방송을 녹화한 녹화자료들과 이산가족의 접수 신청서 등이 기록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방송 자료가 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베를린 장벽 붕괴 사건을 기록한 영상자료가 등재된 이후 두 번째라고 합니다.



 -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일반적으로는 현재의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여 '미래에 어떤 재앙이 닥칠 것이다' 라는 주제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자연이 인간에게 여러 차례 역습을 가했고, 그 결과 역사적으로 잘 나가던 문명 여럿이 절단나기도 했다는 것에 주목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동네도 한때는 잘 나갔다는 이야깁니다.] (출처 : 영문 위키피디아 "Ur")


 -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더미 위에 사는 우리들이라 잘 느끼지 못할 뿐이지, 사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이라는 토대 위에서 살아왔고 그 자연의 변화에 따라 숱한 부침을 겪어왔습니다. 개중에는 자연의 자연스러운(?) 변화에 따른 것도 있고, 인류문명이 자초한 변화도 있지요.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살펴보겠습니다.



1. 메소포타미아 : 관개농업으로 흥한 자 관개농업으로 망하다


 -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스라엘에서 출발하여 시리아-이라크를 거쳐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소위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가장 초기의 도시국가가 형성된 게 기원전 4000년 무렵이라니 대단하죠(고조선의 성립이 좋게 봐줘야 기원전 2000년 무렵이라는 걸 감안해봅시다). 메소포타미아라는 이름 자체가 '두 강의 사이'라는 의미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이곳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이라는 두 개의 강이 물을 공급한다는 이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 물론 이쪽도(남쪽의 아라비아 사막만큼은 아니지만) 비교적 건조한 기후라는 건 분명합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토양에서 농사를 짓기 위하여, 사람들은 수로를 만들어 강의 흐름을 농토로 끌어들였는데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관개농업'의 시초입니다. 중요한 물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이 동네는 많은 농업생산력을 자랑하는 풍요로운 땅이 될 수 있었지요(건조 지역은 일반적으로 물 문제만 해결되면 농사짓기 좋은 땅인 경우가 많습니다).


[농사짓기 좋은 땅] (출처)


 - 그런데 영원히 잘 나갈 것 같던 이 동네에 문제가 생깁니다. 농사가 점차 잘 되지 않게 되었던 겁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 근본 원인은 '염류화'였습니다. 강물이나 지하수 등의 민물이라도 아주 약간의 염분은 포함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농사를 위해 관개시설로 물을 끌어오면, (건조 지역이니까) 끌어들인 물은 많은 양이 증발되어 사라집니다. 물론 증발되는 건 H2O 뿐이죠. 원래 물에 포함된 염분은 증발되지 않고 그대로 땅에 남게 됩니다.


 - 강수량이 많은 곳이라면 자주 내리는 빗물에 염분이 씻겨 내려가서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는 비가 많이 오는 곳이 아니죠. 물을 끌어오면 끌어올수록 염분은 (아주 조금씩이지만) 계속 쌓여 나갑니다. 10~20년 정도라면 별 탈이 없겠지만, 이러한 과정이 수천 년간 반복된다면? 땅에 염분(염류)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식물이 자라기 어렵게 됩니다(뿌리가 물을 흡수하는 데 문제가 생기던가 그렇습니다. 삼투 작용이죠).


 - 결국 수천 년에 걸쳐 생산력이 서서히 떨어지면서, 메소포타미아의 지배력도 서서히 떨어졌다는 이야기. 더구나 이곳은 넓은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힘이 약해지면 주변 지역의 침입을 방어하기 굉장히 어렵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후기는, 북부와 동부에서 밀고들어오는 수많은 이민족의 정복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 물론 두 강이 주는 이점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적어도 서아시아 일대에서는 비교적 잘 나가는 동네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 지역의 중심지는 바빌론에서 크테시폰을 거쳐 바그다드로 이어졌고, 모두 당대 손꼽히는 대도시였죠. 물론 사막화가 더욱 진행된 현대에 와서는...... 사담 후세인? ISIL?



2. 화산 한 방에 날아간 미노스 문명


 - 유럽 최초의 문명으로 꼽히는 게 '에게 문명' 입니다. 그리스 옆 에게 해의 수많은 섬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대체로 이 지역 사람들은 지중해를 가로지르며 해상무역으로 먹고 살았으며 그래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가장 빠르게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에게 해 최남단의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발전한 미노스(미노아) 문명이 대표적입니다.


[미노스 문명의 대표적 유적인 크노소스 궁전]


 - 근대 이후에야 재발견되었고, 따라서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많지는 않지만 미노스 문명은 기원전 2700년경부터 발전하여 천 년 이상 지속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기원전 1500년경 미노스 문명은 갑자기 쇠퇴 기미를 보이더니, 불과 수십여 년만에 그리스 본토의 세력에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잘 나가던 해양문명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배경에는, 에게 해 한가운데 있던 한 화산섬이 있었습니다.


 - 지금은 포카리스웨트 절벽 위 하얀 집으로 유명한 관광지 산토리니 섬이 에게 해에 있습니다. 지금이야 평화로운 관광지로만 보이는 섬이지만, 알고보면 이 섬은 화산섬이며 심지어 인류 역사 이래 손꼽히는 대폭발을 일으킨 곳입니다. 기원전 1500년경, 하나의 커다란 화산섬이었던 산토리니에 대규모 화산폭발이 발생하였고, 땅 속에 있던 마그마와 가스, 화산재가 뿜어져나오자 그 빈 자리가 그대로 무너져내리기 시작합니다(이것을 '칼데라'라고 합니다).


[그 결과 산토리니는 이렇게 여러 개의 섬으로 토막나 버립니다. 섬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바다가 대폭발의 흔적]


 - 일단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진을 동반하게 마련이니, 산토리니 섬의 폭발로 생긴 지진이 크레타 섬을 강타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으니, 무너진 분화구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가면서 대규모의 해일이 발생, 크레타 섬의 해안을 직격해 버립니다! 당시 지중해 최강이었던 크레타의 해군이 이 해일 한 방에 싸그리 날아가 버렸고, 해안의 도시와 마을에도 엄청난 피해가 발생합니다.


 -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화산폭발로 날아간 많은 양의 화산재는 공기 중에 떠다니며 햇빛을 차단하고, 그 결과 지구의 평균 기온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실제로 산토리니 폭발과 맞먹는 규모로 추정되는 1815년 탐보라 화산의 폭발에서는, 화산재 때문에 기온이 떨어져 이후 몇 년간 '여름이 없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큰 기후 변화가 발생한 적도 있지요. 산토리니 폭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고, 가뜩이나 큰 피해를 입은 미노스 문명에 마지막 일격을 날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 이후 미노스 문명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고, 수십 년간 사회 전반이 혼란에 빠지는 양상을 보이다가 그리스 본토 세력의 침공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해군의 위용을 믿고 수도에 성벽조차 쌓지 않았을 정도라니, 해군이 사라진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죠. 이후 크레타 섬은 다시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그리스와 터키의 입구에 있다는 지리적 특징 때문에만 역사에 몇 번 반짝 등장하는 처지가 됩니다.



3. 1℃의 역사 : 기온 변화는 문명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 약 1만여 년 전 마지막(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빙하기가 끝난 이후로도, 지구의 평균 기온은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물론 그 변화라는 게 대략 1~2℃ 미만의 작은 변화였다고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각 지역의 식생이나 서식하는 동물들, 나아가서는 인류문명에 생각보다 큰 영향을 끼쳐 왔지요.


 - 고대 문명이 번성하던 2000~3000년 전쯤에는 전반적으로 평균기온이 지금보다 높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온이 높으면 농작물이 잘 자랄 수 있고, 당연히 인류는 풍요롭게 살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문명이 발전하죠. 사람들은 배가 부르면 딴 짓(?)을 하고 싶게 마련이거든요. 이를테면 중국의 황하 유역은 당시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진 온대(내지는 아열대) 기후였고, 황하 근처에서까지 코끼리와 코뿔소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중국 상나라 시대의 코끼리 모양 유물. 코끼리를 가까이서 관찰하고 그 모양을 디테일하게 알 수 있었다는 이야기]


 - 물론 그동안에도 기온은 조금씩 오르내리고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평균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한 게 대략 3~4세기 무렵부터입니다. 이는 농업생산력의 저하를 유발했고, 당시 지구의 양대 문명(로마, 중국)은 약속이나 한 듯이 혼란기에 빠지게 되죠.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당시 알려진 세계의 양쪽 끝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면 온도 변화에 따른 세계적인 변화 요소를 고려해볼 수 있겠습니다.


 - 이후 수백 년간의 암흑기(임과 동시에 평균기온이 낮았던 시기)를 거쳐 9~10세기 무렵에는 평균기온이 상승합니다. 그리고 12세기 무렵부터 다시 평균기온이 떨어지는데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전 세계에 흑사병+몽골제국 콤보의 시대로 기억됩니다. 이후 잠깐의 조정기를 거쳐(하필 이 때 유럽에서는 르네상스가......) 16세기부터는 그 이름도 유명한 '소빙하기'가 도래합니다(넓게 봐서 12세기부터를 소빙하기로 보는 경우도 있음).


[3000년간 지구의 평균기온 변화 양상] (출처)


 - 소빙하기는 비교적 근래의 일이기도 하고, 비교적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일단 서쪽에서는 이탈리아 중심의 르네상스가 끝장나고 대규모 전쟁이 빈번하게 벌어지기 시작하며, 흑사병은 여전히 잊을 만하면 창궐하고, 사람들이 살기 위해 바둥거리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와 민족주의가 형성됩니다. 동쪽에서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섰으며, 한가운데서는 아랍 종족의 국가가 북쪽 이민족의 국가인 오스만 튀르크로 완전히 대체됩니다.


 - 이렇게 세계 각지에서 문명의 변화는 (어쩌다보니)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양상으로 벌어졌고, 거기에 기온 변화가 상당한 역할을 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최근에도 (다분히 인류의 활동으로 인한) 급격한 기온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것이 인류 문명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4. 황하 문명의 마지막 유산, 황사경보


 - 늦겨울~늦봄 사이에 블로거는 황사(내지는 미세먼지)로 인해 인생이 고난에 빠집니다. 알레르기성 비염 환자에게 먼지가 많은 환경이란 아주 최악이거든요. 도대체 저놈의 황사는 어디서부터, 왜 날아드는 걸까요? 과학적인 요인을 따지기 이전에, 동아시아의 황사는 수천 년 전부터 열심히 살아온 중국 문명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 현재 중국의 산시(陝西)성과 간쑤성 동부 일대, 황하 중류가 휘돌아 흐르는 넓은 지역을 '황토고원'으로 칭합니다. 말 그대로 고운 황토가 엄청난 면적에 걸쳐 퍼져 있는 곳으로, 대체로 건조 기후에 속합니다. 지금 이곳을 찍은 사진들을 보면, 수천 년 전 이곳에 울창한 삼림이 있었다고 말하면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노릇이죠. 그런데 실제로 그랬습니다. 울창한 숲과 비옥한 황토지대, 황하의 물이 합쳐져 이곳에서는 일찍부터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 과거 숲이 우거져 있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 따라서 고대 중국의 중심지는 어디까지나 황하 중하류 일대였습니다. 상술했지만 기후가 지금보다 따뜻하고 황하 유역에 숲이 우거져 있던 고대에는, 황하 바로 아래까지 코끼리와 코뿔소가 살고 있었을 정도로 풍요로운 땅이었습니다. 그러던 곳이 저 모양이 되어버린 것은, 기후의 변화도 있겠지만 인류의 삼림 파괴가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황하 중류의 삼림 면적 변화. 3000여년 전 / 현재] (출처 : NHK 고대문명 다큐멘터리에서 캡처)


 - 삼림 파괴의 결과 이 지역은 점차 사막화되고, 대규모의 문명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중국 초기의 중심지였던 장안(現 시안)과 낙양(뤄양)은 예전의 영광을 잃고, 현재는 중국 전체에서도 낙후된 동네의 지역 중심지로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삼림이 사라지면서 더 큰 문제가 발생했는데, 고운 황토는 바람에 쉽게 날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 숲이 황토를 잡아주지 못하게 되자, 흙과 모래는 바람이 불면 공기 중으로 쉽게 날아갔고 이는 공기의 흐름을 타고 수천㎞ 떨어진 곳까지 날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황사'입니다. 황사는 일종의 퇴적작용을 하여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효과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호흡기에 해를 끼치며 특히 현대에는 공장 매연의 유해성분이 섞이는데다 반도체 산업처럼 먼지에 민감한 분야가 늘어나면서 피해를 매우 키우고 있죠.


 - 여담으로, 황하 문명이 삼림을 파괴한 결과는 다른 쪽에서도 나타납니다. 황토가 강으로 쓸려들어가면서 황하는 우리가 아는 그 싯누런 흙탕물이 되었고, 강바닥에 흙이 계속 퇴적된 결과 황하는 주변 평야보다 강바닥이 더 높은 '천정천'이 되고 말았습니다(당연히 홍수에 아주 취약해집니다). 최근에는 수자원 사용량이 늘어나면서 아예 황하의 흐름이 중간중간 끊어지는 현상이 발생, 자원문제+환경문제까지 유발하고 있다는군요.



노부나가의 야망 : 장성록 - (9) 사이비 종교를 심판하다 (1592. 6. ~ 1596. 8.)





 - 북쪽 전선은 군소 영주들만 상대하다 보니 비교적 순조롭습니다. 시모즈마 가문(전쟁을 치르는 사이 영주가 바뀜) 멸망.



 - 여기까지 밀고 올라가니, 옆동네 하타케야마와 진보 가문이 굽신거리며 동맹을 맺자고 합니다. 일단 동맹을 맺어주고 한 타임 쉬어가기로 합니다.



 - 오사카를 접수하고 남쪽으로 밀고 내려갑니다.



 - 혼간지 가문의 영주(?)는 역시 스님이죠. 그런데 일본 불교는 전통적으로 승려가 결혼하고 자녀도 낳을 수 있습니다. 다음 영주는 혼간지 겐뇨의 아들이 가져갑니다.



 - 오다 가문에서 동맹을 제의하니 기꺼이 받아줍니다.



 - 오사카 남쪽의 사이카 성을 공략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일단 오사카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시코쿠에서도 병력을 있는 대로 끌고 옵니다.



 - 혼간지 쪽 봉기군에는 전투력이 만만찮은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 그리고 더 X같은 건 봉기군을 패퇴시키지 못하면 다음 턴에는 다시 원상태로 병력을 채워놓습니다. ㅡㅡ;



 - 천신만고 끝에 사이카 성 접수. 이제 혼간지와의 싸움도 마무리 단계로 들어갑니다.



 - 필요ㅇ벗어!



 - 혼간지의 마지막 근거지인 야마토 고리야마 성(다른 쪽에 '고리야마 성'이 또 있어서 이렇게 구분)은 조금씩 꾸준히 소모전을 치러 공략하기로 합니다. 이 정도까지 힘을 뺐으면 쉽게 접수할 수 있겠군요.



 - 승리!



 - 사이비 종교의 교주에게 자비심은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혼간지 가문도 멸망.



 - 오잉? 갑자기 노부나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이미 10년 이상 이전에 '혼노지의 변'으로 자결하니까, 이쯤이면 천수를 다 하고 죽은 셈이긴 한데요. 노부나가의 아들 중 하나가 자리를 이어받는데, 역사에서 오다 가문을 말아먹은 바보 취급을 받는 인물입니다.



 - 이쯤에서 후방 영지의 장수들을 전면 재배치하기로 합니다. 열심히 이동 중.



 - 오다 가문이 동맹 연장을 요구하지만 "ㅗ"를 날려줍니다. 자연스레 동맹은 끊어졌습니다.



 - 총포병으로 적 1부대를 공격하다 보면 적 장수가 총에 맞아 죽는 경우가 생깁니다.



 - 자아 휴식도 취했으니 다시 전쟁에 나서봅니다. 일단 오다 가문의 니조 성입니다. 여기는 왕궁에 붙어 있기 때문에, 규모에 비해서는 꽤 중요한 성이죠.



 - 북쪽 전선도 다시 밀고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전에 구입한 대포를 끌어와서 써먹기로 합니다.



 - 대포가 있어 가장 좋은 점은 성문을 깨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는 점입니다. 진보 가문이 허무하게 멸망합니다.



 - 헐 흉년이 들어서 몇 곳에 기근이 발생했다 싶더니 얼마 후 민중봉기가 여기저기서 벌어졌습니다. 민중봉기군은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수도 있고, 사신을 보내어 설득을 할 수도 있습니다.



 - 이와 상관없이 오다 가문과의 전투는 계속 진행 중. 이번에는 북쪽 전선에서 오다니 성 방향으로 또 하나의 전선을 만들기로 합니다.



 - 니조 성 전투도 계속 이어집니다. '구멍' 특기는 앞에 방어병력이 있어도 등 뒤의 성문을 공격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만큼 시간과 병력을 아낄 수 있죠.



 - 이에 힘입어 니조 성 공략에 성공!



 - 이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로, 역사에서는 에도 막부의 2대 쇼군이 됩니다. 이에야스는 아직 이름도 바꾸지 못했는데, 히데타다는 '도쿠가와' 가문으로 나오는군요. 여담으로 히데타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가문의 별동대를 이끌고 갔지만 가는 길에 털렸고, 전반적으로 군사적 능력은 없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ㅡㅡ;



 - 이렇게 사신을 보내어 민중봉기군을 설득할 수도 있습니다(돈을 쥐어줄 수도 있음).




 - 이 와중에 하타케야마 가문을 멸망시켰습니다.



노부나가의 야망 : 장성록 - (8) 사방에서 난타전 (1587. 7. ~ 1592. 5.)




 - 호조 가문의 간토지방은 아무래도 아귀지옥이 아닐까 싶습니다.



 - 북쪽 전선에서는 계속 밀어부치기 진행 중. 다음에는 아자이 가문의 다케베야마 성입니다.



 - 산골짜기로 밀려난 아자이 가문에서 조공을 바치려 하지만 필요없죠.



 - 시코쿠에서도 끝없는 소모전이 계속.


 - 가운데 전선에서는 혼간지 가문과의 대전을 시작합니다. 하필 혼간지 가문의 군기가 똑같은 색이라 저렇게 양쪽이 얽혀 있으면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ㅡㅡ;




 - 항상 강조하지만 장성록은 공성전에서 방어측이 엄청나게 유리한 게임입니다. 플레이어가 공격을 하든, 방어를 하든간에.



 - 일단 시코쿠 동쪽의 쇼즈이 성을 먼저 뚫는 데 성공했습니다.



 - 혼간지 가문에 싸움을 거니 이놈들이 자기 신도들을 부추겨 봉기를 일으킵니다. 실제로 역사상의 혼간지는 신도 봉기를 사주하여 노부나가를 끊임없이 괴롭혔는데, 이를 '잇코잇키(一向一揆)'라 하며 노부나가 최대의 적이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게임상에서도 계속 노부나가 쪽에 싸움을 걸다가 이쪽에서 압박을 시작하니 타겟을 돌리네요.



 - 한편 아자이 가문은 혼간지와 싸우는 사이 조용히 가서 접수.



 - 북쪽으로 가 볼까요? 아사쿠라 가문의 이치조다니 성은 장수 한 명 없이 텅 비어 있습니다. 가문 전체에 가신이 부족해서 그런 모양입니다.



 - 아놔 하지만 방어력이 깡패인 곳입니다. 성문 깨다가 볼 일 다 봤습니다.



 - 조소카베 가문에 도망갔던 오토모 소린을 마침내 가신으로 삼는 데 성공합니다.



 - 혼간지 가문의 세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일단 적을 늘리면 곤란해지니 오다 가문과는 일단 친선관계를 유지하기로 합니다.



 - 굳이 매번 쓰지는 않지만 전투를 이어가다 보면 가신들이 상대 가문에 넘어가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 1590년 1월이 되었습니다. 이제 군소 영주들은 대부분 정리되어 갑니다.



 - 이런 분들은 살려서 보내주면 계속 플레이어를 골치아프게 만드니 눈물을 머금고 처형합니다.



 - ㅁ네이뮴ㄴㅇ레ㅠㅍ치퓨ㅏㅓㅇㄹ헴ㄴ아러!!!!@!@!@#!@#!@! 영지에 '대포 상인'이 찾아왔습니다. 드디어 화력덕후 플레이를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대포 세 기를 들여놓습니다.



 - 오사카 성 공격. 네임드 성답게 만만치 않습니다.



 - 오다 가문에 공물을 보냅니다.



 -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전투가 이어집니다. 북쪽 전선에서는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이치조다니 성을 접수합니다.



 - 시코쿠 섬에서도 조금씩 결말이 보입니다. 서남쪽의 나카무라 성을 점령하고, 조소카베 가문의 영지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 오사카 옆 니조 성이 혼간지에서 오다 가문으로 넘어갔습니다. 이곳의 성주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는 우리에게도 상당히 유명한 인물인데, 이 사람은 나중에 이름을 바꾸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됩니다.



 - 이제 조소카베 가문을 총정리하러 갑시다. 병력이 얼마 없어서 이 정도면 충분히 접수 가능하지 않을까요?



 - ㅃㅃ2;;




시편 9편 (개신교 개역개정판) : 


 -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뭇랍벤에 맞춘 노래 -

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2.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3.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5.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6.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7.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8.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9.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1.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12.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13.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14.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5.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16.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힉가욘, 셀라"

17.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18.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19.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20.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분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한국어판 가사 (<칼빈의 시편찬송가> 시편찬송가 편찬위원회, 진리의깃발, 2009) : 

(1~9절)


1. 주님께 감사하오며 / 주 모든 기사 전하리

나 기뻐하고 즐거워해 / 높으신 주를 찬송하리


2. 원수들 물러갈 때에 / 넘어져 망하리로다

내 의와 송사 변호하며 / 의롭게 심판하셨도다


3. 이방들 책망하시고 / 악인을 멸하셨도다

악인들 이름 지우셨네 /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4. 원수가 끊어졌으며 / 영원히 멸망하였네

주께서 멸한 성읍들을 / 기억할 수가 없나이다


5. 여호와께서 영원히 /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해 준비하사 /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6. 공의로 세계 심판해 / 정직함으로 판결해

압제당한 자 요새이요 / 환난 때 요새이시로다


(가사 출처 : http://blog.daum.net/hwang6710/)



노부나가의 야망 : 장성록 - (7) 세대교체 (1582. 9. ~ 1587. 6.)




 - 주변 소세력들 정리에 들어갔습니다. 일단 내륙의 쓰야마 성부터 접수하였습니다.



 - 요시미 가문 멸망.



 - 후나이 성을 지키던 이토 요시스케가 사망했습니다.



 - 사이무라 가문과도 어느 새 전쟁 중. 공물을 싸들고 왔지만 "ㅗ" 한 방에 정리.



 - 돗토리 성은 공략하기 매우 까다로운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돗토리에는 사구(沙丘)만 있는 줄 알았는데!



 - 히메지 성 쪽에서도 소모전을 한창 진행 중.



 - 돗토리 성의 철통방어를 뚫고 야마나 가문을 멸망시켰습니다.



 - ?! 난데없이 시마즈 다카히사 사망. 사실 다카히사는 실제 역사보다도 훨씬 오래 살았으니, 이제 갈 때도 되긴 했습니다. 다이묘가 세상을 떠났으니 후계자를 정해야겠지요?



 - 그래서 후임 다이묘는 (역사대로) 첫째 아들인 요시히사로 결정하였습니다.



 - 그리고 영주가 바뀌든 말든 하던 전쟁은 계속해야죠.



 - 히메지 성도 시마즈의 손에 넘어왔습니다.



 - 이것으로 산요, 산인지방을 모두 평정하자 새로운 직책이 달렸습니다. '사이고쿠'가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네요.



 - 서쪽이 점차 새빨개지고 있는 중. 긴키지방에 칠해진 붉은색은 시마즈가 아니라 혼간지 가문의 색깔입니다.



 - 모리 가문을 마저 정리해야죠. 세토 내해를 건너 시코쿠에 상륙했는데 이곳은 이미 모리와 조소카베의 전쟁이 한창입니다.



 - 아마기리 성을 먼저 공략하려 했더니 조소카베 가문이 먹어버렸습니다.



 - 일단 조소카베 가문과는 싸우지 않으려 했더니 저쪽에서 먼저 건드리네요. 순간 열받아서 시코쿠 섬을 싹 밀어버리기로 결정합니다.



 - 니조 성 옆에 아즈치 성을 신축하는 노부나가의 이벤트. 가운데의 그림은 일본의 성을 상징하는 '천수각'입니다.



 - 아마기리 성을 점령하였습니다.



 - 역시 노부나가의 이벤트. 웬 사람 죽이는 이벤트가......



 - 이제 모리 가문의 마지막 거성인 유즈키 성으로 향합니다. 대세력의 마지막 거점이다보니 점령이 쉽지 않군요.



 - 이쯤에서 전선이 크게 셋으로 갈리는데, 산인지방 쪽(돗토리 성 일대), 산요지방 쪽(히메지 성 일대), 그리고 시코쿠 섬 쪽입니다.



 - 1587년 1월의 세력구도. 오다 가문의 약진이 눈에 띕니다. 아무래도 오다 가문의 세력확장에 따라 노부나가의 이벤트가 발생하는 모양이군요. 호조 가문은 다시 부활하여 간토지방을 평정하였습니다.



 - 소 요시토시를 등용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실제 역사에서는 쓰시마 섬 영주로 평시에는 조선-일본 사이의 교류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 해상에서는 역시 수군 등급이 높은 장수가 최고입니다.



 - AI와 전투를 치를 때 가장 골때리는 게 이거죠. AI가 거는 화공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성공률이 높습니다.



 - 이 분은 처형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열전에 기록된 이력이 범상치 않습니다. 일곱 명의 주군을 섬겼다니!




 - 세 전선에서 모두 지루한 소모전을 지속하고 있는 가운데, 시코쿠 전선에서는 마침내 모리 가문을 멸망시킬 수 있었습니다.



노부나가의 야망 : 장성록 - (6) 주고쿠 평정전 (1577. 1. ~ 1582. 8.)




 - 계속 전진. 야마구치 성은 주변 성들과 거리가 멉니다.



 - 야마구치 성 주변에 홍수가 발생했습니다. 대체로 치수공사가 된 하천은 홍수가 잘 나지 않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치수가 안 된 끄트머리 쪽에서 물이 넘친 모양이군요.



 - 언제나 그렇듯 소모전 형태로 끌고 갑니다.



 - 난데없이 규슈지방에 지진 발생. 구마모토 지진? 가만 보니 위치도 딱 구마모토 근방이긴 하네요.




 - 호오 흥미로운 걸 하나 발견했습니다. 하천 옆에 있는 후쿠야마 성을 수공(水攻)으로 공격할 수가 있네요. 방어도를 효과적으로 깎을 수 있는데, 정확히 어떤 조건에서 수공을 날릴 수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 아무튼 덕분에 후쿠야마 성을 비교적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 여기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등용하였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군 사령관 중 한 명이죠. 한성과 평양을 가장 앞서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는데, 사실 조선 침공 자체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당대 키리시탄(천주교도) 다이묘로 유명하였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자결을 거부하고 처형당하였습니다. 이후 그의 영지였던 곳에서 일본 최대의 종교 관련 내전인 '시마바라 반란'이 발생합니다.




 - 쉴 새 없이 모리 가문을 몰아부치고 있습니다. 오카야마 성에는 장수가 아무도 없기에, 잽싸게 달려가서 빈집털이를 시전해 주었습니다.



 - 1579년 12월 세력현황. 모리 가문을 완전히 분단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동쪽에서는 세력구도에 변화가 꽤 있습니다.



 - 소소한 이벤트 하나.



 - 공주 한 명이 성인이 되었습니다. 12살짜리가 어딜 봐서 성인인지는 묻지 맙시다 공주는 놔뒀다가 혼인을 시킬 수도 있고 장수로 써먹을 수도 있는데, 보시다시피 능력치가 너무 좋은 관계로 장수로 임명하기로 합니다.



 - 산인지방도 접수하러 가 봅시다. 이 성은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습니다.



 - 한 번 찔러보았지만 역시 공략이 쉽지 않습니다.



 - 야마구치 성 근처에 큰 지진이 발생. 지진이 발생하면 시설 파괴 뿐 아니라 성의 내구도 또한 피해를 받습니다.



 - 다시 한 번 공격!



 - 방어도가 충분히 깎였으니 승산이 좀 있으려나요? 앞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갓산 도다 성의 주인이 바뀌어 있습니다. ㅡㅡ;


 - 두 번째 공격에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 야마구치 성에서는 이동력 수행을 보낼 수 있습니다. 이동력이 높으면 여러모로 쓸 데가 많죠. 능력치가 시원찮더라도 수송유닛 등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 따님은 능력치가 훌륭하다보니 잘 싸웁니다.



 - 옆동네 사이무라 가문이 동맹을 맺으려 하는 모양입니다. 일단 모리 가문을 털고 있는 중이니 받아주기로 합니다.



 - 후쿠미쓰 성을 공격해 봤지만 실패.




 - 영지 내에서 자연재해가 잇따라 발생하였습니다.



 - 사이무라 가문의 원군 요청. 물론 대답은 "ㅗ"



 - 소모전 끝에 후쿠미쓰 성도 접수하였습니다. 이제 모리 가문을 남쪽 시코쿠 섬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



노부나가의 야망 : 장성록 - (5) 규슈를 넘어 산요로 (1568. 4. ~ 1576. 12.)




 - 사가 성 주위에 홍수가 발생했습니다. 지도상에 있는 강 주변으로 홍수가 발생할 때가 더러 있는데, 오랜 시간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1년이 멀다 하고 홍수가 발생하는 지역이 몇 있습니다(간토 지방이라든가 간토 지방이라든가......). 일단 사가 성 주변처럼 습지대가 넓게 있는 지역이 홍수다발지역인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 점령지 수습하느라 잠시 한가하니, 이번엔 사신을 보내어 외교활동을 해 보겠습니다. 사신으로 발탁된 니이로 다다모토의 목적지는 다른 다이묘가 아니라, 덴노에게 갈 겁니다.



 - 당시 덴노는 이 당시엔 존재하지도 않던 도쿄가 아니라 교토에 있었죠. 게임상에서 교토의 위치는 긴키지방 니조 성의 바로 옆입니다. 찾기 어렵다면 스크린샷에 있는 것처럼 긴키지방 가운데의 큰 호수(비와 호) 왼쪽에 바로 붙어 있다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여담으로 이 때만 해도 무로마치(아시카가) 막부가 사라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교토 옆 니조 성은 아시카가 가문이 차지한 것으로 나옵니다(말 그대로 막부의 위치가 다이묘와 동일한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니조 성의 규모는 ㅡㅡ;).




 -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거점이 없는 독립세력의 경우 사신을 보내어 자기 편으로 영입할 수 있습니다. 규슈 일대에 있던 독립세력들을 차례대로 포섭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다만 다들 능력치는 고만고만해서, 내정+잡일 용도로나 써먹을 수 있겠군요.



 - 머리 위 히로나카 가문에서 하도 동맹 연장하자고 떼를 쓰니, 일단 다시 동맹을 맺기로 하였습니다. 전쟁 준비할 시간이 1년 늘어난 것에 지나지 않죠.



 - 내정에 힘쓰는 사이 어느 새 1570년까지 훌쩍 지나갔습니다. 히로나카 가문과의 동맹도 끝났으니 이제 전쟁의 시기가 다가오는 모양입니다.



 -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히로나카 가문에서 자꾸 Shut up and take my money 공물을 보내오지만, 이미 전쟁 준비도 끝났겠다 가뿐하게 "ㅗ"를 날려줍니다. 여담으로 블로거는 이런 류의 게임(문명이라든지 문명이라든지)만 하면 자꾸 외교를 없는 것 취급하고 플레이하는 경향이 있어서......



 - 토벌군 출동!



 - 하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 됩니다. 공성전에서 공격측에게 가장 짜증나는 상황이 저거죠. 이런 구조의 성은 방어도가 충분하다면 15턴 동안 성벽만 깨다가 볼일 다 봅니다. 결국 성벽 깨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방어도를 낮추어야 하고, 상상 이상의 소모전이 되기 십상입니다.





 - 그런데 이 때 큰 변수가 생겨버립니다. 히로나카 가문의 영주가 죽으면서, 가신 중 (혈연이 아닌) 한 명이 자리를 물려받았는데 이에 불복하여 성 하나가 독립해 버렸습니다! 당연히 시마즈 가문에게는 풍악을 울릴 상황.


 - 이게 아닌가? 각개격파 모드가 된 덕분에 규슈 북부를 장악하기가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일단 외따로 독립한 다치바나야마 성부터 접수하기로 합니다. 물론 위에 언급했듯이 이 성은 성벽 깨다가 볼일 다 보는 곳이기 때문에, 병력과 방어도를 충분히 깎아먹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 그리고 항복을 거부하는 배신자는 지옥행 급행열차를



 - 다치바나야마 성 근처에 '하카타'라는 곳이 있는데, 센고쿠 시대 이전부터 상업 중심지로 번창한 곳이며 장성록에서는 위 스크린샷의 형태로 구현되어 있습니다(이로 인하여 다치바나야마 성에서는 매달 상인과 거래를 할 수 있습니다). 하카타는 근대 이후 바로 옆 후쿠오카와 통합하여 현재는 '후쿠오카 시 하카타 구'로 남아 있습니다.



 - 그리고 이웃 나카쓰 성을 털어줍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공략이 가능할 것 같고, 실제로 공략에 성공합니다.



 - 이로써 규슈지방의 모든 거점을 접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역시나 한 지역을 완전 정복하면 특정한 직책을 맡을 수 있는데, 규슈지역의 경우 직책명이 '규슈 탐제'입니다.



 - 이제 1573년 12월 까지 진행. 그 사이에 옛 히로나카 가문은 또 영주가 바뀐 모양입니다.



 - 그 사이 막부 가문은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역사적으로 생각하면 좀 의미 있겠지만 우리와는 상당히 먼 이야기. 아시카가가가


 - 이제 드디어 규슈 바다를 넘어갑니다(저 건너가는 위치에 현재는 간몬 터널이 건설되어 있습니다). 항상 강조하지만 장성록은 공성전이 엄청난 소모전 양상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가용한 병력과 가신을 박박 긁어모아서 내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 물론 이 정도면 점령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 역시 승리. 그런데 그 사이 나베시마 가문(옛 히로나카 가문)은 모리 가문의 성을 하나 털어먹었기 때문에, 아직 멸망하지는 않았습니다.



 - 그런데 여기는 하필 산골짝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동시간도 오래 걸리고, 병력 운용하는 데도 애로사항이 꽃핍니다. 길이라도 깔려 있지 않았으면 정말 난리났을 뻔.



 - 하지만 성의 방어도가 복구되지 않았던 바람에 공성전은 어찌어찌 승리로 끝났습니다.



 - 이것으로 나베시마 가문도 접수. 히로나카-나베시마 가문을 계속 쫓아가다 보니 어느새 규슈를 건너 산요지방 쪽으로 꽤 깊숙히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일단 해외(?)진출은 성공적으로 시작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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